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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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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프랑크 부인 이야기를 열광적으로 늘어놓고 나서 마지막 말은 그렇게 가벼운 말투로 마무리해 준 덕분에 라몽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즐겁게 사시는 것 같네요." 이상하게 다르델로는 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너무 가벼운 그 말투가, 기억으로 여전히 자기 안에 깃든 죽음의 비애, 마법처럼 그 비애를 품고 있는 달콤한 기분, 묘하게 아름다운 그 기분을 없애 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pp.16~17) 

  

"침묵은 주의를 끌지. 깊은 인상을 줄 수 있어 수수께끼같이 알 수 없게 만들어 줘..." (p.24)  

  

뛰어난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려고 할 때면 그 여자는 경쟁 관계에 들어갔다고 느끼게 돼. 자기도 뛰어나야만 할 것 같거든. 버티지 않고 바로 자기를 내주면 안 될 것 같은 거지. 그런데 그냥 보잘것없다는 건 여자를 자유롭게 해 줘. 조심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는 거야. 재치 있어야 할 필요도 전혀 없어. 여자가 마음을 탁 놓게 만들고, 그러니 접근이 더 쉬워지지.  (p.25)

  

"사람들은 살면서 서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하고, 다투고 그러지, 서로 다른 시간의 지점에 놓인 전망대에서 저 멀리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한 채 말이야." (p.33)

  

"시간은 흘러가. 시간 덕분에 우선 우리는 살아 있지. 비난받고, 심판받고 한다는 말이야. 그다음 우리는 죽고, 우리를 알았던 이들과 더불어 몇 해 머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죽은 사람들은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이 돼서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완전히 무(無)로 사라져 버리는 거야. 아주 아주 드물게 몇 사람만이 이름을 남겨 기억되지만 진정한 증인도 없고 실제 기억도 없어서 인형이 되어 버려......"   (pp.33~34) 

  

망설임처럼 보였던 그 멈춤은 사실은 증오를 향한 부름이다. 증오가 그녀와 함께 있기를, 그녀에게 의지가 되어 주기를, 한순간도 그녀를 떠나지 말기를 청하는 부름이다.  (p.50)

  

죄책감을 느끼느냐 안 느끼느냐. 모든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아. 삶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지. 다들 알아. 하지만 어느 정도 문명화된 사회에서 그 투쟁은 어떻게 펼쳐지지? 보자마자 사람들이 서로 달려들 수는 없잖아. 그 대신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우는 거야. 다른 이를 죄인으로 만드는 자는 승리하리라. 자기 잘못이라 고백하는 자는 패하리라...  (p.57)

  

그리고 날개가 있다는 거. 또 하얗다는 거. 하얗지. 이봐, 샤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말이야.천사에겐 성(性)이 없어. 어쩌면 바로 그래서 천사가 하얀 걸거야. (p.61)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탄생시킨 두 가지 증오, 남자가 오르가슴에 이른 순간 동시에 일어난 남자의 증오와 여자의 증오, 그 흔적을 찾아내려 했다. 온화하면서 신체적으로 강한 남자의 증오와 대담하면서 신체적으로 약한 여자의 증오가 이룬 짝짓기.

  

그러니 그런 두 가지 증오의 열매가 사과쟁이일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p.75)                          

우스운 것에 대한 성찰에서 헤겔은 진정한 유머란 무한히 좋은 기분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해, 잘 들어, 그가 한 말 그대로 하는 거야. '무한히 좋은 기분', 말이지. 조롱, 풍자, 빈정거림이 아니야. 오로지 무한히 좋은 기분이라는 저 높은 곳에서만 너는 사람들의 영원한 어리석음을 내려다보고 웃을 수 있는 거라고.   (p.99)

  

"나는 꼭 믿고 싶구나. 너하고 나 사이에 어떤 오해도 없다고, 우리가 서로를 잘 이해하고있다고......"    (p.132)

  

그리고 147쪽 통째 밑줄...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무의미의 축제』를 며칠째 붙들고 있다. 두 번을 읽었고, 그래도 좋아서 놓지를 못하고 다시, 읽고 싶은 자리를 손으로 훑으며 읽기를 여러 번. 리뷰를 해보고 싶은데 엄두가 안난다. 149쪽 분량의 책이지만 그 책이 담고 있는 깊이의 무게를 어떻게 녹여서 풀어야 할지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책이다. 배꼽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스탈린과 칼리닌의 얘기로 한참을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고, 다르델로와 카클리크 이야기, 그리고 칼리방의 이야기 등등... 각자 다른 이야기지만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그 내밀한 이야기들을 한없이 이야기해보고 싶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눈을 반짝거리며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만났을 때의 반응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마침, 팟캐스트 <빨간책방>에서『무의미의 축제』를 다루고 있어서 마침맞은 우연의 기회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연속해서 몇 번을 듣고 있다.

밀란 쿤데라.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글을 읽을 때의 호흡이 작가의 호흡에 이끌리는 듯한 느낌도 받는다. 음악적인 요소를 염두하여 글을 쓴다고 하니 작가의 지휘에 독자가 심취하여 따라가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몇날 동안 몇 번을 더 읽으면서 작가의 지혜와 그 삶의 통찰 속에 깊이 들어가보려 한다. 부디, 이 책이 그의 유작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1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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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사랑들 밀란 쿤데라 전집 2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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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간다. 기껏해야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것을 얼핏 느끼거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서야, 눈을 가렸던 붕대가 풀리고 과거를 살펴볼 때가 돼서야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p.12)

 

막다른 골목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영감의 장소다. (p.32) 

 

그 여자가 아름다웠다고 하시는데 그건 아무것도 알려 주는 게 없지 않습니까? 공장장 동지가 자투레츠키 씨에게 정중하게 일러 주었다. "예쁜 여자들은 많아요! 키가 컸나요, 작았나요?" "컸어요." 자투레츠키 씨가 말했다. "갈색 머리였나요 금발이었나요?" "금발이었어요." 잠시 망설이다가 자투레츠키 씨가 답했다. 내 이야기의 이 부분은 아름다움의 위력에 대한 우화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자투레츠키 씨가 우리 집에서 클라라를 봤던 날 그는 그 정도로 눈이 부셨고 놀랐다. 아름다움이 그의 눈앞에 불투명한 막을 가로막아 놓았던 것이다. 베일처럼 그녀를 가려 버린 빛의 가로막을. 왜냐하면 클라라는 키가 크지도 않았고 금발도 아니었다. 단지 아름다움 속에 깃든 위대함이 자투레츠키 씨의 두 눈에 그녀가 신체적으로 키가 커 보이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빛이 그녀 머리를 황금빛으로 보이게 했던 것이다. 그 작은 남자는 마침내 클라라가 밤색 작업복 차림으로 치마 원단들 위로 몸을 오그리고 있는 쪽에 도달했을 때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아예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pp.37~38) 

 

"사람들의 삶에는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의미들이 있어요." 교수는 말했다. "우리 중 그 누구의 과거든 사람들이 제시하는 방식에 따라 아주 사랑받는 국가 원수의 전기가 될 수도 있고 범죄자의 전기가 될 수도 있는 겁니다." (p.42)

 

살다 보면 후퇴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사활이 걸린 입장들을 지켜 내기 위해 덜 중요한 입장들을 버려야 하는 순간, 그런데 나한테 최후의 입장은 내 사랑인 것 같았다. (p.49)

 

나는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모험이라는 말에 안장을 맸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스스로 방향을 잡아 말을 달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환상일 뿐임을. 그 모험들은 어쩌면 전혀 우리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임을. 그 모험들은 전혀 우리를 특징지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그 모험들의 기이한 흐름에 전혀 책임이 없음을. 그 모험들 자체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상한 힘에 의해, 알 수 없는 어떤 곳에서부터 다른 어디로 향한 채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p.56)



제목을 <농담>으로 지어도 전혀 무방한, 밀란 쿤데라의 또다른 농담 버전의 단편이다. 

 

그가 정직한 사람이었고 상대방은 아프겠지만 더 큰 발전을 위해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 내가 만난 사람들의 감출 수 없는 숨은 마음들, 본능을 본다. 늘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상황들을 모면하기 위해 해가 되지 않을 거짓말을 하면서, 그리고 직면한 문제는 피해 다니기 바쁜 우리네 모습들, 말이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시작된 그의 모호한 처신들, 그것을 덮기 위한 모함과 거짓말들이 끝내는 그를, 계속해서 푹푹 꺼지는 땅을 걷게 하는 결론으로 이끌어간다. 그 모든 것을 농담이었다고 해도 이제는 아무도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나도 우리가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불쑥 농담을 던져 의심을 불러일으켰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의심들은 당장은 잊히지만 오늘 과거 속에서 다시 건져 올리게 되면 갑자기 정확한 의미를 담게 되는 겁니다. (p.42) 


때를 놓친 진실과 정직의 발언은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 때를 놓치면 모든 시간이 거짓과 또다른 거짓으로 물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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