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하지 못한 말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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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겨진 기분을 느낀 나를 위해서 다시는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지. 그런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못하는 관계는 그것대로 또 얼마나 쓸쓸할까. (114쪽)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사랑이라는 게 가능하기나한가? (121쪽)

"많이 힘들었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세상의 무게게 어깨에 느껴지는 게 당연해요."
(중략)
"어떤 괴로움도 공부가 돼요. 잃는 건 없어요." (173쪽)

실연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연의 고통에서 애써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는거라고들 하더라. 오히려 그 속에 푹 침잠해 영원해 보일 것 같은 슬픔에 몸을 맡기고 자기 연민이든 상태를 향한 원망이든 질릴 때까지 붙들고 가라고. 이제 그만하면 됐다 싶을 때까지 바닥을 쳐야 비로소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다고. 현실의 고통과 슬픔을 모른 척, 못 본 척하면 그 상처에선 계속 피가 흐르게 될 거라며. 말은 그럴싸했어. 하지만 그 슬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다 떠안는다면 나는 가루처럼 부서져서 스스로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일단 도망가야만 했어. 그렇게 안간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아니 한 시간 한 시간을 당장 흘려보내는 일이 시급했어. 시간의 힘 말고는 믿을 것이 없었어. (187-188쪽)

나는 당신에게 제대로 작별을 고하고 싶었어. 그게 다야. (208쪽)

깊은 상처는 오직 내가 깊이 사랑했던 사랑만이 줄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내게 깊은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글이 쓰고 싶어진다. (211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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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와 백합'은 존 러스킨이 강연한 내용을 모아 논 글이다. 참깨는 교육의 목적과 독서 등, 백합은 여성의 교육과 역할 등에 관한 내용이다. '독서에 관하여'는 마르셀 프루스트가 참깨와 백합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글로, 단순히 번역을 너머 서서 러스킨 글에 대해 자기 의견을 제시하여 비평한다. 즉 러스킨 독서관에 대한 반박이다. 


'백합' 

요즘과는 너무 먼 내용이라 별루다. 


'참깨'

러스킨은 교육은 경쟁에서 이겨 남들보다 나은 소유와 지위를 누리는 출세 준비 과정이 아니라 진정한 책을 통해 최고의 지혜를 얻으면서 관대해지는 것이다. 점점 관대해지는 것이 인생에서 출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독서는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지혜와 교훈을 주기 때문에 독서가 인생에 절대적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독서에 관하여'

프루스트는 독서는 개인적 독서 경험 속으로 인도하는 역할로 본다. 내용 자체보다는 그 책을 읽었던 시간과 장소의 이미지들이며, 독서는 대화와는 정반대로 혼자 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으로, 

독서와 교육으로 마음과 정신이 강해지는 것은 곧 타인에게 관대해 지는 일이다. 누구와 대화를 하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관대'하여야만 가능하다. 


사족으로,

우리가 상류 사회에 진입하려는 이유는 거기 속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거기 속한다는 사실을 내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이유는 상류 사회가 남들의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최근 모 개그우먼의 몽클레어 밈풍자가 떠오른다.  


특별히. 

프루스트의 어린 시절 독서에 관한 글(133-151쪽)이 참으로 아름답다. 번역도 참 잘하셨다.


추가로,

아들 출장으로 혼자 있는 며느리와 손녀 보러 몇 일 다녔다. 딱 봐도 배고파 우는 데, 시간이 안됐는데, 왜 울지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아기 울음 분석하는데, '배고픔', 내 참, 그제서야 분유 줬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계속 안아 주고, 버릇없게 만들고 있으니, 주 양육자는 고단하기도 할 거 같다... 그래도, 아이를 온전히 안아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 거는 모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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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 쏜살 문고
존 러스킨.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정화.이봉지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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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의 감정이 대체로 관대하고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감정의 토태나 지지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감정을 괴롭히거나 비위를 맞춰서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궁중은 대부분 감기에 걸리듯 열정에 사로잡히며 생각에 감염됩니다. 그래서 발작이 나면 아주 사소한 일에도 날뛰고 고함 지르고, 발작이 지나가면 아무리 큰일이었더라도 한 시간 안에 모두 잊습니다. (54쪽)

마음이 강해지고 정신이 강해지는 것, 곧 관대해지는 것은 진실로 위대한 인생을 사는 길입니다. 점점 관대해지는 것은 인생에서 출세를 하는 겁니다. 인생 자체에서 출세를 하는 것이지요. 인생의 과시적인 면에서 출세하는 게 아니고요. (73쪽)

어린 시절의 독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책 내용 자체보다는 그 책을 읽었던 시간과 장소의 이미지들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증명되었을 것이다. (중략) 독서가 내게 환기한 추억 하나하나의 도정을 나와 함께 걷는 동안, 독자들은 어쩌면 구불구불한 꽃길을 걷는 사람처럼 발걸음을 늦추면서 자신들만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152쪽)

책들은 작가에게는 ‘결론‘이지만 독자에게는 ‘도발‘이다. 작가의 지혜가 끝나는 지점이 바로 독자의 지혜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우리는 작가가 답을 주기를 바라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단지 우리에게 욕망을 불어넣는 것뿐이다. (159쪽)

독서는 우리 내면 깊이 위치한 장소들의 문을 열어 주는 일종의 마법 열쇠와도 같다. 만일 독서가 이런 인도자 역할만 한다면 독서는 우리 삶에 유익하다. 그러나 만일 정신의 개인적 삶에 눈을 뜨게 해 주는 대신 그 삶을 대치하려 한다면 독서는 위험해진다. 즉 진리가 성숙된 사고와 감성의 노력에 바탕해야만 실현 가능한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손에 이미 만들어져 책갈피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완성된 물건으로 간주될 때, 그리하여 단순히 서재 선반들에 꽂힌 책들에 손을 뻗어서 펼친 다음, 몸과 마음이 쉬는 상태에서 수동적으로 맛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될 때 독서는 위험해진다. (164-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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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면,

보름스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삶은 살 만하지 않은 것으로, 이런 삶은 주체의 삶이 아니기에, 삶이 살 만한 것이 되려면 주체가 있어야 하고 그 주체의 삶이 객관적인 관점에서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고 본다.   

버틀러는 삶이 살 만한지 살 만하지 않은지는 주체가 느끼는 주관적 경험에 따라 판단하며, 사람들이 각각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어떻게 의식하고 그 경험에서 어떤 의미를 끌어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즉 주관적 경험을 통해 삶의 가치를 판단하거나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정리하면, 보름스는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명확한 생명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삶은 살 만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지만, 버틀러는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그들의 삶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143쪽)"

보름스는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대하여 주체가 있고 없음 또는 삶과 죽음이라는 양극성으로, 버틀러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겹치는 양가성으로 주장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양극성과 양가성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본다.

나는 버틀러의 입장에 동의한다. '좋지 않다'가 '싫다'의 의미가 아니고, '좋다'의 반대가 '싫다'는 아니니까. 

그렇다면 살 만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살 만한 삶의 조건이 확보되어야 한다. 즉 몸이 놓인 사회적 상황에서 '돌봄'의 중요성이다. 이러한 살 만한 삶의 조건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가 필요하다.

아무튼, 두 사람은 우리가 살 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 '돌봄'을 강조한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묶여있기에 또한 다른 사람이 없다면 나의 삶이 없기에, 서로의 삶에 대한 의무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놓여 있는 삶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한다..  


눈이 많이 왔다. 오랫만에 눈길도 걸어봤다. 설날에는 아들 집에 간다고 갈비도 재고 불고기도 만들고, 대기업 도움으로 떡국, 사골 육수, 부침개도 몇 가지 만들었다. 94세가 된 친정 아빠는 왜 못 오고 안 오냐고, 어쩌면 이 후 못 볼 수도 있는 데, 여기의 선택은 잘 한 걸까? 그래서 삶에서 '양가성'이 조금 더 좋다. 


'살 만한 삶'으로의 실천이 남아 있다. 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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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채석장 시리즈
주디스 버틀러.프레데리크 보름스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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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을 구분하는 일종의 기준을 정의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33쪽)

살 만하지 않은 삶은 우리 몸의 삶이나 생명의 조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종의 중단을 겪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자아의 파괴를 수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덜한less"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worse것인데, 왜냐하면 삶이 계속되는데도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거나 누군가가 그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38쪽)

죽음보다 나쁜 것이 있다면, 삶보다 나은 것도 있고, 살 만한 삶보다 더 좋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45쪽)

주체를 상호주체성으로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의 삶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살 만하지 않고서는 나의 삶도 살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통되게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고 공통된 삶을 위해서 사회구조에 의존하기 때문이지요. (중략) 따라서 우리가 살 만한 삶의 조건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의 조건에 대해 따져 묻고자 한다면, 삶을 비옥하게 하는 제도적 지원과 인프라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60쪽)

우리 문화는 살 만하지 않은 삶에 붙잡힌 삶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합니다. 이런 대립으로 인한 희생자(죽은 자) 아니면 이 대립을 벗어나서 살아 있는 자 둘 중에 하나만 있기를 바랍니다. (64쪽)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는 백신이 거의 보급되지 않았습니다. 값이 비싸고요.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마치 세계의 이런 지역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눈길을 돌리고, 자신을 보존하려는 이 집단적인 "우리‘ 주변에, 문자 그대로의 장벽 혹은 은유적인 장벽을 쌓아서 우리 자신을 보존합니다. 우리는 파괴의 확대에 일조하거나 방조하지 않으면서 이런 파괴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 큰 파괴와 상실을 수반하고, 사회적이과 경제적인 불평등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 중 누구라도 그러한 근본적 불평등이 확정 또는 편햐오디어 재생산되는 이 세계의 모습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보존하려 하고, 그렇게 보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이들이 외면하는 타인이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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