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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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황성(城) 옛터'라는 노래를 들었었다.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滿月臺). 그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쓸쓸한 감회(懷)를 그린 노래였다. 1928년에 나왔다는 이 노래. 일제강점기였던 그때, 조선 망국의 한(恨)도 스민 노래였다. 폐허, 슬픔과 아픔이 묻어 있는 곳이다. 나는 개성의 무너진 만월대를 걸은 적은 없지만, 재개발을 앞둔 마을을 걸은 적은 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뛰던 그 골목들. 재개발을 반대하는 절규들이 곳곳에 물들어 있던 곳. 설운 회포들이 담긴 곳. 나는 그런 잔해들을 순례하며, 우울을 만났다. 그리고 여기, 파멸의 잔해를 여행하는 이가 또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한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던 1992년 8월, 다소 방대한 작업을 끝낸 뒤 나는 내 안에 번져가던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동부의 써픽주(州)로 도보여행을 떠났다.'-20쪽.


 소설에서 말하는 이는 여행을 떠났다. 공허감에서 벗어나고자. 떠났다. 그런데, 결국 마비된 상태로 입원하게 된다. 노퍽 지방의 주도(州都)인 노리치의 병원에. 일 년 만에. 그리고 글을 쓴다.


 '폐허에 가까이 갈수록 망자들의 신비로운 섬에 와 있다는 생각은 점점 사라졌고, 그 대신 미래의 어떤 대재앙으로 파멸한 우리 자신의 문명의 잔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남겨놓은 금속과 기계의 쓰레기더미 사이를 돌아다니는 미래의 이방인처럼 나 또한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 여기서 살고 일했는지 (…) 이해할 수 없었다.' -278쪽.


 여행을 떠났던 그. 정처 없이 다닐다가, 미로에 길을 잃기도 한다. 파멸한 문명의 잔해를 만나는 그. 전쟁과 침략의 광기. 그 욕망의 광기. 그 광기가 그런 상처를 남겼다. 희생자들의 아픔을 뚜렷이 그린 그. 제국주의로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는 그 대재앙의 깊은 아픔을 안다.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259쪽.


 우울. 폐허에서 어두운 우울을 만나고 아파한다.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진다. 그 날카로움으로 난 상처가 아리다. 그래도 그 안에 무딤도 있다. 끝없이 진행되는 실수인 삶. 영원히 이어지는 실수의 삶. 그렇게 실수와 함께 소생하는 삶. 그 안에서 새롭게 탈바꿈하며, 우울을 벗어나야 한다. 파괴는 고통이다. 그리고, 고통을 넘어서 무너진 것을 다시 세워야 하리라. 힌두교의 신 시바가 파괴자인 동시에 변형과 재건까지도 책임지는 복합적인 존재인 것처럼.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모든 강은 하늘에서 내려왔으리라. 하늘에서 내린 빗방울이 모이고 모인 강. 그 강은 유연함으로 길을 이룬다. 강은 파멸하면서도 끝없이 재생한다. 부드러움과 힘참, 감미로운 빛과 은밀한 향. 우렁찬 함성과 소리 없는 노래. 그것이 함께 어우러진 강. 삶과 죽음이 소용돌이치는 강.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도 마치 강 같다. 사실과 허구가 모호하게 어울린다. 여러 사진으로 사실성을 부여하지만 결국은 허구인 소설이다. 꿈과 현실이 강처럼 그 경계에 있는 제발트의 낯선 소설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이도 제발트인지 아닌지 모호하기도 하고. 그리고 강처럼 하늘 같이 높은 사유가 모여 흐름이 된다. 그렇게 매우 독특하게 다가온다. 유연하게 의식의 길을 이룬다. 또 어렵게 다가온다. 그래도 설명할 수 없는 큰 위안을 받게 된다. 그저 계절의 바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이는 말.


 하나. 소설 '토성의 고리'는 제발트가 남긴 네 소설 가운데 세 번째 소설이다.

 둘. 제발트 문학에 열광하는 독자들을 제발디언(Sebaldian)이라고 한다고 한다.

 셋. 토성의 고리는 토성의 달이었던 것이 행성에 너무 가까이 위치하여 그 기조력으로 파괴된 결과 남게 된 파편들인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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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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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가끔 하늘을 바라보고는 했다. 날고 싶었다. 그럴 때는 연(鳶)을 생각했다. 언젠가 새해를 맞아, 연날리기를 했었다. 어릴 때, 시골에서였으리라. 하늘 높이 날아오른 연. 바람을 타고, 맞으며 날았다. 빠르게, 혹은 느리게 날았다. 얼레를 돌려 연줄을 풀기도, 감기도 했다. 그렇게 연은 춤을 췄다. 연을 날리는 사람도 함께 춤을 췄으리라. 의젓하게. 연의 연회(宴會)였다. 그 연회의 별난 참석자였던 나. 어린 나의 연은 작았다. 게다가 서투른 나였기에 연이 추는 춤은 불안했다. 그런 나와 연을 보신 마을 어르신은 나에게 도움을 주셨다. 나와 내 연은 그렇게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춤을 출 수 있었다.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나는 사람들이 있다. 익인(翼人). 그 익인(翼人)과 도시인의 이야기. 나는 먼저 연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 출처: 창비 블로그)


 '몸이 작은 대신 그 몸의 곱절에 이르는 날개를 펼친 사람이 달빛 아래 서 있다.

 익인(翼人)이다.' -가제본 5쪽.


 '날개가 작아서 덮을 수 없다면……

 ……그냥 그대로 꼭 안아 주면 돼, 너의 두 팔로, 너의 가슴에.' -가제본 11쪽.


 '"그러니 그 작은 날개로 어디까지 날겠는지 고민하기보다는……."

 (……)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가제본 122쪽.


 날개가 있는 사람, 익인. 그 익인들은 자체 회복력이 있고, 남을 치유할 수 있다. 그런 신비한 사람인 익인. 그런데, 체구가 크고 날개가 작은 익인이 있다. 그의 이름은 비오. 그 소년 비오가 잡혔다. 고원 지대에만 사는 익인들이 도시인들의 시 청사를 습격했다가 비오가 잡혔다. 작은 날개 탓이다. 시 청사의 도시인인 루. 그 소녀를 인질로 비오가 탈출한다. 그리고 고원 지대로 돌아간다. 비오와 루. 비오는 신비하지만, 작은 날개로 살짝 결핍된 익인이다. 루는 높은 듯하지만, 낮은 출생으로 은근히 경멸을 받는 도시인이다. 무언가가 부족하고 무언가가 다른 그 둘이다. 그 둘은 서로를 알아가며, 치유하고 성장한다. 꼭 안아 주고, 사실 자체의 중요성을 알게 되며. 덧붙여, 익인들이 습격한 까닭과 도시인과 익인들 사이의 오랜 이야기도 듣게 되고.


 '자신과 다른 모습을 한 인간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가제본 50쪽.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차이와 반복' 중에서.  


 '우리가, 닿아도 될까? 마주해도 괜찮을까?' -가제본 184쪽.


서로 다르지만, 서로 하나이다. 비오와 루는 알았다. 익인 가운데 다른 하나인 비오. 도시인 가운데 다른 하나인 루. 서로의 아픈 상처를 보았다. 그리고 익인과 도시인으로 다르지만,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단 하나의 똑같은 목소리'와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를 듣고, 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닿아도 될까? 마주해도 괜찮을까?'라고 서로 물으며,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중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면서도 때론 바람에 저항해야 하는데, 흔들리지 않고 휘청거리지 않고 날 수는 없어." -가제본 170쪽.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무언가는 옳고 바람직하거나 다른 것은 그릇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아. -가제본 296쪽.

 

 살아오며 상처를 입었던 비오와 루. 이제 다가가며, 서로를 치유한다. 상처 입은 자였기에 그럴 수 있다. 그렇게 치유하며, 성장한다. 흔들리지 않고 휘청거리지 않고 날 수는 없기에, 아픔을 이겨내며 성장한다. 결국에 다름이 그릇되다고 말하는 이들을, 구별을 짓고 혐오하는 이들을 넘어선다. 그들의 단단한 선입견에 갈라짐을 내면서. 그 갈라짐에 비오와 루의 따스한 빛이 스며든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아침 하늘을 펴는
 찬란한 날개이게 하소서.


-박재삼의 '갈매기' 중에서.


 '어서 더 멀리 날아가. 네가 원하는 만큼, 어디까지든.

 지금, 내가 가.' -가제본 300쪽.


 소년, 소녀의 눈으로 그려진 상상의 이야기. 그들의 치유와 성장 이야기. 어느새 따뜻하게 응원하며, 함께 거닐었다. 작고, 낮았던 소년, 소녀. 이제는 크게, 높이 날았다. 그렇게 멀리, 오래 날았다. 지금, 절벽에서 '아침 하늘을 펴는 찬란한 날개'가 되어 날았다. 하얀 눈 속에서도 붉은 꽃을 피우려 애써 나오는 꽃망울 같은 용기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무기력한 그 무엇이 아닌, 힘찬 그 무엇의 용기로. 마치 연 같았다. 바람을 타고, 맞으며 힘차게 날아오르는 연. 어릴 적, 나의 연처럼. 서툴고 작았지만, 그래도 솟구쳐 올랐다. 크게, 높이. 그렇게 아름다운 춤을 추었다. 연의 향연(饗宴)이었다. 그 연줄을 타고 이어지는 감동.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의젓할 수 있었다. 연과 함께 날아오르며. 연의 춤을 함께 추며. 연의 날개가 품은 따스함을 느끼며.     


     


 덧붙이는 말.


 하나. 처음에 저자도, 책 제목도 모르고, 가제본으로 읽었다.

 둘. 영 어덜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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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4-02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버드 스트라이크를 주문했는데 아직 받지 못했어요. 글 잘 쓰는 작가라고 해서 궁금해서 주문했지요.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같은 책에 주목하고 있었다니...요. ㅋ

사과나비🍎 2019-04-02 23:37   좋아요 0 | URL
아, 페크님은 ‘버드 스트라이크‘를 어제 주문하셨나 봐요~^^*
저는 가제본만 읽고 책은 아직 못 만났는데요...
예약 주문 안 해서 후회하고 있네요~^^; 구병모 작가 좋아하시는 분들 많으시더라고요~^^*
저도 이번에 처음 읽었는데요. 좋았어요~^^*
그러게요~ 페크님과 제가 같은 책을 생각하고 있었다니요~
저에게 무한 영광인데요~^^* 이번에 주파수가 맞았나 봐요~^^*
아무튼! 미인 페크님~ 항상 행운과 행복이 함께 하시기 바랄게요~^^*
 
나의 마지막 히어로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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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꿈을 잃은 사람을 다시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사랑이 아닐까.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신 - 도깨비(2016)'의 도깨비 '김신'은 고백한다. '그 아이가 자꾸 나를 살게 해'라고. 그 아이는 그의 신부, '지은탁'. 영화 '제리 맥과이어(Jerry Maguire, 1996)'에서도 고백한다. '제리'가 '도로시'에게 'You complete me.'라고. 고백하는 영화가 여기에도 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 1997)'에서 '멜빈'은 '캐롤'에게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이라고 한다. 모두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특별한 사랑이 있다. 연인의 사랑이 아닌, 영화 배우를 향한 그 지지자의 짝사랑이다. 그 짝사랑의 힘으로 꿈을 찾아 다시 사는 여인.

 

영화 '록키3(Rocky III, 1982)'.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영화 초반의 록키 발보아처럼 그녀는 되는 대로 살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록키 발보아처럼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지금이야말로 다시없는 기회였다.' -15~16쪽.


 '그녀의 남편. 남편을 만난 것은 스탤론 덕분이었다. 가정을 갖게 된 것은 스탤론 덕분이었다. 의사가 된 것도 스탤론 덕분이었다.
1983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록키3>를 보지 않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46~47쪽.


 1983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록키3(Rocky III, 1982)'를 본 리즈. 병원의 비서로 일하는 그녀다. 역경을 딛고 다시 챔피언이 되는 록키의 이야기. 영화 초반의 록키처럼 그녀는 되는 대로 살면서 죽어가고 있었고. 그래서 영화 관람 후, 열병을 앓는다. 그리고 록키처럼 다시 일어난다. 그렇게 그녀의 꿈을 찾아 의사가 된다. 권투를 배우는 곳에서 만난 장과 결혼도 하고, 아들도 둘을 낳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스탤론 덕분이라 생각한 그녀. 스탤론이 가난해질 것을 염려한 그녀. 그를 위해 버는 돈의 10%를 저금하는 예금 계좌를 개설하기도 한다.


 사랑은 봄에 피는 꽃.

모든 것을 희망으로 향기롭게 하며,

폐허조차도 향기로 그윽하게 한다.


귀스타브 플로베르(1821~1880) 

 

 

So many times, it happens too fast,
You change your passion for glory.
Don't lose your grip on the dreams of the past,
You must fight just to keep them alive.

 


'록키3'의 주제곡 'Eye of the Tiger'의 가사 중에서.  


 나에게도 우상(偶像)이 있다. 나의 영웅인 그 우상. 본받고자 한다. 열렬한 애정을 보내며.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되고. 내가 사랑하는 작가, 배우, 가수 등. 그들은 나를 살게 하는 구원자다. 나의 우상인 그 영웅들에게 보내는 사랑. 사랑은 봄에 피는 꽃이라 한다. 모든 것을 희망으로 향기롭게 하며, 폐허조차도 향기로 그윽하는 하는 그 사랑이다. 소중하다. 소설, '나의 마지막 히어로'의 리즈도 우상이 있다. 바로, '록키3'의 '실베스터 스탤론'이다. 깊은 사랑을 보낸다. 지지자로서. 리즈에게도 그 사랑은 봄에 피는 꽃이었다. 그리고 '록키3'의 주제곡. 'Eye of the Tiger'의 가사처럼 되었다. 열정을 영광으로. 꿈을 놓지 않으며. 그녀의 마지막 영웅인 스탤론을 따라서. 그렇게 살았다.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소설이 처음이다. 전작을 만나지 않았다. 이 소설만으로 보건대 매우 짧고, 아주 깔끔한 글을 쓴다. 단단한 그 무엇이다. 크로키(croquis) 같다. 또, 한 가닥의 난초 그림 같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 글. 얇은 글에 스며든 여백의 미가 돋보인다.  




 덧붙이는 말.

 

 이 소설을 주제로 한 이다혜 기자와 이종산 소설가의 대담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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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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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 (Proof beyond a Reasonable Doubt).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을 따른다(in dubio pro reo)는 원칙에 근거, 피고인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한다면 판사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


 형사소송법 제307조(증거재판주의)
①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
②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


 형사소송법 제308조(자유심증주의)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한다.


 많은 송사(訟事)가 있다. 그 가운데, 죄를 논하는 송사가 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판결이 있기도 하다. 솔직히 오심(誤審)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그들도 실수하기에. 그렇기에 재판에 심혈을 기울이지만, 쉽지 않다.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겠다는 우리의 법. 그 가운데 하나가 증거재판주의. 그것에 너무 얽매여 기계적으로 판단을 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합리적 의심'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야기가 있다. 소설이다. 무슨 이야기이고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들어 보자.  

 

 20대 초반의 남성이 열 살 가까이 연상인 여자친구와 함께 모텔에 투숙했다. 얼마 후, 여자친구가 프런트에 달려왔다. 남자친구가 젤리를 먹다가 목에 걸려 숨을 못 쉰다고. 남자는 결국 사망. 질식사였다. 유가족은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했다. 그런데, 남자친구의 사망보험금 3억 원이 있다. 수익자는 여자친구였다. 여자친구는 살인죄로 구속기소되었다. 일명 '젤리 살인사건'이다. 판사 현민우의 눈과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자친구 김유선. 생을 떠난 남자친구 이준호. 그들의 재판을.    


 '재판을 비난하거나 누구를 규탄하거나 현실의 결론을 바꾸려는 의도는 없다. 독자들이 그 사건과 이 작품의 사건을 동일시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소재도 '젤리'로 바꾸었고, 당사자들의 성별도 바꾸었다. 결국 이 이야기는 허구다. 진실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가 전하려는 것에 있다.' -'작가의 말' 중에서. (305쪽)


 이 소설의 이야기. 어딘가 낯익지 않은가. 이른바, '낙지 살인사건'1과 흡사하다. 작가의 말을 보니, 그 사건과 이 작품의 사건을 동일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진실은 이야기가 전하려는 것에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자주 오해하는 게, 법이 정의를 찾아줄 거라는 환상입니다." -183쪽.


 '"여러분은 납득할 결론을 향해 꾸물꾸물 나아가는 달팽이 같은 존재를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법에는 행선지가 없습니다. 무한궤도를 무심히 도는 톱니바퀴 같은 존재인 거죠. 법은 정의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규칙 속에서 예측 가능하게 돌아가는 체제의 유지가 우선 목표입니다." -184쪽.


 '"……법원이란 곳은 변화를 주도하는 기관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 변할 때 가장 나중까지 남아 있다가 뒤처리를 하고서야 자신도 모습을 바꾸죠. 당시만 해도 남성 중심, 가부장적인 의식이 강했으니까……. 요즘에는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죠. 성범죄 양형이 대폭 올라간 건 결국 시대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판사는 그걸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해요."' -218쪽.  


 법은 정의를 찾아줄까. 솔직히 모르겠다. 사법농단 의혹 등. 사법부는 우리의 불신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법은 있어야 할까. 그 대답은 '물론'이다. 법이 없다면 큰 혼란이 오기에. 그렇게 있어야 하는 법원. 그 법원이 올바르게 되도록 시대의 흐름을 이끌고 싶다. 우리의 작은 촛불 하나하나로. 그렇게 생각해 본다.

 

 광화문 앞 해치 동상.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판사에서 이제는 변호사가 된 그. 이 책의 작가 도진기다. 우선, 법은 그의 앞마당이기에 믿음이 간다. 그가 던진 질문인 이 법 이야기. 나는 해치 또는 해태(獬廌獬豸)2를 생각했다. 상상의 동물인 해치. 법이라는 말이 해태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던가. 즉, '해태가 물처럼 고요하게 판단해서 틀린 상대를 받아버린다는 의미'의 고자(古字)인 灋에서 법(法)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복잡한 자는 제외하고. 그 해치. 우리에게도 그런 해치가 법과 함께 있으면 한다. 송나라의 유학자 육상산은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이라고 했다고 한다. '백성은 가난함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않음을 걱정한다'라는 뜻이다. 논어에서 유래했다3는 이 말.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나온다는 이 말. 이 말처럼 백성을 고르게 할 해치. 사람들의 맑고, 바른 마음에 있으리라. 우리의 법이 해치와 그런 세상을 이루어 나아가기를.


 도진기의 '합리적 의심'이라는 이 이야기. 친숙한 놀라움을 선사한다. 법정. 그리고 '산낙지 살인사건'이라는 이 두 친숙함. 거기에 인간성의 가장 밑바닥을 처절하게 그린 심리는 마지막의 놀라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가의 성실함이 그렇게 했으리라. 매혹적인 이야기다.  



  1. 나무위키의 '산낙지 보험 사망 사건' 항목 참조. ( https://namu.wiki/w/%EC%82%B0%EB%82%99%EC%A7%80%20%EB%B3%B4%ED%97%98%20%EC%82%AC%EB%A7%9D%20%EC%82%AC%EA%B1%B4 )
  2. 나무위키의 '해태' 항목 참조. ( https://namu.wiki/w/%ED%95%B4%ED%83%9C )
  3. 논어 계씨편의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 불환빈이환불안(不患貧而患不安)'. 즉,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않은 것을 걱정하며,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하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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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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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에는 외할머니댁에 가고는 했다. 그런데, 십여 년 전에 하늘로 가신 외할머니. 이제 명절이면, 외할머니를 추모해본다. 그리고 무언가를 추억해본다. 오래전, 나는 외할머니댁의 다락방에서 골동품을 찾겠다고 했다. 먼지 속에서 찾은 건 촛대, 그릇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도 외가의 옛 분들께서 쓰시던 것이리라. 그리고 다음에 뵈었을 때, 외할머니는 촛대와 그릇을 소중하게 두고 계셨다. 그저 감사했다. 추모하는 나에게 다가온 추억은 감사였다.

 작가 29인이 추모를 한다. 작가 박완서를 추모한다. 8주기를 맞아서. 작가이기에 글로써 추모하고, 추억한다. 추모하는 각자에게 다가온 추억은 무엇이었을까. 29명의 추모객들이 남긴 추억. 그 추억들을 받아 나도 소중히 간직해본다.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백수린, '언제나 해피엔딩' 중에서. (120~121쪽)


 불안. 앞날의 불안. 젊은이들에게 그 불안이 덮쳤다. 불안에는 위로가 다가간다. 불안해하는 민주에게 박 선생은 위로를 준다. 영화관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언제나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괜찮아진다는 말. 나도 며칠 전, 아는 동생들과 게임의 엔딩을 봤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Detroit: Become Human, 2018)'이라는 게임의 엔딩을. 인터랙티브 무비(Interactive Movie)라는 종류의 이 게임. 선택에 따라 엔딩이 바뀌는 이 게임. 사실, 이 게임의 엔딩을 두 번 봤다. 한 번은 해피엔딩 실패. 두 번째에 해피엔딩 성공이었다. 해피엔딩에 실패했을 때, 슬펐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기에 괜찮아졌다. 실패의 불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견딜 수 있으리라.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공평함에서 시작된 성난 마음을 딛고 언제가 되든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서로를 조금 더 좋아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라며.' -윤이형, '여성의 신비' 중에서. (175쪽)


 지혜와 슬기는 서로를 오해한다. 육아, 살림하는 전업주부였다가 다시 취업한 지혜. 전업주부로서 육아와 살림의 달인인 슬기. 둘은 서로를 오해한다. 그리고 질투한다. 여성의 심리 묘사가 뚜렷하다. 귓가에 정확하게, 분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서로를 조금 더 좋아하는 법을 배우기를 나도 간절히 바라본다.

 

 이렇게 29편 가운데 인상 깊었던 두 편이었다. 물론, 다른 이야기들도 좋으니, 만나시기를.

 

 (사진 출처: 네이버 이미지)


 박완서 작가의 8주기를 추모하는 짧은 소설 29편. 멜랑콜리와 해피엔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갈래의 강에 박완서 작가에게 보내는 작은 편지의 종이배를 띄운다. 각자 다른 색의 편지를 안은 종이배를. 마치 영화 '러브레터(Love Letter, 1995)'처럼 주고받는 편지를. 남겨진 박완서 작가의 글들에 주고받는 편지를. 멜랑콜리한 해피엔딩의 편지를. 이 삶에 대한 편지로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풍자와 해학으로 삶에 담긴 역설을 그린다. 그렇게 박완서 작가를 깊이 추모하고, 새롭게 추억한다. 나도 편지를 품은 색색의 종이배를 보며, 추모하고, 추억한다. 그 삶의 무늬가 담긴 추억을 함께 간직한다. 깊이 간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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