밤의 기별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하늘연못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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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가는 특유의 결벽증을 갖고 있는 사람 같아 보인다. 내 주변인들의 마루야마 겐지에 대한 찬탄과 권장에도 불구하고 차마, 한 권 빼들기를 주저주저하였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가 일본 문학과 문단에 대해 안쓰럽고 민망할 정도로 질타하는 내용과 자신은 최고의 문학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인터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디 얼마나 잘 썼는지 보자' 하는 심정으로 맨 먼저 읽기 시작했던 책이 바로 <밤의
기별>이다. 한 소년이 등장한다. 이 소년은 마루야마 겐지의 다른 소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나 그밖의 소설에서 보여지는 남다르고 치열해 보이는 주인공이 아니다. 비정하지도 단호하지도 않은 이 소년의 나래이션은 듣기에 참 좋다. 배경은 2차 대전 이후이다. 아버지는 전쟁터에 끌려 갔고, 혼자가 된 어머니와 여동생 이들은 어떤 큰 저택을 소
유한 남자의 비호 아래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은 길에서 다리 하나를 읽은 상
이 군인을 보게 되는데 그는 소년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소년 홀로 그 저택에서 나와
아버지와 살게 된다. 그러면서 소년은 많은 사람들과 알게 되고, 아련하고도 찬찬하게
성장을 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딱 두 작품을 읽었을 뿐이지만, 둘 중에 플롯의 단단함과 빛나는 묘사와
서사적인 문체에 있어서 단연 <밤의 기별>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 책은 지금의 나의 수중에 없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영화라는 장르에 뭍혀 소멸하고
말 것이라고 단언하던 나의 한 친구에게, 그 친구의 말을 반증(反證)하고 싶은 의미로
다가 선물로 영원히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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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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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소설책을 읽는 것은, 별로 기쁠 일이 드문 인생의 순간에 있어서, 가끔 누리는 아주 큰 기쁨이다. 그럴려면 지식 및 정보 습득이라던가 소기의 목적을 의도하지 않아야 하고, 아무 시, 아무 날에 아무 곳에서나 빠져드는 책읽기여야 한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은 독자로 하여금 꼼짝 못하고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다음 순간 지구가 무너진다고 해도, 그 무엇도 책장을 넘기는 일에 제동을 걸 수 없게끔 만드는 기술 같은 게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런 문필력을 소유한 사람들의 소설을 읽고 나면, 뭐랄까, 향수병도 아니고, 상사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병 하나를 앓게 되는데 그건 바로, 나는 저런 소설 하나 써보고 죽었으면 하는 병이다. 몇 달전 히라노 게이치
로의 <달> 이후로 이런 소설을 또 만났다.

처음으로 돌아가, 이 책을 소개해 준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때마다 꺼내 읽으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위안을 주는 책이야' 라고. 그러면서 이 책이 폴 오스터의 작품 중, 가장 역작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 두가지만을 우선 말하고 싶다.

첫째, 이 소설은, 작중 역사학자 비버(주인공 포그의 아버지임이 밝혀진)가 쓴 소설 '캐플러의 피'를 통해, 미국 역사에서 인디언의 멸망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캐플러의 피'에서 나오는 종족은 주인공 포그와 그의 삼대째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인디언의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의 핏줄이 인디언이었거나, 혹은 인디언과 아주 가까이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냈던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백인이면서도 은연중에 이런 역사 의식을 드러내는 폴 오스터가 약간은 이채롭게 느껴진다.

둘째, '주인공 포그가 여러 가지 여정을 거쳐 결국엔 어떻게 되었는가'를 즉물적인 시각에서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사랑하는 여자와는 헤어지게 되었고, 둘, 에핑이라는 노인의 아들이라고만 알았던 역사학자 비버, 그런데 이 비버와 좋은 시간을 함께하고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에까지 다달아 지내던 어느날, 비버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고, 비버는 몇 달후 저세상으로 가야 했다. (어머니, 외삼촌,
에핑이 죽은 후, 하나 남았던 혈육마저 포그를 떠난 것이다.)

셋, 비버로부터 어느 정도의 유산을 물려 받게 되었음에도 그것 마저도 여행 중에 도난 당한다. 위의 셋을 통틀어서 결론을 내자면, 주인공 포그에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만 놓고 보았을 때, 이 얘기는 한없이 우울하며 절망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지, 과연 <달의 궁전>이라는 이 이야기가 우울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의 매력은 바로 '절망'을 '삶의 아이러니'로 바꾸어 풀어내는 데 있다. 우연의 엇갈림으로 짜여지고, 군데군데 희망을 가장한 여러 변수가 기다리고 있는 뒤틀린 이 세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독특한 인식의 방식과, 불운한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그 태도에 이 소설의 매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한 이 이야기가 장엄한 목소리로 타이듯 '젊은이여, 희망을 가져라' 투가 아님을 말해야 겠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빈털터리가 된 주인공이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그는 가 보는 데까지 다 가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연과 우연으로 얽힌 예측 불가능한 이 세상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유유히 즐기기로 그리고, 그 안에서도 이야깃거리를 발견하리라고 맘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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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3-2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완벽한 미국 서사의 모형이지~ 싶다...
 
외치는 소리
오에 겐자부로 지음, 김이진 옮김 / 문학사상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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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 3학년 때로 기억된다.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개인적 체험>-이 소설은 <개인적 체험>에 앞서 2년 전 그의 나이 27살에 발표한 소설이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나는 학교 도서관에 그의 또다른 소설을 어렵사리 찾았던 것이다. 이 소설은 <개인적 체험>에 앞서 2년 전 그의 나이 27살에 발표한 소설이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빌린 이 책에는 글줄을 채 읽기도 전에 벌어진 안타까운 사연(?)이 하나가 얽혀 있다. 책을 빌리던 날, 공중 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하다가 잠시 정신을 놓았던지 전화기 위에 책을 그대로 올려 놓고, 나온 것이다.정신을 차려 다시 찾아가 본 부스 안에는 책이라곤 온데간데 없었다.

책을 반납해야 하기에 나는 그 책과 같은 책을 찾기 위해 서점 안을 이잡 듯 뒤졌다. 그러나 출판사와 옮긴이가 같은 그 정장본의 책은 찾기가 쉽지 않아, 당시 국일출판사에서 <침묵의 외침>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같은 책으로 대신 들고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 측에서는 출판사와 옮긴이가 같아야 한다며 책을 받을 수는 없고, 그에 상응하는 돈으로 지불하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은 영원히 나의 수중에 들어오게 됐다.

최근에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오 년 전에 읽을 때도 번역자를 욕하면서 툴툴대고 읽었는데, 여전히 번역은 짜증이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은 여전하다.

때는 1957년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신입생으로 양친이 돌아가시고 멀리 시집간 누나에게서 약간의 생활비를 보조받고 살아가는 가난한 학생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잘못 옮긴 매독 때문에 그 치료를 위해 찾아간 병원의 의사 소개로 한 미국인을 알게 되는데, 일본에서 백과 사전 세일즈를 하고 있는 그 미국인 아래 주인공 나를 비롯하여 모두 세 명의 십대 후반 소년들이 모이게 된다. 이들이 모인 목적은 현재 만들고 있는 중인 보트 한 척을 완성해서 일본이 아닌 먼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는 것이고, 이 목적 아래 한 집에서 공동 생활을 하게 된다.

일본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현재는 혈혈단신의 열일곱 소년 혼혈아 타이거, 일본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에게서 태어난 가난한 한인 부락촌에서 살다가 온 오웅남, 그리고 주인공인 나와 미국인 셀베조프. 이들 사이에 공통점은 단 하나이다. 지금 발디디고 있는 이 세계를 철저하게 타인의 세계로 느끼며 현재의 공간에서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미국인인 셀베조프는 여기서 형식상의 물주(보트는 그의 돈으로 제작에 들어갔으며, 그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공동의 집도 그가 집세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이고, 이 세 소년을 자비로운 휴머니스트인양 보필하고 있지만, 그는 동성애자이며 그것과 연루되어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생기면서 공동 생활 도중에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리게 된다.

그들은 보트의 나머지 제작비를 대기 위해 사업을 구상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돈벌이 일을 벌리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셀베조프가 떠나자 서서히 불행의 그림자가 이들을 덮는다. 타이거가 경찰에 의해 총상을 입어 죽고, 오웅남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며, 사형 선고를 언도 받는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오웅남. 미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타이거. 어정쩡한 입장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본인 주인공 나와 자비로운 평화 주의자인양 이들을 모두 소집했으나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회한(이들이 완성하려 했던 보트는 제작 중단으로 비바람을 맞고 낡아 부서졌다.)만 남겨주고 자기의 본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미국인 셀베조프.

이들 주인공이 시사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1960년 당시에도 세계의 돌아가는 모양새와 인정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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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허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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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학 3학년 때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중문학을 전공하던 친구가 색색이 밑줄까지 쳐가며 읽은 책을 그대로 선물로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30페이지 가량 읽고 도중하차하고 말았다가, 거의 6년이나 지난 지금에서 다시 펼쳐보게 되었다. 그건 다름아니라 최근 부쩍 지난날 중국에서 있었던 문화 대혁명에 대해 알고 싶은 욕심이 들었고, 더욱이 소설 속에서라면 그 구체적인 실체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 이 책은 문화 대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 혁명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한다기 보다는 그러한 역사적 격동이 인간과 인간 관계에 어떠한 충격을 주었으며 또한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소설의 전개 방식은 이렇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손유에와 호 젠후를 비롯하여 11명의 중요한 등장 인물이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해 나가고 있다. 이들 중엔 호 젠후와 손유에와는 입장을 달리하는, 시대의 흐름에 재빨리 영합했던 시 류와 첸 유리 요뤄쇠 같은 인물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서술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작가가 인간의 총체적이고도 본질적인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채택한 표현 방법인 셈이다. 내 나름대로 이 11명의 주인공들을 그들의 인생관에 따라 세 부류로 분류할 수 있
을 것 같다.

첫 번째 부류는 손유에와 호 젠후를 중심으로 시왕 등이 해당되는데 이에 속하는 사람들의 인생관은 다음과 같다. 인생이나 사물에 대해 독자적인 견해를 갖고 독특한 태도를 취하며. 자기가 옳고 아들답다고 생각하는 목표는 열심히 추구한다.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인간의 가치를 중요시한다. 인생이 항상 그러하듯 이들에게는 특별히 모진 시련이 닥쳐오지만 이들 특유의 강렬한 자존심과 자애와 자신감으로 이를 극복해 나간다.

두 번째 부류는 손유에와는 유일하게 자매와 같은 동지애를 느끼는 인물로 설정되어 나오는 '리이닝'과 손유에가 한때는 동정어린 마음으로 생활을 보살펴 주기까지했던 '슈홍종' 등의 인물이다. 젊은 시절에는 사상에 대해서도 생활에 대해서도 높은 이상을 품었으나 지금은 그저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한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리이닝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들 부류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생활이 계속 필요를 낳고 물질의 필요가 조금씩 내 정신을 빼앗아, 마지막에는 대신해 버렸지. 욕망에는 나이가 없어. 그 하나하나가 분발의 목표가 되어 다른 것 따위는 생각할 틈도 없지. 철학은 철학자에게 맡기고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기고 나는 생활의 전문가가 되어 살림을 연구하고 있는 거야.'

세 번째 부류는 시류와 첸 유리, 뚱뚱보 왕과 같이 기회주의자로서 세력을 잡고 나면 끝까지 쥐고 흔들며 다음 세대를 위해 양보하기를 주저하는 인물들이다. 손유에와 호젠후가 주동 인물이라면 이들은 주동 인물에 제동을 거는 반동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후기를 보면 1980년에 이 작품을 쓴 것은 작가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당시는 모더니즘을 부르주아의 예술이라 하여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나온 배경은 리얼리즘이 작가 자신을 속박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예술의 혁신을 추구하는 한 방편에서 기인한 것이다. 리얼리즘의 방법은 객관성을 강조하고 작가가 자기를 은폐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기존의 예술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작가는 모더니즘의 형식으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한편으로는 내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손유에도 호 젠후도, 자오 젠호안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손에 얻기까지는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나 커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내가 사는 이 시대가 행복한 시대일리 없으며, 자오 젠호안의 말처럼 인생이란 얻는 것과 잃는 것 외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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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멀지 않다 민음의 시 80
나희덕 지음 / 민음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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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환의 노래 중에 <귀뚜라미>라는 노래가 있다.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아직 내 울음소리는 노래가 아니요,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토하는 울음,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소.'라는.

대학 2학년 때 이 노래를 첨 듣고, 이 노래는 나를 위한 송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노래를 달리 옮기면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으니. 조용히 때를 기다려라 라고 옮겨야 할까나. 밟히고 짖눌려 버리기 쉬운 사소한 존재에게 견고하고 단단한 의지를 불어넣는 마력을 나희덕은 갖고 있다.

4년 남짓한 사회 생활은 나에게 여운을 두지 말고, 복종하지도 말며, 곁을 터 주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그 단단한 틈을 밀고 들어오는 시심(詩心)이 있다. 그건 바로 나희덕의 시이다. 그의 이 시집 중, <속리산에서>라는 시는 이 시집 전체의 경향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가파른 비탈만이 /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산다는 일은 /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평평한 길은 가도가도 제자리 같았다./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이 남아 있는 나에게 /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 산을 오르고 있지만 / 네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 산 속에 갇힌 시간일거라고,'

삶은 그런 것이다.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고,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천장호에서-
던지는 돌멩이에도 제 속을 보이지 않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열정을 갖고 대들기를 반복해 보지만, 얼음장처럼 닫힌 마음이 그러하듯 돌을 아무리 던져도 호수는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시인이 아니, 내(우리)가 삶을 지속시키는 방식은 그렇게 열정과 냉정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희덕은 시에서 노래한다. 냉정을 열정으로 무화시키는 힘을, 과거의 썩은 물웅덩이처럼 남아 있는 상처는 정리되어 이제 현재의 삶을 파헤쳐 놓지는 않는 것이다. 과거를 단정하게 정리하는 기억, 이것은 바로 열정 속에서도 냉정을 찾는 것이며, 냉정 속에서 열정을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또 말한다.
'사는 건 쐐기풀로 열두 벌의 수의를 짜는 일이라고, 그때까지는 침묵해야 한다고, 마술에 걸린 듯 수의를 위해 실을 짜깁는다.-고통에게1-' 이렇게 조용히 시인은 나에게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처럼, 복종함으로 반항에 이르는 길을 풀어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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