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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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내가 살았던 동네가 사라졌다. 재개발로 높은 아파트를 짓고 있으니, 그렇다. 어릴 때,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친구가 많았던 그 동네. 학교 안뿐만 아니라, 등굣길과 하굣길에서 함께 걸으며, 웃고, 떠들던 그 동네. 방과 후에도 장난꾸러기 소년과 새침데기 소녀가 어울려 놀았던 그 동네. 이젠 없다. 그렇지만,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었던 그들에 대한 기억이 있다. 기억 안에서 그 동네를 언제나 재구성하며. 그리고 그 이웃들이 다시 소환됐다. 한 작가의 짧은 이야기를 읽으며. 1970년대 우리 이웃들을 그린 박완서 작가의 48편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왜 낭만을 찾는답시고 간직하고 있는 낭만이나마 하나하나 조각내려 드는 것일까? 이 낭만이 귀한 시대에.' -'마른 꽃잎의 추억 4' 중에서. (71쪽)


 '"부인, 그래서 나쁠 것도 없잖습니까. 전 지금 오래간만에 행복합니다. 가슴이 소년처럼 울렁입니다. 늙어도 행복할 권리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노을과 양떼' 중에서. (321쪽)


 '이사 오는 날이었다. 옆집에 산다는 여자가 인사를 왔다. 나는 반갑고 한편 놀라웠다. 아파트에도 이웃이란 관념이 남아 있다는 게 반가웠고, 그 여자의 미모가 놀라웠다. 중학교 다니는 자녀가 있는 그 여자의 미모는 상당하달 수 없었지만 유달리 착하고 밝은 표정 때문에 눈부시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여자가 내 이웃이라는 게 예기치 않은 행운처럼 즐거웠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 중에서. (387쪽)


 작가는 말한다. 48편의 짧은 소설에서 말한다. 연인, 부부, 이웃 안에서. 결혼, 집, 아픔 안에서. 낭만과 자유를, 행운과 행복을. 각별히, 여인과 어르신의 낭만과 자유를, 행운과 행복을. 1970년대의 우리나라에서.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장통도 함께 있었다. 배금주의에 물든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 작아진 그 시대. 낭만과 자유가, 행운과 행복이 더욱 소중해졌다. 풍요 속의 빈곤이리라. 황폐해진 우리들. 더욱이 가려린 이들에게는 그 목마름이 깊었으리라. 그래도 낭만과 자유를 찾고, 행운과 행복을 지키려고 한다. 희망으로. 아픈 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 결혼은 나에게 화두이니, 혼인을 바라는 부드러운 마음을 이야기 안에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건강도 나에게 화두이니, 쾌유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도 이야기 안에서 나에게 고이 스며들었고.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차이와 반복' 중에서.


 이때와 그때. 물론, 차이가 있다. 지금과 1970년대. 여러 가지 달라졌다. 그때와 이때의 다름. 이때와 그때의 다름. 그렇지만,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그때의 다양함이 한 목소리를 내듯이, 이때의 다양함이 한 목소리를 내듯이. 그때도 이때도 한 목소리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듯이.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하나인 것이다. 여러 다름이 하나가 됨을 반복하고 있다.

 박완서 작가의 이 소설도 그렇다. 매우 짧은 소설 안에서 지금과 다른 1970년대를 말한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그 서로 다름이 서로 하나가 된다. 사람 사는 것이 이때와 그때가 달라 보이지만, 역시 같다, 단지 시간만 다를 뿐. 작가는 평범한 일상에서 풍자와 재치로 이 역설을 세심히 그리고 있다. 낭만과 자유를, 행운과 행복을. 그리고 이 가치들을 아끼며 감싸는 희망을. 모든 물방울들이 담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품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그래서 빛난다. 따뜻하게 빛난다.

 그리고 소환된 어릴 적 내 이웃들의 기억도 이때와 그때로 마주 보았다. 결론은 이렇다. 역시 같다, 단지 시간만 다를 뿐.      

 덧붙이는 말.

 하나. 이 책은 1981년 '이민 가는 맷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왔다가 몇 번 개정판이 나온 후 지금의 개정판에 이르렀다.

 둘. 이 책은 기업의 사보에 실었던 콩트 모음집이다.

 셋.  작가는 콩트 쓰는 맛을 방 안에 들어앉아 창호지에 바늘구멍으로 내고 바깥세상을 엿보는 재미로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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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2-16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작가 님의 짧은 소설이라고 하니 관심이 가네요. 장바구니에 담겠습니다.

사과나비🍎 2019-02-18 22:57   좋아요 1 | URL
아, 답글이 늦어 죄송해요~^^;
예~ 따뜻한 책이더라고요~^^*
아, 감사해요~^^*
그나저나 내일 아침에 눈이 많이 온다고 하네요. 조심하시기 바랄게요~
 
마리카의 장갑
오가와 이토 지음, 히라사와 마리코 그림,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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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겨울이 다가오면, 으레 뜨개질을 하셨다. 그렇게 가족들의 옷과 목도리 등을 지으시고는 했다. 어느날, 어머니는 나에게 말 문양이 들어간 스웨터를 입혀 주셨다. 나는 그 옷을 자랑스레 입고 다녔고, 친구의 부름으로 그 집에도 갔다. 친구의 어머니는 놀라시며, 그 옷의 출신을 물으셨다. 그 출신은 어머니의 손끝이라고. 정성으로 어머니께서 지으셨다고 하니, 더 놀라셨다. 어머니의 솜씨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기에. 나는 그런 어머니의 따스함으로 자랐다. 이제 어머니에 이어 여동생이 따스함으로 키우고 있고. 그리고 따스함을 잇는 이야기가 있다. 마리카의 이야기. 한 편의 동화 같은.


 '엄지장갑은 털실로 쓴 편지 같은 것.
 좋아하는 마음도 말이나 글 대신 엄지장갑의 색깔이나 무늬로 표현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좋아하는 마음'이 형상화되는 것입니다.' -63쪽.


 '엄지장갑을 떠준다는 것은 온기를 선물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직접 손을 잡아줄 수 없어 엄지장갑을 떠서 선물하는 것입니다. 엄지장갑은 손의 온기를 대신 전해주는 마리카의 분신입니다.' -148~149쪽.


 마리카라는 여자아이가 첫울음을 낸다. 루프마이제공화국에서. 그곳은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나라. 흑빵 등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음식의 나라. 노래와 춤을 더없이 사랑하는 나라. 꽃과 나무 등의 정령을 믿는 나라. 그리고 엄지장갑이 함께하는 나라다. 그 나라에서 마리카는 자란다. 역시 따스함으로. 나라에서 정한대로 열두 살에 수공예 시험도 치르고. 열다섯 살에 사랑을 만나서 사랑의 엄지장갑을 뜨고. 마리카의 깊은 사랑을 받는 그는 야니스. 그 둘의 사랑은 결혼으로 이어지고. 그런데, 결혼하고 5년이 지난 시간, 마리카의 나라가 지워진다. 얼음 제국에 의해서. 그렇게 노래와 춤이 지워지고, 민속의상도 사라진다. 오직, 엄지장갑만이 이어진다. 털실로 쓰는 편지인 엄지장갑만이, 온기를 선물하는 엄지장갑만이. 그럼에도 마리카와 야니스는 순박한 일상에서 행복을 이어나간다. 그러나, 야니스마저 연행되어 떠나고. 

  

 

(사진 출처: 작가정신 블로그)


 '비 갠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습니다.

 지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습니다. 그네도 반짝입니다. 아름다운 꽃밭이 보이고, 그 너머로 숲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무지개가 아름다운 빛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마리카는 자신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변화했을 뿐입니다.

 (…)

 슬픔의 눈물은 흐르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상쾌한 바람이 불 뿐입니다.' -193쪽.


 '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웃으면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슬퍼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없습니다.' -200쪽.


 '"Paldies!"

 마리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고맙다는 말로 생을 마쳤으니 행복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203쪽.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단해도 일상에서 작은 기쁨, 잔잔한 감동을 발견하고 만들어나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가와 이토 인터뷰 중에서.


 마리카의 일생을 그리며, 슬픔의 강을 건너 웃음을 만나라는 이야기다. 때마다 엄지장갑으로 '털실로 편지'를 쓰는 사람들의 따스함. 잠에는 자장가가 다가가고, 따스함에는 엄지장갑이 찾아간다. 그 따스함이 혈맥에 정겹게 흐르며, 고마움을 남긴다. 엄지장갑은 따스함이 고마움으로 이어지는 실이다. 따스함은 자라게 하기에 고마움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에는 한 결, 한 결 아리는 슬픔에서 웃음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 웃음이 모여, 소소한 행복을 이루고. 그렇게 행복은 은은히 빛나는 색과 무늬로 우리의 곁에 머물고. 애써 찾지 않아도. '파랑새'처럼.


 '보석함처럼 반짝이는 라트비아라는 작은 나라에서 이야기 조각들을 모았다. (……) 그곳에서 만난 숲, 바람, 햇빛, 호수, 사람들의 선량한 웃음이 독자 여러분께 전해지길 바란다.' -'일러스트 에세이 '라트비아, 엄지장갑 기행'' 중에서. (218쪽)


 라트비아를 바탕으로 한 상상의 나라, 루프마이제공화국이라는 나라. 그 나라의 얼굴과 마리카의 일생. 따스함이 마리카를 자라게 했다. 마리카도 따스함으로 많은 이들을 자라게 했고. 그리고 마리카의 마지막에는 고마움으로 장식하고. 나도 어머니의 따스함으로 자랐다. 그런 어머니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드린다. 이 이야기를 만나며. 고마움은 행복의 시작이다. 그리고 작가 오가와 이토의 바람처럼 라트비아의 숲, 바람, 햇빛, 호수, 사람들의 선량한 웃음이 어김없이 나에게 전해졌다. 처음 만난 그녀의 이 소설. 그 따스함에도 고마움을 느낀다. 이 고마움은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녀의 다른 소설에서도 그러하리라.




 덧붙이는 말.

 

 하나. '본문 중의 ‘ミトン(미튼)’은 통상적으로 엄지손가락만 분리되어 있는 장갑인 ‘벙어리장갑’을 가리키지만, ‘벙어리장갑’이라는 단어에 언어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여 ‘엄지장갑’으로 옮겼다'고 한다.

 둘. 이 책 마지막에 일러스트 에세이 '라트비아, 엄지장갑 기행'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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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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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은 눈부시다. 새로운 아침을 여는 찬란한 날개이기에. 그 날갯짓으로 무한히 나는 상상. 경이롭다. 그 상상이, 그 날개가 날면서 담아온 눈물과 땀. 그렇게 품은 깊고 넓은 바다. 살아 있게 하는 그 바다. 맑은 그 바다는 많은 살아 있음을 낳는 어머니가 된다. 그런 상상으로 빚어진 열네 가지 이야기가 있다. 나도 더불어 상상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의 종이접기는 특별했다. 엄마가 숨을 불어넣으면 종이는 엄마의 숨을 나누어 받았고, 엄마의 생명을 얻어서 움직였다. 그건 엄마의 마법이었다.’ -‘종이 동물원중에서. (14)

 

 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났다. 만들어진 모성이 아닌, 스스로 솟아나는 모성. 따뜻했다. 나도 이 이야기를 종이접기처럼 접어서 간직하고 싶었다. 숨을 불어넣어서. 소중히.

 잭, 이 이야기의 나다. 어릴 적에 우는 나를 달래기 위해 어머니께서 포장지로 종이접기를 해주셨다. 특별한 종이접기를. 마법 같은 종이 동물들은 친구였다. 그런데, 미국 백인 아버지. 중국 황인 어머니. 그 아들인 나. 미국의 백인과 다른 나. 그 다름이 싫어, 어머니와 종이 동물들을 멀리하는 나.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하늘로 떠난 어머니. 어느 날, 나는 어머니께서 남기신 편지를 만난다. 슬픈 편지를.

 

 ‘그런 이야기를 떠벌리는 사람들은 그냥 관심을 받고 싶은 거예요. 그 왜, 2차 대전 때 일본군한테 납치당했다고 주장하는 한국인 매춘부들처럼.’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중에서. (513)

 

 731부대의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다. 한국인이라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이야기. 그 희생자분들을 추모한다. 작가도 추모하며 지은 이야기리라. 작가는 숨김없이 731부대의 그 잔학성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냈다. 과거의 역사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기술로. 그렇게 그들의 만행이 증언으로 다가온다. 작가의 진지한 탐구에 깊은 울림을 경험하게 된다.

 

 이 두 이야기. 그밖에 열두 이야기가 더 있다. 그 여러 이야기는 눈부신 상상으로 지난 기억을 분명하게 다시 그리고 있다. ‘종이 동물원에서는 잭의 기억,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에서는 731부대의 기억. 그 기억으로 글에서 느끼게 되는 놀라움과 신기함이 강화된다. 애수(哀愁), 향수(鄕愁)도 진한 향을 내게 되고.

 또, ‘파자점술사’, ‘모노노아와레는 특이하게 언어의 기호인 문자를 재료로 하고 있다.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에서는 작가의 사랑을 공감하게 되고.

 

 SF 환상 문학 단편 선집인 이 책. 상상이라는 나래가 담아온 눈물과 땀이 모인 바다로 만들어진 조약돌 같은 책이다. 오랜 시간, 상상의 꿈이 담긴 바다의 파도로 태어난 조약돌. 황홀한 햇살에 반짝인다. 오랫동안 반짝인다. 슬프고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래서 홀로 그 반짝임을 고이 새겨 둔다. 눈부시게.  

 

 

 덧붙이는 말.

 

 하나. 단편 종이 동물원이 휴고 상,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2012년에 수상했다고 한다.

 둘. 단편집 종이 동물원이 2017년에 로커스 상 최우수 선집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셋. 단편 모노노아와레가 휴고 상을 2013년에 수상했다고 한다.

 넷. 작가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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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론도 스토리콜렉터 70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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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진 출처: 북로드 페이스북)


 누구나 가까운 이에게 발등을 찍히고 억울해서 울부짖은 기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거짓과 진실. 모함과 누명. 그들은 거짓으로 모함했었다. 허나 진실은 누명이었다. 복수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질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어찌해야 할지 몰라 슬퍼하기만 했었다. 그러다가 슬픔을 잊기로 했다. 온전히 잊지는 못해도 슬픔을 잊기로 했다. 그랬더니, 아픔이 작아지는 듯했다. 그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렇게 사필귀정(事必歸正)이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러기 위해 정당하게 진심으로 외치리라. 진실을 부드럽게. 그런데, 한 소설의 남자가 있다. 그 남자도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20년 전, 그날의 진실을. 그는 어떻게 외칠지 들어 본다.


 '당신 말이 맞았소.

 과거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6월 1일은 우리 모두를 파멸시킬 거요.

 잘 지내시오!' -가제본 26쪽.


 '"네메즈, 이 사건에서 손을 떼시오.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란 말이오." -가제본 135쪽. 


 연이은 죽음. 살해로 보이는 사건들. 그리고 자살로 보이는 사건들. 그 피해자들의 교집합은 연방범죄 수사국 수사관이나 그 가족이었다. 자비네 네메즈. 연방범죄 수사국 아카데미교관이자 수사관인 그녀는 의심을 품는다. 누군가 그 내막에 있다는 의심. 화살표는 오래전의 연방범죄 수사국의 한 부서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마약전담반. 슈나이더가 수사관으로서 첫 발걸음 내딘 그곳. 그녀는 결국, 마르틴 S. 슈나이더를 찾는다. 정직 처분을 받고 대학 강단에 있는 그를. 천하제일 프로파일러로 불리는 그를.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엄중히 말한다.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그런데, 네메즈가 어디 그럴 사람인가. 홀로 움직이던 그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슈나이더는 이 사건에 들어오게 되고. 이제 그와 그녀는 사건 안에서 어떻게 어울릴지.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성경, 마가복음 7장 21절~23절.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결국 그 녹이 점점 그 쇠를 먹는다' -법구경.


 악한 것.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한다. 녹. 쇠에서 생겨 점점 그 쇠는 먹는다. 범인들은 악한 것으로 더럽힌 사람이고, 녹이 먹은 쇠다. 그렇기에 배신하고 누명을 입게 했으리라. 죽음의 론도를 연주하고, 어둠의 윤무를 추었으리라. 20년 전 그날에도, 지금도. 우리는 마음의 그늘로 녹슬지 말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범인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리라.

 그나저나 네메즈와 슈나이더. 그 둘의 호흡이 잘 맞는다. 죽음의 론도1 안에서, 어둠의 윤무 안에서. 그 둘이 한 쌍의 날개가 되어, 힘찬 날갯짓을 한다. 아침을 여는 날갯짓. 악한 것과 녹을 확실히 찾아 사라지게 하는 날갯짓. 그 날갯짓을 바라보며, 만족감의 책장을 넘긴다. 다른 이들도 실망하지 않으리라. 치밀한 구성과 역동적인 전개에.   




 덧붙이는 말.


 이 소설은 슈나이더 시리즈의 네 번째 이야기다.  


 

  1. 주제가 같은 상태로 여러 번 되풀이되는 동안에 다른 가락이 여러 가지로 삽입되는 형식의 기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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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광들
옥타브 위잔 지음, 알베르 로비다 그림, 강주헌 옮김 / 북스토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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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작년인 2017년, tvN의 방송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한 말이 있다.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라고. 이렇듯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을 많이 산다. 산 책을 다 읽지 못할 만큼. 애서가인 나. 나도 책을 모은다. 그저 소소하게 모은다. 그렇게 책을 모으다가 책 수집하는 병에 걸린 나. 난치병인 줄 알았다. 언젠가는 나으려니 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랬다. 불치병이라고. 안 낫는다고. 그래도 병이 깊지 않으니 다행이려나. 물론, 이 병이 깊은 사람들도 있으리라. 애서가를 지나 애서광이 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열한 가지 이야기.


 '그때 내가 당신의 손을 잡았지요, 남작 부인. 우리 둘은 몽상에 젖어 완전히 다른 세계, 완전히 다른 시대에 살았지요? 그 시간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요? 여하튼 우리 둘은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고, 박자에 맞추어 스카롱의 시를 나지막이 웅얼거렸습니다.' -'시인 스카롱의 새해 선물' 중에서. (352쪽)


 그 이야기 가운데 하나. '시인 스카롱의 새해 선물'이 있다. 연애편지다. 소싯적 사랑의 열병에 많은 이들이 써 본 그 연애편지. 나도 썼었고, 이 애서광도 썼다. 난 연애편지 초보였지만, 이 애서광은 그것마저도 달인이다. 나의 연애 세포는 비활성화되어 혼자가 되었지만, 이 애서광은 연애 세포가 활성화되어 둘이 되었을 듯. 손에 손잡고. 시와 함께.


 또 다른 이야기 하나. '알려지지 않은 낭만주의 작품들'이 있다. 전 늑대사냥 대장, 고(故) 레옹 베르나르 디뉘의 장서가 경매된 이야기다. 내가 하늘로 간다면, 서재의 책들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보라.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아 소중한 책들. 중학교 다닐 때, 읽고 또 읽어 나를 키웠던 김용 할아버지의 무협 소설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국 할머니인 애거서 크리스티 할머니의 추리 소설들. 그밖에 수없이 많은 내가 사랑하는 책들. 내가 이 책들과 이별했을 때, 새로이 만나는 이는 여전히 사랑해줄까? 난 누군가를 떠나 내게 온 책들도 사랑해주고 있다. 중고 도서로 그 책들. 누군가의 날인. 누군가의 서명. 어떤 책은 사연이 있으리라. 부디 내가 없더라도 슬픈 운명을 만나지 않기를. 그나저나 소설로 돌아가서, 경매에 참석한 그는 어떻게 됐을까? '30권'을 낙찰받는다. '전대미문의 가치를 지닌' 책들을. '빵 한 조각 값'으로.


 책의 앞날을 다룬 이야기도 있다. '책의 종말'이라는 이야기다. 1895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에서.


 '인쇄술이 이미 최고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 종손들은 인쇄로 책을 만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때쯤이면 인쇄술이 시대에 뒤진 방법이 될 것이고, 지금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는 사진에 의해 쉽게 대체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의 종말' 중에서. (243쪽)


 '행복한 청자는 집에서나 주변을 산책하면서, 혹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유적지를 둘러보며 학습하는 동시에 건강을 관리하는 즐거움, 달리 말하면 지적인 양식을 섭취하는 동시에 근육을 단련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주머니에도 들어가는 작은 녹음 장치가 발명되어, 알프스 산맥과 콜로라도 캐니언을 등반하는 동안에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요.' -'책의 종말' 중에서. (253쪽)


 '전자책'과 '오디오북'을 말하는 것이리라. 옛 애서광들은 '전자책'과 '오디오북'도 예언했었다. 대단하다. 이제 책의 앞날은 또 어떻게 그려질까? 그런데, 난 아직까지 종이로 된 책을 좋아한다. 책장의 넘길 때의 그 감촉과 소리. 그 애정을 놓을 수 없다. 너무 구식인가. 어쩔 수 없다. 그게 나인걸. 서재나 더 넓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책의 진화는 살짝 궁금하기는 하다.


 이 세 이야기에 여덟 이야기가 더 있다. 읽어보시라. 현실과 허구. 과거와 미래. 이들이 버무린 이야기. 환상을 품은 이야기다. 애서가들에게 꽃을 바치는 이야기다. 좋다. 알베르 로비다(1848~1926)의 그림도 좋다. 이 이야기의 지은이 옥타브 위잔(1851~1931)은 프랑스의 작가 겸 애서가라 한다. 그도 책을 모으는 병을 갖고 있었으리라. 역시, 나와 동병상련이다. 그나저나 일본의 '츤도쿠(積ん読)'1처럼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읽어야 하리라.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를 읽어야 하고, 이어서 나를 일깨울 수 있어야겠다. 그러면 글자 없는 책이지만, 언제나 빛나는 책도 읽을 수 있으리라. 책 안에 길이 있다.   



 

  1. ‘책을 사는 것은 좋아하지만 쌓아 두고 결코 읽지는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일본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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