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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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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는 곧 우리네의 젊은 날의 초상이라 부르고 싶다. 삶에 대한 자그마한 것에도 깊이 반응하고 고뇌했던 그 젊은 날들, 부딪히고 아파하고 상처입고 상처주면서 조금씩 자리잡아가는 우리의 인생관. 그런 치열한 젊은 날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겠고 그러한 날들이 없었다면 고스란히 30대, 40대가 되어서 그보다 더욱 치열한 오춘기를 겪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삶의 허무가 곧 인생인 듯 살아가는 와타나베. 하나밖에 없던 친구 기즈키의 자살. 그리고 기즈키를 함께 기억하는 나오코와의 사랑. 또한 와타나베를 사랑하는 미도리. 상실과 갈등의 날들 속에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가는 와타나베의 젊은 날의 이야기. 


나오코와의 사랑은 자신을 향한 연민과 친구를 잃은 상실의 아픔과 연인을 잃은 나오코의 마음에 대한 공감과 그로 인한 그녀에 대한 연민, 보호본능이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낸 감정이라고 본다. 그녀를 평생 사랑하겠다고 하지만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다. 와타나베를 만나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관계를 가진 나오코지만 그 관계조차도 어쩌면 그 사람, 기츠키에 대한 그리움이 불러온 단 한번의 촉촉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에 반해 미도리는 새로운 삶에 대한 탈출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과거의 상처와 상실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는 새로운 사람. 나오코와 계속 함께 한다면 서로의 상처는 덧날 뿐이지만 미도리는 삶에 대한 허무함 속에 생기를 넣어준다.

 

나오코에게도 만약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면 죽을만큼의 아픈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조금씩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분명 오랜 연인이었던 기즈키의 가장 친한 친구 와타나베를 볼 때마다 더욱 과거 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나오코였을 것이다. 과거는 과거 속에 두고 아픔은 시간을 두고서라도 치유해야 하며 결국은 터널 속을 빠져나가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봐야 하는 나오코에게 결국 희망은 주어지지 않았다. 삶의 포기를 선택한 나오코가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우리는 사랑에 대한 상실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은 상실감 속에 평생 자신을 가두고 살아갈 수 있고 그러한 젊은 날의 기억이 지금의 황폐한 나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아픔을 겪은 자는 그렇지 않은 자보다 더욱 그윽하고 깊은 눈을 가질 수 밖에 없고 더욱 깊은 통찰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소중한 것을 잃은 자들의 특권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전히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 여전히 부딪히고 아파하고 힘든 날들을 살아가지만 그래도..라며 그 상실감 속에서 살아갈 희망을 붙잡는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대로 아픔없고 상처없고 행복한 날들의 연속이면 좋겠지만 삶은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상처를 허락하고 상실의 아픔을 허락하고 고통과 고뇌를 허락한다. 그러한 치열한 싸움 가운데 삶에 대한 겸허한 자세와 삶에 대한 통찰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라는 인생의 선배들이 남긴 말이 그냥 주어진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잃을수도 있고 더 아플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수록 더욱 희망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희망의 빛 미도리. 과거의 상실 속에서 나를 가누지 못하던 나오코였던 나에게 희망의 빛으로 찾아온, 나의 미도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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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식당 기프트 세트 (1권~4권 + 자석 메모 보드 + 고급 정리함 + 2010년 연하장) 심야식당
아베 야로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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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하느라 지친 사람도, 사랑이 깨져서 우는 사람도, 꿈을 잃고 실망하는 사람도,
일상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사람도, 일에 쫓기는 사람도,
상사를 잘못 만나서 하소연하고 싶은 사람도, 행복해서 날아오를 것 같은 사람도,
배를 채우고, 마음도 채우고, 모두 웃는 얼굴로 돌아가는, 거리 한구석의 안식처.
 
 
메마른 마음과 목을 적셔주는 심야식당.
 
요즘들어 머리가 자주 지끈거린다. 누군가 내 머리를 눌러줄때면 죽을 듯 비명을 지른다. 여러 삶의 힘듦과 스트레스를 제때 풀지 못하고 늘 쌓아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루리는 늘 판단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판단하는 삶을 습관적으로 살아가고 늘 사람들에게 판단받는 것을 견뎌내며 살아간다. 그러한 편치 못한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곳을 찾기란 힘들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안식을 원한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나에게 안식을 주는 사람이길 원하고 어떤 장소에 갈 때에도 그 곳이 나에게 안식처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사람이나 장소라면 언제든 습관적으로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읽은 '심야식당'이 바로 그런 곳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안식을 주는, 아주 편안한 곳. 어느 누구도 나를 판단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주는 곳. 주인장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음 하고 첫 발걸음을 하지만 오히려 무뚝뚝한 주인장에게 나의 고민과 사연을 술술 이야기하며 매일 습관적으로 찾아가게 되는 곳이 바로 '심야식당'이다. 
 
'심야식당'의 손님들은 밤무대를 삼아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상처와 삶의 무게로 하루하루 무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첫사랑의 입술이 명란젓을 닮아 매일같이 명란젓을 미디엄으로 구워 먹는 스트립퍼. 어릴적 기억을 떠올리며 고슬고슬 따뜻한 밥에 가다랑어포를 얹어 간장을 뿌려 먹으며 행복을 느끼는 엔카 가수. 늘 차밥을 시키는 애증으로 똘똘 뭉친 차밥 시스터즈, 육류만 먹어대는 부인 때문에 결국 이혼하고 늘 와서 채소만 먹는 남자, 사제지간의 슬픈 사랑을 담은 우엉볶음...
 
우리의 눈에는 집에서도 쉽게 해먹을 수 있는 음식에 불과하지만 이들에게는 눈물의 음식이고 희망의 음식이다.
자신의 힘든 삶에 한 줄기 희망처럼 찾게되는 '심야식당'에서 그들은 다시 살아갈 희망으로 마음까지 든든히 채우는 것이다. 조직 폭력배라 할지라도, 밤무대 가수라 할지라도, 스트립퍼라 할지라도, 하나같이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는 순수한 사람들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버터를 녹여 간장을 뿌려 먹는 고슬고슬한 밥에 배가 금새 고파지지만 그들의 순수한 미소에 나도 모르게 배고픈 걸 잊고 함께 웃게 된다.
 
내 마음을 그저 담담히 들어줄 누군가가 있는 곳.
내 마음을 이렇게 저렇게 빼고 자르고 편집하여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곳.
'심야식당'이 많이 읽히고 드라마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가 바라던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한번 주위를 둘러보자. 정말 아주 가까운 곳에 나의 '심야식당'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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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 -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뿔(웅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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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생의 어느 한 부분을 안다는 것으로

서로 얼굴 한번 안 본 사이끼리 위안과 격려를 주고받습니다.

그런 소설이 되기를 바랐고 그것이 교감되었다는 것이 기쁘고 고맙습니다.

 

- 임영태-

  

책 표지 한장을 넘겨 작가 이력 밑에 조그맣게 새겨진 짧은 임영태님의 소감을 읽으며 나는 혹시나 이 책을 읽으며 엉엉 울게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그 사람은 분명, 읽는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상처들을 하나가득 안고 있으리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울면서 걸어가는 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 끝끝내 참아도 흘러내리는 눈물. 자신의 의지로 감당할 수 없는 눈물,눈물의 호소들... 하지만 오랜만에 정말 마음껏 울 수 있는 책이면 오히려 읽고 난 후 개운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어야겠다는 마음졸임을 내려놓았다. 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테고 아직도 내 마음에는 남의 아픔에 공감하며 울 수 있는 눈물의 주머니가 비어 있지 않음을 깨닫는 것일테니.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은 '나'라는 대필작가의 이야기다.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던 사랑많은 아내를 잃고 반지하 연립주택을 사무실 겸 주거공간으로 삼아 매일 동네를 산책하며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처량한 40대 사나이. 그의 담담한 일상을 담고 있어 그저 술술 읽혀 내려가지만 그가 느끼는 비애감과 서글픔과 그리움은 내 마음을 계속 먹먹함으로 물들여갔다.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주인공의 마음따라 생각따라 추억따라 꿈따라 그렇게 이끌려간다. 이런 경험은 공지영님의 <도가니>를 읽었을 때도 느꼈더랬다. 그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한없이 이끌려 갔던 그 느낌. 

 

그는 매일같이 떠나간 아내와 아꼈던 애견 태인이를 그리워하며 동네를 산책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과거의 추억 또한 산책한다. 그러한 과정을 겪으며 그는 과거의 자신을 위로하고 용서하기에 이른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아이가 컨베이어 라인에 앉아 있다. 아이가 식당의 긴 줄 뒤에 서 있다. 아이가 리어카를 끌고 자재과로 간다. 잠시 서서 담장 밖 미루나무를 본다. 아이는 낯익으면서 멀었다. 그 아이는 내 안 어느 곳에서 자라지 않은 또 다른 나였다. 내가 손을 놓은 아이였다. 내 입에서 저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자식, 외로웠구나. 많이 막막했구나. 말이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아이가 오래도록 그 말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때 너 그랬구나....." <p.281>

 

"나의 맹렬한 허기와 대결 의식이 슬펐다. 참 못나게 살았다. 그건 치열함이 아니라 오히려 게으른 자만이었다. 질긴 엄살이었다. 그러나, 용서하고 싶었다. 가장 힘찬 용서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아무 걱정 하지 마요." <p.282>

 

읽는 내내 먹먹했다. 읽으면서 엉엉 울었음 싶었지만 그런 류의 눈물이 아니라 가슴에 맺혀서 좀처럼 터져 나오지 않는 깊은 설움섞인 눈물이었다.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 죽은 자는 다만 염원하고 소망한다. 간절히 무언가를 바라지만 그건 욕망이 아니라 다만 그리움이다.<p.125>


그의 눈에 죽은 자들이 보였던 것은 그 또한 간절히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으로 살아갔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그는  과거 속에서만 살아가고 현재속에서는 그저 삶이라는 것을 버텨만 가는 죽은 자였는지도 모른다. "그거 아니라도 살아 있는 이유를 모르면 죽은 거랑 똑같죠."<p.131>

 

'나'도 주인공처럼 과거 속의 나를 만나 그때의 나를 위로해야 할 것이고 용서하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나도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과거 속에 갇혀 살았던 적이 있다. 속으로는 세상과 단절하며 내 속에 갇혀 살면서 세상을 향해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면을 쓰고 살았던 적이 있다. 그때는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었고 늘 눈물을 머금고 살았다. 울면서 걸어가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푹 눌러쓰곤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마음껏 울었던 때가 있었다.

 

그래... 내가 네 마음을 안다. 그 때 많이 힘들었지. 같이 울어주는 이 하나 없이  얼마나 힘들었니. 그 때의 나로 돌아가 가만히 안아주고 싶다. 너는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 있다고 힘있게 얘기해 주고도 싶다.

 

주인공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새벽이 밝아오는지도 모르고 어느새 한 권을  다 읽게 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은 게 아주 오랜만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주인공의 마음이 내 안에서 넘실거린다. 책을 읽으며 이대로라면 끝끝내 울진 않겠구나 생각했었는데  마지막에 주인공이, 태인이가 환생하여 왔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유기견을 바라보며  "몽아" 라고 부를 때 나는 느닷없는 공격을 받은 것처럼 가슴에 맺혔던 눈물들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몽이"는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을 주었던  나의 반려동물 애견의 이름이다. 우리 세 남매 모두 자신의 미니홈피에 비공개 폴더를 만들어두고 남몰래 꺼내어 보는 사진의 주인공 몽이... 주인공의 애견 태인이가 아니라 우리 몽이가 다시 살아나 주인공의 품에 안긴 것처럼 기쁘고 반가웠다. 그리고 그립고 또 그리웠다. 몽이를 묻고 돌아오는 날 아버지도 울고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 우리 모두 다 울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몽이를 입밖에 낸 적도 없고 지금까지도 함께 몽이를 떠올리며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주인공이 태인이를 떠올릴 때마다 몽이를 떠올렸더랬는데 그렇게 몽이 이름을 마주할지 어떻게 알았으랴... 정말 느닷없는 대목에서..느닷없는 눈물이었다. 주인공이 태인이에게 가졌던 그 애잔한 그리움만큼이나 나는 몽이가 그립고도 그립다.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은 주인공의 아내가 만든 문패에 적혀 있는 문구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직접 읽으며 그 의미를  찾아보셨음 한다.  그 먹먹한 마음 안으로 들어가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  

 

 

 한 사람을 온전히 만나면 거기에 다른 이들도 보인다.

배역이 다를 뿐 모든 사람의 욕망과 상처는 본질적으로 같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무게의 삶을 산다.


<p.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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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1 범우 한국 문예 신서 51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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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기에 맞장구 치고 싶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책이다." 라는 머리말 중의 문구가 나에겐 무척이나 강렬했다. 다독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애독가이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무척이나 기대했던 책이라 더더욱 그 문구가 강렬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문구가 내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는 듯.

 

거의 하루에 한 권 이상을 읽어내는 장정일님의 독서량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고 그의 거친 표현들이 책읽는 자의 오만함이라기 보다는 책읽기를 생활화하는 자의 특권처럼 느껴졌다. 그의 거침없는 표현들에서 왠지 모를 애정이 묻어나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의 독서일기를 읽으면서 장정일님만의 색깔을 인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하며 책을 읽고 자신의 감정과 표현을 아끼지 않는 장정일님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장정일님이 소설가다 보니 아무래도 일반인의 시각과는 많이 달랐고 알려진 대로 책품평이 무척이나 까칠하셨는데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이었다. 그는 책을 읽고서 '이 쓰레기 같은 소설' '오문과 악문으로 가득한 책' ' 엉터리 페미니즘 소설' 등의 거친 표현을 쓰며 아주 냉정한 칼같이 접근하기를 즐겨했고 작가에 대한 비판 또한 서슴지 않았으니 그 중에서도 '공지영'님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싶을 정도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책에 대해서는 '아주 재미있고, 가슴을 울린다.' '그것은 읽고 나자마자 곧바로 내 뇌의 한 부분이 될 만큼, 강력했다.' 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 모습도 간간히 만날 수 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내 역량이 장정일님의 다독에 미치지 못해 읽는 내내 안타까움이 함께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 라는 말도 있지만 이번 경우는 그런 경우와는 다른 듯 하다. 실망이라고 할 것도 없이 [장정일의 독서일기]에 소개되는 책들이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어서 장정일님이, 읽은 책에 대해 때론 신랄하게 비판하고 때론 극찬을 아끼지 않을때도 거기에 장단 맞추질 못하고 그저 글로서 인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7권부터 읽었더라면 장정일님의 일기에 공감도 하고 때론 반대입장도 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든다.

 

요즘은 어느때보다도 서평에 대한 관심이 많은터라 서평쓰는 법에 대해서도 챙겨서 읽어보고 잘 적은 서평들을 찾아 읽어보는 수고 또한 아끼지 않지만 그만큼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다. 책은 내가 읽는 행위지만 서평은 내가 쓴 글을 다른 이가 읽는 것이다 보니 조금

더  신중해지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부터 부담이 되어 예전처럼 마음으로부터 자유하며 쓰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나에게 시원한 해답을 주었다. 독서일기와 서평의 색깔이 틀리긴 하지만 서평 또한 내가 읽은 것을 그 느낌 그대로 담으면 된다는 것. 책읽기를 즐기는 것처럼 서평 또한 즐기면서 쓰면 된다는 것. 남들과 생각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나만의 색깔로 다듬어 담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읽는내내 함께 공감도 못해드리고 그 독서의 깊이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장정일님에게 조금 죄송스러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장정일의 독서일기] 7번째를 읽고자 한다. 물론 내가 읽지 않은 책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읽은 책도 드문드문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아무쪼록 장정일님의 생각에 공감도 하고 그의 거친 비판에 맞장구도 쳐보고 싶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내게 쉬운 책이 아니었지만 내가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한번 더 읽고싶은 책으로 자리잡을 듯 하고 다시 한번 더 읽었을 때는 나의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있게 장정일님의 독서일기를 대하는 그 날까지 열심히, 즐기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자라는 즐거운 다짐을 해본다.

  

소설책에 밑줄을 긋는 행위는, 요주의를 위해 밑줄을 그을 때를 제외하고는

독자가 작가 혹은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하게 느낄 때이다.

그리고 그 밑줄은 다른 독자가 그 책을 들었을 때

당신도 내 생각에 동의하느냐는 물음 곧 대화가 된다.

이때 밑줄로 건네는 그 대화는, 소설을 읽으며 밑줄치기에 탐닉하는 사람은,

책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책(고독)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타인(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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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긴 만남 - 시인 마종기, 가수 루시드폴이 2년간 주고받은 교감의 기록
마종기.루시드폴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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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물방울인 내가 강물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순간인 내가 연속적 시간인 너와 대화를 나누기를,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진솔한 대화가

신들이 사랑하는 의식과 어둠,

또한 시의 고상함에 호소하기를

 

보르헤스, 「송가 1960」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서 책이 출간되는 사례는 일찍이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그 내용의 종류도 다양하다.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평생에 걸쳐 편지로 마음을 전한 예술가들의 서간집이라든지 반고흐와 동생 테오가 주고받은 『반고흐, 영혼의 편지』와 신영복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처럼 일기형식을 띄는 사색적인 편지글도 있고 『채링크로스 84번지』처럼 헬렌 한퍼라는 작가와 영국의 중고 서적상이 우연한 기회로 의도하지 않게 20년동안 주고받은 서간집도 있다. 하지만 이 서간집들의 특징은 의도되지 않은 순수한 편지라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마종기님과 루시드폴의 편지에세이 『아주 사적인, 긴만남』을 너무도 읽고 싶어서 구입해놓고는 갑자기 심각한 선입견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과연 이 책은 순수한 편지글인가. 아니면 출판사에 의해 철저하게 의도된 것인가.' 책을 펼치기도 전에 그 물음에 발목이 잡혀서 책을 머리맡에 두고서도 한참 후에야 첫 장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나의 순수하지 못한 마음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더욱 정성들여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생명공학 박사이면서 '루시드폴'이라는 예명으로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연주하는 조윤석과 의사이면서 시를 쓰는 일흔의 老시인 마종기님이 2년에 걸쳐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 펴낸 『아주 사적인, 긴 만남』은 영혼의 소통이 묻어나는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기위해 멀리 타국 북유럽에 도착한 첫 날, 약간의 두려움으로 움츠린 루시드폴이 제일 처음 펼쳐든 책이 바로 마종기님의 「이슬의 눈」이었고 그 이후로 마종기님의 시는 루시드폴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2집 앨범을 만들 때에는 마종기님을 가장 훌륭한 음악 선생님 (p.15)이라고 표현하기에 이른다. 누구에게나 계기가 있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계기. 삶이 변화되어지는 계기. 그러한 계기는 언제나 어떤 극한 상황. 또는 인생의 고독의 시기에 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루시드폴에게 전혀 낯선 존재. 마종기 시인이 자신의 음악의 멘토같은 존재로 자리잡는 운명적인 순간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아, 이 시[동생을 위한 조시]를 저는 얼마나 많이도 읽었던가요. 그리고 늘 이 시의 뒷부분을 읽을 때면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있어 전철역에서, 집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전화를 하는 중에 얼마나 읽고 또 읽어주었던지. 보내주신 편지 중에서 무엇보다도 '쉽고 좋은 시'라는 시구가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 '쉽다'라는 것이 저에겐 단어 그대로의 '쉽다'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에서 독자의 가슴으로 '쉽게' 가는, 그런 시가 '쉽고 좋은 시' 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결심하게 되었지요. 나는 쉽고 좋은 노래를 써야겠구나..  (p.89)
  

 

그렇게 루시드폴이 마종기 시인의 오랜 팬인 것을 알게 된 어느 출판사가 두 분을 소개해 줌으로써 메일을 주고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의도된 기획이긴 하지만 출판사의 선한 의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루시드폴과 마종기 시인은 같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외로운 싸움을 싸우며 공부를 했다라는 동질의식과 생명공학 박사, 의사라는 전문분야에 몸담고 있으면서 또다른 직업, 예술을 한다라는 비슷한 처지에 쉽게 마음을 터놓으며 공감대를 형성해간다. 마종기 시인은 고향을 떠날 때 느꼈던 정신적, 육체적 상처를 이야기하며 루시드폴의 이국 생활을 깊이 이해해 주었고 그 외로움과 소외감을 힘껏 응원해 주었다.아버지와 아들 뻘 되는 36년의 나이차가 무색하리만치 대화는 자연스러웠고 서로의 편지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루시드폴은 마종기 시인에게 더욱 존경과 감탄을, 마종기 시인은 루시드폴에게 더욱 깊은 호감과 반가움을 담으며 편지는 이어지고 있었다. 

 

서간집은 두 사람의 은밀하고 깊은 이야기를 몰래 훔쳐 읽는 기분으로 두 사람의 마음을 오가며 읽을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고 또한 내가 좋아하는 [소통]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어 좋아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소통의 부재]의 시대를 살아가고 짧은 인사말에 익숙한 시대를 살아가는 요즈음, 편지지 분량 2장은 족히 넘어보이는 이메일을 읽을 때면 무엇보다도 마음이 꽉차게 좋은 건 사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근황과 현재의 마음상태, 또는 계획과 비전을 긴 글로 써내려가며 상대방에게 나의 진심이 전해지도록 전하는 그 정성어린 마음이 무척이나 정다웠고 부러웠고 그리워졌다. 나조차도 그렇게 정성어린 편지를 쓰지 못하고 살고 있음이 돌아보아져서 반성이 되기도 한 시간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깊은 소통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정말 축복이고 선물이라고 한다면 분명 루시드폴과 마종기 시인은 서로에게 선물임에 틀림없다. 편지는 그렇게 2007년 8월 24일부터 시작해 2009년 3월 27일까지로 끝이 났지만 그 이후에도 평생에 걸친 소통은 계속 될 것이고 서로가 더 깊은 동질애로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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