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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얼음처럼 빛나고/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가장 높은 정신은/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산정(山頂)은/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빛을 받들고 있다/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하나의 형상 역시/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나의 영혼이/이 침묵 속에서/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 얼음 덩어리들은 /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 결빙의 바람이여 / 내 핏줄 속으로 / 회오리 치라 /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 나의 전신을 / 관통하라 / 점령하라 / 도취하게 하라 / 산정의 새들은 /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 맞추던 /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 점령하라, 압도하라 /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 두길 갈망해 왔던가 /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한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조정권 시집 『산정묘지』, ‘산정묘지 1' 전문


우연히 시인 조정권의 ”독락당“을 읽고 그의 시 세계가 궁금해서 오랜만에 시집을 구입했다. 30편의 연작시 ”산정묘지“ 중의 1편을 읽고 그의 깊고도 깊은 영혼의 세계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30편의 연작시가 조금은 어렵기도 했지만 1편의 감동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아무도 몰래 혼자만 읽고 싶은 시이지만, 마음을 나누고픈 이가 있다면 악필임에도 불구하고 정성스레 손글씨로 선물하고픈 시다.



*

독락당 대월루(對月樓)는 /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 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

- 시집 『산정묘지』, '독락당'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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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욕망과 영성>에서 좋았던 몇 구절을 옮겨 본다.

건강한 신앙은 내 갈망을 ‘다루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욕심이 가득한 갈망, 즉 욕망으로 진화한다. 갈망 자체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건강한 불, 열정인데, 그 갈망을 다루지 않으면 치우친 욕심(정념)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그 갈망을 다루지 못한 성경 속의 인간 군상들이 어떻게 욕망의 사람으로 진화되어 가는지 보여 준다. 그것은 수 년 전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성경을 바이블(기준, 척도)로 믿고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다. (12쪽)

하나님의 축복은 크게 되지 않아도, 높아지지 않아도, 유명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저 내게 주신 갈망, 육체를 통해 보고 느끼고 만지는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 그것을 향유하는 것이 축복이라 하겠다. (14쪽)

성육신의 삶, 거진이진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표는 내 분야에서 기독교의 공공성과 책임성을 구현하려는 마음이 있는가에서 드러난다. 또 이 땅에서 소소한 삶의 기쁨에 감사하며 그것을 향유하려는 삶의 자세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을 누리길 원하신다. (24쪽)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내게 주신 순간의 아름다움, 일상의 축복을 향유하는데 있다. 과거의 기억에 붙잡혀 그때만 그리워하고 다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면서 지금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찾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25쪽)

노동, 즉 일상의 수고와 그것에 수반되는 고민과 갈등과 불안의 시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고귀하고 복된 시간이다. 고단한 이 세상에서 도피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고 마음 맞는 교인들과만 몰려다니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내 삶의 노동과 같은 현장,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하는 시간이 하나님의 시간이고 축복의 연장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일과 영성’의 중요한 시작점이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에 감탄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 영성이다. 작은 일에서 원복을 찾는 것, 그것이 기독교 영성이다. (27쪽)

침묵은 나를 움직이는 내 안의 엔진을 ‘셧 다운’ 시키는 것이다. 일단 멈춤으로써 나도 모르게 나를 움직이는 나의 욕망을 알아차리는 시간이다. 그렇게 자기를 직면하는 시간이 없으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를 모는 것처럼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 (28쪽)

비록 나의 실존은 두려움과 불안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면 남들과 비교하고 남을 모방하면서 그들의 힘을 좇지 않을 수 있다. (64쪽)

너는 정말 네 열망을 찾았냐고, 네가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이 정말 네가 원하는 길이냐고, 너는 왜 그렇게 남을 의식하냐고, 너는 왜 남들이 하는 것을 아무런 비판 없이 따라 하기만 하냐고, 나 자신에게도 한번 물어 보자. (87쪽)

그러나 보아스는 달랐다. 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그는 모방짝패와 모방회오리가 불어오는 한복판에서 전혀 다른 길로 걸어갔다. 그런 길을 걷는 자, 그리고 이방인이지만 모방폭력의 위험 앞에서도 신앙의 길을 함께 걸었던 룻과 같은 자들의 선택 위에 하나님은 새로운 가문을 만들어 주신다. 그것이 다윗의 가문이요 그리스도의 혈통이었다. (143쪽)

이제 예수님은 모방폭력과 희생양 매커니즘의 상황에 놓여 있는 독자들을, 원망과 복수 대신 화해와 용서의 세계로 초대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 다 아시면서도 가신 ‘자기 죽음’의 길이다. 자기 부인이다. (212쪽)

사랑을 통해 일단 영혼이 눈을 뜨면 추구가 시작된다. 이제 그대는 결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때부터 그대는 특별한 갈망으로 타오를 것이고, 다시는 자기만족이나 부분적인 성취라는 낮은 땅에서 배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영원성은 그대를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그대는 적당히 타협하지 않을 것이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완전한 성취의 꼭대기에 이르려고 노력을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이 영적인 길이 열릴 때, 그대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자비로워질 것이다. (존 오도나휴, ’영혼의 동반자‘ 중에서) (229쪽)



<욕망과 영성>은 내 안의 갈망보다 내 안의 모방욕망이 무엇인지 깊이 들여다보게 했다. 마침맞게 찾아온 책. 다른 이의 욕망을 내 것으로 취하지 않는 연습. 자주 침묵하며 나를 움직이는 욕망을 알아 차리기. 그리고 갈망 잘 다루기. 무엇보다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내러티브 경험하기는 삶에서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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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 하피(아르피에)의 성모
아티스트 안드레아 델 사르토(Andrea del Sarto)
제작연대 1517년
종류 유화
기법 패널에 유채
크기 178 x 207 cm
이미지출처 wikimedia commons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의 라이프는 아버지 가업보다 예술에 더 관심이 많아 베를린의 전시회장을 누비며 그림을 감상하는데, 어느 작가의 자화상 앞에서 운명과도 같은 전율을 느낀다.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아르피에의 성모’의 마돈나를 닮아 ‘모피 입은 마돈나’로도 불리우는 작품이었다.



실제로 이 책의 작가 사바하틴 알리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아르피에의 성모’ 작품의 마돈나를 보고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책 덕분에 찾아 본 작품을 자주 들여다보면서, 성모 마리아를 보며 스토리를 구상한 작가와 자화상 작품 앞에서 전율을 느낀 라이프를 떠올렸다.

"지금까지 사는 동안 늘 그녀를 찾고 기다렸다. 주의를 집중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사방에서 그녀가 남기는 작은 흔적이라도 찾으려 애썼다. 쓰디쓴 경험을 거쳐 비로소 통찰력을 갖게 됐는데 어떻게 틀릴 수 있단 말인가?" (150쪽)

“쓰디쓴 경험을 거쳐 비로소 통찰력을 갖게” 된 그 무엇을 나 또한 기다리는데 사람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힘들어도 즐겁게 나를 소진할 수 있는 이 다음의 사건을 기다린다. “어떻게 틀릴 수 있단 말인가” 그 생생한 느낌을 기다리며 오늘도 우직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 거센 바람을 뚫고 좋은 소식이 오고 있음을 믿으면서.

이제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를 마음에서도 덮고 다른 책을 시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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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업무의 경중에 따라 독서의 양이나 질에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인정하고 그런 중에도 틈틈이 책을 읽자 하고 있는데 중요한 건 책의 선택이다. 책도, 영화도 귀한 시간 들여 읽고 보는 거, 내게 유익하고도 내적 성장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런 고민을 계속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얼마 전에 읽었던 팀 켈러의 <결혼을 말하다>를 읽고 마음에 큰 깨달음이 있었고, 독서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이 내 독서의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시각으로 책을 읽고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일러 주는 것만 같았다고 할까. 


팀 켈러의 <결혼을 말하다>를 읽고 김형석 교수님의 <백 년의 독서>를 선택한 것 또한 내 시각을 더욱 단단하게 붙들기 위해서이다. 아주 지혜롭고 성숙한 사람은 아이와 같이 순수하다고 했던가. 당신의, 독서 생활의 시작부터 철학 이야기,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당부하는 모든 문장이 순수했고 겸손했고, 특히 철학 이야기에서는 철학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읽어도 흥미를 느낄 만큼 대표 철학자들의 핵심을 재미있고 쉽게 들려주셨다.  


그리고 당신의 독서 관점, 그리고 철학을 대하는 관점을 명확하게 짚어주셔서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특히 고전 읽기를 강조하셨는데 고전은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알려주고", "고전다운 고전은 시중에서 떠드는 베스트셀러 열 권보다 더 큰 무게와 영향력을 갖고 있"으니 "고전을 읽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당부하셨다. 


강조해서 언급해주신 책은 메모해두었고 시간을 두고 한 권씩 읽어보려고 한다. 어렵다고, 당장 나와 상관없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사고와 시각을 위해 인내하며 계속 읽어나가야겠다. 무엇이든 시작이 있으면 결과는 나타나기 마련이니 천천히, 우직하게 읽어나가면 사고가 한 뼘이라도 더 확장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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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경 옮김,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오늘의 밑줄_

식물이, 동물이, 아이가, 남편이, 아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지 정한 내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내 사랑은 파괴적이다. 내 사랑은 죽음의 키스인 것이다. (28쪽)

폭력과 달리 사랑은 인내를 전제로 한다. 내적 노력을, 무엇보다 용기를 전제로 한다.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실망을 참고 견딜 용기, 일이 잘못되어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 사람은 자신의 강인함만 믿으면 되기 때문에 그 힘의 왜곡된 형태인 폭력을 믿을 필요가 없다. (34쪽)

고요를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은 없다.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 (41쪽)

아, 좋다. 밤이 하얗게 새도록 대화하고픈 사람을 만난 기분이다. 계속 얘기해 주세요. 쉬지 말고 당신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대화 도중 잠깐 쉬는 순간엔 숨을 죽이고 그다음을 기다리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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