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났다
조르주 페렉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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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사람으로서의 경험은 의도와 상관없이 이런저런 일을 거치며 유일한 글쓰기의 경험이 된다. (중략)가공하지 않고 손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꿈은 내가 그것을 기록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마치 일련의 유사한 형상들, 반복되는 주제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감정들과 순간적으로 연결된 강렬한 이미지처럼 하나의 단편 혹은 하나의 단어로 다시 떠올랐다. (90-91쪽)

그러니까 기억의 작업에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하겠네요. 첫 번째는 일상성을 철저하고 면밀하게 검토하는 방식이고, 두 번째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 제 자신의 역사를 찾아보는 것이고, 마지막은 허구화된 기억입니다. 그러고 보니 네 번째도 있네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암호화"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어요. 완벽하게 암호화해서 집어넣는 거죠. (100쪽)

사실 제가 글쓰기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바는 어린 시절이 제게 되돌려주었던 방식입니다. 모든 글쓰기 작업은 매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흔적처럼 글쓰기의 순간 속에 고정될 수 있지만, 사라졌던 무엇과 관련해서 이루어집니다. 저는 어떻게 현재에 개입하는지 모르겠어요. (107-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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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미술관 -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이야기
이유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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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이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지 않고 마치 ‘비장애인‘처럼 행동하면 대중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선을 넘었다‘고 나무란다. (48쪽)

모성애에서 어느 정도가 ‘헌신‘이고, 어디까지가 ‘집착‘인지 미처 몰랐던 것이 애나의 비극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느 누가 명확히 알 수가 있겠는가. (116쪽)

‘여성은 최후의 식민지‘라는 말이 있다. 자국과 제3세계를 가리지 않고 여성의 가사 돌봄 능력을 마치 천연자원처럼 마구 착취하고 값싸게 이용하는 자본주의 가부장 사회를 보면 저절로 이 말에 동의하게 된다. (148쪽)

"노년의 지혜란, 노년들은 긴 시간을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니 삶이라는 여행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다음 세대에게 소중한 안내판 한 두 개쯤은 전승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는 삶이라는 여행의 의미를 다면적으로 묻고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싹튼다. 삶의 의미가 활용 가능한 자원이나 기술 등을 이용해 얻는 상품이나 부, 권력으로 환원되는 사회문화 맥락에서라면, 지금과 같은 기술 환경에서 노년들에게 청해 들을 지혜는 별로 남아있지 않다." (168-169쪽)

"중요한 질문은 동물들이 이성을 가지고 있는가, 말을 하는가가 아니다. 그들이 고통을 느낄 줄 아는가이다." 맞는 말이다. (220쪽)

예술가와 후원자 사이에 흐르는 이와 같은 ‘끈끈한 연대‘는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그 옛날 왕족, 귀족, 성직자 같은 권력자들의 자리에 기업가가 들어 앉은 것 정도다. 오늘날의 기업가들은 메세나Mecenat라는 이름으로 문화예술 활동에 천문학적인 규모의 기부와 후원을 한다.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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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뉴비긴의 성경 한 걸음
레슬리 뉴비긴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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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천 년 동안, 유럽인들이 알던 책은 사실상 성경이 유일했다. (중략) 성경의 이야기야말로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던 유일한 이야기였다. (중략)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가정에 성경책이 있다. (중략) 우리 대부분은 성경을 이따금씩 유익한 생각이나 위로, 지침이나 방향을 얻을 수 있는 문집 정도로 대한다. 그리하여 성경이 입맛대로 골라 읽는 지혜 선집이라는 인상을 부추긴다. 이는 읽을 만한 부분을 성경 자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미리 정해 두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의 권위가 아닌 것이다. (17쪽)

성경은 종교 서적이 아닙니다. 종교 서적이라면 이미 인도에 얼마든지 많이 있어 더는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주의 역사, 곧 창조세계 전체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독특하게 해석한 책입니다. (18쪽)

모세는 자기 민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 홍해를 건너 시내 광야로 들어간다. (중략) 결국 그들을 하나님이 명하신 산으로 데려간다. 그들을 만나기로 미리 약속하셨던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다. (중략) 이것이 계약이 아니라 언약이라는 사실이다. 계약은 쌍방이 흥정하여 합의하는 것이지만, 언약은 주 여호와의 일방적 행동이다. 그분은 어중이떠중이 노예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전적으로 헌신하셨다. (34-35쪽)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한다면 왕은 필요 없어진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옳은 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왕과 법정과 경찰과 감옥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치 질서를 주시면서도 또한 그것 자체가 깊은 타락의 원천임을 경고하신다. (45쪽)

40일 동안 예수는 광야에서 씨름하시며, 사람들의 추종을 얻어 내는 방법으로 세상이 제시하는 제시하는 세 가지 길을 마주하신다. 첫째는 경제적인 것이다. (중략) 다음은 종교적인 것이다. (중략) 끝으로 정치적인 길이다. (중략) 그 길을 거부하심으로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이다. (중략) 예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 나라는 예수 자신이다. (71-73쪽)

성경은 창조세계와 인류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그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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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이순(웅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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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위안들.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18쪽)

내 주변의 사람들은 아마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다(어쩐지 그런 것 같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하지만 한 사람이 직접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이 우습고도 말도 안되는 시도). (20쪽)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니!" 이 말은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어떤 존재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21쪽)

나의 슬픔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중략)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랑의 관계가 찢어지고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 가장 추상적인 장소의 가장 뜨거운 지점...... (47쪽)

이 순수한 슬픔. 외롭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패인 고랑. (50쪽)

이 당혹스러운 부재의 추상성. 그런데도 그 추상성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비로소 추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추상은 부재이면서 고통이다. 그러니까 부재의 고통. 그런데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닐까. (52쪽)

슬픔은 잔인한 영역이다. 그 안에서 나는 불안마저 느끼지 못한다. (64쪽)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78쪽)

일에 열중하고 일에 쫓기는 흥분상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면. 그때 가장 깊은 비애 속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 내면 안에 머물기. 조용히 있기. 혼자 있기. 오히려 그때 슬픔은 덜 고통스러워진다. (110쪽)

이런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111쪽)

그런데 이런 애도(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애도)의 슬픔은 래디컬하게 그러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죽음을 길들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의식이 예전에는 그저 남에게서 빌려온(졸렬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철학에서 얻어낸) 것이었다면, 지금 그것은 나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고통스러운 건 죽음의 의식 때문이 아니다. 그건 나의 애도 때문이다. (129쪽)

마망의 죽음 때문에 빠져버린 고독은 이제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영역으로까지 팔을 뻗는다. (중략) 온몸을 탕진케 하는(공황 상태와 같은) 외로움의, 슬픔의 환유. (133쪽)

사랑이 그런 것처럼 애도의 슬픔에게도 세상은 비현실적이고 귀찮은 것일 뿐이다. (136쪽)

애도의 슬픔으로, 마음의 번민으로 내내 시달리면서도 (그것도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결코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지독하게),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거의 막돼먹은 아이처럼) 여전히 잘 돌아가는 습관들이 있다. 욕망의 낄낄거림, 작은 탐닉들, 난-널-사랑해라는 욕망 -- 아주 빨리 사라져버리는, 곧 다시 다른 사람에게로 방향을 바꾸는 -- 그런 욕망으로 가득한 담론의 습관들. (151쪽)

마망의 사진들을 오래 바라보는 일. 그 사진들에서 출발하는 글쓰기 작업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두려움을 (중략) 늘 똑같은 의견이 있다: 애도의 슬픔은 점점 익어가는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내 경우 애도의 슬픔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진행의 과정도 거기에는 없다: 때문에 너무 이른 애도의 슬픔 같은 것도 없다. (159쪽)

마망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지금까지는 추상적이기만 했던 사실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216쪽)

삶의 결핍 상태가 서서히 구체적인 얼굴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새로운 일을 꾸며서 만들어갈 수가 없다(글쓰기는 예외지만). 우정도 사랑도 그 밖에 다른 일들도. (234쪽)

자살
죽으면 괴로워하는 일도 없게 된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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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문트 후설,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 살림지식총서 476
박인철 지음 / 살림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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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설의 철학은 이른바 ‘현상학‘으로 특징지어진다. (중략) 말하자면 의식과 세계와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적 틀로서 현상학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25-26쪽)

후설의 철학에서 세계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태도란, 어느 특정 존재 영역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총체적이고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 태도를 후설은 ‘철학적‘ 혹은 ‘현상학적‘ 태도로 부른다. (34쪽)

자연적 태도에 대한 판단중지 내지 초월론적 환원과 더불어 후설 현상학의 방법론을 특징짓는 또 다른 대표적인 방법이 ‘본질직관‘이다. (46쪽)

본질직관은 내가 이미 이전에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본질에 대한 선지식을 구체화하고 확증하는 과정이 된다. (중략) 선지식은 이른바 우리에게 하나의 습성 형태로 저장되어 온 것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 습성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적,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 (54-55쪽)

세계는 지향적 체험 속에서 구성된(의미 부여된) 것으로 주어지고 파악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주관성에 의존한다. (중락) 의식과 세계와의 관계는 이제 지향적 관계로 밝혀졌다. 세계는 초월론적 주관성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지향적 대상이다. 지형적 대상성이 주관성에 의해 형성된다. (71쪽)

후설의 존재론은 개체 중심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의 전체론적 세계관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전체론적, 목적론적 세계관에 따를 때, 각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존재 가치가 있으며 타자와의 관계가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특히 나와 타자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가 주된 관심사가 된다.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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