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애쓰지 않아도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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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소리를 허투루 쓰지 않고, 내게 주어진 빈 페이지를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작가로 살고 싶다. (작가의 말 중에서)

<쇼코의 미소> 이후로 두 번째 만남이다. 첫 느낌이 좋아서 가끔 작가의 이름을 만나면 반가움이 일었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이번 소설집 문장의 호흡은 각별히 좋은 느낌이었고, 문장이 그대로 내 안에 흡수되는 듯했다.

열 네편의 단편, 짧지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주 절묘하게 잘 녹아 있다. 살면서 차마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 상처가 되어 늘 마음을 쿡쿡 찌르던 과거의 일들이 인물들의 편지와 독백, 그리고 대화를 통해 고백되고 그 이야기는 그녀들만이 아니라 곧 내 이야기도 될 수 있음에 마음이 저릿해지는 순간들을 만난다. 세상에 가득한 슬픔을 우리는 왜 모른 채 살아갈 수 없을까. 어떤 이는 차별로, 가정 폭력으로, 사랑받지 못함으로, 사랑하는 이나 동물을 잃음으로… 각자의 슬픔 속에 산다. 작품의 인물들이 이제 “애쓰지 않아도 별다른 감정 없이” 아픔과 마주하려 할 때, 너의 슬픔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작가의 도닥임에 마음이 뭉클해지곤 했다.

언젠가는 각자의 아픔을 마주해야 한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그때의 상처입은 나를 안아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더이상 “애쓰지 않아도”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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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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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분노와 원망을 품은 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한 번뿐인 인생, 온전한 기쁨도, 온전한 행복도 누리지 못한 채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함몰되어 간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이가 있어 그이의 품에 안겨 한바탕 시원하게 울고 나면 울분이 사라질까.

아내와 딸을 죽인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오직 복수만을 위해 살아가는 코뿔소 노든은 길 위에서 소중한 인연들을 만난다. 동물원에서 만난 코뿔소 앙가부, 함께 길을 나선 펭귄 치쿠, 그리고 치쿠를 대신하여 노든의 곁을 함께 한 어린 펭귄까지.

함께 길을 떠나며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힘을 주고받는 그들을 보며 내내 마음이 뭉클했는데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삶의 꼭짓점마다 나타나 사랑과 관심과 기도와 도움을 주었던 인연들이 생각났다,

노든이 펭귄 치쿠와 어린 펭귄을 통해 살아갈 이유를 깨닫고 소리 없이 울 때, 그 마음이 오롯이 느껴져서 한동안 목이 멨다. 분노와 원망과 미움은 남을 죽이고 싶게 하고, 내 영혼을 죽게 하지만 그 마음을 내려놓을 때 찾아오는 평안은 다시금 힘차게 세상을 살아갈 힘을 줄 것이다.

그리고 어린 펭귄이 노든을 떠나 “자기 몫의 두려움을 끌어안고 바닷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것은 노든의 존재와 끝까지 자신을 품어 주었던 윔보와 치쿠가 아니었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임을 보면서 홀로 나만의 만족을 위해 사는 삶이 얼마나 반쪽짜리 삶인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 대상작인 루리의 <긴긴밤>은 내게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게 했고, 감사한 인연들을 다시금 떠올려 주었고, 지금의 나 또한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님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면서 겸손하게 했다.

읽는 내내 좋아하는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한 명씩 떠올려 보기도 했다. 좋은 책을 읽으면 마음이 순해진다. 그런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고, 순해진 마음이 내게만 머물지 않고 내가 바라보는 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라게 된다. 순한 마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흘러가기를 소망해 본다.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99쪽)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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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여름 에디션)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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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것이 큰 만족을 줄 때가 있다. 출퇴근길에 편하게 들으려고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선택했는데 이렇게 스며들 듯 흡족하게 들리는 오디오북이 얼마 만인가 싶었다. 번아웃이 오면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 선택한 이별, 그리고 어릴 때부터 꿈꾸었던 서점.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 그리고 주인공 영주의 이야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서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는 소설이다. 서점에서 커피를 내리는 민준은 커피에 진심이어서 내용이 진행될수록 커피 향이 더 짙어지는 느낌까지 든다. 북토크, 북토크를 위한 질문지 작성,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은 실제처럼 실감이 나기도 했다. 주인공 영주만큼 챕터챕터가 참 깔끔했다. 영주의 과거가 드러나는 챕터에서는 그 맘이 어떤지 알 것만 같아서 눈시울이 더워졌고,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하는 승우에게는 고마움이 느껴졌다.

어른이 되면 나이테 같은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사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난 이후로 많은 일들에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여유가 생겼다. 아픔의 내용은 달라도 그 눈물의 농도는 맛보아 아는 것이니 괜스레 연민의 마음도 생기고 낯선 이를 안아주고픈 마음도 드는 것이다. 과거의 아픔으로 인해 내가 더 성숙하게 되었고 더 나은 현재를 살고 있다면 절망이 감사가 되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영주 또한 마음에 나이테 하나 새겼지만, 더 단단한 영주로 나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휴남동 서점, 단골 서점으로 삼고 싶을 만큼 좋은데 오디오 북으로 듣던 사람들의 생각도 그랬는지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종이책으로도 출간되었다. 나도 소장하고 싶어서 오디오 북 중간을 넘어설 때쯤에 구매했는데 마침 여름 에디션. 이렇게 순하고 깔끔한 소설, 참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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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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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기사(종이책 297쪽 전문 수록)가 나갔던 2019년 가을 이후로, 세상은 달라졌다. 인터뷰 전문 기자로의 내 인생 또한 그 기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그것은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18p)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칼럼을 좋아한다. 인터뷰이의 깊은 생각과 뜻을 아주 겸손한 자세로 끌어내는 인터뷰어의 능력과 글 솜씨에 늘 매료되곤 했다. 특히 이어령 선생님의 인터뷰 내용은 책으로 더 엮어져도 좋겠다 생각했는데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터뷰집으로 탄생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상반기 동안 오래도 붙들고 있었다.

이민아 목사의 ˝아빠가 예수님 믿는 게 소원˝이라는 말에 신앙의 길로 들어선 이어령 선생님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딸의 태도와 모습을 통해 자신의 지성으로 해석할 수 없는 영성의 세계가 있으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지성과 영성을 아우르는 스승, ˝죽음이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은 내게도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몸은 죽음에 가까워 노쇠하여도 정신만은 또렷하여 후대에 당신이 받은 선물을 지혜의 유산으로 남기려고 하시는 열정은 눈물겹도록 저릿하게 다가왔다. 실제로 이어령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많은 책들이 출간되었고, 곧 직접 쓰신 육필원고, <눈물 한 방울>이라는 책도 나온다고 하니 아직도 우리가 그분에게서 길어야 할 지혜의 샘은 무궁무진한 것이다.

살면서 침묵해야 할 때가 있고, 쏟아내야 할 때가 있는데 선생님은 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안에 있는 것들을 토해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어떤 사명을 띠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아내시는 듯했다. 그것을 얼마큼 받아 마시느냐는 내 몫이고 우리 각자의 그릇의 분량이겠다. 지금 읽고, 또 시간이 지나서 읽었을 때는 선생님의 깨달음을 더 큰 그릇이 되어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

지성이 영성을 만나면 그 깨달음의 깊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본다. 이 귀한 인터뷰집을 통해 그 깊이를 맛볼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이 시대에 이어령 선생님을 이어 각 영역에서 많은 스승들이 나타나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그리고 내가, 스승은 아니어도 지성과 영성으로 깊어지는 한 명의 제 몫을 하는 어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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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님의 말처럼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가 이 인터뷰의 핵심이다. 돌아보면 선생이 이 시대에 태어나 대중 앞에 서서 쓰고 말한 모든 것도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19p)

모든 사물, 모든 현실 속에는 그런 엷은 막이 있어. 나한테는 그것을 뚫는 게 영성이라네. (221p)

침묵을 만들고 침묵을 견딘다는 건 내공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 낯선 시간을 자주 감각하는 사람이 예술가가 되고 철학자가 되는 것이겠지요.(247p)

죽음에 가까이 가고서 나는 깨달았어요. 죽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305p)

지성의 종착점은 영성이에요.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에요. (3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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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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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에세이집을 읊어볼까. 박연준의 <소란>, 용윤선의 <울기 좋은 방>, 그리고 하나 더, 한정원의 <시와 산책>. 앞의 두 권은 몇 번을 읽었는지 셀 수가 없다. 그나마 <시와 산책>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정독은 세 번이라 손꼽을 수 있겠다.

눈을 좋아하고, 언 강에 매료되고, 11월을 편애하고, 고양이를 아끼고 무엇보다 산책을 좋아하는 그녀. 그녀의 문장, ˝산책자는 걸을 때만큼은 자신의 ‘몸‘보다 ‘몸이 아닌 것‘에 시선을 둔다.˝에 비춰본다면 그녀는 단연코 산책자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피어나는 시들과 정돈된 생각들은 조용하지만 묵직하고, 담담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올린 울림이 있다. 책을 다 읽고 차례만 읽고 있어도 좋은 이유는 그녀의 문장을 벌써 사랑하게 된 까닭이겠다. 성소자가 되려다 산책자가 된 그녀의 글은 안으로 깊어져 홀로 걸을 수밖에 없는 수도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곧 시집도 나온다고 하니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의 시집을 기다리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 그녀의 문장이 아름다운 덕분이다.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 밤하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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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이라는 목적지만을 찍어 단숨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소한 고단함과 아름다움을 거쳐 그것들의 총합이 당신을 만나게 하는 것. 그 내력을 가져보고 싶게 한다. (24p)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 그런 다음 나의 내면이 다시금 바깥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작고 무르지만, 일단 눈에 담고 나면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단단한 세계를. 그러므로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25p)

가지지 못한 것이 많고 훼손되기만 했다고 여겨지는 생에서도, 노래를 부르기로 선택하면 그 가슴에는 노래가 산다.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34p)

나무는 말이 없어요. 밤도 묵묵해요. 신은 별처럼 숨만 쉬어요. 제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침묵하기만 합니다. (1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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