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전 한 잔 밀리언셀러 클럽 4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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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녀가 함께 부른 노래. 나는 그런 노래가 좋다. 더욱이 사랑 노래라면 더 좋다. 애절한 사랑의 어울림. 들을수록 좋다. 그래서 이야기도 남녀가 함께 나오면 좋다. 단짝으로, 또는 연인으로 즐거움과 감동을 주니, 좋다. 이런 이야기도 들을수록 좋다. 그런 좋은 이야기. 있다. 켄지와 제나로의 이야기다. 그 첫 이야기를 들어 본다.


 사립 탐정 패트릭 켄지. 한 사건 의뢰를 받는다. 유력 정치인 민주당 상원 의원 멀킨에게서. 그의 청소부가 중요한 사진과 서류를 갖고 사라진 것. 그 청소부는 흑인 여성 제나. 어렵게 그 여성을 만났지만, 의문의 그녀. 범죄 조직과 이어진 이 사건. 켄지와 그의 단짝 제나로는 위험 속으로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들이 인종문제를 들먹이면 우리는 그 말을 믿는다. '민주주의'를 거론하면 스스로를 기특해하며 고개도 끄덕여준다. 우리는 소시아(조폭)를 비난하고 때때로 폴슨(의원)을 조롱하지만 스털링 멀컨(의원수장) 같은 사람들을 뽑아준다. 그러다가 이따금 반쯤 정신이 들 때면 왜 이 세상의 멀컨들은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한다.
그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유린당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우리를 강간한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끌어안고 키스를 해주는 한, 우리 귀에 대고 "아버지는 너를 사랑한단다. 아버지가 너를 돌봐주마."라고 속삭이는 한, 우리는 편안히 두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며, 허울 좋은 '문명'과 '보호'의 명분 아래 우리의 몸과 영혼을 물물교환한다. 20세기의 악몽이 빚어낸 거짓 우상들과 말이다.' -340쪽.

 

멀리 있어서

그리운 사람

잊혀졌기에

새로운 사람

 

하늘엔 작은 별이

빛나고

가슴속엔 조그만 사랑이

반짝이누나

-나태주, '사람이 그리운 밤' 중에서.

 

 '그녀는 세상의 모든 행복이다. 그녀는 최초의 따스한 봄바람이다. 어린 시절의 토요일 오후이며, 시원한 파도가 모래 위를 뛰어다니는 이른 여름의 해변 산책이다. 그녀의 포옹은 힘이 있고, 그녀의 몸은 풍만하고 부드러우며, 헐벗은 내 가슴을 뛰어다니는 그녀의 맥박은 빠르고 거칠었다. 그녀의 샴푸 냄새 그리고 내 턱에 닿은 채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목덜미.' -121~122쪽. 

 

 인종 차별, 아동 학대, 청소년 범죄, 가정 폭력, 정치인과 범죄 조직의 연루, 범죄 조직의 상호 다툼 등. 이 이야기는 이런 미국의 어둠을 그리고 있다. 예리하다. 그리고 이 그림의 여백을 패트릭 켄지가 안젤라 제나로를 향한 사랑으로 채우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유부녀. 비록 폭력적인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지만. 안타까움에서 시작된 사랑이었는지 아닌지. 어쨌든 켄지는 순정적이다. 마초인 그가. 가까이 있지만 멀리 있어서 그리운 사람. 알고 있지만 잊혀진 사람. 그의 가슴속엔 조그만 사랑이 반짝이고 있다.  


 'X-File'의 폭스 멀더와 다나 스컬리, '링컨 라임 이야기'의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도 남녀 단짝. 이 이야기도 그런 단짝. 좋았다. 남녀의 화음이 좋았다. 그리고 여러 인물의 개성. 짜임새 있는 이야기. 사회 문제를 향한 날카로운 눈길. 마음에 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켄지의 사랑! 응원하게 된다. 이들의 이야기. 계속 듣고 싶다. 들을수록 좋을 것 같다.

 

 

 

 

 

 덧붙이는 말.


 하나. 데니스 루헤인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둘. 셰이머스 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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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의 영역
최민우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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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하늘의 별을 보았다. 점이었다. 사람들은 그 점들을 이어서 별자리를 지었다. 그렇게 그 점들은 무한의 그 무엇이 되었다. 수많은 객체를 형상화할 수 있는 점. 그것이 선을 이루고 영역을 이룬다. 확실한 실선이 아닌 점선. 그 점과 점 사이에 상상이 채워진다. 상상이 녹아든 영역. 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다. 별도 점이다. 그렇기에 많은 예언을 낳았다. 그 예언은 점성술이라 불리고. 점, 즉 별의 빛, 위치, 움직임. 그것으로 앞날을 미리 보기한다. 모호하지만, 삶은 모름지기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살짝 기대를 갖기도 하고.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날 거다."'

 '"소중한 걸 잃게 된다. 힘들 거다. 용기를 잃지 마라. 도망치면 안 돼."' -16쪽.  


 한 노인. 예언을 하신다. 신탁(神託)처럼 하시는 할아버지의 예언. 그런데, 불길한 예언이다. 기막힌 건, 그 예언이 적중한다는 거다. 두렵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예언을 손자인 내가 듣는다. 역시 불길. 나는 대한민국의 한 남자다. 열한 번의 낙방. 열두 번째에 합격 후 작은 회사에 다닌다. 그의 연인 서진. 취업하기 위해 어려운 싸움을 한다. 이 또한 대한민국 청춘의 얼굴이다. 그런데, 그녀. 어떤 면접을 보고 난 후, 그림자를 잃는다. 그리고 그. 사고로 한 눈의 밝기를 잃고. 겉은 깨끗한 왼쪽의 그 눈의 밝기를.


 '예언이라는 확고부동한 점이 있다고 삶이 분명해지지는 않는다. 그 점의 앞뒤에, 위아래에 다른 점을 찍는 건 우리 자신이다.' -164쪽.


 또, 밤하늘을 본다. 역시 별은 점이다. 그 점을 이은 별자리. 많은 신화(神話)를 담고 있는 그 별자리. 영웅담, 연애담. 그 수많은 변주. 서진과 나의 이 이야기는 이 시대, 이 무대의 영웅담, 연애담이다. 현재 대한민국, 서울. 그 청춘남녀의 신화. 사실, 예언은 신화의 단골 손님이다. 소년, 소녀가 객제이며, 또 주체인 예언. 그 예언을 이루는 신화. 확실히 예언은 확고부동한 점이다. 예언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점의 바깥은 미지다. 그렇기에 모호한 예언. 그 해석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언으로 삶이 분명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점의 앞뒤에, 위아래에 다른 점을 찍을 수 있기에. 불길했던 할아버지의 예언. 그런데, 그건 더 불길한 걸 막기 위한 불길이었을 수도 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아니겠는가.


 슬프지만, 빛나는 신화의 두 남녀 같은 이 이야기. 두 남녀가 사랑하니,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그 부드러움에 더해 가볍고, 따뜻해진다. 점선을 어떻게 이어야 하고, 아직 남은 점선의 영역을 어떻게 갖추어야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소중히 그린다. 이 이야기를 꼬옥 안아 본다. 역시 부드러운 가운데 가볍고, 따뜻하다.





 덧붙이는 말.


 이 소설은 '문학3'의 문학웹에 2017년 1월부터 3월까지 연재했던 원고를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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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
카타리나 잉겔만 순드베리 지음, 정장진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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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아버지께서 책 몇 권을 손에 들고 오셨다. 그 가운데 한 권이 '오 헨리 단편선'이었다. 꼬마였던 나는 그 책이 좋았다. 웃음 안에 따뜻함이 있었다. '마지막 잎새', '크리스마스 선물'은 많은 분들도 아시리라. 지금, 여기에서,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를 생각해본다. '경찰관과 찬송가'라는 이야기. 거리에서 생활하는 소피. 그는 감옥에 가려고 한다. 추운 겨울에 섬의 피난처라 부르는 그곳에서 지내려고 한다. 그 소피와 동병상련인 할머니가 계시다. 이분은 노인 요양소에 계신 분. 친구분들과 함께 감옥에 가고자 하신다.


 오 헨리의 '경찰관과 찬송가'에서 소피는 감옥에 가는 법으로 여러 가지를 실천한다. 음식점에서 돈 없이 식사. 거리에서 치한 수작. 길에서 풍기 문란 행위. 어느 신사의 우산 절도까지 모두 실패. 음식점의 웨이터는 내쫓기만 하고. 희롱을 당한 여인은 유녀(遊女)였고. 풍기 문한 행위는 승리 축하 소동이라 여기고. 절도한 우산은 원래 주운 우산이었고. 그런데, 우연히 들어간 교회. 그곳에서 찬송가를 듣는다. 찬송가의 울림으로 소피는 마음을 바꾸게 된다. 열심히 살겠다고. 일자리를 얻겠다고. 바로 그 순간, 경찰관은 그를 잡아가고. 결국 감옥에 가게 된다.


 79세의 메르타 안데르손 할머니는 스웨덴의 다이아몬드라는 노인 요양소에 계신다. 요양소의 원칙은 8시 취침, 간식 금지, 산책은 어쩌다 한 번만. 이것이 불만인 할머니. TV에서 감옥을 보게 된다. 하루에 한 번씩 산책을 시키는 감옥. 그 매력에 감옥에 가고자 하신다. 혼자가 아니라 요양소 합창단 친구분들과 함께. 그렇게 5인조 노인 강도단이 된 노인분들. 계획은 국립 박물관의 미술 작품 가져오기. 그림값 천만 크로나를 받으면 돈을 잘 숨겨 두었다가 그림을 돌려주기. 출소 후, 그 돈으로 행복한 노후 보내기. 그분들, 용감하게 모네와 르누아르의 작품을 가져온 후, 모작으로 위장. 그림을 호텔 방에 두신다. 그런데, 폭풍우에 돈의 절반을 소실. 게다가 호텔 방에 둔 그림은 행방이 묘연. 노인분들은 아연히 계시다가 경찰서에 자수. 그러나 아무도 믿는 이는 없고.


 '낙엽 지는 황혼기를 맞아 인생을 조금 즐겨 보고 싶은 노인들이 강도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그 사회는 분명 뭔가 잘못된 사회임에 틀림없다.' -208~209쪽.


 나무들 다 가을빛 지니는 이때. 삶에도 가을빛을 지니는 때가 온다. 그리고 오늘처럼 비바람이 있는 날. 낙엽이 지고. 그 낙엽 지는 황혼기를 맞은 노인분들. 메르타 할머니와 그 친구분들. 그 개성으로 해학이 묻어나는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 오 헨리가 지은 '경찰관과 찬송가'의 소피도 웃음을 짓게 하고. 닮은 이 두 이야기의 큰 이야기는 감옥에 가는 법 실천. 그 웃음 안에 따뜻함을 남긴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며, 도움을 주게 되는 따뜻함. 어릴 적, 할머니께서 꼭 쥐어 주시던 손으로 이어지는 그 따뜻함. 소중히 간직하게 된다. 메르타 할머니. 그리고 친구분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웨덴의 노인분들은 그분들이 됐다. 아, 미국의 소피 아저씨도 잊지 않겠다.

 

 

김정희, <대팽고회> 1856년(71세), 129.5x31.9cm, 간송미술관 소장.

 

 푸짐하게 차린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각, 나물이고 大烹豆腐瓜薑菜

성대한 연회는 부부, 아들딸, 손자라네 高會夫妻兒女孫

 

 추사 김정희 할아버지의 대련이 있다. '대팽고회'라는 대련. 중국 명나라 문인 오종잠(吳宗潛)의 「중추가연(中秋家宴)」이란 시에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성대한 연회는 부부, 아들딸, 손자라고 말씀하시는 추사 할아버지. 여백에는 이것이 시골 서생에겐 제일가는 즐거움이라 하셨고. 이런 것이 소확행. 즉,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런지. 그것이 최대의 행복이고. 추사 할아버지도 깊게 느끼셨을 듯. 이런 행복을 많은 노인분들이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메르타 할머니와 그 친구분들이 감옥 가기 계획을 세운 건 소박하지만 큰 행복에 닿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웃음 안에 따뜻함으로 이런 행복에 다가가기 위해 달리는 메르타 할머니와 친구분들. 나도 힘차게 응원을 한다. 이분들의 외침을 들으며. 언제까지나.  

 

'우리를 위하여! 최대한 행복해지려고 하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576쪽.

 

 이 글의 마지막에 갑자기 사진첩에서 외할머니 사진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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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락한 이유
데니스 루헤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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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이 있었다. 대체로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는 그 사람. 그 사람을 오랫동안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서서히 다가갔다. 더 좋아지고 싶어서. 그런데, 무반응. 그래서, 결심하고 확인했다. 마음이 악보처럼 접히지 않는다고. 마음을 서로 맺고 싶다고. 그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큰 용기였다. 다음 날, 나에게 온 답은 거절이었다. 아팠다. 너무 아팠다. 마음이 아팠고, 이어서 몸도 아팠다. 지금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았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다시 시작되는 아픔. 비록 외사랑이었지만, 깊은 사랑이었기에 그런 듯. 이제 잊도록 해야 하겠지. 어떻게 놓아주어야 할지 몰라 볼 때마다 멀리하게 된다. 얼마 후면 보기 어려울 수도 있는 그 사람. 슬픈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고 있다. 모질지 못한 나는 좋은 말만 하겠지. 눈물이 앞을 가리어 보이지 않아도. 사랑했지만, 보내주어야만 하는 나. 또 다른 슬픈 사랑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공명(共鳴)했다.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5월의 어느 화요일, 레이철은 남편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7쪽.


 '이틀 전, 만약 누군가 그녀더러 남편을 사랑하냐고 물었다면 그녀는 "그럼."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사실, 누군가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 같은 질문을 했다면 그녀는 "그럼."하고 대답했을 것이다.' -9쪽.


 사랑하지만, 남편에게 죽음을 선물한 여인, 레이철. 어쩌다가 그랬는지. 그녀는 아버지와 헤어져 어머니와 살았다. 유명 작가이지만, 독단적인 어머니, 엘리자베스 차일즈와 함께. 어머니와 어긋나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산 레이철. 그녀가 대학생 때, 어머니는 교통 사고로 생명을 잃는다. 이제, 유산을 받은 레이철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아는 건, '제임스'라는 이름. 대학에서 가르쳤다는 사실. 또, 그녀가 본 마지막 뒷모습. 사설 조사원 브라이언 델라크루아에게 도움을 받고자 하지만, 받은 건 충고와 거절. 아버지는 과연 어디에. 그리고 몇 년 후, 레이철은 유능한 기자가 된다. 그녀의 이름을 듣고 찾아온 사람으로부터 아버지의 실마리를 찾고. 결국 제러미 제임스라는 사람을 찾는다. 그런데, 그는 친부가 아니었다. 기자인 레이철. 특파원이 되어 7.0의 지진이 난 아이티로 향하고. 그곳의 참상. 그리고 강간, 죽음. 아픔의 소녀들을 보고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 생방송에서. 유튜브로 널리 퍼진 영상. 그녀는 이혼과 해고를 당하고야 만다. 세바스찬과 이혼. 기자직에서 해고. 그리고 공황 발작과 대인공포증이 거칠게 찾아오고. 그런데, 우연히 브라이언을 다시 만나고. 그의 사랑으로 공황 발작과 대인공포증이 잠잠하게 된다. 그렇게 브라이언과 2년 동안 사랑의 힘을 느낄 때였다. 레이철이 그가 없어야 할 곳에서 브라이언을 본다. 이 남자, 뭔가 수상하다. 그의 비밀은 뭘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ㅡ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ㅡ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1925), 진달래꽃, 매문사, 190-191.


 이별의 정한(情恨).1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라는 체념도 아니고,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는 님도 아니지만, 레이철은 남편 브라이언과 스스로 이별한다.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라는 사랑. 님의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이별의 슬픔을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비애. 또, 그 아픔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인고(忍苦). 사랑, 비애. 인고는 시 '진달래꽃'과 이어진다. 그 울림이 어울린다.


 '이게 어떻게 끝날진 모르겠어. 내 진짜 위치를 모르겠어. 그녀는 어둠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받은 유일한 답은 더 깊은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위층에는 빛이 있을지도 모르고 다시 밖으로 나가면 분명 빛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운명의 장난으로 빛이 없다면, 세상에 남는 것이 밤뿐이고 빠져나갈 길이 없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밤과 친구가 될 것이다.' -495쪽.


 레이철과 브라이언. 그들이 추락한 이유는 사랑의 어둠 때문이었을 것이다. 레이철로 인한 브라이언의 죽음. 서로 사랑했지만 생사의 강으로 이별했다. 그래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2 날개가 있기 때문에 날고 날기 때문에 추락할 수 있는 것이다. 레이첼과 브라이언은 사랑했기에 날았고, 또 사랑했기에 추락했다. 사랑이 날개였다. 이제 레이철은 사랑하기에 다시 날 것이다. 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녀이기에.


 몇 년 전, 우연히, '셔터 아일랜드(Shutter Island, 2010)'라는 영화를 보았다. 굉장했다. 그리고, 그 원작이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데니스 루헤인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이 '우리가 추락한 이유'도 그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다른 듯하다가 역시 그였다. 힘차면서도 섬세한 심리 묘사의 손. 달의 뒷면까지 비추는 듯한 그의 냉철한 눈. 잘 어우러져 있다. 차분히 이어지던 이야기가 급류를 만난 듯 몰아치고. 그와 함께 발자국을 남기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다. 사기꾼, 살인, 탐욕, 복수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AP)'라는 평. 정말 적절하다. 내 사랑의 아픔에도 깊은 위로를 받았다. 아, 갑자기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 듣고 싶어진다. 이 작품을 되뇌며, 내 사랑을 보내며, 듣고 싶어진다.       

     


 

  1. 시 '진달래꽃'의 해설은 두산백과 참조.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4767&cid=40942&categoryId=32868 )
  2. 이문열의 소설 이름이다. 또 이 소설이 원작인 동명의 영화도 있다. 이 이름은 잉게보르크 바하만(Ingeborg Bachmann)의 시집 제목이자 시구에서 차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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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요 네스뵈 지음, 이은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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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방불패(笑傲江湖 之 東方不敗: Swordsman II, 1992)' 중에서.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옛 무림에 동방불패라는 분이 계셨다. 절대 고수셨지. 김용 선생께서 만드신 인물. 일월신교의 교주로 규화보전을 익힌 마성의 인물. 영화에도 나오신 동방불패. 그때의 많은 남정네들은 임청하 누님의 그 동방불패를 잊지 못했지. 충격이었고, 동경이었던 동방불패. 그렇게 많은 날을 설레며 보냈고. 지금, 맥베스를 그리며, 옛 동방불패, 그분이 다시 다가온다. 빗나간 야망을 품었던, 맥베스와 동방불패. 그 둘은 닮았다.  


 맥베스. 빗나간 야망의 상징이다. 그리고 파멸의 상징이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도 그렇고, 요 네스뵈의 맥베스도 그렇다. 사실, 옛 기억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얼개만 남아 있었다. 이제, 요 네스뵈의 '맥베스'를 통해 다시 조각이 이어졌다. 그렇게 '맥베스'의 흐릿한 얼굴이 분명해졌다.  


 ''맥베스'의 무대는 실업과 마약 조직, 부패한 정부, 산업 오염으로 신음하는 1970년대의 어느 도시다.' -'작가의 말' 중에서. (5쪽).


 그 도시에 새로운 경찰청장이 앉는다. 그 이름은 덩컨. 강직한 그는 부패와의 전쟁을 시작하고, 특공대장이었던 맥베스를 조직범죄수사반장에 앉힌다. 이때, 이 도시의 큰 암흑인 헤카테는 덩컨을 없애려고 하지. '약쟁이나 도덕주의자보다 더 예측하기 쉬운 부류가 딱 하나 있다면 그건 사랑에 홀딱 빠진 약쟁이 겸 도덕주의자야(131쪽)'라고 말하며, 맥베스의 칼을 덩컨에게 향하게 하려고 한다. 세 자매를 보내, 맥베스가 경찰청장이 되리라는 예언을 듣게 해서. 그 예언으로 맥베스의 애인인 레이디를 움직이게 해서. 결국, 덩컨은 맥베스의 칼에 쓰러지고, 맥베스는 경찰청장이 된다. 그러나, 공포, 불안과 악몽으로 무너지며 파멸하는 맥베스. 물론 레이디도 함께.  


 동방불패. 이 또한 빗나간 야망의 상징이다. 그리고 파멸의 상징이고. 일월신교의 교주인 임아행을 가두고 새로운 교주가 되지. 그가 익힌 규화보전의 위력으로. 그런데, 규화보전을 익히기 위해서는 남성을 버려야 했다. 거기에 더해 동방불패는 여성이 되었고. 성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영호충에 대한 사랑. 동방불패 또한 무너지며 파멸하게 되고.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만 나를 해칠 수 있어! 버사만 나를 청장 자리에서 밀어낼 수 있어. 나는 불사신이다! 맥베스는 불사신이다! 죽은 인간들아, 나가거라!"' -430쪽.


 '동쪽에서 해가 뜨는 한 난 절대 지지 않는다.' 영화 '동방불패'에서 동방불패의 대사 중에서.


 맥베스와 동방불패. 많이 닮은 두 사람. 가장 강력했던 그 둘. 그러나 그런 그 둘에게 가시가 있었다. 맥베스에게는 예언과 애인인 레이디. 동방불패에게는 규화보전. 그 가시는 빗나간 야망을 이루게 했지만, 계속 자라나 파멸을 불렀다. 불안의 씨앗이었다. 그렇게 비극이 되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글은 질서와 안정에 가치를 둔다.1 그의 '맥베스'도 그렇고, 요 네스뵈의 '멕베스'도 그렇다. 욕망과 배신으로 뭉친 자는 자멸한다는 그것.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세 마녀, 요 네스뵈의 세 자매는 혼란, 무의식의 얼굴이다.2 모호한 언어로 예언을 전하며, 맥베스의 빗나간 야망에 기폭제가 되는 그들. 질서와 안정, 혼란과 무의식. 그 다름의 어울림. 그것이 우리에게 깨끗함을 더해 준다. 영화 '동방불패'도 그렇다. 규화보전은 동방불페에게 혼란, 무의식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그리며, 다다른 건 질서와 안정이고.


 '검정 혹은 빨강. 탐욕 혹은 공포. 밤빛 혹은 핏빛.' -'작가의 말' 중에서. (6쪽).


 요 네스뵈의 '맥베스'는 정말 '검정 혹은 빨강. 탐욕 혹은 공포. 밤빛 혹은 핏빛'이었다. 그 바탕은 새하얀 눈. 그렇기에 더욱 도드라진다. 새하얀 눈 위에 내린 깊은 어둠. 새하얀 눈 위에 핀 새빨간 꽃. 그것이 요 네스뵈의 '맥베스'였다. 가히,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아름답게 변주하여 연주해냈다. 그 선율이 영화 '동방불패'와 어울려 나에게 다가왔고. 그 무늬가 깊게 새겨졌다. 나의 곳곳에.





 덧붙이는 말.


 이 요 네스뵈의 '맥베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그의 대표작을 재해석하는 호가스 셰익스피어 프로젝트의 일곱 번째 책이다.  

        


 

  1. 셰익스피어 정치적 읽기, 테리 이글턴 지음, 김창호 옮김, 민음사, 2018, 11쪽.
  2. 같은 논조. 셰익스피어 정치적 읽기, 테리 이글턴 지음, 김창호 옮김, 민음사, 2018, 12~13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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