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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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A Grief Observed, “비탄에 잠기다.” 혹은 “(직접 겪은) 비탄에 대한 관찰”이 되겠다. 큰 슬픔을 직접 겪지 않고는 다른 이의 슬픔을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아픔을 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차원이 다른 슬픔이다. 그런 큰 슬픔을 지나온 자의 눈빛은 자주, 남몰래 깊어질 것이며 그자의 애도의 깊이는 분명 다를 것이다. 살면서 너도나도 한 번쯤은 겪어야 하는 깊은 강.

“우리는 그 진실성이나 거짓됨이 우리의 생사를 좌우하는 문제가 되기 전에는 그것을 얼마나 진정으로 믿는지 알 수 없다.” (43쪽)

“사랑은 소유하지 않고 갈망할 때에야 비로소 완벽해지고,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의 선물을 주는 것이며 고통은 귀 기울이지 않는 세상을 깨우는 확성기”라고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한 C.S.루이스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가 써내려간 <헤아려 본 슬픔>에는 그런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사랑하는 H(헬렌 조이 그래셤)가 암으로 사망하자, 하나님을 원망하며 사람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는 악한 신으로 표현하기까지 하며 자신의 슬픔을 격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루이스 자신의 믿음을 제대로 직시하는 일생일대의 시험의 장, 그리고 지금까지 확신에 차서 강의하고, 집필한 내용의 그 모든 것이 불시에 수면 위로 올려져 그의 믿음을 하나님께 감사()당하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믿음은 늘 그렇게 시험을 당하므로.


“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다. 오직 그러한 고통 아래에서만 그는 스스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62쪽)

평생 사랑이 없을 것처럼 살던 루이스에게도 거의 예순이 다 되어 진정한 사랑이 찾아왔으니 얼마나 달콤하고 행복했겠는가. 심지어 H가 암으로 시한부를 선고받은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결혼까지 했으니 그 사랑은 참으로 진실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감당할 수 없는 크기와 무게이기에 루이스는 H를 떠나보내고 흔들리는 신앙의 시기를 겪게 된다. 어떻게 “그 C.S.루이스가 그럴 수가 있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러한 루이스를 보며 위로를 받았다. 뿌리까지 믿음이 흔들리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정하는 시간을 겪지 않은 자의 신앙은 언젠가는 또 그러한 시험을 치뤄야 할 것이기에 솔직하게 자신의 슬픔 앞에 무너져,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의 모습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 하지만 참으로 진실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내가 어떤 상태를 묘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슬픔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그것은 지도가 아닌 역사서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임의로 어느 지점에서 그 역사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영원히 멈출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87-88쪽)

루이스 답게 글을 쓰면서 슬픔을 관찰하며 파헤치려고 했지만 그는 슬픔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하나님과 H를 그 자체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방법을 깨달아간다. 자신의 슬픔에만 빠져 있을 때는 오히려 하나님과 H와 멀어질 수밖에 없지만 차츰 슬픔에서 벗어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때에야 하나님과 H가 그 자체로 존재하며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며 처절하게 몸부림치지 않으면 알지 못할 깨달음이겠다. H에게 돌아오라고, 제발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자신만을 위한 것인지 철저하게 인식하지 않고는 다다를 수 없는 깨달음이겠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이나 사랑의 자질을 알아보시려고 시험을 하시는 게 아니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시니까…. 그분은 언제나 내 성채가 카드로 만든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쳐서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 (78쪽)

C.S.루이스와 H의 사랑을 담은 영화 <섀도우랜드>를 보고, 이어서 <헤아려 본 슬픔>을 읽으니 그 슬픔과 감동이 두 배, 세 배가 되는 듯했다. 마치 내가 옆에서 생생하게 겪는 아픔같이 느껴졌달까. 책을 통해서 상실의 아픔을 이렇게 절절하게 느껴본 적이 있었나 싶게 깊이 맛보며 묵상할 수 있었다. 내가 겪지 않고는 감히 당신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상실의 아픔을 대면하여 관찰한 루이스 덕분이다. 먼 훗날, 내가 직접 겪는다면 “정말” 알게 되겠지. 루이스가 느낀 그 아픔의 깊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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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25 0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s루이스 작가 좋아합니다 안나님이 알려주신 이책 꼭 읽어볼께요 영화도😊
안나님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 🎄☃

안나 2022-12-25 00:42   좋아요 1 | URL
아, 좋아하신다니 기뻐요. 특히 <순전한 기독교>의 그 명징한 문장력은 읽을 때마다 설레는 것 같아요. ㅎㅎ 참고로 <섀도우랜드>는 넷플에서 봤어요. 시간되실 때 꼭 한 번 보시길요 ^^ 스캇 님도 부디, 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내년에도 스캇 님의 매력적인 글, 자주 읽으러 들를게요. 🎄⭐️🙋‍♀️

2023-01-06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06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리커버 에디션)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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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과 아버지

들여다보면 아버지의 상처에서 기인한 연약함의 표출이다. 상처가 자기연민이 되고, 갈수록 자격지심과 자기방어로 이어져 가장 가까운 가족들을 힘들게 한다.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고, 솔직하게 상처를 내보여 위로 받는 방법을 모르는 가장은 결국 자신의 가정과 인생을 해친다. 그러한 자신 또한 얼마나 두려울까. 상처 입은 아이와 청년이 좋은 어른으로 성장해서 좋은 가장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며 얼마나 큰 인생의 승리인지… 상처 입은 인생이 그 상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우리 인생의 숙제가 아닐까 한다. 또한 상처 입은 아버지를, 또는 어머니를 어떻게 대하느냐도.


가정폭력과 아버지, 그리고 딸

상처는 대물림된다고 해야 하나.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모두 집을 떠나고 습지의 오두막에 일곱 살 난 카야만 홀로 남는다. 나이가 어려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습지의 생태가 제 삶의 근원인 것처럼 습지의 한 부분이 되어간다. 성경의 다윗이 생각난다. 막내였던 다윗은 형들이 하기 싫어하는 양치기를 도맡아 하며 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루 종일 양을 쳤다. 외로워서 수금을 타며 노래를 했고, 양들을 노리는 곰이나 맹수가 나타나면 매일 연마한 물맷돌로 양을 지켰다. 일상의 성실, 원했던 삶은 아니지만 그 삶에 정성을 다했던 다윗은 후에 사울 왕을 괴롭히는 악신을 수금 연주로 떠나게 했고, 그 유명한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쓰러뜨렸다. 그렇게, 홀로 남은 카야도 습지의 동물들과 새와 벗하며 습지의 모든 환경에 자신을 맡기면서 결국 누구도 쓸 수 없는 습지 생태 관련의 책을 계속해서 펴내게 된다. 상처 입은 사람은 있을 수 있으나 그 삶을 어떻게 대하느냐, 어떻게 이겨나가느냐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양을 치는 들판이 왕이 되는 훈련 장소였고, 홀로 남아 살아야 하는 습지가 자신을 생태 전문가로 만들어 주는 곳일 줄이야. 삶을 대하는 태도에 언제나 답이 있고 미래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랑, 선택의 어려움

두 남자가 등장한다. 마음 깊이 우러나는 사랑으로 카야를 대하는 인간적인 남자, 카야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습지를 떠나 자신의 세계로 들어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만다. 문득, 에밀리 디킨슨의 시가 생각나는데 워딩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그리고 한 남자, 사랑하는 이가 떠난 공허한 자리를 끝까지 좋은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며 살기에 카야는 외롭고 허전하고, 그 남자는 육체적으로 끌린다. 선택의 문제. 저 사람이 내 사람이 아닌 걸 알지만 나의 외로움을 저 사람으로 채울 것인가. 말 것인가. 카야는 선택했고, 선택은 늘 책임을 요구한다. 인생을 살면서 늘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그럼에도, 사랑.

자신의 세계로 그녀가 올 수 없다면 자신이 그녀의 습지로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에게는 그를 대신하는 남자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대로 된 선택을 한다. 떠나지 않고 그녀 주위에서 그녀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남자로서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킨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의 위대함이란. 상처입은 남자, 여자. 어쩌면 우리 모두는 상처 하나씩 안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 상처를 알아보고 모난 부분을 부드럽게 대해주고, 기다려주고, 안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하지만 누구나 그런 사람을 기대하고 소망하고 바란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언제까지 기대만 해야 하나. 우리의 사랑을 어떤 상황에서도 품을 수 있는 그릇으로 용량을 키워야지. 그렇게 생각만 해도 용량이 좀 커지는 것 같더라. 한 사람에게만큼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면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친구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을 장래희망으로 삼아도 좋겠다 싶은 마음. 하지만 기대는 쪼끔 남겨 두고파. 난 언제나 "그럼에도, 사랑"을 믿는다.


마무리.

미처 못한 이야기가 내내 마음에 떠다녀서 이렇게 또 구구절절 적어 보았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다 읽고 개인적으로 작가에게 속았다 싶은 부분도 있었는데 그것도 이 책의 재미라면 재미겠다. 아, 이제는 마음에서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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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2-02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영상으로도 제작 된다는데 아 ㅜ.ㅜ 원작 만큼 가슴 아플것 같습니다

안나 2022-12-02 00:32   좋아요 1 | URL
ㅠㅠ 안그래도 찾아보니 영화는 11월 초에 개봉했더라구요. 원작의 여운이 조금 잦아들면 영화도 챙겨 보려구요. 습지와 오두막 내부를 어떻게 표현했을지 너무 궁금해요. 영화도 책만큼이나 좋을 거 같아서 기대 잔뜩입니다.
 
[eBook]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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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빛이 벌새의 깃털에서 극도로 미세한 분광기를 통과해 수천수만 조각으로 부서져 어떻게 황금빛 도는 붉은 목덜미의 윤기를 만들어내는지, 색채만큼이나 깜짝 놀랄 만한 언어로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46. “세상의 왕” 중에서)

많고 많은 문장 중에 이 문장으로 시작한 이유는 책을 읽는 내내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작가 델리아 오언스와 작품을 우리 글로 숨막히도록 멋지게 옮긴 김선형 번역가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카야가 그녀의 편집자를 만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작가와 번역가를 향한 꼭 내 마음 같아서 이 문장을 읽을 때 마음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에서 야생을 연구한 생태학자 델리아 오언스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습지 소녀 카야가 주인공이지만 숨은 주인공은 습지다. 습지의 생태에 대해 이토록 아름답고도 문학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작품이 또 있을까. 그녀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깊이와 단단함과 아름다움에 자주 숨이 막혔고, 자주 울컥했다. 외로움과 좋은 사람, 그리고 아름다운 인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의 문장이었다.

버림받은 삶, 외로움, 고독, 사랑, 공허, 잘못된 선택, 편견, 혐오 등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는 인생을 살면서 만날 수 있는 많은 비극과 슬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습지 소녀 카야를 지켜보면서 우리네 인생도 카야 처럼 습지 또는 늪에 홀로 갇혀, 타인의 시선과 편견에 얽매여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돌아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작가는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삶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는 것은 스스로 삶을 개척해가는 의지와 함께, 결국 사람이고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올해는 소설을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오디오 북으로만 접하고 다른 분야의 책을 주로 읽었는데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정말 괜찮은 소설을 읽고 싶다며 신중하게 선택한 작품이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인생에서 내 마음에 꼭 드는 무언가를 만나면 느낄 수 있는 벅참과 감동을 며칠 동안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고, 작가도 물론이지만 김선형 번역가의 작품은 언제 만나도 반가울 것 같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책을 사랑한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로맨스, 미스터리, 살인사건, 소녀의 성장 이야기가 모두 버무려져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리즈 위더스푼)

책을 읽고 검색을 해보니 셰릴 스트레이드의 자서전 <와일드>를 읽고 영화 제작을 했던 리즈 위더스푼이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고 영화 제작을 했다고 한다. 리즈 위더스푼,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 내 마음도 있겠구나… 믿고 신뢰하며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참 반가운 일이다. 영화는 올 11월 초에 개봉했다고 하니 찾아봐야겠다. 영드 <노매드랜드>의 데이지 에드가 존스가 분한 카야, 정말 배역도 찰떡인 것이 책만큼이나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도 마음 꽉 차게 흡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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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묻다 - 과학이 놓치고 있는 생명에 대한 15가지 질문
정우현 지음 / 이른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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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그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컨디션과 마음가짐이 준비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펼칠 수 있는 책이 있다. 내게는 정우현의 <생명을 묻다>가 그랬다. “생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함과 “묻다”가 주는 호기심이 내게 좋은 컨디션과 마음가짐을 빠른 시간 내 갖추도록 독려하는 듯했다. 그리고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부딪칠 수 있는 것까지도 염두하고 마음을 준비해야 하니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했음에도 몇 개월이 지나고서야 펼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결론부터 얘기해볼까. 정말 가독성이 좋았고, 과학에 깊이가 얕은 나조차도 저자의 치밀한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는 걸 발견하곤 했다. 과학에 신학과 철학, 문학과 신화, 예술을 아우르며 질문에 대한 답 또는 이야기를 펼쳐갈 때, 이것이야말로 융합 사고력이구나 감탄할 정도였다. 하나씩 질문을 던지며 그들이 제 역할을 하도록 있어야 할 자리에, 응답해야 할 자리에 적절하게 배치되는 것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무엇보다, “과학은 생명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로 문을 열면서 “생명은 우연인가”라는 질문으로 첫 발을 뗀 저자가 마지막 질문에 이를 때까지 아주 세심하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생명의 기원에서부터 생명의 역사, 그리고 생명을 바라보는 이론이 과거와 현재, 어떻게 실패하고 발전을 거듭해왔는지 이야기하는 것에 결코 균형을 잃지 않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질문 또한 아주 전략적이어서 이미 답을 내리고 던지는 질문과 도전하는 질문, 그리고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키며 고민케 하는 질문으로 지금까지 좁은 식견에 머무르고 있던 내 생각의 지경을 넓혀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래서 이 책은 저자와 함께 동행하는 독서이기도 하고, 그의 질문 하나 하나에 반응하며 함께 생각하는 독서이기도 하다.

생명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다윈, 리처드 도킨스의 진화 이론과 DNA와 유전자, 생명을 환원주의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의 한계, 생명을 기계적으로 바라보는 현대과학의 관점, 복제, 노화, 죽음까지 읽을수록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아주 깊이 있게 펼쳐지는데 정통 분자생물학자인 저자는 과학자 입장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생명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함을 인정하며 생명의 본질을 깊이 고민하는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열 다섯 가지의 커다란 질문 안에서 “생명”이라는 큰 줄기를 관통하며 이렇게 폭넓고 다양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과학자가 지금까지 있었을까 싶은 것이 과학에 깊이가 없는 나로서는 굉장히 즐겁고 신선한 독서 경험이었고, 어디를 펼쳐도 친숙한 과학자와 철학가, 그리고 문학에서 말하는 생명에 관한 저마다의 이야기가 친절하게 펼쳐지니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과학책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다음 책이 기다려지는 과학자를 만났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참 반갑고 기쁘다.

“생명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이라는 과학의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하나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189쪽)

“우리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밝혀낸 생명의 원리가 모든 생명에게 적용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생명이 가진 창발성이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녀석이라서, 2 곱하기 2는 항상 4가 아니라, 5나 6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번번이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법칙이라는 것에 얽매이기에는 생명은 너무나 경이롭다.”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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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한 국어학원
변진한 지음 / 깨소금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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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트친(트위터 친구)이 글을 쓰고, 일인 출판사를 만들어 책을 내셨다.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원장이라는 이름으로 국어학원을 운영하셨던 진한 님의 이야기가 참 진솔한 목소리로 펼쳐지는데 오래 지켜본 덕분인지 그분의 성정과 유머, 그리고 가족과 학생들을 향한 사랑이 문장에 얼마나 깊이 녹아 있는지 알아 볼 수 있었다. 


진한 님의 호흡을 따라 읽어가는데 숨이 가쁘지도, 느리지도 않고 얼마나 편안한 호흡으로 읽히는지 역시 그분 답구나.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트위터에서는 알 수 없었던 속사정들도 조금 더 가까이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여름한"(열매가 많은)이라는 학원 이름처럼 지난 학원 생활 속에서 얼마나 많은 열매를 거두었을까, 왠지 그 열매가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학원을 폐업하게 되었다고 졸업생에서부터 학원을 거쳐간 많은 아이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긴 문자를 보내는 그 진실함에서 진한 님은 정말 아이들에게 든든한 나무였겠구나. 믿고 배울 수 있는 선생님이었겠구나. 아이들이 가졌을 그 감사한 마음이 내게도 전해져 오는 듯해서 뭉클했다.


진한 님은 사진,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서 사진 전시회도 하시고 "망고아빠" 라는 이름으로 음반 [숨어있는 것들]도 내셨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11월>을 좋아한다. 매달 들어오는 저작권료에 "저도 한 몫 하고 있어요~" 라고 여기에서 꼭 말씀드려야겠다.(하하) 피아노곡인데 참 좋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한 님의 글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


"몇 달 되지 않은 일인데 벌써 전생처럼 아득하다. 별것 아니라면 아닌 작은 동네 학원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의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만 있다면 오래 기억하고 싶어 적어 둔다. 그리고 그 기억의 힘으로 새로운 길을 걸어보고 싶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길은 또 다른 시작에 닿아 있을 것이다." (117쪽)


아무쪼록 어깨와 허리에서부터 몸과 마음이 온전히 회복되시기를, 진한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힘껏 새로운 길을 꿈꾸시기를 바라고 나 또한 계속, 힘껏 응원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한 님께 정호승 시인의 <봄길>의 첫 부분을 읊어드리고 싶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있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다음이 기대됩니다. 아주 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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