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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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작품의 강점은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배명훈(소설가)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이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 들어야 한다. 삶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면서 마지막 조각을 채우는 무수한 감정의 분위기. 어느 새 마음의 끝자락에 사랑이 매달렸다. 때로는 튀어 올랐다가 어느 순간 내려갔다. 그래서 사랑은 쨍하게 아름다운지 모른다. 포물선을 그리니까.

 

오랜만에 김초엽의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기이한 경험을 했다. 시공간적으로 떨어진 이야기에 쉽게 가닿을 수 없다는 막연함이 쨍하게 부서졌다. SF적 상상력이 신선하고 경이로웠다. SF가 그리는 세계는 먼 곳이며 따라서 우리 또한 먼 곳을 향하게 된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를 확대해보면 어떤 세상일까? 배명훈 소설가의 표현을 빌려보면 과학소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하며 사람들 코앞으로 좀 더 가까워져야 한다. 그래야만 쨍하게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비록 흔한 포물선을 보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먼저 관내분실을 읽은 것은 2회 한국과학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라는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SF가 그리는 미래사회를 둘러싼 문제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지금도 현실적인 문제이며 다가올 우리의 미래에도 여전히 불안함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미래의 도서관에서는 더 이상 책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책 대신 죽은 사람들의 정보가 데이터화 되었다. 그러니까 죽음을 저장하고 검색하는 마인드 도서관이다. 문제는 마인드로 검색이 가능한데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지금의 삶의 방식과 비슷하게 의미를 가지는 미래의 삶에서도 혼란스러움을 피할 수 없다. 만약에 혼란스러움을 야기하는 미래사회의 불투명함을 찾고자 하는 결론에 이른다면 죽음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분실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실험은 어떤 문제를 수사의 흐름 속에서 관계를 이끌어간다. 소설은 임신이라는 아주 민감한 시기에 지민이 죽은 엄마(은하)의 마인드를 잃어버린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와 관계를 깊이 파고들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엄마에게 딸은 원죄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상처로 남는다. 이를 둘러싼 갈등으로 엄마의 비밀이라는 묵직한 질문을 하게 되고, “엄마는 마치 없는 사람 같았다.”(251p)는 답을 하게 된다. 엄마의 세계를 통해 우리 시대의 여성의 존재와 상처를 천천히 짚어보면서 ‘82년생 김지영이 선명하게 시선에 들어올 정도로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실존의 문제와 현대문명에 스며든 절망감 때문에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라는 단편에는 지구를 떠나 마을이라는 행성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을은 지구와 다른 세상이었다. 서로를 미워하지도 않고 간섭하지도 않으며 여성이라고,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한 행복을 누리고 산다. , 성인식을 통과해야만 한다. 바로 시초지(지구)로 순례를 떠나는 것이다. 지구에는 아름다운 신인류와 그렇지 못한 비개조인으로 서로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살아간다. 이러한 구별 때문에 지구는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순례자들이 지구로 떠나는 이유는 뭘까? 떠나는 것 못지않게 커다란 의문은 순례자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지옥을 좋아할 리 없다는 점에서 불행한 지구. 그런 만큼 순례자들이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어쩌면 순례라는 과정은 자기의 트라우마를 들여다보는 것인지 모른다. 마을에는 트라우마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행복하다. 겉만 보면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행복하다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역설적인 의미에서 보면 살아 있음에도 사실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유령과도 같은 희미한 존재로 사는 게 과연 우리가 바라는 행복일까?

 

지구가 그토록 모순 덩어리라고 해도 외롭고 쓸쓸한 풍경이라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성보다는 감성이 우세하다는 것이다. 마을에서 아름다움은 절대적이다. 그러다보니 서로에게 고통이 없어야하며 어떠한 아슬아슬한 낭만적 감성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지구에서 아름다움은 상대적이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며 서로의 보이지 않는 눈물까지 헤아릴 줄 안다. 미래라고 해서 사랑이 유토피아와 같다면 거부감이 생길 것이다. 사랑은 어디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더러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보다 많이 행복할 것이다.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 사랑이 그냥 좋아진다.

 

미래에는 분명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텅 빈 우주를 여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문득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어느 과학자가 말했던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과학자에 따르면 태양은 오렌지 크기이며 지구는 모래 알갱이만 하다는 것. 모래 알갱이에 그 많은 생명체 살고 있으며 인간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주에서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기적에 가깝다. 이러한 기적이 가능한 것은 우주가 벌레들이 파먹어놓은 구멍 뚫린 거대한 사과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구멍은 곧 우주의 공간과 공간 사이이며 이것을 연결하는 웜홀 통로의 발견으로 우주 개척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웜홀 통로 이전에도 딥프리징, 워프 버블이라는 기술이 있었으나 어느 것 하나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이유인즉,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존재의 나약함이 훨씬 투명해졌다.

 

지구에 있는 안나가 불가능함을 모를 리 없다.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남편과 아들이 있는 슬렌포니아 행성계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에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눈물이 맴돌았다. 과학적으로 보면 그녀의 도전은 비현실적이게도 망상에 가깝다. 그러나 계속에서 망상을 듣고 있으면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 아닐까, 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숙명적인 고통을 차라리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같은 우주가 아니라 같은 하늘이라는 것, 사랑은 정확해야 한다. 그녀가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밖에도 스펙트럼, 공생가설, 감정의 물성,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단편들도 우리가 계속해서 지구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아 나선다. 특히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에 나오는 판트로피(Pantropy)’가 아른 거렸다. 터널 프로젝트로 불리는데 우주 환경에 인간의 신체를 맞추는 것이다. 인간이 적응과 선택을 통해 진화해왔으니 우주 환경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얼마든지 우주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우주 환경에는 지구에 없는 것이 너무 많을 정도로 있다. 바로 무중력이다.

 

어쩌면 무중력의 삶은 인간이 바라는 환상일 것이다. 그러나 중력이 없다보니 작가의 말대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이해보려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가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는 게 무의미할 정도이다. 작가의 단편집을 읽고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쨍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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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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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사랑' '', 이 세 단어의 유사성을 토대로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이기주, 언어의 온도

 

온도(溫度)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물체의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를 말합니다. 기온에 따라 우리 몸의 온도는 본능적으로 싹둑싹둑 오르고 내립니다. 그런데 살아오는 동안 마음에 담겨지는 온도는 어떤가요? 체감온도라고 해서 마음속에서 흩어지거나 부서집니다. 가슴 한 편에서 희노애락의 투명한 감정들이 생겨납니다. 그런가하면 이름 모를 감정도 있습니다. 기쁜 일들을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마냥 그렇지 않습니다. 늘 슬픔이 하나 둘 따라다니기 마련이니까요. 때로는 슬픔의 밑바닥에 가라앉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 이상으로 그리움으로 뭉클해집니다.

 

한지혜의 산문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으면서 괜찮다라는 온도를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온도계로는 체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괜찮다, 라는 혼잣말을 하려면 지구를 몇 바퀴 돌고 돌아야 합니다. 살아온 과거를 애틋하게 기억하면서 내뱉는 그 말에 담긴 온도는 정말이지 괜찮다, 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고맙고 미안한 지난날을 위로하는 것은 삶의 지문(指紋)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미생(未生)과 완생(完生)의 팽팽한 슬픔을 견디며 다시 살아보겠다는 삶의 가장 긍정적인 순간에 가장 긍정적인 말, 괜찮다는 말은 과거도 현재도 아니며 미래처럼 들렸습니다.

 

작가의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알게 됩니다. 괜찮다는 말은 삶이 간직할 만한 소중한 감정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삶을 지탱하는 부드러운 리듬이 되기도 합니다. 가령, 삶이 도통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 작가로서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출발을 하기도 전에 한 아이의 엄마가 짊어져야 할 가사노동이라는 현실이 역주행하면서 자신에게 무섭게 달려왔습니다. “아이는 어쩌고?”라는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자신의 무력함을 쉽게 원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상은 작가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외칠 수밖에 없다는 울분이 너무나 부조리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습니다.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고민하는 순간을 생략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작가로서의 의무와 권리라는 가속 페달을 밟습니다. 고민하는 순간, 작가의 감정이 무너지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남들과 달리 앞으로 달린다고 해서 삶의 어떤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비록 답을 못 찾았다거나 모를 수 있더라도 더 이상 원망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일단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해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괜찮다는 믿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시포스의 불행이 아니라 시시포스의 행복이라는 에너지로 충만해졌습니다.

 

작가의 골목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가 내리고 단풍잎이 떨어지고 바람이 붑니다. 모르는 사람이 내 앞에서 말을 걸면 낯선 느낌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눈은 친숙한 사람이 말을 건네는 듯해서 오히려 온기(溫氣)가 그대로 전해집니다. 사람에게서 받지 못한 위로를 아낌없이 받아서일까요? 마음껏 울고, 웃고 싶었습니다. 살아온 날들의 씨줄과 살아갈 날들의 날줄이 아픈 마음에 수를 놓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괜찮은 마음이 부드럽게 꽃을 피우며 삶을 견디게 합니다.

 

오늘을 사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나의 온도는 몇 도인가? 라는 물음과 같은 골목에 서 만나게 됩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에 따라다닙니다. 적어도 차가운 사람은 아니길 바라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누군가에게 온기를 조금이라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온기가 곧 사랑이며 삶이니까요. 작가의 소박하고 담백한 생활언어에서 인간의 문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문법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다보면 운명이라는 커다란 그림이 완성됩니다. 이 책을 통해 작가는 인생의 토정비결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참 괜찮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운명은 사주에도 타로에도 없습니다. ‘발열(發熱)하는 인간참 괜찮은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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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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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려버리면 얼마나 통쾌할까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걱정을 하다 보니 심리적인 부담감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놀 때 놀아야 하는데 제대로 놀지 못하고 있지요. ‘놀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라고 합니다. 어쨌든 무슨 일이든지 즐겁게 해야 하는데, 정작 오늘내일이 지루하고 답답할 지경입니다. 잠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편히 자고 싶어도 그러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고민 때문에 가슴이 숨 막히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찌근거리고 아픈 나머지 제대로 잘 수도 없습니다. 불면의 고통을 참아내려고 이불을 뒤집어쓰며 최후로 버텨 봐도 속수무책입니다. 끝내는 이불을 발로 확 걷어차고 맙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번 당하고 마는 ‘이불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이불킥을 하지 않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먼저 이불킥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불킥을 하게 되는 과정은 아주 단순합니다. 몸에 난 상처는 눈에 보이니까 약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마음이란 게 워낙 복잡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의 병이 자신도 모르게 쌓이고 쌓입니다. 어떻게 아프냐고 대답을 요구하더라도 왜 아픈지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이불킥의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이야기하다보니 몸을 조심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합니다. 몸이 추우면 이불을 덮다가도 몸이 뜨거워지면 이불을 걷어차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이 마음의 온도에 따라 얼마든지 차가워지고 뜨거워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민을 가지고 이불킥의 심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불킥의 대부분이 무언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5단계’로 올라갑니다. 바로 생리 욕구, 안전 욕구, 애정. 소속 욕구, 자기 존중 욕구, 자기실현 욕구입니다. 앞 단계의 낮은 욕구에서 다음 단계의 높은 욕구로 올라가게 되는 모양으로 피라미드와 같습니다. 높은 욕구일수록 성공 가능성이 낮습니다. 이러다 보니 욕구에 대한 불만이나 회의가 생겨나며 부족한 것을 꼭 획득하려고 합니다. 매슬로의『존재의 심리학』따르면 ‘결핍동기’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결핍동기에 집착할수록 두려움과 의심으로 ‘흐릿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시각각 감정이 바뀔 때마다 이불킥을 날리며 감정을 토해내는 것은 흐릿한 렌즈를 깨뜨리는 것일 뿐 결코 건강한 치료는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마음이 건강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슬로가 주장하고 있는 ‘성장동기’입니다. 성장동기는 결핍동기와 달라서 뭔가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흐릿한 렌즈가 아닌 선명한 렌즈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흐릿한 렌즈는 우리의 이성을 혼란스럽게 해서 정신을 갉아먹습니다. 하지만 선명한 렌즈 덕분에 우리는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을 더욱 효율적으로 지각하고 현실과 더욱 편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불편한 관계를 가진다고 하면 우리가 자아실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현실과 편안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행복해보입니다. 이렇듯 성장동기는 우리가 가지고 있으나 드러낼 수 없는 잠재력을 최고로 빛나게 하기 때문에 ‘경이로운 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인생이 허무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됩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금세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누군가 삶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니 실패하더라도 끝가지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어떻게든 살면서 버텨야 하니까요.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실망이 커지고 최선은 줄어든다는 것,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낮에도 우울하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삶의 무거움으로 죽음이 가벼워지는 이 시대. 이왕이면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침’과 ‘죽음’을 서로 나눠보면 그리 좋아할 사이는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연옥을 통과하다 보면 왜 좋을까? 라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김영민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앞서 말한 경이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침없이 ‘죽음킥’을 날리기 때문에 삶이 ‘확’ 달라지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답답한 속이 한바탕 시원해지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죽음이라는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죽음으로 선택하는 것이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그 쓸쓸한 마음 한 구석에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무의미하게 사는 고통을 끝내겠다는 것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순간, 죽음에 대한 연민이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더라도 고통의 탈출구로 여기는 방법을 한 번쯤 고민하게 됩니다. 과연 죽음이란 이런 것이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이유인즉,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 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p8).

 

죽음이 오히려 삶의 기반이 되는 감각이라는 문장을 되새겨보았습니다. 인생을 한 순간 사라지게 하는 죽음이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절망했는데, 저자의 버티는 삶을 통해 절망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삶의 또 다른 열정을 되찾는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매일매일 어느 한 순간 내가 죽음을 생각하게 된 절박한 이유입니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닙니다. 거침없이 죽음킥. 죽음도 더 이상 과거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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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와 소음 - 미래는 어떻게 당신 손에 잡히는가
네이트 실버 지음, 이경식 옮김 / 더퀘스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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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와 여우 중에 누가 예측을 잘 할까요? 많은 동물 중에서 고슴도치와 여우가 주인공이 된 까닭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 때문입니다. 아르킬로코스 시인은 “여우는 사소한 것을 많이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중요한 한 가지를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 20세기 영국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해 쓴 에세이를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제목으로 빌려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사상가들을 고슴도치형과 여우형으로 구분했습니다. 고슴도치형이 플라톤, 헤겔이라면 여우형은 아리스토텔레스, 괴테입니다.


다시 앞으로 가서 고민했던 문제를 살펴보면, 예측은 어떤 선택을 하는데 있어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왕이면 좋은 선택을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입니다. 그러나 좋은 선택이라고 여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쁜 선택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반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선택을 하는데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을 합니다. 그중에서 예측도 많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엉터리 예측을 하면서 낭패를 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오랫동안 예측의 성공률이라는 퍼즐 조각을 연구한 전문가에 따르면 여우가 고슴도치보다 예측을 상당히 잘한다고 합니다. 일상의 여러 문제를 고슴도치는 이론적이며 구체적으로 자신만만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우는 경험적이며 관찰적으로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조심스럽게 생각한다는 게 우유부단하다고 여겨지는 문제입니다. 혹, 자신감과 확신이 없어 보인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도 어떤 문제에 대한 예측이 무척이나 궁금할 때 고슴도치가 아닌 여우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여우에게 부탁하는 걸까요?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책이 바로 네이트 실버의『신호와 소음』입니다. 네이트 실버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통계학과 미래 예측의 전문가입니다. 그런 만큼『신호와 소음』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예측이라는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우’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여우의 원칙 3가지는 문제를 해결하는 매력적인 활동으로 우리의 생각의 방향을 충분히 바꾸게 합니다. 바로,

 

여우의 원칙1: 확률적으로 생각하라

여우의 원칙2: 날마다 새로운 예측을 하라

여우의 원칙3: 집단지성을 활용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어떤 믿음은 예전에 한 번 풀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믿음은 처음 본 것이라 어떻게 믿어야 할지 어렵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살펴보면 우리의 믿음은 ‘확률적 믿음’에서 비롯되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믿음이 확률 100%라고 하면 우리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믿게 됩니다. 반면에 믿음이 확률 0%라고 하면 우리는 전혀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확률 100%에 가까운 것이지 정확하게 확률 100%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스플래쉬>


저자가 말하는 확률적 믿음에 따라 매일 아침 해 뜨는 것을 본 사람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사람은 어느 정도 예측을 할 수 있어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뜬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내일 아침 해가 뜨지 않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내일도 해가 뜬다고 확률 100% 믿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예측을 하더라도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확률적 믿음이 반대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이 몇 백 만년에 일어날 정도여서 확률 0%이라고 하면 우리는 굳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확률 0%에 가깝기 때문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무엇을 예측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 이면에는 그만큼 세상을 불확실성이 지배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예측이 빗나가고 있습니다. 보통 뭔가 위험하다고 했을 때 우리는 위험에 미리 대응할 수 있습니다. 포커 게임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카드를 보고 베팅을 하게 되니까요. 이렇듯 위험은 어느 정도 계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확실성은 다릅니다. 한마디로 측정하기가 어려운 위험이라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위험보다 불확실성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는 머릿속을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예측하려고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요? 하루에도 정보의 양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으며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엄청난 양의 정보를 손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정보의 양이 많다고 하면 불확실성은 줄어들어는 게 당연시됩니다. 다시 말하면 정보가 많을수록 우리는 스마트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예측하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일찍이 엘빈 토플러는『미래의 충격』에서 ‘정보의 과부하’를 말하면서 정보가 홍수가 넘쳐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경고했습니다. 즉, 정보의 중독으로 인하여 우리의 판단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정보의 오염이 심각해져 우리가 멍한 상태에서도 습관적으로 정보를 클릭하다 보니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에 대한 유연한 사고입니다. 정보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 때문에 정보를 차단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결될 정도로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아주 효과적이며 설득력 있는 방법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정보의 대한 몇 가지 정의를 살펴보면,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은 “정보란 잡음(noise)이 배제된 메시지 신호(signal)”라고 정의했습니다. 반면에 그레고리 뱃슨(Gregory Bateson)은 “다름을 만드는 모든 차이가 정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전자가 정보를 전달하는 형식이라면 후자면 정보의 내용을 말합니다. 저자는 이들의 정의를 통합하면서 정보를 ‘신호’와 ‘소음’으로 구별했습니다. 신호가 유용한 정보라고 하면 소음은 불필요한 정보입니다.


정보의 수량보다 내용이 늘 중요하지만 이제는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흔히 정보를 당연하게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보가 곧바로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호와 소음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현실의 한계를 제대로 직시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보를 적극적으로 걸러내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소음을 가려내거나 제거할 수 있는 능력,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예측을 할 수 있는 능력, 확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등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능력에 따라 우리는 “신호는 진리다.”라는 새로운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불확실성을 판단하기 정보에서 새로운 예측을 이끌어 내는 방법으로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베이즈 정리는 조건부확률과 관련이 있습니다. 베이즈 정리는 세 개의 값( 임으로 X, Y, Z로 표시)을 추정하여 ‘사후확률’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X는 사전확률, Y, Z는 각각 새로운 사건이 발생할 확률입니다. 우리는 경험적 믿음에 따라 사전확률(X)을 과대,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어떤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이즈의 정리의 매력은 새로운 정보(Y, Z)를 추가하면서 우리의 판단을 상당한 수준으로 확신하게 만듭니다. 적어도 우리가 틀릴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실행하면서 우리의 예측이 좀 더 정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는 정직하게 말하면 불확실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빅 아이디어(big idea)’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이야말로 ‘스몰 아이디어(small idea)’이겠지요. 스몰 아이디어는 단순하게 현재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온갖 소음을 아무런 판단 없이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빅 아이디어는 끊임없이 신호를 파악하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가능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번쩍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확률적으로 생각하면서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한 결과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생각, 새로운 미래가 탄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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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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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왜 피부색이 다를까요? 과학적으로 피부의 어두운 물질인 멜라닌 세포(melanocyte) 때문입니다. 피부는 햇빛 속에 포함된 자외선에 약합니다. 그래서 피부의 멜라닌 세포가 자외선을 차단하는 일종의 보호막을 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자외선의 양이 많을수록 피부색은 검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자외선의 양이 적을수록 피부색은 하얗게 됩니다. 문제는 피부색에 따라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인종(人種)은 주변 환경에 적응한 결과입니다. 인종이 다르기 때문에 피부색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부색으로 하나만으로 인종을 구별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 사회역학의 관심을 대중적으로 불러일으킨 김승섭은『우리 몸이 세계라면』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앎’에 질문하며 새로운 현재적인 가치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피부색으로 인종을 전체적으로 설명하다 보면 환원주의(還元主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환원주의는 어떤 현상에 대한 여러 원인 중에 어느 하나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령, 피부색이 검다고 해서 모두 흑인종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피부색이더라도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인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 몸에 새겨진 인종에 대한 지식을 사회역학으로 전복하고 있습니다. 사회역학이라는 학문은 어떤 문제에 대한 사회적 원인을 해독하는 것입니다. 인종을 피부색으로 구별하는 것도 모자라 ‘한 방울의 법칙(One drop rule)’은 인종이 사회학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사실을 당혹스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방울은 ‘피(blood)’를 말합니다. 이 책에는 오랫동안 자신이 백인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여행을 갈 목적으로 여권을 만들다가 출생증명서에 흑인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여성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유인즉, 그녀의 몇 세대 부모에게 흑인 피가 32분의 1이상 섞여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도 흑인 피가 32분의 1이상 흐른다는 근거에 있었습니다. 정작 그녀의 몸에 32분의 29에 해당하는 백인 피는 무시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인종에 대한 계산은 비과학적이며 사회적으로 ‘인종차별’이라는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 때문에 사회적으로 차별을 당하게 되면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차별을 당한 사람 스스로 미래가 없는 열등한 사람,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더구나 계속적으로 차별을 당하게 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올라가면서 우리 몸 또한 비정상이 됩니다. 인종에 대한 콤플렉스, 트라우마와 같은 모든 부정적인 사실들은 사회적 폭력에서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몸에 둘러싼 문제를 ‘몸’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의 바깥이 아닌 안쪽에만 찾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몸의 상처를 몸 내부에서 찾아 치유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픈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픈 몸을 치료하면 건강한 몸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몸속의 암을 수술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는 ‘암’이라는 결과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암의 발생 원인을 제대도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나쁜 습관으로 인해 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자는 몸에 각인된 불편한 진실을 다양하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과학의 언어’로 질문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언어는 경험에서 얻어졌다고 하더라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상식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경험을 판단의 언어라고 한다면 과학의 언어는 데이터에 있습니다. 판단의 언어는 경험에 따라 직관적이며 틀릴 수 가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언어는 데이터에 따라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저자의 표현을 따라가다 보면 판단의 언어는 천동설(天動說)이며 과학의 언어는 지동설(地動說)이라는 견해를 알게 됩니다. 즉,

 

그래서 더욱, 오늘날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이론이나 직접 경험했다는 이유로 확신하는 사실들 역시 우리 시대의 천동성일 가능성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어야 한다. 지금 내 생각이 틀린 것일 수 있다는 비판적 사고는 인류가 과거의 상식과 맞서 싸우며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던 거대한 원동력이었습니다(p 317).


<언스플래쉬>


그렇습니다. 지동설은 과거 천동설과 맞서 싸우며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이해하려는 원동력에서 나왔습니다. 저자는 인간(몸)과 사회의 역학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지식이나 상식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실제로는 이것이 마치 천동설과 다르지 않아 인간의 감각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적 약자(弱者)들에게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는 차별적인 지식에 대해 수많은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지식을 통해 사회적 약자의 아픈 몸을 예전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회적 약자의 고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더더욱 어제 없던 것이 오늘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몰랐을 뿐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오랫동안 그들을 차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는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불편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과연 정상적인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정상적인 사회는 우리 모두 함께 사는 세상입니다. 정의롭고 평등해야 합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가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법과 제도만큼이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정의롭고 평등한 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사회역학을 공부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절박한 문제를 연구하는 지식인입니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이야기하다보니 자신마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고뇌를 저자는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식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화려한 스펙이 아니라 진정한 열정과 용기가 아닐까요?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지식인의 표상』에서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양심을 말했습니다. 지식인의 표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문가적 태도이며, 다른 하나는 아마추어적 양심입니다. 전문가적 태도는 지식인이 권력이나 권위에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마추어 양심은 권력이나 권위에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또한 전문가적 태도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라면 아마추어 양심은 해야 할 일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누구에게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저자는 부조리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들과 아픔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합니다.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그들의 고통을 결코 쉽지 않는 과학의 언어로 꺼내고 있습니다. 이유인즉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구가 계속해서 도는 것처럼 그의 아마추어적 양심이 한순간에도 멈추질 않길 바랍니다.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꼭 필요한 관심과 열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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