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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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나는 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을까?"
혼잣말처럼 기행이 말했다. 그건 어쩌면 불행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는 언제나 불행에 끌렀다. 벌써 오래전부터, 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가즈랑집 할머니가 겨우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건져온 뒤로는 줄곧 기행을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32쪽)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여름, 그는 폐허 위에서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잔해에서 쓸 만한 벽돌을 골라내는 법, 경사진 철로를 따라 밀차를 밀고 가는 법, 물을 많이 마시지 않고도 탈수를 피하는 법...... 그리고 희망과 꿈없이 살아가는 법까지도. (64쪽)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뿌누 거기에 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85쪽)

"그런 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짓는 죄와 벌이지. 최선을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 고통받은 뒤에야 그게 최악의 선택임을 알게 되는 것, 죄가 벌을 부르는 게 아니라 벌이 죄를 만든다는 것." (88-89쪽)

"(중략)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감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165쪽)

그 눈 때문에 깊은 밤, 기행은 이따금 이깔나무와 소나무와 가문비나무의 숲으로 가곤 했다. 숲속에서 귀를 기울이노라면 작고 가벼운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소리가 들렸고, 때로는 그것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런 밤이면 숙소로 돌아온 뒤에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눈송이들처럼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인생의 자잘한 일들이 시간의 더께를 뒤집어쓴 채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왜 그래야만 했을따? (170-171쪽)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은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잇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따.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리는 게 아ㅣ다. 현실 자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190-191쪽)

그리고 서희가 사람들로 북적대는 혜산역 대합실 한켠에서,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고 시를 읊조리기 시작하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 순간,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이 어떻게 자신의 귀에 와 박혔는지, 그리고 이제 더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그 아름다운 언어가 어떻게 쇠도끼 날처럼 자신의 머리통을 내리쳤는지. 그래서 어떻게 자신과 시를 둘로 쪼개놓았는지. 이제 시는 자신의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불행과 시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214쪽)

기행은 밤만 계속 이어지는 북극의 겨울을 생각하고, 그런 밤을 처음 맞이하는 어떤 사람이 있어 그가 아침과 빛을 간절하게 희망하게 되는 것을 생각했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나 어른들이나 책에서 배운 바와 마찬가지로 그 밤에도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그가 믿는 것과, 그 믿음에도 불구하고 기나긴 밤 안에서 그가 죽게 되는 것을 생각했다. 그때에는 기나긴 밤, 깊은 어둠은 무심하게도 계속 흘러가겠지.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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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말한 '결정자가 된다는 것'의 기준이 마음에 든다. 월리스가 스스로 결정자가 되어 시도한 작품들이다. 그의 글은 상세하다 못해 분명 읽고 있는데도 세밀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일리노이주 축제의 촌스러운 사람들 가운데 출입기자증을 꼭 목에 걸고 있는,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나만을 위해' 준비된 축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축제로 인식하게 되면서, 어린 시절의 환상을 깨며, <데이비드 린치, 정신머리를 유지하다>미국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 <무엇이 종말인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지만 종말인 것만은 분명한>존 업다이크 폄하, <수사학과 수학 멜로드라마>, <결정자가 된다는 것: 2007년 미국 최고 에세이 특별 보고서>최고의 에세이는 감독이든 작가든, 심지어 독자이든 '스스로 결정자가 되려고 시도하는 작품(279쪽)'이어야 가치가 있다고. 결국 어떤 상황을 말하든, 타인에 대해 말을 하고 있어도 작가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 자신의 생각을 온전하게 풀어 놓을 수 있는 글이 진짜로 좋은 글이다. 지금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글로 제대로 풀어 놓은 월리스가 부럽다. 그래도 월리스 글은 지독할 정도로 너무 과하다. 우리에게는 선택할 여지가 있기에 듬성듬성 읽기도 하고, 잠깐 딴 생각을 하면 금방 다른 길로 들어서면서도 읽었다. 픽션은 무에서 나오는 것, 넌픽션은 '무한한 선택의 완전한 자유(265쪽)'에서 나오는 것... 자유롭게 선택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페이퍼는 이렇게 쓰고 쉽지는 않았고, 더 잘 쓰고 싶었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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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떠나온 상태에서 떠나오기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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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일라잇 무도회장에 흑인은 없다. 농가 어린이들의 얼굴에는 무언가 충격과 각성의 표정이 어려 있다. 우리 백인이 이렇게 춤을 출 수 있다니 하는 반응이다. (중략) 이 공간에는 인종차별은 아니지만 공격적인 백인다움의 분위기가 흐른다. 중서부 시골에서 열리는 대개의 공공 행사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분위기다. 흑인이 참가한다고 해서 푸대접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흑인은 이런 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83쪽)

린치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처럼 기이한 ‘진부한 일상의 아이러니‘의 해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분류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중략) 린치적인 표정은 상황이 도저히 정당화할 수 없는 시간 동안 길게 유지되어야 한다. 흉측한 채로 그대로 고정된 채 동시에 한 열일곱 가지 별개의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해야 한다. (134-135쪽)

린치의 영화에 ‘영화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다각적이다‘ 같은 요점이 있다고 결론짓는다면 큰 실수다. 린치의 영화는 그런 영화가 전혀 아니다. 유혹적이지도 않다. 적어도 상업적인 의미에서는 편안하거나 선형적인 영화가 아니며 하이콘셉트, 혹은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도 아니다. (중략) 우리가 어떤 수준에서든 영화가 우리로부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특정한 내부적 방어 체계를 세워 우리 자신을 얼마나 내어줄지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요점, 혹은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의도가 없는 린치의 영화는 이런 잠재의식의 방어 체계를 해체하고 다른 영화와 달리 린치가 우리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린치의 영화들은 종종 감정을 동요하게 만들고 악몽을 꾸게 하는 것이다. (147-148쪽)

무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진정한 매체는 언어가 아닌 영상이며, 그 영상의 경향이 사실주의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표현주의든 초현실주의든, 무엇이 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진실로 느껴지느냐, 전달받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대박을 터트리느냐 하는 것이다. (194쪽)

물론 이런 혐오의 일부는 손쉽게 설명 가능하다. 질투, 우상 파괴, 정치적 올바름의 반발, 그리고 우리 부모들 상당수가 업다이크를 존경한다는 사실, 부모가 존경하는 대상을 비방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 세대의 상당수가 업다이크와 기타 GMN을 싫어하는 진정한 이유는 이 작가들의 급진적 자아도취, 나아가 자아도취적인 자신과 등장인물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과 관련이 있다. (216쪽)

수학이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그 미를 감상하기 위해 너무 많은 피라미드적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기 때문일 수 있다. 수학은 학습된 취향의 궁극에 있을지 모른다. 또한 수학의 진리가 절대적이고 전적으로 추상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여전히 이 분야를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하며 수학을 하는 사람들을 사회성 떨어지는 괴짜라고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중략) 낮은 수준의 수학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공포와 불쾌감이야말로 수학 멜로드라마의 대두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게 되는 이유다. 이 장르가 순수수학에 생명을 불어넣고 이 분야의 비상한 아름다움과 열정을 평범한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독자들에게도 수학에도 이로울 것이다. (233-235쪽)

글을 쓸 때 픽션은 더 겁이 나지만 논픽션은 더 어렵다. 논픽션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고 오늘날 느껴지는 현실은 압도적으로, 회로가 터질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반면 픽션은 무에서 나온다. 그런데, 말하자면, 사실 두 장르 모두 겁이 난다. 둘 다 심연 위에 걸친 줄을 타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심연이 다르다. 픽션의 심연은 침묵, 허무다. 반면 논픽션의 심연은 ‘완전 소음‘, 즉 모든 개별 사물과 경험의 들끓는 잡음, 그리고 무엇을 선택적으로 돌보고 표현하고 연결할지 어떻게, 왜 할지 등에 대한 무한한 선택의 완전한 자유다. (265쪽)

이 수상집의 작가들은 같은 말을 더 잘, 더 간결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서비스적 ‘가치‘라고 할 때 그것이 무슨의미인지는 지금까지 말한 대로이며, 정치 문제나 갈등을 빚는 문제와 동떨어진 주제에 관한 에세이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여러 에세이들이 단지,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 특정한 사실 집합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중략) 독자 여러분의 ‘결정자‘가 생각하는 ‘최고‘를 가장 솔직하고 편파적으로 정의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 글들은 내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이 세상에서 내가 사유하고 살아가고 싶은 방식의 본보기, 거푸집이 아닌 본보기다. (280-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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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 저책을 읽다 말다가, 그러다 여기 저기 다니기도 하고, 지금은 비 온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라디오에서는 생애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11월은 처음이라 한다. 내린천 단풍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어영부영 그냥 지나가고, 제주도 반달살기라도 하자 했는데, 뭐뭐해야지, 뭐뭐하자, 그러고 만 것이 많이 남아있다. 다음에 하자... 그러다 도서관 서가에서 눈에 띈 '그리운 곳이 생겼다'. 그리운 곳도 있지만 그리운 사람도 있다. 저자는 박완서님의 딸이다. 그래서 글쓰는 것은 손해가 있을 법하다. 아니면 저자의 부족한 역량일 수 있다. 내가 누구를 어떻게 무엇으로 가름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소소한 것, 들꽃, 바닥 돌, 거리 등을 많이 언급된다. 멀리 가지 않고 그리운 곳을 가 볼 수 있는 것은 책이 있어 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다녀 온 곳이 나오면 좀 더 세심하게 관심이 간다. 동일한 지역에서도 각자 보는 것이 완전 딴판이다. 자작나무는 나도 좋아한다. 그리고 자작나무는 누구나 좋아한다는 건 편견일까, 동생네 전원주택도 자작나무로 도배했으니... 저지난주는 동생 생일 축하로 온 가족이 모였다. 으싸하면서 50대 자축 여행을 계획했다. 그리고 제부와 여동생 탁구대회를 겨울 가족 여행지에서 하기로 했다. 갈 수 있으려나, 하지만 모두들 들떴다. 기분이 좋다. 실시간 탁구연습하는 영상도 보게 되니. 나머지 가족들은 베팅...      

지난주는 서해에서 낙조를 보았다. 엄청 많은 사람들, 일일 갱신하는 확진자 수로 겁도 났다... 

너무 큰 것은 감히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지금 조성진의 빗방울변주곡 듣는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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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곳이 생겼다 - 호원숙의 여행 이야기
호원숙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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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번 여행은 어머니에 대한 관찰도 포함된다. 어머니에 대한 살뜰한 배려와 돌봄보다는 멀리서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이 좋다. 또 남편에 대한 연구, 앞으로 여생을 어떻게 풍요롭게 잘 지낼 것인가를 그의 행동을 보고 연구한다. 그러나 나의 그런 생각은 곧 부질없다고 느껴진다. 그냥 보는 대로 느끼고 마음을 풀어놓자. 연구할 필요도 없고 관찰은 또 무슨 필요? 기운이나 느끼고 오자. (19-20쪽)

나라야니 강을 건넌다. 어머니가 먼저 배를 탄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치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연습 같다. 안개에 싸여 폭이 그리 넓지 않은 강이건만 아득하다. 아침이기 때문인가 모두들 조용하다. 천천히 노를 젓는 소리와 끼룩끼룩 오리들 소리도 이승에서 들리는 소리 같지 않고 마치 환청과 같다. (44쪽)

시내에서 떨어진 숙소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로 자작나무 숲이 쭉쭉 뻗어 밤인데도 희끗희끗 빛을 내며 번득인다. 피곤감이 사라지며 눈이 번쩍 뜨인다.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이구나. 이 숲을 보러 온 것이다. 야생동물의 눈처럼 번드깅는 하얀 자작나무는 정신이 번쩍 나게 하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힘이 있다. 그냥 하얀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마다 조각을 한 듯 날카로운 문양이 들어 있다. (96쪽)

자신의 실수로 카메라를 잃어버렸는데 누구를 탓하랴. 너무 아낀 것도 죄라면 죄다. 물건에 대한 지나친 애정도 죄다. 꽃에 대한 지나친 친밀감도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냥 바라보았어야 했다. 예쁜 꽃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유유히 걸어갔어야 했다. 머릿속에 담아두었어야 했다. 악착같이 내 물건에 담아두려고 했던 건 소유욕 때문이었다. (103쪽)

내가 이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이 길이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길, 나라와 나라를 건너가는 길을 보고 싶었다. 버스나 기차 속에서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며 동경했던 유럽의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여행의 목적은 충분했다. (123쪽)

너무 멀리 왔나 보다. 집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생각을 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그냥 여행에 집중하자고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다행히 모두들 무사히 내려 기다리는 버스를 탄다. (164쪽)

폼페이 유적 무너진 집터에서 주는 비애감도 없었다. 그러나 그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불가리아의 집들과 강들이 사랑스러웠다. 역사적인 유적이 감동을 자아내려면 시간과 예술성 그리고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173쪽)

솔직히 말하면 이런 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혼자서 멍하니 기다리는 시간. 나는 인천공항에서 두 시간 가까이 어정거리는 시간을 즐긴다. 약간의 고독감도 좋지 않은가. 비행기 안에서 주리를 트는 시간도 그리 나쁘지 않다. 이번 여행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상상해본다. (202쪽)

가이드는 내리막길이 힘들다고 했다. 그리고 길이 없어 등산 가이드를 꼭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타국의 산속, 길 없는 길을 간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돌밭에 길이 있을 수 없다. 눈물이라도 찔금찔금 흘리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어떻게 되겠지 뭐 하는 배짱이 생긴다. 앞서가는 여자들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256쪽)

여행에서는 무엇보다도 잔재미가 중요하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유럽의 역사나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전쟁이나 패권의 역사보다는 골목 바닥에 깔린 반들반들한 돌의 감촉을 더듬는 것이 좋다. 그 돌바닥이 알고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좋다. (273쪽)

샤울레이 십자가 언덕으로 간다. 메밀밭 유채밭의 넓은 벌판에 십자가 무더기 언덕이 있다고 한다. 수백 년 동안 박해로 죽은 사람, 무덤도 없이 어딘가에서 죽어간 사람을 위해 사람들이 십자가를 갖다 놓아 언덕을 이루었다. 그 십자가의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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