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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니아 이야기
호아킴 데 포사다 지음, 안진환 옮김 / 시공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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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우화(寓話)를 통해 삶을 변화시키는 책들이 상한가이다. 기존의 성공에 관한 책에서 볼 수 없었던 재미와 감동이 읽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재치 있는 우화와 함께 솔직한 멘토는 성공의 체감도를 높여주고 있다.

이미『마시멜로 이야기』로 우리의 삶을 바꾸게 한 호아킴 데 포사마가 이번에는『피라니아 이야기』를 선보이며 다시 한 번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일러주고 있다. 앞의 책이 성공을 꿈꾸게 했다면 이 책은 서문에 나와 있듯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한다. 즉 성공하기 위한 실천적 방법을 제시하면서 실행하라고 한다.

 

그런데 피라니아가 뭐지? 피라니아는 이빨이 날카롭고 턱이 강하기 때문에 위험한 물고기이다. 또한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식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바다의 하이에나 같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은 피라니아에 대한 두려움이 과장된 탓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바다에 들어갈 수도 없고 피라니아를 잡을 수도 없게 되었다.

 

이처럼 이 책은 성공의 비결이 일곱 마리 피라니아를 잡는 것이라고 독특하게 말하고 있다. 그 첫 번째는 고정관념이며 두 번째는 모험 없는 삶이며 세 번째는 목표 없는 삶이며 네 번째는 부정적 감수성이다. 다섯 번째는 질문과 요구 없는 삶이며 여섯 번째는 열정 없는 삶이며 마지막으로 실행하지 않는 삶이다.

 

돌이켜보면 일곱 마리 피라니아는 우리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살다보면 숱한 현실의 벽을 만나기 마련이며 이런 저런 변명으로 은근슬쩍 넘어가기 일쑤이다. 그만큼 머리와 가슴이 가까이 있지만 머릿속의 생각을 가슴 밖으로 내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오히려 성공에서 멀어지고 만다.

 

이 일곱 마리 피라니아 중에서 네 번쩨 피라니아를 우선적으로 잡고 싶어졌다. 저자는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 반응하는 개인의 회복하는 정도에 따라 세 명으로 나누고 있다. 즉 민감한 사람, 탄력적인 사람, 반응적인 사람이다. 민감한 사람이 삶에서 만족감을 덜 느낀다면 탄력적인 사람은 주변의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반응적인 사람은  양쪽 사이를 오가면서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서 적절하게 판단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사람이 되라고 한다. 행복한 생각을 하면 행복해지고 슬픈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라는 평범한 진리가 우리의 삶을 360도 변화시키는 마인드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사람들의 성공 드라마를 보면 성공은 부러움의 대상인 동시에 요구의 대상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일곱 마리 피라니아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찍이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처 활용되지 않은 채 낭비되는 재능을 그늘에 방치된 해시계’라고 경고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누구나 의심하지 않았던 피라니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자신감을 미끼로 삼아 피라니아를 잡으면서 최고의 인생을 만들어야 한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오히려 저자는 “실패율을 늘려라.”라고 격려하고 있다. 이것이 성공의 피라니아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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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링크 - 첫 2초의 힘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무열 옮김, 황상민 감수 / 21세기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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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체 튀어나와 유레카! 유레카! 를 외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놀라운 발견은 과학사에 있어 위대하다. 이렇듯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있다. 우리가 이번에 만나 볼 말콤 글래드웰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최상의 생존 전략을 찾아 나서며 마침내 블링크! 블링크! 를 외쳤다.

블링크! 조금은 생소하지만 이 말은 2초 안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판단을 말한다. 2초라는 짧은 시간에 아주 중대한 문제를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2초 이내에 판단하지 못하고 몇 초를 더 머뭇거린다면 우리에게 최악의 결과가 생기고 만다. 생각하기 위해서 잠시 시간을 멈춰서는 안 된다. 사업에 있어서든 대인관계에 있어서든 이 법칙은 성공하기 위한 흥미로운 아이디어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최고의 블링크를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에 저자는 『블링크』라는 책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대중 앞에 나타났다. 이미 그는 『티핑 포인트』로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다. 『티핑 포인트』가 ‘작은 아이디어를 빅 트렌드로 만드는’ 책이었다면 이번에 나온 『블링크』는 작은 아이디어를 실천적인 전략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봐도 좋다. 꼭 비즈니스맨이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삶의 패턴을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시간이 2초라고 말한다. 앞서 말했듯이 아주 중대한 문제일수록 빠른 판단을 해야 한다. 그만큼 우리는 빠른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키워드 중에 ‘얇게 조각내어 관찰하기’가 있다. 매우 얇은 경험의 조각들을 토대로 상황과 행동의 패턴을 찾아내는 무의식적인 능력을 말한다. 곧 순간적인 능력이다.

 

하지만 블링크에도 단점은 있다. 저자는 워렌 하딩의 오류를 통해서 이 점을 경계하고 있다. 워렌 하딩의 성공 조건은 외모였다. 외모 덕택에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낳고 말았다. 결국 그의 외모만을 믿은 나머지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도외시한 실패작이다.

 

왜 그랬을까? 문제는 우리가 직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직감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용한다. 이런 무의식은 곧 ‘느낌’ 같은 것이다. 느낌이 좋으면 좋고, 나쁘면 나쁘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실하지는 못하다. 얼마든지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나쁜 결과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좋으면 좋다는 식의 편견에서 판단하고 만다.

 

이는 저자가 말하는 적응 무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느낌이 좋으면 좋다는 식의 연결고리는 강력한 무의식이다. 반면에 느낌이 좋은데 나쁘다는 식의 연결고리는 약한 무의식이다. 약한 만큼 우리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을 해야 한다. 약한 무의식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세상의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지 어느 누구보다도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블링크의 놀라운 힘이다. 느낌이라는 직감을 믿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중심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직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세상을 판단하고 위험을 경고하며 목표를 설정하고 치밀하면서도 능률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즉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순간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만큼 통찰력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순간적인 판단의 가치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느낌의 차원은 아니다. 누구나 충분히 공감할 내용이다. 남들보다 더 빠르면서도 정확한 판단이 성공하기 위한 새로운 비결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순간적인 판단을 활용하는 것도 우리에게 매력적인 능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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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 할멈과 호랑이 네버랜드 우리 옛이야기 1
박윤규 지음, 백희나 그림 / 시공주니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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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게 만 느껴지던 옛 이야기가 새롭게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그림책으로 꾸며지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생동감이 있어 좋았습니다. 아이들이 그 리듬을 따라가면 한 권의 책을 꿀꺽 삼킬 수 있습니다. 읽는 재미 못지않게 보는 재미도 솔솔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나온『팥죽 할멈과 호랑이』는 눈여겨 볼만합니다. 그냥 흔하고 흔한 그림책이 아닙니다. 한지로 만들어진 팥죽 할멈과 호랑이가 그림과 함께 때로는 빛그림(사진)과 함께 입체적으로 나오고 있어 전혀 색다른 느낌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입말의 묘미를 살렸습니다. 옛 이야기는 특성상 오랜 세월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말하는 이의 솔직하고 담백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구수한 이야기에 속도와 긴장감을 한층 불어 넣고 있습니다. 결국 듣는 이는 귀를 쫑긋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 보기 드물게 의성어와 의태어가 경쾌합니다. 호랑이가 어슬렁 어슬렁 알밤이 폴짝폴짝 통통 자라가 엉금엉금 척척 지게가 겅충겅충 껑충 등 아주 효과적이면서도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동작 하나하나 소리 하나하나에도 온 신경을 모았습니다. 그만큼 작가의 세심한 배려로 아이들이 우리말을 어렵지 않게 따라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도 재미는 측면을 아름답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할멈을 잡아먹으려는 호랑이를 혼내주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납니다. 알밤에게 눈을 데이고 자라한테 코를 물리고 물찌똥이 때문에 벌렁 넘어지고 그것도 모자라 송곳에 찔립니다. 하지만 호랑이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호랑이가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멍석이 둘둘 말아버리며 지게가 업고는 계곡으로 내던져 버립니다.


호랑이에게는 안됐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속이 후련해집니다. 호랑이가 벌을 받는 것이 통쾌합니다. 우리 아이도 덩달아 박수를 쳤습니다. 아이에게도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또렷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아이에게 나쁜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 아이는 나쁜 사람을 경찰 아저씨가 잡아간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따지고 보면 호랑이가 물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옛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진리는 단순합니다. 하지만 같은 그림책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서 책 읽는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의 마음을 맑고 건강하게 합니다. 팥죽이 맛있듯 이 책은 아이에게 좋은 영양소가 정성껏 담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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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리포트 1 - 나는 고발한다
정경아 지음 / 길찾기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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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라는 소리에 명치 부근이 저려왔다. 태평양 전쟁의 성적 희생양이 되어 버린 여성들의 한(恨)맺힌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척이나 가슴을 시리게 했다. 여성의 성적인 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요된 성의 노예화는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부수어버리고 말았다. 허울뿐인 이념은 상처를 아물게 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듣기 좋게 위안부라는 진통제로 비양심적으로 치료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위안부(comfort women)이지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 책에 나오는 얀 뤄프 오히르네가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증언한 사실만으로도 그녀들은 강간 피해자(rape victims)였다. 그래야 비로소 수치심이 아닌 악몽 같은 세월로 얼룩진 역사에 대한 심판을 내릴 수 있었다.


이렇듯 강간 희생자들을 보고 있으니 너무 처절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 버림받음을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여성에게 남아있는 것은 양심이라는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경계에 더욱 가까웠다.


그런데도 위안부는 육체적 정신적 피해자이면서도 침묵하며 살아왔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혁명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은폐할 때는 솔직했던 것이 노출될 때는 거짓된 것 같으며 아무리 절실한 동기를 느꼈다 하더라도 일단 공개되고 보면 인간의 마음은 통찰보다는 오히려 의심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까? 우리가 위안부를 보는 시선은 한편으로는 슬프다고 하면서도 의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녀들이 피해자인 것은 사실이나 성(性)이라는 미묘한 감정이 우리의 눈과 귀를 흐리게 했다. 더구나 가해자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그녀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고 있다.

 

이런 조작된 각본 속에서 어느 누군가가 자신이 한때는 위안부이었다, 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떠한 변명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위안부 행위가 역사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스스로를 죄인의 굴레를 만들어 버린다.


이제 우리에게 위안부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참다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위안부에 대한 아니 강간 피해자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침묵은 우리를 비겁하게 만든다. 더구나 타인이 우리의 어머니이자 딸이라고 한다면 그 충격은 어마어마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광기와 참혹함을 충격적으로 볼 수 있다. 전쟁을 목적으로 성을 도구로 삼은 일본의 만행은 악몽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쟁 후 아무런 책임도 없이 위안부들의 잘못만 크게 부풀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오히려 이로 인해 반사이익을 노리는 이율배반적인 그들을 보니 더욱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과연 우리는 역사의 승리자인가? 패배자인가? 일본이 패망하여 직접적으로 우리는 광복을 맞이했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사 청산문제를 놓고 보면 역사의 패배자라는 생각이다. 매번 과거사(위안부) 문제로 한일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도 끝내는 우리만 복수심에 가득 찬 분풀이에서 끝나고 마는 악순환을 반복해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이상 시행착오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방송인 김미화씨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솔직히 말했다. 그만큼 잘못된 역사를 심판하는 자리에 우리 모두가 합류하기를 바라고 있다. 정말로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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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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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비극적이면서도 불행한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적지 않은 애증이 온 몸을 휘감았다. 더구나 그 대상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사형수라고 하니 뭐랄까, 날카로운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공지영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사형수라는 만만치 않는 삶의 무게에 대해 고백을 한다. 어쩌면 사형을 둘러싼 정신적인 암(癌)에 대한 투병이며 휴먼 스토리다. 사형수와 만남과 이별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죽음에 다가서야 하는지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되묻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형수에 대한 동정심은 위험해 보인다. 자칫 잘못하다간 치명적일수도 있다. 피해자를 대신해서 사형수를 비난하는 것도 부족한데 극악무도한 죄를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칼날을 휘두르게 된다.

 

또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형수에게도 산다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인지 무척이나 회의적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고통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사형수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 사형제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교화라는 것은 통렬한 보복 같았다.

 

저자에게 이런 일이 심상치 않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상처를 주고받는 사회에서 치료를 위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갈등만 부추긴다. 사형수에게 상처는 무슨 상처냐며 몰아세우는 것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교도소를 드나들면서 그들의 아픈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저자는 그들도 피해자라고 말한다. 너무나 절박한 목소리와 눈빛이 사형수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명찰 대신 ‘서울 3987’이라는 검은 글씨의 죄수 번호는 다름 아닌 가짜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참 묘한 일이 생겨났다. 착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가엽게 여기는 마음도 함께 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다시금 물컹거렸다. 내 몸 안에 숨겨져 있던 막막함이 꿈틀거렸다. 나는 정말로 사형수를 용서할 수 있을까?

 

톨스토이는『부활』에서 다음과 같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마태복음 18장)


돌이켜 보면 다른 사람을 이만큼 용서한다는 것은 저자말대로 바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한 일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든 죄인이든 누구나 인간이라는 이름 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자신이 용서할 수 있을 때 삶이든 죽음이든 행복한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곧 나의 배려이다. 남의 불행에서 생기는 동정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리가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어정쩡한 오만이다. 저자는 사형수의 불행을 보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눈물의 경계를 슬프면서도 밝게 무너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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