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신이 인간에게 읽힐 요량으로 편찬한 책이라 할 수 있다.(10쪽)" 인간은 세상 만사를 아우르기 위해 메타포를 개발한 것이다. "메타포란 A 분야의 경험을 이용하여 B 분야의 경험을 환히 비추는 방법(10쪽)"이다. 이러한 메타포로 인간에게 세상을 읽도록 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 중 단연코 책이 으뜸이다. 일회성이고, 되돌릴 수 없는 우리는 책을 통해 인생을 미리 알 수 있다. 세상이 곧 책이라는 메타포를 기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1) 여행자로 정의한다. 삶은 여행이다. 마치 세상을 여행하듯 책을 읽는다. 책은 사람이 다양하듯, 온갖 일들이 일어나듯, 천의 얼굴을 가진다. 여행을 어떻게 하는지는 우리의 몫이다. 무늬만 여행을 떠나기 보다, 탐구하는 여행으로 알뜰하게 챙겨서 기억 속에 저장하여 점차 익숙한 모습으로써 우리 삶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 2) 상아탑으로 정의한다. 책이라는 상아탑을 안식처로 삼아 세상과 유리된 자신 만의 공간에서 무한 반복적인 배회를 하고 있을 수 있다. 그 상아탑에서 완전히 나와야 한다. 깊이 있고, 진득하게, 오랜 시간을 들여 심오한 독서를 반복하여 상아탑의 문을 박차고 나와 세상책과 맞닥뜨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기반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3) 책벌레로 정의한다. 제발 그대 책벌레들이여, '책 속의 사실'과 '현실'을 너무 꼼꼼하게 비교하지 말아 달라(132쪽)'고 부탁한다. 책 속의 세상과 현실의 세상은 완전히 동일 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책을 모두 독파한다고 세상사를 완전히 알 수는 없고, 책은 세상을 비춰주는 도구임을 기억해야 한다. 결론으로 장강명이 말한 세계가 곧 책이고, 삶과 여행과 독서는 모두 똑같은 정도로 심각하고 위험한 행위임을 기억하기다. 그대가 여행을 하든, 상아탑 속에 있든, 책을 씹어 먹고 있던, 책은 읽어야 한다. 특히, 종이책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책은 인생의 등대이므로 책은 계속 읽어야 한다. 'you are what you read(당신이 읽는 것이 곧 당신) (169쪽)'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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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된 독자 -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양병찬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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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의미의 공간을 넓히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메타포(metaphor)에 기댄다. 메타포란 A 뷴야의 경험을 이용하여 B 분야의 경험을 환히 비추는 방법으로, 언어의 직접적인 전달능력이 부족함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중략) 따라서 인간의 재능에서 변하지 않는 부분, 글쓰기와 독서 행위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원리, 즉 메타포를 위해 사용되는 어휘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매우 흥미롭고 교훈적이다. (10-14쪽)

보나벤투라, 아우구스티누스, 단테에게 독서란 순례자가 계신된 길을 따라가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책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 전까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양심을 찌른다. 거기까지가 책의 역할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대하다고 일컫는 텍스트가 모두 그렇듯, 궁극적 이해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아무도 모르므로, 그 곳을 묘사할 단어가 없다. (59쪽)

‘인생=여행‘이라는 비유도 오래된 메타포 중 하나다. 독서란 책을 여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독서. 인생. 여행이라는 트리오는 ‘인생=여행‘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 인생. 여행은 서로에게서 의미를 차용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 준다. 따라서 독자는 책을 통해 세상을 여행하면서 인생을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단, 인생과 독서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는데, 오르한 파묵은 [조용한 집(Silent House)]이라는 소설에서 그 점을 잘 설명했다. "인생은 재출발을 용납하지 않는다. 정시에 운행되는 열차와 같다. 그러나 책은 다 읽은 후에도 헷갈리거나 당황스러울 때는 언제든 처음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당신은 원한다면 몇 번이고 다시 읽어 이해 못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62쪽)

종이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는 ‘제2의 책‘이 생겨난다. 제2의 책은 ‘과거. 현재. 미래의 독서‘와 ‘회상과 기대‘로 구성된 마음속의 텍스트이며, 독서를 돕는 여행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반면 전자책은 자유로운 여행 공간이 아니다. 개념상으로만 봐도 현실감이 부족한 가상공간이다. 한마디로 유령 같은 존재여서 전통적인 연상 기능이 부족하다. (71쪽)

전광석화 같은 스크롤과 쓸어 넘기기가 판치는 오늘날, 우리는 천천히, 깊게, 철저히 읽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종이책이 됐든 전자책이 됐든 독서 여행의 목적은 ‘읽은 내용을 알뜰히 챙겨 귀환하는 것‘이다. 그런 독자라야만 진정한 의미의 독자라 할 것이다. (73쪽)

상아탑의 이중적 이미지, 즉 ‘학구적이고 호젓한 안식처(위험이 수반됨)‘와 ‘책임과 행동을 회피하는 은신처(죄책감이 수반됨)‘라는 모순된 이미지는 [햄릭]에서 잘 드러난다. (96쪽)

햄릿이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어서가 아니라 학문적 가르침에 잔뜩 얽매여서다. ‘대학의 교리문답서를 모두 잊고, 현실의 경험에서 다시 배워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108쪽)

그람시는 묻는다. "비판의식 없이 생각하는 것과,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신념을 의식적. 비판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옳은가?" 이것은 햄릿의 유명한 말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것이지만, (중략) 그람시의 이분법은 햄릿에게 두 가지 독특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나는 상아탑이라는 서재에 머물면서 독서의 한계가 소장한 책과 일치하는 독자로 남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열린 공간으로 독서의 범위를 확대해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안한 세상책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123쪽)

오늘날 상아탑이라는 독서 장소는 또 하나의 공간을 상징하게 되었으니, 바로 인터넷 서핑 공간이다. 현대사회는 속도와 간결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그 때문에 느리고 강렬하고 사색적인 독서는 비효율적이고 케케묵은 것으로 여긴다. 다양한 종류의 전자책은, 하나의 텍스트를 오래도록 진득하게 음미하는 대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짧게 단편적으로 부지런히 쪼아 먹으라고 부추긴다. (중략) 그러나 사실, 그들은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 무한한 공간의 왕들을 헤아리고 있을 뿐이다. 햄릿이 그랬던 것처럼. (125-126쪽)

이상한 운명에 얽매인 독자가 할 일이라고는, 앞에 놓인 책에 눈을 고정하고 한 페이지씩 정독하는 것밖에 없다. 그건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무기력하고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책벌레는 주변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 종이에 감싸여 있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그 모습이 마치 고치와 비슷해 나중에 나비처럼 자유로워지리라고 상상하기 쉽지만, 그건 착각이다. (130쪽)

독자는 책바보와 책벌레라는 이중의 굴레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는 책바보가 되고 ‘걸신들린 독자‘는 책벌레가 되는데, 둘의 공통점은 ‘책에 사로잡힌 독자‘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다. (147쪽)

여행자가 됐든, 상아탑 거주자가 됐든, 책벌레가 됐든, 각각의 메타포에 부여된 의미는 오랫동안 변화되어 왔다. (중략) 우리는 ‘독서하는 피조물‘이다. 단어를 섭취하고, 단어로 이우러져 있으며, 단어가 존재의 수단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단어를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 자아도 확인한다. (167-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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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어릴 적 아버지와 고양이를 버리고 왔던 아주 평범한 기억으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역사의 작은 한 조각이다. '역사라는 그런 것이다 - 무수한 가설 중에서 생겨난 단 하나의 냉엄한 현실(97쪽)'이다에 공감한다. 인간으로 살면서 피할 수 없고, 굴복할 수 밖에 없는 현실(아버지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중일전쟁)은 지금도 크거나 작게 반복되고 있다. 하루키 아버지는 역사 속에서 결과는 원인을 꿀꺽 삼켜 무력화하는, 누구에게나 말하기 어렵고, 전할 수 없는 무거운 체험, 죽을 때까지 품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사건들, 응어리가 되어 있는 것들 중에서 포로로 잡힌 중국 병사를 처형한 일을 딱 한 번 속을 털어내 말해 준다. 그 중국 병사를 아버지가 처형했는지, 아님 지켜봤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하루키는 중국 병사와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 내포된, 아버지에게 미친 영향은 자신에게로, 즉 다음 세대에게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그 조각난 이야기 하나하나의 아귀가 맞춰져 하루키 자신이 태어나고 소설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의 삶이 덧없는 환상같다고 말하고 있다. 

부모님을 뵈러 가기 전에 읽은 글이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가보고 싶어한, 당신이 북한군에게 끌려가기 직전 꾀를 내어 무사히 빠져나온 그 집터를 보러 간 적이 기억났다. 아버지의 기억은 우리의 기억으로 온 몸으로 전수되어 왔다... 가끔씩 동생들을 만나 어릴 적 기억을 나눠보면 서로 다른 부분이 아주 많다... 보웬의 다세대가족치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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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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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51쪽)

아버지는 전쟁터에서의 체험에 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다. 당신 자신이 직접 손을 댄 일이든 또는 그저 목격한 일이든. 아마 기억도 하고 싶지 않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큼은, 가령 서로의 마음에 상처로 남는다 해도, 피를 나눈 아들인 내개 말해서 전하고 어떤 형태로 남겨야만 한다고 느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는 나의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54쪽)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뿐이다. 딱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이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다. (92-93쪽)

(이어서)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된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93-95쪽)

아버지의 운명이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경로를 밟았다면, 나라는 인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라는 건 그런 것이다-무수한 가설 중에서 생겨난 단 하나의 냉엄한 현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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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목수정의 글이 좋다. 이럴 때 읽으면 치유가 된다. 

어딘지 모르는 알 수 없는 근지러움이 온몸을 덮치면서, 마음과 정신까지 근질거리고, 잇몸조차 부어 먹는 거조차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 모든 걸 알러지라고 치부해 버리면, 아직도 세상 만사가 알러지가 되고 있는, 그러면 나는 젊은이에 속한건가. 그건 분명 아닌데도, 긁고 있는 손가락이 미울 정도로, 이도 저도 못하는 마음의 흔들거림, 총체적인 위기에 처한 것 같다.  

이렇게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 자신감과 바탕이 되는 지식과 마음의 근육이 부럽다. 

십여년 만에 예전에 같이 일했던 이들을 만났다. 그 당시 많은 도움을 받아서 만나고 싶었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입속까지 근질거리고 있었다니, 이런 내가 싫다. 요즘 들어 듣고, 들어주는 자리에서 먼저 선점하여 이야기하고 수다쟁이가? 된 모습이다. 주변인들이 나를 만나는 이유는 분명 아주 잘 들어주고 긍정적인 피드백과 비밀유지가 완벽했기 때문일텐데, 그래도 그들보다는 덜 이야기하고, 이전의 나보다는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고 애써 위로한다.

목수정의 아버지 목일신은 아동문학가이자 우리가 어릴 때 부른 '자전거'를 작사한 분이다. 이름을 딴 일신중학교와 목일신문화재단, 목일신아동문학상이 있다. 할아버지 목치숙은 독립유공자이다. 이러한 가족 배경을 가진 그녀가 어릴 때 만난 그녀와 정반대의 계급, 소위 친일파 배경을 가진 남자친구와의 이야기가 '당신들의 계급을 동정한다(22-26쪽)'에 나온다. 비루하게 왜곡된 역사가 청산되지 않아, 계속 거짓을 부르게 만드는 지금을 알 수 있다. 

프랑스와 한국의 경계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말들이 조각조각 들어있다. 정리하면, 끝내 무릎 꿇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진실을 말하고, 그게 인간에 대한 예의이고 살아있는 자의 몫이라고, 깜깜한 밤을 지나는 우리는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영혼을 보듬어, 상생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기를 권하고 있다.    

혼자서 아는 척하고, 잘난 척하며 살려고 한 것 같다. 나에게만 집중하는데도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근질거림을 어쩌지 못한다. 알러지 때문이라고 뭉뚱거려 퉁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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