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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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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만 상처 입었고 나만 고통스럽고 나만 아픈 듯 하지만 누구랄것도 없이 우리는 모두 상처뿐인 인생 속에서 그 상처를 곱씹으며 살아간다. 그 상처란 것은 대부분 사람에 의한 마음의 스크래치일 경우가 많고 그로 인한 관계의 깨어짐과 용서 못함이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 이 책 또한 연쇄 살인범에게 딸을 잃은 ’거대한 슬픔’ 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을 읽고 용서를 경험했고 다시금 하나님 안에서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고백하는데 그만큼 마음의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각자의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책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첫번째는 ’내가 고통당하고 신음할 때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두번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마음이 슬픔에서 놓여놔 드디어 자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하나님이 나에게도 나와 하나님만이 아는 그 [오두막]으로 초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맥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하나님을 ’파파’라고 부르는 낸을 아내로 둔 가장이다. 어느날, 맥이 아이 셋과 캠핑을 떠나게 되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연쇄 살인범에 의해 막내 ’미시’가 납치되고 급기야 잔인하게 살해된다. 그 이후로 맥은 ’거대한 슬픔’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삶을 산다. 그런 맥에게 오두막으로 초대하는 쪽지가 오게 되고 맥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미시’가 살해된 장소 [오두막]으로 가게 된다. 그 곳에서 맥은 하나님 ’파파’와 ’ ’사라유’ ’예수’를 만나게 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성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예수님에 대해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사랑의 주님으로 인식하는 반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언제나 우리를 감시하시고 우리를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부,성자,성령 되신 각각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오해하는 하나님의 인성에 대해 바르게 알 수 있는 기회를 만날 것이다. 나또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은 나를 특히 더 징계하신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애써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진리를 무시하고 싶어서 주인공 맥처럼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기 일쑤였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맥과 하나님과의 사이도 벌어졌지만 그는 점점 더 벌어지는 간격을 무시했다. 그는 냉랭하고 무감동한 신앙을 받아들이려 했고, 그 안에서 어느 정도 위안과 평안을 얻었다." <p97>

 

하지만 『오두막』을 읽으면서 맥에게 온 쪽지는 곧 나에게 보내신 초청장인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상처는 모습을 드러내었고 내가 결코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고 잊혀진다는 세상 진리 속에 그 상처들을 묻어 두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이 이제는 나를 개인적으로 만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 내 속의 그 슬픔과 상처를 끌어내어 나에게도 맥에게 주었던 그 자유와 기쁨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 을 가진 당신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바란다.

 

  

"네가 용서하길 바란다. 용서란 너를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

....

어떤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한다는 의미야."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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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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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는 25살의 젊은 나이에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을 하며 문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김애란의 첫 소설집이다. 처음 그녀의 작품을 만난 건 『2009년 제9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너의 여름은 어떠니]였고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이미 예전부터 그녀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로부터 들어 왔었다.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그녀의 책 『달려라, 아비』를 펼쳐 들었을 땐 이미 나에겐 그녀에 대한 선입관으로 가득했다. 마냥 발랄한 내용으로만 가득할 것이리라는 생각..심지어 『달려라. 아비』의 '아비'는 사랑스런 여자의 애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얼마나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는지 절절히 느껴야했고 그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호기심이 나를 사로잡았다.

 

총 9편의 단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아버지'이다. 물론, [달려라 아비]의 '아비'는 사랑스런 여자의 애칭이 아니라 말그대로 '아버지'의 낮춤말 '아비'인 것이다. 하지만 등장하는 아버지는 하나같이 현재의 삶을 함께 공유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과거의 아버지, 또는 상상속의 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어머니와 가난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간 것에 대한 분노와 상처와 어두움으로 아버지에 대한 처절한 마음과 복수심을 드러낼 듯도 한데 신기하리만치 그 감정들을 긍정적으로 풀어낸다. 

 

[달려라, 아비]에서의 아버지는 처녀적 어머니에게 끝없는 구애를 펼쳤을 때 결국 어머니가 허락하면서 단, 지금 당장 피임약을 사와야만 한이불을 덮겠다는 단서를 달았을 때부터 뛰기 시작하여 그녀와 어머니를 버리고 간 이후에도 상상속의 아버지는 늘 분홍색 야광 반바지 차림으로 후꾸오까를 지나고 보루네오섬을 거쳐 그리니치 천문대를 향해 달려가는 긍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 십수 년동안 쉬지않고 달린 아버지에게 썬글라스를 씌워드리는 그 재치는 정말 아픈 현실의 상황을 유쾌한 상황으로 웃어넘기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스카이 콩콩]에서의 아버지는 고추를 보여주면 스카이 콩콩을 사주겠다는 짖꿎은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집나간 아들의 귀가길을 밝히려 손수 가로등을 고치는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긍정이 빛을 발하는 단편은 단연 [사랑의 인사]라고 할 수 있겠다. 아이는 공원에서 자기를 버려두고 간 아버지를 실종되었다라고 표현한다.


'순간 나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나는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모호한 문장, 먼 곳에서 수백년 전 출발해 이제 막 내 고막 안에 도착하는 휘파람 소리. '아빠가 사라졌다.'는 말이었다. 정말이지 아버지는 실종된 것이 틀림없었다.' <p.147>


정말 유쾌하지 않은가.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실종되었다고 받아들임으로써 정신적 상처를 거부하는 자세. 그러한 긍정적인 자세로 일관하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사랑의 인사]는 정말 사랑스런 작품이다.

 

그외 단편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녀가 잠 못드는 이유], [영원한 화자], [노크하지 않는 집] 등은 작중 인물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뛰어나고 우리가 흔히 만나는 배경들과 소재들을 이야기함으로써 나의 공감을 얻어내기에 충분했다. 이 작품들에서도 그녀의 긍정적인 매력은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나는 이해받고 싶은 사람, 그러나 당신의 맨얼굴을 보고는 뒷걸음치는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사랑이 '나는'으로 시작되는 사람이 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래도 나는’ 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나는 한번 더 ’나는’이라고 말한 뒤 주저앉는 사람. 그러나 나는 멈출 수 없는 사람. 그리하여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처음부터 다시 말하는 사람이다.

하여, 우리는 흐르는 물에 손을 베이지 않고도 칼을 씻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p.138>

 

우리는 쉽게 상처 받았다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나는 당신에게 이런이런 상처를 받았습니다.' 라며 부모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기도 하고 삶의 고달픈 삶 속에서는 쉽게 좌절하기를 즐겨하고 언제든 부정적인 면만을 부각시켜 그 부정적인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기를 즐겨한다. 이 책은 우리에게 상처를 거부하는 자세, 상처에서 벗어나 삶을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즐거운 상상(야광 반바지를 입고 세계를 뛰어다니는 아버지를 상상하듯.)을 하며 삶을 유쾌하게 살아갈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자기긍정적인 삶의 세계로의 초대. 그것이 그녀의 매력이라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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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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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라는 작품을 접하고서 나는 '그'에게. 그리고 '최규석의 세계관'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생각들과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그리고 짧은 우화들 속에 담겨진 사회비판들. 명랑만화 공룡둘리를 사회의 소외된 계층으로 탈바꿈시켜 우리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 여유. 그것만으로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기에는 충분했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를 읽으면서 3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 어쩜 이렇게도 뚜렷한 자기만의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궁금해 했었는데 그 다음으로 읽은 『대한민국 원주민』을 통해서 그리고 『습지생태보고서』를 통해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그의 근원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77년생인 그는 시골의 가난한 집 막내로 태어나 가지고 싶은 걸 한번도 맘놓고 가져본 적 없는 그래서 포기를 일찍부터 배우게 되었고 운동화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의 가난 때문에 고무신이 최고라 여기며 살았고 누나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입학하는 중학교를 가난 때문에 공장으로 보내자라고 하는 아버지와 중학교는 졸업해야한다는 어머니의 실랑이로 겨우 입학하는 아주 사치스런 것이었다. 도시로 이사를 오면서 그는 자신이 도시의 자기 또래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가 자신의 세계관을 짧은 단편, 우화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냈다면  『대한민국 원주민』은 자신의 어린시절과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 형성과정을 보여주고  『습지생태보고서』에서는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습지생태보고서』라는 의미는 1화 [의태]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하위 종(種)의 남루함을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딱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은근히 즐기는 듯도 한 뻔뻔함과 간혹 먹이사슬의 모순을 접할 때면 뒤에서나마 구시렁거릴 줄 아는 비판의식도 갖춘 편이다. 허나...전반적으로 일관된 서식 양태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도 이종(異種)으로서의 의태(擬態)가 가능한 상황하에서는 순간적으로 행동 양식이 돌변하기도 한다."

   

그렇다. 습지는 하위 종이 서식하는 곳. 즉 최규석을 비롯 친구 셋과 상명대를 상징하는 사슴인 녹용이(무척이나 응큼한)가 사는 자취방을 의미하고 그 곳은 그들의 서식양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에 적합한 곳이므로 그들의 생활보고서 즉, 생태보고서라 하겠다.

 

최규석은 자신을 습지에 사는 하위 종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것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 구석구석에는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쉼없이 고민하고 욕망을 쫓을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최규석을 만난다. 심지어 연애에서조차도 그러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연애비용으로 돈을 많이 쓴 그에게 내면의 자아가 나타나 묻는다. "아버지 한 달 용돈 4만원인 거 알지? " 최규석은 이건 그냥 연애일 뿐이라며..죄 짓는 것이 아니고 남들 다 하는 연애일 뿐 (27화 남들 다 하는 것) 이라며 스스로 위안하려 하지만 고통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르바이트 하는 곳의 아가씨가 자기를 붙들고 하소연을 하며 눈물을 흘릴 때 자신은 어떤 위로의 말도 못해줬음에 자책하며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친해질까봐..그 슬픔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질까 봐 무서웠어." (12화 정답) 약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품는 따뜻한 마음은 있지만 그 약자들의 세상이 얼마나 가슴시린지 알기에 애써 모른척 하려는 그의 독백에 내 마음이 시큰거렸다.

 

『습지생태보고서』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최규석은 좋은 대학을 나와 멋지게 출세하고 싶지만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케 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한다. 그들은 늘 그러한 현실과 욕망 앞에서 무릎꿇고 만다. 그들의 자취방 이야기는 하나같이 재미난 캐릭터에 재미난 이야기들로 넘쳐나지만 도무지 웃음이 나질 않는다. 그들 편에 서서 <힘내!>라고 도닥이고 있는 내 모습만 보일 뿐이다. 어쩌면 나조차도 그들의 생태를 너무도 잘 아는 하위 종인지도 모를 일이다.

 

최규석은 등장 인물 중에 지극히 객관적인 인물을 하나 설정해 두었는데 그 인물이 바로 사슴 녹용이다. 


"번화가에서 이고지고 걸어다니는 것도 쪽팔리고, 그러고 버스 타는 것도 쪽팔리고, 니네들 구질구질한 차림새도 쪽팔리고...하여튼 다 쪽팔려." "속물 근성이라니!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너 혼자만 비켜 서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너도 좋은 집에서 멋진 차 타고, 스타일 죽이게 입고 폼 나게 살고 싶잖아!?" <p. 123>


어쩌면 녹용이는 최규석의 내면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최규석이 현실과 욕망앞에 늘 고민할 때 그의 마음을 반영하는 욕망의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녹용이의 대사가 그러한 부분을 많이 반영하고 있고 녹용이의 말에 최규석은 늘 고개를 숙이고 만다.

 

『습지생태보고서』는 젊은 청년들이 등장하는 젊은이들의 만화다. 하지만 등장하는 젊은이들 중 어느 하나 유행과 멋과 세상의 쾌락을 아는 자도, 누리는 자도 없다. 실제로  『습지생태보고서』는 최규석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이다. 그리고 생각했던 액수만큼 모였을 때 과감히 연재를 중단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최규석은 이 작품 말미에 『습지생태보고서』는 자신에게 전세금을 마련해주었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변했다고 느껴지면 그것이 통장의 잔액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라며 끝을 맺는다. 그는 결국 『습지』로 습지를 탈출한 것이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세상의 욕망 앞에서 맞설 줄도 알고 고민할 줄도 아는 작가. 최규석. 

비록 자신을 습지에서 서식한 하위 종이라 표현하였지만 지금처럼 당당한 모습으로,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시각을 간직한 채 세상을 바라본다면 앞으로의 그의 작품들은 더욱 빛을 낼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그것이 싫은 논리적인 이유를 백 가지는 더 댈 수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도망이 아닌.. 선택일 수는 없는 걸까?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 걸까?

혹은 어른이 되는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쩜 슬픈 그 날에

한 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리 노력했노라 자위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뿐일까?

세상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도 발을 빼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그래도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것일까?

자기 안의 수많은 모순과 세상에의 두려움을 한가득 품고도

영문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기분 좋은 외침은....

 

단지 어리석음 때문만은 아니겠지?

 

제 54화 그렇겠지? <p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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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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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메일을 쓰고 당신의 메일을 읽는 시간이 저에게는 일종의 '가족 타임아웃'이예요. 이 시간이 일상 밖에 있는 작은 섬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그 섬에 당신과 단 둘이서만 머물고 싶어요. 당신만 괜찮다면요. (p.149)

  

당신한테 키스하고 싶어요.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상관없어요. 나는 당신의 글과 사랑에 빠졌어요. 당신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돼요. 얼마든지 딱딱하게 써도 돼요. 난 그 모든 것을 사랑하니까요. (p.153)

 

새벽 세시예요. 북풍이 부나요? 굿나잇. (p.265)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져 있었던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지인의 소개글을 읽고 나도 읽어봐야겠단 생각에 어젯밤 펼쳐들고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다 읽고 잠이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메일로만 이루어진 소설인데다 너무나 익숙한 대화체여서 무슨 의미일까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쉽게 읽어내려 갈 수 있어서 지금의 나에겐 참 마침맞은 책인 듯 싶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이메일 데이트. 잘못 보낸 이메일로 시작된 그와 그녀만의 작은 세상. 차분하고 젠틀한 언어심리학자 레오와 이메일 세상에서만큼은 적극적인 두 아이의 엄마 에미. 누가 보아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에미에게는 굳이 이메일 속의 레오가 필요하지 않지만 잘못 보내진 이메일을 통해 시작된 이메일 데이트는 그녀를 점차 그녀가 속한 행복한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게 하고 레오에게 집착하게 한다. 친구에서 연인의 감정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은 읽는 이, 어느누구도 그럴 순 없다고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숨은 감정들을 담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인터넷 세상에 너무도 많은 말들을 남기고 있고 사적인 공간이라며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만들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사적인 마음들을 오픈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 이웃을 맺고 레오와 에미처럼 둘만의 은밀한 대화들을 하기도 하고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 그 이웃에게 사랑의 마음을 품기도 한다. 처음엔 그저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 시작된 채팅과 이메일 펜팔은 결국 레오와 에미처럼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집중하게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게도 하지만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비밀친구를 만들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동경이랄까. 아니면 이 세상엔 나를 이해해주고 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우리네 소망이랄까.

 

아슬아슬한 감정선을 넘나드는 레오와 에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어쩌면 에미의 마음이겠지만. 이메일은 하고픈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담을 수는 있지만 상대방에게 당장 듣고 싶은 대답은 바로 들을 수 없는 답답함이 있다. 때로는 그 사람이 어떤 의도에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에미처럼 지금 당장 답을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때도 있는 것이다.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는 그런 마음들이 아주 잘 드러나 있고 아주 현실적인 대화들로 가득차 있다. 작가의 경험으로 쓰여진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까.

 

아슬아슬한 감정선에 대한 자제력. 특히나 결혼을 한 사람이나 애인이 있는 사람이 채팅이나 이메일로 펜팔을 하려고 한다면 꼭 갖춰야 하는 덕목이다. 근데 결혼을 한 사람이나 애인이 있는 사람이 채팅이나 이메일 펜팔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는 게 아닐까. 무엇으로부터 도피하고픈 마음. 혹은 무엇으로 보상받고 싶은 마음. 마음... 레오는 에미에게서 실연의 아픔을 위로받고 에미는 평안한 생활과 남들에게 보여지는 행복한 가정의 표본의 모습에서 일탈을 꿈꾼다. 어쩌면 에미는 너무도 평탄했던 삶이었기에 레오에게 더욱 푹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라면 흔히 겪을 수 있는 이메일 데이트를 통해 지루한 삶에서 극적인 로맨스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호응을 이룰 수 있는 책이다. 물론 나도 재미있게 읽었다. 읽는 내내 에미 때문에 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예전엔 나도 이메일 친구를 만들어서 내가 하고픈 얘기들을 다 쏟아내고 싶다고 간절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결국 내가 택한 것이 블로그다. 어느 한 특정인이 아닌 블로그에 내 마음을 다 쏟아내면서 나는 치유되어 갔다. 어쩌면 불특정 다수에게 내 마음이 오픈되고 내 마음이 읽혀지면서 잃었던 평정심을 되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에미처럼 블로그에 집착했던 적이 있었던 것도 인정. 하지만 내가 집착했던 것이 사람이 아니라 블로그여서 다행이고 레오와 에미가 공유한 은밀한 세계는 마음의 동경으로만 두고 싶단 생각도 한다.

 

그것이 삶을 살아감에 있어 현명한 것임을 아니까.

이제는 굳이 동경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아도 현재에 충실한 것이 현명한 것임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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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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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 그의 책은 처음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설지 않은지. 그의 작품을 아주 오래전부터 애독한 사람인 듯 착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나는 작가를 아주 친숙하게 느끼며 12월 세 번째 책으로 『惡人』을 선택했다. 이웃사촌님의 별 다섯개 짜리 책이었었지. 그리고 요시다 슈이치 작가 본인마저도 "감히 나의 대표작이라 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설레이는 마음과 기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 맘껏 기대하며 읽어주리라. 생각하며 책을 펼칠 수 밖에.

 

『악인』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과연 누가 악인인가'라는 생각꺼리를 남겨두고 끝을 맺는다. 작가는 그 해답을 독자들에게 맡긴 채 사건 전개, 그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심리 묘사, 상황 묘사에만 집중한다. 처음부터 그럴려고 작정한 듯 작가는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차단한 채 입을 다물고 있다. 어쩌면 독자들을 위한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요시다 슈이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악인] 그 자체에 있는 것일까. 그 [악인]의 이면에 있는 외로움과 내면의 상처, 사랑에 대한 갈구..를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우리 누구든 [악인]이 될 수 있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 어쩌면 그런 이면의 정신세계가 [악인]의 근원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등장하는 인물마다 우리 누구나가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고 하나같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를 하나씩 안고 있다. 그 중 몇 몇은 그 상처로 기인된 외로움과 소통의 부재로부터 벗어나고자  만남 사이트에 가입해 문자를 주고 받기도 하고 하룻밤을 보내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한다. 물론 그로 인해 생각지도 못했고 의도하지도 않았던 [살인사건]이 일어나지만 그 사건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외로운 존재인지 알게 된다. 어쩌면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겠고.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은 갑자기 등장한 [미쓰요]로 인해 내용이 더욱 깊어진다. 그리고 [미쓰요]는 등장인물 [요이치]를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요이치]에게 모성본능을 가지게 하면서 그에게 한없는 동정심을 갖게 하고  『악인』이라는 소설을 눈물젖은 연애소설로 전환시킨다.

 

옮긴이[이영미]의 말을 빌리자면

 

두 사람은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타자가 되어주지만, 끝내 행복해지길 원하는 것과 행복해지는 것의 절망적인 거리감을 체험한다. 비극이 예견된 그들의 만남은 그러나, 작품 전반부에 드러나 인간의 천박함과 추함을 인간 영혼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의 찬가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해낸다. 그들은 사람이란 얼마나 약하고, 악하고, 외롭고 , 강하고 그리고 우아한 존재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며, 우리는 그들에게서 고귀함과 나약함이 공존하는 인간의 모습을 엿본다.  (p.478)

세상의 소통으로부터 단절된 듯 살아간 두 사람의 만남은 읽는내내 마음을 저리게 하고 안타까움에 눈물짓게 한다. 하지만 그녀 [미쓰요]조차도 [악인]에 대해 헷갈려 하는 것 같아 아쉽긴 했다.

 

내가 『악인』을 읽으며 울컥. 눈물 흘렸던 장면은, 품 속에 스패너를 감춘 요시노의 아버지 [요시오]가 [마스오]를 찾아가 [마스오]에게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렇게 다른 사람이나 비웃으며 살면 되겠어?"라고 말하는 장면. 무슨 장면인지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 정말 눈물나더라.

 

아직까지 가슴에 『惡人』의 여운이 남아있어 먹먹하다. 읽은 느낌을 남기고파 적는 글은 두서없고..

하지만 요시다 슈이치와의 첫만남은 대성공. 고로 그의 작품을 하나씩 챙겨봐야겠다. 

"자네 소중한 사람은 있나?"

요시오의 질문에 쓰루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이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자기 자신까지 행복해지는 사람."

요시오의 설명을 들은 쓰루다는 고개를 저으며 "....그 녀석도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아."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요즘 세상엔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이 너무 많아. 소중한 사람이 없는 인간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어버리지. 자기에겐 잃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강해진 걸로 착각하거든. 잃을 게 없으면 갖고 싶은 것도 없어. 그래서 자기 자신이 여유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뭔가를 잃거나 욕심내거나 일희일우하는 인간을 바보취급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안 그런가? 실은 그래선 안되는데 말이야." 

 

쓰루다는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p.448)

이 본문은 [요시오]의 입을 빌려 작가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미쓰요]가 던졌던 질문. "그 사람은 악인이었던 거죠? 그런 악인을, 저 혼자 들떠서 좋아했던 것뿐이죠. 네? 그런거죠?" 에 누가 명확하게 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善人이겠지만 다른 그 누군가에게는 惡人일지도 모르는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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