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화첩기행이 기억 나서 집어든 책이다. 김병종이 특히, 뉴욕에 관하여 자신이 쓴 시와 그림을 곁들인 소회이다. 덧붙여 샌프란시스코, 쿠바, 위대한 작가들, 장소, 음악, 그림, 음식 등을 자신이 걷고 있는 그 곳과 버무려 쓴 시화기행이다. 

시인이 되었어야 하는데, 요즘 자주 하는 말로 '다음 생에 시인이 꼭 되시길' 빌어본다.

화첩기행이 더 좋다. 김병종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나보다. 가볍다는 느낌이다. 암튼, 생일 자축으로 그랜드캐니언을 가려고 예약했다. 글 속에 그랜드캐니언이 없었다면 화가 날뻔했다.

나이에 걸맞고, 자신의 교양에 맞는 책을 선택하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한다.

연초부터 계속 엇나가고 있는 독서다. 한편으로는 이런들 저런들, 남는 게 시간인데... 

아울러 도서관에 간 김에, 뜨개 강사들이 말했던 M1R, M1L, KFB, K2TOG, SSK 등이 떠올라,  '손뜨개 영문패턴 핸드북', '오늘부터 영문도안 손뜨개'를 빌려서 봤다. make one right, skip skip knit. 이렇게 말해주면 쉬운데..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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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화기행 2 - 뉴욕, 한낮의 우울 시화기행 2
김병종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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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거리 건너마다 위치한 박물관과 미술관뿐 아니라 브로드웨이와 소호, 첼시, 웨스트사이드와 브롱크스, 할렘을 거느린 뉴욕, 그야말로 다양하고 거대한 세트장이라 할 만하다. 그 위에 시나리오 작가가 스토리의 얼개로 지붕만 덮으면 영화로 완성될 정도다.
영화가 인생이고 인생이 곧 영화라는 말이 맞는다면 뉴욕은 대체로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도시다. 영화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영화 그 자체이기 때문에. (18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드넓은 초원 같은 야채밭을 차로 두 시간쯤만 지나면 검은 숲 사이 군데군데 하얀 모래톱이 드러나고, 거기 수줍은 듯 돌아앉은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한없이 부드러운 모래밭과 고요히 흐르는 물과 숲속의 길, 캐멀비치에서 스페니시베이라고 부르는 해안까지 따라가노라면 사슴이 한가하게 풀을 띁는 연둣빛 풀밭과 햇살이 반사하는 하얀 조약돌에 부리를 씻는 물새가 보인다. (140쪽)
캐멀비치와 페블비치를 지나 스페니시비치까지 이어지는 ‘17마일 드라이브‘ 코스는 미국 서부의 대표적 경관 여행지로 꼽힌다. (142쪽)

그랜드캐니언, 유타주를 가로지르며 멀리 애리조나주까지 뻗어나간 대협곡. 억겁의 세월 동안 바람과 물롸 공기가 만나고 틀어지며 만들어낸 장엄한 풍경.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며 단아한 유럽 도시 문명의 전통을 여지없이 깨트린 미국에서 그랜드캐니언은 반전도 그런 반전이 없다. 황토와 괴석 그리고 바위산을 돌아 흘러가는 콜로라도강의 천년 물길은 사람이 지어올린 빌딩과 비교될 수 없다. (중략)
그랜드캐니언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밤에 별빛을 모아 스스로의 내면을 비추어볼 일이다. 덧없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잘못 알고 한사코 붙잡으려 했던 마음. 강박적 쾌락과 가짜 기쁨에 몰말라 했던 나날......
그랜드캐니언에서는 시작과 끝이 없다. 심지어 죽음도 삶의 한 형태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엄습하는 알 수 없는 충만과 평온, 도시로 돌아가서도 제발 이 느낌만은 지속될 수 있기를. (169-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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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는 글을 이렇게 쓰고 있구나... 칼은 연결보다는 단절과 해체의 의미가 더 크다. 그녀가 속해 있었던 세계, 자신의 출신계급, 사회, 가족, 종교, 특별함을 잘라내고 평범하고 현실에서 있는 그대로 정말 팩트로만 글을 쓰고 있다. 단절을 하기 위해서는 경계를 잘 살펴야 한다. 경계를 문제 삼아 해체하고 허물며 글을 쓰는 것, 거리두기를 통해 글을 쓰는 것,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글로 쓴다는 것, 자신의 글쓰기는 사치이며, 문학적 포장은 거부하고 출신계급을 변절한 처지이기에 더 치열하게 글을 쓴다는 것. 그 속에서 독자인 우리가 길을 찾아 가도록 하며, 그녀의 기억들과 경험과 지식들은 우리에게 투사되면서 전달되며 증여된다.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그것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그녀에 대한 글을 몇 편 읽었다. 이제 다른 이를 만날 때가 되었다.

*설날이 내일이다. 몇 시간 운전하기를 모두 꺼리기에 부모님 댁은 기차타고 가기로 했다. 90이 넘은 아빠는 언제 오냐고 계속 묻는다. 가족 사진 보고 기다리라고 하면, 당신은 내일 없을 수도 있다는 귀여운 협박으로...

*특히, 명절이 되면 부모님에 대하여 깊이 깊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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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같은 글쓰기 -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와의 대담
아니 에르노.프레데리크 이브 자네 지음, 최애영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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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글쓰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그녀는 실존의 고통과 즐거움과 복잡함을 적나라하게, 뼛속까지 파헤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6쪽)

내게 하나의 텍스트는 생각과 욕망의 미끄러짐과 겹치기를 통해서 조직되는 무엇입니다. 내가 글을 쓰던 순간에는 모호하고 형태가 뚜렷하지 않던 것을 차후에 해명하고 그 맥락을 잇기를 원한다면, 바로 그러한 미끄러짐과 겹침을 설명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 텍스트를 정성들여 조탁하는 과정에 투여되는 삶의 작용, 즉 현재의 작용을 무시하도록 내게 강요하는 셈이될 겁니다. (20쪽)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 싶은 욕망의 다른 이유가 생각나는군요. 이것들은 내가 내 출신 사회계층을 배반하고 있다는 감정에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나는 ‘사치스러운‘활동을 하고 있어요. 비록 역시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글쓰기에 바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사치가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이러한 삶을 ‘속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어떤 안락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 글쓰기를 하는 것, 내가 손으로 한 번도 노동해보지 않은 만큼 나 자신의 존재 전체로써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속죄의 다른 방법은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들을 전복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68-69쪽)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내 모든 지식뿐 아니라 교양, 기억 등이 모두 연루된 어떤 작업을 통해, 외양을 넘어서 나 자신을 세상에 투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련의 작업은 하나의 텍스트로, 따라서 타인들에게로 귀착되지요. (중략) 그리고 그것을 전달하는 작업, 즉 하나의 텍스트를 타인에게 증여하는 적업을 의미합니다. 타인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상관없습니다. (79쪽)

내 생각에 글을 쓰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활동입니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세상의 베일을 벗기고 변화시키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기존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다지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활동입니다. (97쪽)

내게 글쓰기란 철저하게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삶의 즐거움보다 우월한 어떤 즐거움을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아름답고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것은 곧 ‘멀리‘ 있는 것, 바로 나 자신의 것이었던 그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과 동일시되었죠. (중략) 갑자기 정치적 행위를 위해 글을 쓰겠다는 욕망을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 아니, 나는 삶과 인식의 차원에서 험난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도정을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이 명백한 사실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어요. (중략) 이러한 삶의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글쓰기에 관한 나의 관념 혹은 직관을 전복시켜버린, 문학과 현실 사이의 일종의 정면 대질이라고 할 과정을 겪었습니다. (98-99쪽)

바르크는 어디선과 말한 바 있습니다. "글쓰기는 작가가 자기 언어의 본질적 성격을 어느 사회 영역에 위치시킬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영역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선택을 명료하게 인식했고, 그 인식은 나를 ‘거리 두고 글쓰기‘로 이끌었습니다. (중략) 지배자들의 언어도구, 그 중에서도 특히 고전적인 문장구조를 채택하고 있는데, 내가 선택한 글쓰기는 그러한 언어도구를 사용하여 피지배자들의 관점을 문학 속으로 침입 혹은 난입시키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102-103쪽)

말, 여행, 광경 등, 그 어떤 수단으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글로 쓰면서 발견하는 것, 숙고 똔ㄴ 홀로는 그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습니다. 글쓰기는 무엇을 다가오게 하고 도래하게 하는지는 결코 미리 알 수 없어요. 그러니 글쓰기에는 공포 또한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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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추천하여 구입하여 읽은 책이다. 빌려 읽어도 충분하거나 아님 안 읽어도 된다. 그저 웃음이 나왔다. 일일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기본적으로 드라마를 폄하하는 마음이 있다. 어쩌면 삶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라마에 녹아 있는데,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 그래도 다른 삶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띠끌 같은 나 일 수도 있고, 수많은 티끌이 모여 나를 이루기도 한다. 티끌은 삶의 조각조각일 수도 있고, 현재의 나의 형편일 수도 있다. 너무 비관적일 수 있지만, 주인공 안젤라는 그게 아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신이 주관하여 살려 한다. 

수많은 선택지에서 또는 선택의 종류도, 그러한 선택지에서 선택조차 당함을 못한 이까지 살고 있다. 누구는 부모를 잘 만나서, 누구는 능력이 있어서, 누구는 환경이 좋아서, 등등은 핑계댈 수는 없다.

이왕 태어났으니,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온전히 본인 몫이다.  

어쨌든, 지금 자족하며 살고 있다. 후회와 아쉬움과 욕심이 여전히 밀려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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