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에 코지 미스터리라고 나와있지는 않지만 코지 미스터리입니다. 주인공이 11살짜리 여자애니까요. 화학에 푹 빠져있는 나이보다 조숙한 소녀. 엄마는 없고 자신을 괴롭히는 언니 둘과 우표외에는 세상사에 무관심한 아빠, 전쟁의 상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전직 군의관이자 잡일꾼 도거, 가정부 아줌마, 이상이 이 가족의 구성원입니다.
스틸라이프와 비슷한 시기에 읽었는데 보니 칭찬 문구나 탔다는 상의 목록이 거의 일치하는 책인데 제 감상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스틸라이프는 책 소개에 코지 미스터리라고 나와있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할만큼 잘 만든 미스터리이고 파이바닥은 책 소개에 코지 미스터리라고 나와있지 않아도 아~그 장르구나 싶더군요.
아무리 코지 미스터리라고 해도 마지노 선이 있거든요. 이 책은 그 점에서 그 선을 넘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점이냐면 주인공이 너무 어립니다. 이 어린 주인공을 무슨 수로 자꾸 살인사건에 엮을건지도 문제지만 자연스럽게 역어간다 하더라도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초등학생도 아닌데 어른들 다 두고 11살짜리가 살인사건을 혼자서 해결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감정이입하기는 어렵더군요. 아무리 조숙하고 머리가 좋아도(좋은 정도가 아니라 천재 수준이라고 해도) 11살인데요. 요즘 애들은 성장이 빨라서 우리때보다 더욱 조숙하다고 하지만 저희 11살때를 생각하면 글쎄요. 조숙함 정도라 아니라 조로증 수준이거든요. 거기다 이 시대는 1950년대가 배경인데 말이죠. 전화기조차 일상생활에서 쓰이지 않는 시대인데...
사실 구조나 스토리 자체도 약간은 청소년용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깊이가 좀...이 장르에서 깊이를 논한다것 자체가 말이 안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너무 얄팍해서 좀 싱겁더군요.
둘째로 쓸데없는 화학이 너무 많이 나와요. 주인공이 화학광인데다 살인사건이 독이라서 그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지 몰라도 별반 필요한 얘기가 아니었는데 지나치게 많이 나오더군요.
셋째로 중간에 아버지가 과거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너무 길고 장황해요. 유명한 우표라는것만 알면 되는거지 그 우표의 기원까지 알 필요는 없거든요. 그 우표의 과거를 알아서 뭐합니까. 중요한건 그 우표가 무지 귀해서 살인을 불사할 정도라는 것 정도만 독자에게 전달하면 될것을 왜 굳이 쓸데없는 우표의 내력을 만들어서 장황하게 설명해 주는지 이해가 안되요. 더구나, 살인죄로 잡혀서 유치장에 가기 직전에, 면회가 안되는걸 억지로 밀고 들어가서 간신히 만나는 그 중요한 순간에.
이 장면도 이해가 안되는게 엄마도 없고 자신은 파산했다고 하고 큰 딸이 이제 겨우 16살인데, 이 딸 셋만 두고는 부하인 도거가 자신때문에 살인을 저질렀을까봐 살인죄를 가짜로 자백한다고요? 무슨 이런 무책임한 인간이 다있다니? 싶더군요.
과거에 우표때문에 자신이 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제에 우표수집에 열을 올리는것도 이해가 안가긴 마찬가지고요. 저라면 그런 과거가 있다면 우표따윈 거들떠 보기도 싫을텐데. 무슨 자학인가 싶더군요.
쓸데없이 장황한 설명, 주인공의 지나치게 어린 연령, 공감하기 힘든 배경인물들, 어정쩡한 시대 등등 어느것 하나 마음에 들지가 않더군요. 같은 상을 탔다는 스틸라이프와 비교하니 더 그랬구요.
이걸 왜 양장본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준으로 봤을때 청소년용으로 분류해도 무난할 정도인데. 그에 비해 스틸라이프는 오히려 소장할만한듯해서 양장본으로 만들어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봤는데요. 아니, 애초에 셜록 홈즈 정도의 고전도 아닌데 추리소설에 무슨 양장본이람, 책값 올라가게스리 말이야-가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내용과는 별개로 책의 모양과 디자인 자체는 아주 좋습니다. 양장도 좋고요, 표지도 색감 예쁘구요, 심지어 종이질도 너무 좋습니다. 책 디자인과 편집은 잘하셨더라구요. 종이 색깔과 글자 크기도 좋더군요. 약간 큰 폰트가 청소년용의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책 모양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이 더 속이 쓰리더군요. 이 책은 처분할거고 스틸라이프는 보관할건데 이 책은 예쁘고 스틸라이프는 그렇게 예쁘지 않다는 점 약간 실망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