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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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예기치 못한 모든 일이 종이 위에 필연적인 일로 기록되면 무해한 역사가 된다. 역사학은 예기치 못한 미래의 공포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러는 사이 재난은 서사시가 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만약의 가정에서 시작된 필립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모> 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3선이 실패하고 그의 라이벌이었던 찰스 린드버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한 가족의 삶에 미칠 파장에 관해 그리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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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저들이 생각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망쳐버린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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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 로 대표되는 미국의 주류 집단은 오랜 세월 반유대주의를 근간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한다. 작품은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 필립 로스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작품인데,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세상의 '음모' 를 알지 못하던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눈물을 비롯한 여러 사건을 거쳐 각성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기독교도 미국인들의 '조상' 대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박해는 필립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예민> 하게 만드나 아직 어린 필립의 입장에선 부모가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에 대한 까닭을 알 길이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범죄자로 여기는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하는 와중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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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에서
애국심이 분열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자신이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다른 어떤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미국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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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지배했고 앞으로도 지배할 난공불락의 북유럽계 및 영구계 신교도들" 은, 그들에 따르면 미국의 독립을 이루었고, 국가를 건설했으며, 황무지를 정복했다. 아메리칸 원주민 진압했고, 흑인 노예 소유하고 해방시켰으며, 변경 지역을 개척하고 정착했다. 농경 생활을 이룩하면서도 도시화를 이루고, 정치와 법을 장악하며, 부의 축적하고 은행을 소유한다. 야구팀과 언어를 소유한다. 이 모든 것을 이룬 '선하고 깨끗하고 부지런한' 수백만의 기독교도의 대표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애국심을 강요하고, 애국심을 앞세워 로스 집안과 같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지울 것> 을 강요한다. 그러한 은밀한 폭력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미국의 에덴동산이자 애국의 낙원" 이었던 워싱턴기념탑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는 게티즈버그 연설문이 새겨진 석판은, 과연 유대인 로스 가족에게도 낙원의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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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노린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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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를 기반으로 한 파시즘의 음모.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파시즘이라는 거대 담론 뒤에 존재하는 히스테리, 무지, 악의, 어리석음, 증오, 두려움이 만들어 내는 음모. 로스 가족은 수많은 '히틀러들' 이 만들어 내는 음모 속에서 일상을 파괴당하고 불안과 무력함을 내재화한 이들의 표상이었다.

 

작품 속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직접 전쟁터에 참여한 앨빈은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불구가 된다. 국가는 <네 의지> 로 참전하지 않았느냐며 은밀히 가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모른 척하며 그의 고통을 개인의 책임으로 국한시킨다. 즉 "국가는 앨빈을 버린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이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랬듯 울며 고통을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기에 더 이상 자신이 아닌 어느 누구의 고통도 짊어지려 하지 않고 끝없이 갈등을 빚어낸다.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서 앨빈의 고통을 셀든의 아픔으로 확장시킨다. 참전용사 청년의 육체적 고통은 반유대주의적 폭력에 고아가 된 어린아이의 트라우마로 확장된다. 국가적 파시즘을 내재화한 일상 속 미시 파시즘이 어떻게 소수자를 타자화하고 박해하여, "존재 자체로 토막 난 다리가 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싼 고통을 각성한 어린 로스가 그 토막 난 다리가 된 존재 곁에서 어떻게 '트윈 베드' 를 함께 쓰고, '의족' 이 되며, 그의 아픔에 공감하는지를 보여준다.

 

너무 두꺼워서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엄청 재밌고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환장하겠네 싶은 작품이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걸 읽고 <왜 쓰는가> 를 읽을걸 하는 후회 아닌 후회를 했다. 작품 속 씁쓸한 지점은 (이모인 이블린마저 넘어갔던) 로스 가족과 같은 유대인을 향한 반유대주의적 폭력에 대한 자성이 아이러니하게도 윈첼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작품은 "민주국가에서는 시사 문제를 따라잡는 것이 시민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시민이라면 당대의 뉴스를 최대한 어릴 때부터 알아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유효한 파시스트들의 음모와 중우정치를 멈추기 위해선 깨어 있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듯하다.

 

발췌


[...]  린드버그의 미국이 저지른 악의적인 학대로 망가져 버린 아이가 나와 트윈 베드를 나눠 쓰게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보살펴야 할 토막 난 다리는 없었다. 그 애 자체가 토막 난 다리였고, 나는 그 애의 의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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