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 전면개정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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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차가우면서 동시에 가장 뜨거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탐정 사와자키가 그렇게 보이기에. 하라 료(1946~)라는 소설가가 창조한 중년의 사립 탐정 사와자키. 그의 첫 등장은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1라는 무대였다. 일본에서 원문 출간 연도는 1988년이었던 이 이야기. 마흔세 살인 하라 료의 첫 소설이었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동경하며 쓴 하드보일드2 소설로 힘차게 세상에 내보냈다. 그렇게 사와자키 탐정은 그의 첫 무대에서 많은 관객에게 갈채를 받게 됐고. 다음 무대에도 이어졌다.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낭만적이고 냉정한 탐정의 전설이.


 사와자키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허름한 탐정 사무실로. 오른손을 주머니에 감춘 낯선 사내. 그가 한 남자의 행방을 묻는다. 사에키 나오키라는 르포라이터의 행방을. 그리고 20만 엔을 맡기고, 그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리고 누군지 묻는 물음에는 가이후라 밝히며 사라지고. 그런데 르포라이터의 장인인 미술평론가 사라시나 슈조도 사와자키에게 묻는다. 사위가 어디에 있는지. 결국, 사와자키는 사에키 나오키의 아내 사에키 나오코의 의뢰를 받게 된다. 남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그리고 사와자키는 우여곡절 끝에 알아내게 된다. 르포라이터와 오른손을 가린 사내, 이 두 남자 실종의 진실을. 그들의 행방불명이 지난 도쿄 도지사 선거 때 괴문서 사건과 도지사 후보 저격 사건과 이어졌음을.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싸우기만 하는 존재인가? 싸워 이기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인생에서 승패는 늘 부분적인 승패에 지나기 않는 거 아닌가? 싸울 상대가 자신이든 누구든."' -'말로라는 사나이' 중에서. (439쪽).


 와각지쟁(蝸角之爭)3이라는 말이 있다. 달팽이 더듬이 위에서의 싸움. 넓고, 크게 보면, 우리의 싸움이 그렇게 하찮은 일로 보일 것이다. 사와자키가 활약하는 이 책,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의 맨 뒤에 실린 단편에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말이 있다. '말로라는 사나이'라는 단편에서 사와자키 탐정이 싸움에 대해 한 말이다. 인간이 싸우기만 하는 존재인지. 싸워 이기는 게 그렇게 중요한지. 질문한다. 아옹다옹 지내기만 하는 우리들. 더 넓게, 더 크게 보자. 사와자키처럼.


 '"그게 '남자는 터프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부드럽지 않으면 살 자격이 없다'였던가?"' -'말로라는 사나이' 중에서. (435쪽).


 이 책 뒤의 단편에 인용된 이 대사. 옮긴이의 말을 보니, 레이먼드 챈들러의 《플래시백》에 나온다고 한다. 사와자키가 되어야 할 바람직한 인간상을 저자가 은근히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이와 일맥상통하는 태강즉절(太剛則折)이라는 말이 있다. 너무 굳거나 빳빳하면 꺾어지기가 쉽다는 뜻이다. 부드러움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터프는 폭력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사와자키는 터프한 듯하면서, 부드럽다.

 

영화, <영웅본색>(1986) 중에서.


 옮긴이의 말을 보니, 주윤발의 <영웅본색>(1986)이 살짝 언급됐다. 친구들과 그 영화의 명장면을 흉내내기도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홍콩 noir의 전설작 중 하나인 오우삼 감독의 이 영화! 쌍권총과 바바리코트 그리고 성냥개비는 주윤발의 상징이 됐었다. '의에 살고 의에 죽는' 그! 강자에게 차갑지만 약자에게는 따뜻한 그! 멋있었다. 그런 주윤발을 닮은 사와자키도 멋있었다. 와각지쟁과 태강즉절을 아는 사와자키. 협객 같았다. 그런데, 레이먼드 챈들러가 만들어 낸 필립 말로는 아직 모르기에 아쉽다. 추측하건대4, 필립 말로도 주윤발, 사와자키와 닮았으리라.


 이렇게 낭만적이고 냉정한 탐정 사와자키. 감상적이지만, 감정을 절제하기도 하는 그. 그는 이런 인생관을 이 작품에서 끝까지 지켜 나간다. 인생의 싸움에 대해 더 넓게, 더 크게 보는 남자. 터프한 듯, 부드러운 남자. 그래서 가장 차가우면서도 또 가장 뜨거운 남자가 되는 것이다. 남자다운 남자! 독자들은 사와자키의 깊은 지지자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그를 돋보이게 하는 개성 있는 다른 인물들. 그런 인물들이 활동하는 현실감 있는 배경에, 치밀하고 흥미로운 구성까지. 매우 훌륭하다. 정말 이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나저나 사와자키 탐정도 건강을 위해서 금연해야 할 텐데.





 덧붙이는 말.


 하나. 이 작품은 제2회 야마모토슈고로상 후보에 올랐었다고 한다.

 둘. 33쪽의 '못짓'을 '몸짓'으로. 357쪽의 '두 남자을'을 '두 남자를'로. 442쪽의 '몇해'를 '몇 해'로 고쳐야 한다.

 셋. 구판은 우리나라에서 2008년에 나왔고, 이 책은 2018년에 나온 개정판이다.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으로 읽고 씁니다.


 



  1. 하라 료,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권일영 옮김, 비채, 2018.
  2. 1920년대부터 미국 문학에 나타난 창작 태도. 현실의 냉혹하고 비정한 일을 감상에 빠지지 않고 간결한 문체로 묘사하는 수법이다. 헤밍웨이의 <살인자>를 비롯한 초기 작품이 있으며, 주로 탐정 소설에 영향을 끼쳤다.
  3. 1. 달팽이의 더듬이 위에서 싸운다는 뜻으로, 하찮은 일로 벌이는 싸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장자≫의 <칙양편(則陽篇)>에 나오는 말이다.
    2. 작은 나라끼리의 싸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4. 단편 '말로라는 사나이'를 보고, 또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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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블러드
임태운 지음 / 시공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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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SF! 좀비! 우주! 이 소설! 여리지만, 큰 열매를 맺을 것 같아요. 그런 새싹 같은 소설! 힘차게 응원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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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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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러브레터’에서 도서관 창문에 기대어 독서하는 장면. 커튼이 움직이며 빛의 미학을 보여주었지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빛의 현관’은 그런 집을 그린 것 같아요. 가족과 빛의 집. 물론, 비밀도 있겠지요. 그 수수께끼와 함께, 따스한 빛의 환대도 받으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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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 풀컬러 일러스트 에디션 아르볼 N클래식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알레+알레 그림, 강수정 옮김 / 아르볼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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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지학사아르볼)


 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有限)하고, 멈추지 않으며, 일방통행이다.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특권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그것. 시간 여행을 한다는 것. 정말 매혹적인 일이다. 그렇기에 많은 매체에서 시간 여행을 다루고 있다. 나도 간혹 상상하기도 하고. 내가 시간 여행을 상상하기 시작한 건 아마도 어떤 애니메이션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꼬마 시절에 본 한 애니메이션. 바로, '시간탐험대(원제: 타임 트래블 톤데케만(たいむとらぶる トンデケマン), 일본 방영: 1989.10.19.~1990.08.26)'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타임머신은 주전자였다. 돈테크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전자. '돈데기리기리 돈데기리기리 돈데돈데돈데 돈데크만'이라는 주문을 외우고, 공간을 열어준다. 그것을 통해 시간 여행을 하고. 그것을 본 어린 나에게 타임머신은 정말 신기하고, 동경의 물건이었다. 이런 타임머신을 처음으로 소개한 소설을 만났다. 내가 간직했던 한 애니메이션에 대한 추억의 설렘까지 소환한 공상 과학 소설. '타임머신'이다. 


 타임머신을 발명했다는 그. 시간 여행자. 그의 집, 저녁 모임에서 손님들에게 말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 손님들이 두 번째로 모인 날. 먼지투성이에 지친 모습으로 발에 피를 흘리며 나타난다. 그리고 802701년의 미래로 시간 여행을 다녀왔다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손님들에게 들려준다.

 802701년으로 가서 미래의 인류를 만난 그. 두 종족의 인류가 있다고 한다. 한 종족은 '엘로이'다. 120㎝ 정도의 키에 가냘프고 순한 채식주의자인 그들. 그리고 다른 한 종족은 '몰록'이다. 추악한 겉모습에 육식을 하는 그들. 이 두 종족은 놀라운 관계를 맺고 있는데.


 '하지만 내게 미래는 여전히 검은 공백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으로 몇 곳에 불이 켜졌을 뿐 그저 거대한 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211쪽.


 1895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이 소설. 이 공상 과학 소설 '타임머신'은 불평등을 다룬 소설이었다. 그 당시 영국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부익부 빈익빈. 자본주의의 그림자로 인한 심한 빈부격차. 부의 큰 불평등이 오래 이어지면,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타임머신'의 저자, 허버트 조지 웰스도 그것을 경고하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판도라'의 상자에도 희망이 담겨 있듯이 그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미래는 아직 공백이라고. 미지의 세계라고. 결국 미래는 우리가 채워 가는 거리고. 이것이 그의 상상에 깃든 깊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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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0-06-07 0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Rod Taylor가 주연한 1960년의 영화버전을 참 좋아합니다 이 책의 표지도 그런 옛날의 감성을 잘 살린 것 같습니다

사과나비🍎 2020-06-08 18:12   좋아요 1 | URL
아, 영화도 있나 봐요~^^* 1960년! 정말 오래된 영화네요~^^* 저도 한때 고전 영화 찾아보고는 했었어요~^^*
이 영화도 기회되면 보고 싶네요~^^* 아무튼! transient-guest님!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즐거운 시간되시기 바랄게요~^^*

페크pek0501 2020-06-10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 여행, 멋지죠. 제가 읽었던 일본 소설에도 그런 게 있었어요. 한번 그 시대로 가 볼까, 하면서 한 남자를 데리고 가는 장면이 있는데, 가능한가? 하며 생각을 했더랬죠. 두 사람이 마침내 시간 여행을 다녀와서 현실에서 이야기하는 걸로 이어집니다. ㅋ

사과나비🍎 2020-09-14 19:05   좋아요 0 | URL
답글이 너무 늦어 무척이나 송구한 마음입니다~ 그나저나 시간 여행이 소재인 일본 소설이 있나 봐요~ 궁금해지네요~^^*

2020-08-10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0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14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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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 나에게도 할머니가 계셨다. 두 분 다 하늘에서 나를 보고 계시겠지.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친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하늘로 가셨기에.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투병하셨다는 것과 시골에서 장례식을 하셨다는 것. 그 두 가지로 나도 학교에 며칠씩 결석했다는 것과 슬펐다는 것. 그 정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더 많다. 막내 이모와 함께 외할머니댁에 내려와서 잠시 지냈던 것, 대부분의 명절 때, 외할머니댁에 가서 하룻밤 묵었던 것. 그렇게 외할머니와 추억의 조각이 여럿 있다. 외할아버지께서 먼저 하늘로 가시면서 재산을 지키시면서 사신 그 외할머니. 친손주를 더 크게, 자주 보셨지만, 외손주인 나도 돌아보신 외할머니. 젊어서 하늘로 간 작은 아들과 내가 닮았다고 하셨다. 그렇게 슬픔이 깃든 눈으로 말씀하셨다. 그런 외할머니는 암이셨다. 그렇게 하늘로 가셨다. 우리 집에서도 투병 생활을 하셨던 외할머니. 지금도 내 가슴속에 기억되어 있다.

 여성 작가 여섯. 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 그녀들의 짧은 소설을 만났다. 할머니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나의 할머니에 대한 기억 소환 매체가 되었다. 특히, 가슴속에 있던 외할머니의 기억이 다시 온몸에 스며들었다.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빌었어. 손주가 태어나면 구연동화도 해주겠다고."' -윤성희의 '어제 꾼 꿈' 중에서. (33쪽)


 결혼도 안 한 나도 손주가 태어나면 구연동화를 해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내 아들딸에게 먼저 해줘야겠지만. 그리고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명절 때 간식을 드시며, 외할머니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시고는 하셨다. 주로 동네 사람들과 친척들의 소식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주 이야기를 하실 때는 나에게도 말씀하셨다. 마치 구연동화 같았다. 사투리였지만,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감정을 넣어서 하신 말씀이기에. 나도 손주가 생기면 그러겠지. 천천히 감정을 넣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리라는 것.


 할머니, 이런 게 살아 있다는 거야?' -강화길의 '선베드' 중에서. (101쪽)


 나도 하늘에 계신 외할머니께 어느덧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마도 외할머니는 '그럼, 그렇지'라고 말씀하시고 계시겠지.

 강화길의 '선베드'는 요양원에 계신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를 바라보는 손녀의 격정을 담았다. 나도 병실에 계시던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병이 악화되어 결국 일반 병실에서 중화자실로 가신 외할머니. 면회하고 나왔을 때, 눈물이 나왔다. 병원 복도 벽에 기대어 눈물을 지었다. 나도 격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이밖에 다른 작품들도 할머니에 대한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자신만의 색을 지닌 기억들로. 작가들의 다채로움이 좋다. 이런 여섯 작품을 만나고 대화하며, 할머니의 기억을 또다시 새겼다. 주로 외할머니의 기억을. 그렇게 오랫동안 잊지 않으며 소중히 기억을 이어가야지. 그 외할머니의 딸인 어머니도 어느덧 외할머니가 되었다. 나의 여동생에게 아이가 있으니. 그렇게 되어 가는데, 나는 느끼지 못했다. 할머니라는 이름의 존재감을. 또 그렇게 존재하기 위해 어떤 나날을 지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빛의 아픔이 색(色)이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할머니들의 아픔이 여섯 가지 색을 이룬 것이다. 찬란한 여섯 가지 색을. 이제 그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알게 되리라. 또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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