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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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전체를 바라볼 때 누구에게나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언제 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때로는 몰랐다는 것을 핑계 삼아 너무 당연하게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진정으로 내 삶을 살고 있을까, 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으로 인해 삶이 바뀌는 기구한 운명 같은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결혼식 날에 형의 장례식이 거행되어야 하는 비현실적인 슬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애도가 끝나고 나서는 ‘가장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렸습니다. 가장 경이로운 세계에서는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왔던 가치들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진실은 ‘골드버그 장치’와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일들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세계 3대 미술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곳입니다. 하루 만에 미술관을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작가는 그곳에서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경비원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뉴욕커>에서 일한 화려한 커리어를 생각한다면 경비원은 비효율적인 직업으로 보입니다. 형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경비원이라는 모순을 선택했으리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바쁜 일상에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번아웃에 빠져 살아갈 길을 잃어버린 채 그저 삶을 견디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삶의 고단함과 무게감에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존재감이 없을 때마다 공허한 실망감을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상처를 경험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면서 다시 돌파구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살아보면서 예전과는 다른 아름다운 삶을 사는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매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경비원은 그가 일하고 싶었던 정말이지 단순한 일입니다. 문제는 단순한 일을 한다고 해서 삶을 단순한 자세, 즉 수동적인 자세로 하는 것은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습니다. 비록 경비원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바운더리 이상은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며 시간을 흘려보냈을 것입니다.


이 책에서 작가가 메트로미술관에서 예술작품과 씨름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경비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예술작품을 눈으로 마주하면서 흡수합니다. 남들에게 없는 예술작품을 향한 특별한 열정과 애정이 가득합니다. 그는 평범한 경비원이었지만 예술에 대한 통찰력으로 메트로미술관의 예술작품을 두루 살핍니다. 예술이 던지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며 예술을 가까이에서 이해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전문가들의 견해는 고차원적입니다. 문제는 예술의 문외한들에게는 예술적인 분석보다는 예술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이해하는데 있습니다. 때로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바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질문에 맞는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작가의 예술에 대한 메시지를 곱씹으며,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지니는 가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켈란젤로의 걸작<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유명합니다. 만약에 이러한 걸작을 단편적인 정보와 지식만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예술이 말하고자 의미를 배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이 조르나타 (giornata)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탈리어로 조르나타는 ‘하루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는 하루하루가 마치 모자이크처럼 모여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단순합니다. 하지만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고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인생이란 팍팍한 현실을 버티는 용감한 방법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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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2-20 0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 자신의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위대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찜해 둔 도서인데, 도서 내용을 이미 상당 읽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해주네요. 감사합니다.

오우아 2024-02-25 22:58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님, 감사합니다. 미켈란젤로의 조르나타 기법을 여러번 생각했습니다^^
 
사슴벌레 소년의 사랑 사계절 1318 문고 27
이재민 지음 / 사계절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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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슴벌레 소년이 있을까요? 얼마나 가슴 설레는 첫사랑이 있을까요? 누군가를 좋아하고 꿈꾸고 애틋하게 여기면서도 때로는 질투도 하는 이름 모를 짝사랑을 우리는 첫사랑이라 부르며 가슴에 아로새기며 잊지 못합니다.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더 아름다운 첫사랑은 인생을 살면서 단 한번 볼 수 있는 사랑의 맨얼굴이었습니다.


‘제1회 사계절 문학상 수상작’인 이재민의『사슴벌레 소년의 사랑』에는 첫사랑이 달맞이꽃으로 피어납니다. 시골에서 자란 중1 은수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소에게 먹이를 줘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온갖 꽃과 곤충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라 시골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은수는 마송리 약수터에서 묘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엄마와 함께 약수터에 갔는데 그곳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폐병에 걸린 순희 누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 순간 놀랍게도 가슴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여자 친구와는 사뭇 다른 사춘기(思春期)라는 독특한 에너지가 콩닥거렸습니다. 이 에너지는 짝사랑으로 물결치며 은수의 몸을 더욱 근질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은수는 이성에 눈을 뜨고는 누나에게서 달맞이꽃 향기를 맡으며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지 소설을 읽다보면 이 책의 제목이 달맞이꽃 소년의 사랑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습니다. 은수는 누나를 사랑한 나머지 달맞이꽃이 되었으니까요. 누나는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별이 아니라 단 하나 밖에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누나는 은수에게서 달맞이꽃 향기를 맡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은수를 자신보다 9살 어린 정(情)이 많은 소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누나에게는 결정적으로 남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수는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타오르는 질투심 때문에 누나의 남자 친구를 ‘쪼다’라는 말로 뭉갰습니다. 또한 누나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거나 속 썩이는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더 이상 달맞이꽃으로 맞설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은수는 “나는 누나를 지켜주는 사슴벌레가 될 거야.”(120p)라고 다짐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강하고 멋진 보기보다 순한 곤충은 없었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은수처럼 되고 싶지 않을까요? 여기에 사랑에 대한 해롭지 않은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은수에게 사랑은 사슴벌레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슴벌레는 은수 자신인 동시에 짝사랑하는 누나의 분신이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사슴벌레에 집착하고 소유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사랑 때문에 혼란스러운 은수의 성장통이 무엇이며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누나가 말했듯이 “진정으로 사슴벌레가 좋다면, 사슴벌레가 자유롭게 살게 해 주어야 하는 거야.”(140p)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를 구속하는 즐거움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주는 아름다움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슴벌레 소년의 사랑』을 다시 읽었습니다. 그 사이 20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거리는 가까워졌으나 깊이를 재는 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책을 하거나 숲길을 거닐다가 상수리나무에 있는 사슴벌레를 발견한다면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과거를 그리워한 나머지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변해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생각하게 할 것입니다. 비록 이보다 더 아픈 고통이 없더라도 사랑은 영원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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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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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래서 네가 말한 그 도시가 무척이나 궁금한 나머지 나 또한 그 도시를 상상하며 한걸음씩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누구나 한 번쯤 답답하고 반복적인 이 도시를 탈출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으며, 이 도시에서 특별한 능력이 없이 톱니바퀴처럼 살고 있다는 무력감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네가 그 도시에 있으니 더욱 욕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도시는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여 기묘하고 낯설었다. 어쩐지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비로소 믿을 수 있는 도시였다. 시계탑에는 시곗바늘이 없고 도서관에는 책 대신 오래된 꿈들이 있다. 그 도시에서는 누구나 그림자가 없다. 더군다나 너는 분명 열여섯 살 소녀 모습 그대로 그 도시에 있었는데 정작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던 순간의 당혹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결코 간단치 않은 질문을 만나게 된다. 그림자를 포기하고 진짜 나를 만날 것인지, 진짜 나를 포기하고 그림자로 살아갈 것인지를 되묻게 된다. 우리는 살아서는 그림자를 데리고 있다가 죽어서는 영혼으로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그림자가 존재 자체를 고민하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이별을 두려워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다른 무엇이 훨씬 더 중요하고 절실하게 느껴진다. 정말로 우리는 흘러가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여전히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생각하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겠음을 고독하고 공포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 이유 없음이 다름 아닌 우리 존재의 한계 때문인지 모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네가 말한 도시에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놀라운 네가 말한 도시에서 우리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산다. 기어이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들어왔으니 우리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불확실한 벽을 통과하고 마주하게 된 도시는 우리에게 진짜 나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림자를 데리고 사는 현실이 얼마나 허무할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허무는 마치 뿌리 없는 식물 같은 그림자였다. 허무로 가득 찬 현실에서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림자를 벗어던져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다. 허무는 불확실한 사랑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네가 있는 그 도시에서 우리는 그림자가 없었다. 대신에 진짜 사랑이 환상적으로 그려졌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림자를 구원하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외면했던 그림자는 우리의 분신이었던 셈이다. 그림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순간, 뒤집어 말하면 그림자의 말이 더 진실처럼 들렸다. 도시에 있는 게 가짜고 도시 밖이 진짜라는 것이다. 네가 말한 불확실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말 그대로 불확실해졌다. 오직 확실한 것은 네가 말한 그 도시가 사실은 ‘놀이공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 갑자기 네가 말한 도시에 대한 감정은 모호해졌다. 그림자를 믿어야 할지, 아니면 네가 말한 도시를 믿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작가의 말대로 과연 이쪽이 아닌 저쪽 세계에서 사는 게 옳은 일인지 의뭉스러웠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 또한 네가 말한 도시에서 ‘꿈 읽는 이’기를 그치고 그림자를 가진 인간이 되고 싶었다. 결국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죽은 것으로 여겨져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과는 정반대여서 네가 말한 도시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현실과 비현실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았다. 때로는 현실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환상도 필요한 법이다. 따라서 작가가 보여주는 비현실은 결코 비현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리 내부 속에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현실과 비현실이 흐르는 강물처럼 뒤섞이며 평범한 일상이 되는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나와 너, 그리고 고야스와 옐로 서브마린 소년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감을 찾았다. 알고 보면 납득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에서 나는 그림자일 수도 있고 동시에 꿈 읽는 이라는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작가의 혜안을 빌리자면 ‘백 퍼센트 마음’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마음의 경계였다. 어쩌면 네가 말한 도시는 우리가 열망하는 순수가 아니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순수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에게도 불확실한 벽을 통과할 수 있는 특별한 희망이 생겼다. 백 퍼센트 마음으로 살아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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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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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히든 피겨스」(2016) 를 보면서 가슴 아픈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캐서린이 화장실로 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멀쩡한 여자 화장실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그녀는 일하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는 800미터를 뛰어 다른 건물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유색인종(흑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유색인종 화장실만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감독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화장실 문제로 보여주면서 “나사(NASA)에선 모두가 같은 색 소변을 본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화장실이 어떤 곳인가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화장실은 꼭 필요한 장소입니다. 언제 어디서 일어날 줄 모르는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한 번은 반드시 가야할 공간입니다. 화장실이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존재의 무거움을 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화장실이 단지 간판으로 걸려 있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알 수 없습니다. 화장실이 어디에, 어떻게 있어야 하는지를 곰곰이 따져야 합니다. 화장실이 멀리 있거나 공간이 좁고 청결 태가 엉망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참아야 할 고통은 계속해서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볼 일을 보고도 왠지 뒤 끝이 좋지 못합니다.


화장실 같은 참사가 반복할 때마다 우리는 인간으로 실격을 당했다는 불편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뭔가를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 실격이라는 주홍 글자가 새겨지고 맙니다.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를 보며 김승섭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로 답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임상학자가 아니라 보건학자의 시선으로 타인의 고통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임상학자는 차트에 적힌 질병을 약으로 처방합니다. 반면에 보건학자는 질병에 스며든 사회 역학을 진단합니다. 질병을 개인의 잘못된 위생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환경을 원인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오줌권’ 투쟁을 계속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줌권은 말 그대로 화장실을 갈 권리입니다. 사회적 약자들 입장에서 화장실에 가는 것은 하나의 투쟁입니다. 가령,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화장실이 두렵습니다. 쉬는 시간이거나 교대 시간이 아니면 화장실에 갈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작업 인력이 부족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결국 화장실을 포기하고 오줌을 참는 게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하지만 노동자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방광염이라는 질병입니다. 이러한 방광염을 약으로 치료하면 일시적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고통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는다면 오줌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권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저자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기 위해서 공부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타인은 장애인, 여성, 해고노동자, 트렌스젠더, 성폭력 피해자, 세월호 유가족, 천안함 생존자 등 다양합니다. 이러한 타인은 우리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 들입니다. 우리는 보통 시스젠터(cisgender)입니다. 출생시 법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는 트렌스젠터(transgender)와 같습니다. 출생시 법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다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존재는 상대적으로 차별과 모멸감의 피해자가 되고 맙니다.


그들은 공기처럼 존재하는 차별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가해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그들은 사회적 약자라는 트라우마에 갇혀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었으며 그들의 상처 또한 아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슬프거나 동정심으로 끝나지 않는 현실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안타까운 참사는 계속 일어나는 데도 사회적인 변화가 없다는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플라톤은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만큼 불공정한 일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어떤 고통은 치료가 아니라 응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응답은 당사자의 고통에 찬 비명이 무엇인지 투명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자는 자기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오줌권이라는 말이 연구자의 언어인 동시에 정직한 언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유인즉, 당사자의 고통이 아닌 사회적인 고통으로 바라보게 되고 생각을 달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평등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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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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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근본적인 입장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타오르는 질문』에서 여성의 권리를 변호했다. 그러면서 거듭 자신은 ‘나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고백했다. 그녀의 고백을 떠올리면 세상에는 두 가지 페미니스트가 있는 것 같다. 좋은 페미니스트와 나쁜 페미니스트다. 좋은 페미니스트가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라면 나쁜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권리를 오히려 은근슬쩍 억압하고 만다. 결과적으로 나쁜 페미니스트는 우리가 원하는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비언 고닉의『사나운 애착』을 읽으면서 또 하나의 페미니스트를 생각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좋거나 나쁘다는 양가적인 감정으로 너무나도 쉽게 공감한다. 공감의 기준은 양심에 있다. 양심이 허락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좋은 페미니스트가 된다. 하지만 ‘사나운 애착’은 다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나운 페미니스트’여서 그렇다. 사나운의 사전적 정의는 획일적이지 않다. 성질이나 행동이 모질고 억세기 때문이다. 결코 좋다거나 나쁘다는 감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강렬함이 스며있다.


이 책에서 사나운 애착을 갖고 선택한 인물은 비비언 고닉의 엄마와 그녀다. 그들은 두 여인이면서 동시에 모녀(母女)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녀라는 애증이다. 모녀가 단순히 가족이라는 애착의 굴레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모녀는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관계다. 그들은 사소하거나 특별해 보이는 여러 가지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하니까. 때로는 커다란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엄마와 같이 있으면 불편하면서도 안전하다고 말한다. 끝내는 엄마를 “가장 오랜 친구”라고 여긴다.


하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사나운 애착의 실마리는 이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것이 아니라고 해서 방향이 달라지지 않았다. 실마리의 방향은 “난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그녀의 외침이었고 그것을 좀 더 가까이 듣고 싶다는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이 살아오면서 부대낀 거리를 동행하게 되었다. 생각하건데 거리를 걷는데 감사해야 했다. 만약에 공원에 앉아 그녀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면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생각하는데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불순분자’가 되는 데는 엄마의 영향력이 없지 않았다. 그녀를 낳고 온 몸으로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동시에 엄마의 억척스러움, 당당함 그리고 고통과 우울도 함께 그녀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엄마 또한 각자 삶을 살 권리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가 말한 그 권리의 내면에는 그녀 자신이 ‘몸’으로 배운 게 최선이었다. 문제는 몸이 감당해야 할 의무에는 정작 ‘자기 삶’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그녀는 단단하리라 믿었던 엄마의 몸이 어느 순간 산산조각 부서지는 것에 실망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없고 오로지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그녀는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욕망이 아닌 ‘영혼의 환상’을 가지고 결혼하였다. 그런데 결혼한 순간부터 영혼은 사라지고 여자라는 역할만 더 커졌다. 40년 동안 남편을 위해 음식을 하는 등 집안일을 하는 것에 대해 회의하면서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가사노동이 힘들다거나 불편해서 생기는 뾰쪽한 감정은 아니다. 가사노동을 누가 하느냐가 걸림돌이었다. 그녀는 집안일을 여자 혼자서 하는 것을 미덕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 책의 제목처럼 ‘사나운 애착’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사랑도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 남편이라고 해서 여자가 의무적으로 사랑해야만 하는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고통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삶. 두 여자가 걸어온 시간은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두 여자의 삶과 여전히 평행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나 계속해서 걸을 것이다. 단순히 그녀들을 더 알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두 여자의 삶과 만나는 지점에서 사나운 페미니스트가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사나운 페미니스트는 삶과 사랑의 불완전한 조각을 다시 맞추며 우리를 인간으로 타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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