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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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지 않은 사람은 편안한 믿음 속에서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난 이상, 여행자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실에 맞춰 믿음을 바꿔가게 된다. 하지만 만약 우리의 정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믿음에 집착한다면 여행은 재난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35쪽)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64쪽)

무슨 이유에서든지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은 현재 안에 머물게 된다. 보통의 인간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지만 머릿속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중략)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81-82쪽)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117쪽)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147쪽)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155쪽)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면 나는 무엇에든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잊기를 바랐다.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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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대상자들의 자전적인 고백에는 그들이 글을 쓰게 된 배경, 목적, 방향, 내용, 다짐, 등을 엿 볼 수있다. 특히, 작가 자신을 오롯히 드러내고 있다. 어떠한 순간에 불현듯, 때론 축척된 에너지로, 어떤 계기로, 글을 쓸 수밖에,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로 모여 있다. 사람의 외모가 다르듯, 속 마음의 층위는 얼마나 다를까. 살아 오고, 살고 있는 알 수 없는 환경에서 그 단면을 끄집어 내어 풀어풀어 쓴 그들의 소설에는 그들이 여기에 쓴 문장들과 하나씩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글은 이러하고, 누군가는 저러하다고 나름 느끼게 된다. 모든 게 다른 게 당연하기에 글도 모두 다르다. 좋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  "이제는 소설만 가지고도 인간을 교육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150쪽, 김지원)"

 

*글을 읽으며 '밑줄그은' 속 문장은 저자들이 지금까지 이런 이유로 글을 쓰겠구나 하고 짐작한 걸 옮겼다. 그리고 몇몇은 어려워서 짐작도 못하고, 죽은 이들도 있고, 윤이형이 절필한 이유도 추측할 수 있다. 또 표절한 신경숙도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이 가지는 목적과 소설가의 의무도 생각하게 된다. 소위 불법일 때, 사람들은 그 일의 불법성을 따지기보다 자신의 착한 본성과 속한 집단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불법의 정의는, 불법은 누가 정하는 것인지, 불법의 한계도, 무전유죄도, 이것저것으로 이어지면서 막연하고 혼란스럽다... 그들의 속마음이 단번에 쓱 들어와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블라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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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대상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
공지영.손홍규.편혜영 외 19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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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처를 보여주면 얼마 후 그곳으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지고 점점 더 숨고 싶어 하며 점점 더 사람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모든 접촉에의 차단은 나에 대한 비난들을 누룩처럼 부풀렸고 내 특질과는 아무 상관없는 헛소문들이 내 귀에까지 자주 들려온다. 좋은 학교, 좋은 집안, 그럴듯한 외모, 젊은 여성, 이혼녀, 베스트셀러 작가. 이 반짝이는 모조구슬 같은 딱지들은 무대의상처럼 화려하고, 그 안에서 내 영혼은 썩은 내를 풍기며 곪아가고 있었다. (21쪽, 공지영)

박태기꽃을 보거나 나비와 마주치거나 갈림길을 만나거나 떡을 못 받거나 설령 받았더라도 나는 예외 없이 구시렁거리고 꿈지럭거렸다. 다시 말해 아무 때나 무슨 일에든, 꾸준히, 안 게으르게, 맹렬하게. 그러는 사이에 소설이 슬며시 끼어들었던 건 아닐까. 혼자하는 긴 원망과 반성, 하릴없는 궁금증, 고의적인 음해, 상상을 넘어선 망상, 일방적인 착각과 환멸, 이 상시적이고도 꾸준한 꾸물거림의 수풀 사이로 소설이 비단뱀처럼 흘러든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꾸물거리는 것이 허비가 아닌 생산일 수도 소설의 경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35쪽, 구효서)

간발의 차이로 죽지 못한 게 억울해 가슴을 탕탕 쳤지만 나는 여전히 나 자신밖에 모르는 어린애였다. 내 죄와 상처, 새 설움밖에 몰랐고, 내 죽음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타인의 죽음을 배우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48-49쪽, 권여선)

그렇게 나는 글을 쓴다는 건 고독을 대면하는 일이라는 걸, 평생 글을 쓰겠다는 것은 평생 고독을 대면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축구장에 들어설 때만이 축구선수라 할 수 있는 것처럼 고독할 때만이 작가의 일은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놀랍게도 나는 그 고독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렇게 15매를 쓴 어느 날 밤에 깨닫게 된 사실일 것이다. 그 고독이 너무나 따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바뀌게 된 것 같다. (111쪽, 김연수)

이렇게 인간에게 딱지를 붙여 분류해 감옥에다가 딱딱 집어넣는 지식이 있다면, 그 감옥에 갇힌 인간을 풀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돌이켜보면 ‘소설 나부랭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재미있었기 때문에 읽기 시작했고 마침내 작가의 길로 들어서 꾸준히 좋은 작품을 쓰려고 애썼던 나의 삶. 이제는 소설만 가지고도 인간을 교육시킬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50쪽, 김지원)

학문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면, 소설이란 진지하게 ‘사는 것‘인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심오하게 ‘배우는 것‘이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싸안는 경험의 그물망, 그것이 소설의 깊이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것‘인 동시에 ‘배우는 것‘으로서의 소설과 작가를 염두에 두고, 심화되는 가속력의 세계와 퇴행하는 인간의 조건을 또한 경계해야 할 것이다. (176-177쪽, 박상우)

내 태생지의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은 끈질기게 내게 들러 붙어 있다가 현재의 내 삶 속으로 불쑥불쑥 쳐들어와 문장을 일구어내곤 한다. 사실에 의해서보다는 결국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게 마련이라는 그 기억이란 것이 이렇게 지독한 것인가,싶어 때때로 몸서리쳐질 때도 있다. (199쪽, 신경숙)

세상에는 이렇게 절박하고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아직 나 개인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괴롭지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 편이고 아직은 쓰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238쪽, 윤이형)

이 세상에 태어난 자 누군들 외로움과 그리움에 몸부림치지 않으랴만, 그것은 그것과 싸우면 싸울수록 더 커지는, 신화 속의 괴물과 같은 것임을 일찍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그것을 싸워서 이겨내는 길은 없다. 지혜롭게 비켜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이것이 운명이라고 하는 것임을 나는 이제 알겠다. (254쪽, 윤후명)

문학에 전혀 새로운 테마가 있을 리 없고 순수니 통속이니 하며 굳이 금기하고 배재해야 할 영역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작가가 삶을 다루는 새로운 층위가 있고 새로운 문학 형식의 고안이 있을 뿐이다. 나의 소설은 늘 삶 자체에서 생산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또한 많ㅇ니 다른 지점이 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 여성적 생명과 존재라는 생의 원형질적인 관심에서 올라서서 삶의 표면과 일상을 무대로 새로운 형식의 고안을 모색할갈 것이다. 그것은 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글쓰기의 고통은 그 현재성 속에서 늘 충분하다. (265쪽, 전경린)

몸을 갖지 못한 언어가 지은 집은 어쩌면 가장 무력한 것이 아닌가 절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 동시대를 같이 숨 쉬는 것들,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존재할 것들은 역설적으로 오직 언어 안에서만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81쪽, 정미경)

삶의 객관적 조건을 아는 것과 삶의 내면을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서류와 정보를 통해 누군가의 형편과 조건을 알 수는 있겠으나 그것으로 섣불리 삶을 짐작하려는 일은 각각의 삶을 단순화시킬 뿐이다. 숫자나 통계가 단순화시킨 삶을 벗어나는 방법은 개인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내가 지켜봐온 부모의 이야기, 세 자매의 이야기, 오빠의 이야기 같은 것들. 통계와 수치로는 짐작되지 않는 어떤 얘기들을. (315쪽, 편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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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배워서 쓴 산문이다.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결심을 호수 건너기로 비유한다. 글쓰는 자신에게 익숙한 안정감과 타성이라는 영어에서 벗어나려고, 자기 밖의 세계에 다가가기 위해서 새로운 수단, 이탈리아어을 선택한다. 삶도 또한 마찬가지다. 낯선 언어뿐 아니라 환경, 관계, 물건도 호수뿐 아니라 바다 건너기에 비유된다. 코로나로 직면한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또한 변화와 변신을 꾀하게 만든다. 어떻게 변화하고 살아가느냐는 먼저 시도와 노력이 겸비되어야 한다.  수십 번, 수만 번의 휘젓기와 시도 끝에 와 닿는 건너편, 그 곳에서 보면 이쪽이 저쪽이 된다...... 퇴직한 우리 부부에게 지금, 여기는 전부 낯설다. 전우애로 맺어진 우리지만 온전히 서로를 바라본 시간과 공간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또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정도보다 적지는 않다. 그리고 아들을 독립시키기로 했다. 집 가까이 다니는 대학이 있지만 나머지 학업부터 네가 살고 싶은 곳에서 시작하도록 정했다. 부모가 된다는 것도, 부부가 된다는 것도, 각각의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흡사하다... 그 나라 언어를 알아야 관계가 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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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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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건너편에 도착했다. 난 문제없이 해냈다. 지금껏 멀리서만 봤던 오두막이 몇 걸음 앞에 보인다. 저 멀리 남편과 내 아이들의 모습이 까마득하다.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호수를 건너자 내가 알던 호숫가는 건너편이 되었다. 이쪽이 저쪽이 된 것이다. (중략)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빠져들려면 기슭을 떠나야 한다. 구명대 없이, 뭍에서 몇 번 젓는지 세지만 말고 말이다. (13쪽)

이제 이 작은 사전은 부모라기보다 형제 같다. 여전히 내게 필요하고 아직도 날 이끌어준다. 사전에는 비밀들이 가득하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18쪽)

많은 열정적인 관계가 그렇듯 이탈이어에 대한 내 열광은 애착,집착이 될 터였다. 이성을 잃은, 응답받지 못하는 뭔가가 늘 존재하겠지. 난 이탈리어와 사랑에 빠졌지만 내가 사랑하는 대상은 내게 무관심하다. 이탈리어는 날 절대 갈망하지 않은 거였다. (22쪽)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일종의 추방에 익숙해져 있다. 모국어인 벵골어는 미국에서 보자면 외국어다. 자신의 언어가 외국어로 생각되는 나라에서 살아갈 땐 계속 기묘하고도 낯선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25쪽)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외부에 언제나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더는 사전이나 메모장, 펜이 필요 없는 날을 꿈꾸고 살아야 할까? 내가 영어로 책을 읽듯이 도구 없이 이탈리아어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을 꿈꾸어야 할까? 이런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는 게 옳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게 많아도 나는 아주 활동적이고 열심인 이탈리아어 독자면 족하다. 나는 노력을 좋아한다. 한계가 있는 조건을 더 좋아한다. 무지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필요하다는 걸 안다. (42쪽)

하지만 메모장에 단어들을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도 만족스럽지도 않다. 나는 모은 단어들을 사용하고 싶다. 필요할 때 단어를 퍼 올리고 싶다. 단어에 닿고 싶다. 단어들이 내 일부가 되게 하고 싶다. (47쪽)

자신에 대한 믿음과 권위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나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데 작가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는 구속받고 제한받는데도 왜 더 자유롭다고 느끼는 걸까? 아마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완전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왜 불완전하고 빈약한 이 새로운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끼는 걸까?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에서 노숙자나 다름없이 살기 위해 훌륭한 저택을 포지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리라. (73쪽)

나는 왜 글을 쓸까? 존재의 신비를 탐구하기 위해서다. 나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서다. 내 밖에 있는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다. (중략) 나는 글쓰기를 통해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는 것은 더 심오하고 자극적인 형식으로 언어를 익히고자 하는 내 방법일 뿐이다. (75쪽)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삶은? 결국 같은 것이리라. 말이 여러 측면과 색조를 갖도 있고 그래서 복합적인 특성을 갖고 있듯 사람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거울, 중요한 은유다. 결국 말의 의미는 사람의 의미처럼 측정할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76쪽)

나와 이탈리아어 사이의 거리는 지금도 극복할 수 없다. 겨우 두 걸음 나아가는 데 내 인생 절반이 소요됐다시피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만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건너고 싶었고 깊은 성찰의 물꼬를 튼 작은 호수의 은유는 틀렸다. 사실 언어는 작은 호수가 아니라 넓은 바다다. 두렵고 신비한 요소,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자연의 힘이다. (79쪽)

그들이 왜 날 이해하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날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벽이 있다. 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날 무시할 수 있다. 날 벼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날 바라보긴 하지만 진정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그들 말을 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는 사실을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노력을 귀찮아 한다. 때때로 내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말을 할 때 건드려선 안 되는 물건을 건드린 아이처럼 비난받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중략) 언어는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그 나라 말을 모르면 자신이 인정받는 당당한 존재임을 느낄 수 없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 (113-114쪽)

변신의 메커니즘은 절대 변하지 않는 삶의 유일한 요소일지 모른다. 모든 개인, 나라, 역사의 시대, 우주만물의 과정은 때로는 약하고, 때로는 격렬한 변화의 과정일 따름이다. 변화가 없다면 우린 그대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무언가가 변화하는 전이의 순간들이 우리의 척추를 만든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한 순간순간들은 살아남거나 사라진다. 변화가 우리의 존재에 뼈대를 만든다. 나머지는 대개 망각된다. 예술은 우리를 일깨우고, 마음에 새길 뜻을 주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찾는 걸까?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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