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엠_샘 #영화 #서평

세월이 흘러 내 곁에는 두 아이가 있다. 아이를 키우다보니 과거 영화를 볼때와는 다른 감동이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아이를 키우는 일, 그것은 어떤 경험보다도 힘겨운 생의 사투였고 부모의 삶이라는 화두를 평생 던져준 일생일대의 과제였다.

7살 지능을 가진 아버지를 둔 루시, 루시는 그 누구보다도 힘겹고 어려운 상황이다. 매일 책을 읽어주지만, 글을 읽을 줄 몰라 외운 동화책 한 권만 수천 번을 읽어주는 아버지 샘. 이제 곧 8살이 되는 루시는 동화책의 내용에 질릴 만도 하건만, 유치원에서 보내주는 동화를 읽어내지 못하는 아버지를 위해 동화책을 읽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글을 읽지 못하는 척을 한다. 아버지 샘은 다시 또 매일 읽는 동화책을 읽어주며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 장면은 끝내 눈물샘을 건드리고 만다. 숨가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바쁘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동화책 한 권 읽어주지 못한 아이들에게 그저 미안함 마음이 들어서였다. 7살 지능을 가졌지만 아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기세인 샘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아동복지사로부터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는 아버지 샘으로부터 루시를 강제분리시켰기 때문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아버지는 변호사를 알아보지만 그 누구도 아버지 샘을 위한 변호를 하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샘과는 비교되는 세련된 커리어 우먼 변호사 미셸 파이퍼를 찾아가지만, 어쩐지 그 변호사는 너무 정신없는 모습이다. 샘에게 정신감정을 의뢰한 복지사들로부터 정신병원에 가는 동안에도 변호사는 과속을 일삼으며 끊임없이 욕설을 하고, 운전 중에도 수없이 통화를 하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 저능아 샘보다 더 정신병을 앓고 있는 병자라 해도 믿을 수 있는 장면이었다. 어쩌면 현대인들의 모습은 정상과 비정상을 오가며 끊임없이 방황을 일삼는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의 모습을 반추하는 엘리트 변호사역의 미셸 파이퍼와 사회적 취약계층의 샘의 만남은 최상의 계층과 최하의 계층이다. 둘의 대조적인 삶이 교차되며 펼쳐진다. 수백 평이 넘어 보이는 집에서 포르쉐를 타는 미셸 파이퍼에게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세련된 옷차림과 자신만만한 그녀의 태도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지만 그녀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루시와 같은 나이인 8살 아들 윌리. 사고뭉치에 엄마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며 오히려 경멸의 눈빛을 하고 있는 아들을 볼 때마다 변호사의 입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남편은 매일 출장으로 바쁘고 아내와는 전화통화만 할 뿐 가정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런 상황에서 샘을 만났다. 매일 찾아오는 의뢰인들은 서로 아이를 맡지 않겠다며 소송을 걸어대고 자신의 삶에서도 아이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는 현실이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사랑은 없는 메마른 삶이다.

워커홀릭이었던 그녀를 시기하는 동료들. 돈 밖에 모르는 변호사로 수군대는 동료들에게 장애를 가진 샘을 무료변호 해주겠다는 선언을 해 버리고 만 것은 어쩌면 자신의 이기심에 대한 치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샘의 변호를 통해 미셸은 자신의 인생에 무엇이 빠져있는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거친다. 루시를 빼앗겨 울부짖고 있는 샘에게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샘보다 자신이었다는 고백은 미셸의 변화를 알려주는 장면이다. 샘의 지능은 7세이지만 삶에서 소중한 사랑을 주는 방법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변호인단 앞에서 루시가 한 말은 이것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제게 필요한 건 사랑뿐이에요.’

재판에 진 샘은 위탁가정에 있는 루시를 보러갔다가 멀리서 지켜만 보다 차마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이후 집에만 칩거하며 나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찾아간 미셸은 자책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처음으로 자신의 장애와 무능을 탓하며 괴로워하는 샘을 마주한다. 이제 막 이혼을 하고 온 미셸은 샘에게 소리치며 운다. 누구나 다 그런 고통 하나는 가지고 있다며 성공한 커리어우먼인 자신도 여전히 외모에 대한 열등감과 타인과의 경쟁에서 뒤처질까하는 두려움과 자신을 미워하는 동료들과 싸우는 중이며 매일 자신을 경멸하는 아들의 눈빛에 고통 받고 있다고 모든 것은 샘의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한다.

항소를 준비하는 변호사와 샘은 다시 루시를 찾아오기 위해 의기투합하며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루시의 위탁가정집 근처에 아파트를 마련한다.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루시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샘과 루시는 너무도 행복하다. 늦은 밤 아빠를 보고 잠든 루시를 다시 위탁가정집에 돌려보내는 것이 하루일과가 되버린다. 그것을 지켜보는 위탁가정집의 부모들.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위탁가정의 부모들은 루시를 샘에게 보내며 좋은 엄마가 되어주고 싶어서 재판에 샘을 나쁘게 말하려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루시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 영화의 마지막은 변호사와 위탁가정의 부모들, 샘의 친구들, 루시의 친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축구를 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며 어른들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에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다. 늘 모범생인 줄 알았던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자 어긋나기 시작했다. 삐딱한 말투와 삐딱한 행동, 순화되지 않은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어른 흉내를 내며 화장도 시작했다. 근심으로 아이를 보며 아이가 잘못될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늘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사랑의 눈빛으로 마주한 기억이 없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어쩌면 그렇게 큰 조건이나 환경이 필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공한 여성조차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있듯이 아니면 영화 속 아동복지사들이 아버지로서의 자질을 검증하며 수많은 조건을 내세우는 것조차 어리석은 허울인지도 모른다. 루시가 아버지로서의 지능을 의심하는 복지사들에게 사랑만이 필요하다는 말로 심금을 울렸듯이 아이는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의 방황은 어쩌면 사랑이 필요한 나이에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나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그래. 사랑한다 나의 딸들...
샘의 문장으로 마지막을 대신한다.
전 세계인들을 울게 만든 한 문장...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https://youtu.be/9cGBsTcA-5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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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또래, 중년의 당신에게
알라딘 서평이벤트에 당첨되어 온 선물~♡
노트는 이쁘고 연필도 귀엽고 저스트살구는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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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분노
#불행은 타인을 믿지 않을 때 시작된다.

분노 怒り라는 글자를 피로 쓴 살인현장이 영화의 시작이다. 살해 현장은 매우 잔인했고 무더위에 지쳐있는 형사들의 표정에서도 그 잔인함에 혀를 내두른다. 아내가 먼저 살해당한 후 욕조에 있었고 한 시간 뒤 돌아온 남편이 살해당한 후 욕실 바닥에 눕혀 있고 범인은 시체를 밟고 올라가 샤워까지 했다. 그리고는 여자의 장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내 먹었고, 분노라는 글씨를 피로 쓴 후 사라지고 7년째 범인의 행방을 찾지 못한 상태이다. 생방으로 범인의 인상착의를 공개수배 하지만 여전히 성과가 없다.

그런 가운데 세 명의 용의자가 7년 전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오해를 받게 되면서 영화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헷갈리게 한다. 영화를 보는 중 내내 세 명 모두가 살인범처럼 보이는 것도 이 영화의 계획된 미장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 세 명의 용의자들을 통해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게이이면서 클럽 문화에 심취해 있는 도쿄의 샐러리맨 유마는 남성적인 매력과 자신감이 넘친다. 비록 어머니가 암투병을 하고 있지만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사람을 즐겁게하는 엔돌핀이 가득하다. 유마는 사랑에도 적극적인 스타일로 전형적인 성공한 도시남성 캐릭터이다. 그런 그의 앞에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데다 조용한 나오토를 동성애 클럽에서  보자마자 첫 눈에 반한다.  자신과 정반대의 캐릭터이기 때문에 끌렸는지 모르지만 유마가 생각하는 나오토는 깊은 사랑이었다. 늘 도망만 가려는 나오토에게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치며 자신의 옆에 두려하지만, 우연히 카페에서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이후로 나오토에 대한 질투와 불안이 짙어만 간다. 그러던 중 공개수배 프로그램을 통해 7년전 부부 살인 용의자 얼굴에 있던 점 세 개를 나오토에게서도 보게 된다. 갑자기 사라진 나오토를 유마는 애써 잊으려 노력하는데, 어느 날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로 유마는 영원히 나오토를 버린다..그러나, 밝혀진 진실은 나오토가 오랫동안 심장병을 앓고 있었고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떠난 것임을 알게 되자 유마는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질투와 의심에 눈이 멀어 나오토의 사랑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은 믿음이 수반되지 않으면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이지 않는 법이다.


과거를 알 수 없지만, 우울해 보이는 항구의 타시로. 항구에서 같이 일하는 요하이는 3개월 전 가출한 딸을 유흥업소에서 데리고 온다. 밝고 명랑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웠던 딸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늘 아프다.  그런 딸이 정체도 모르는 타시로를 사랑한다고 울어대니 아버지인 요하이는 더욱 가슴이 찢어진다. 조그만 섬마을에 유흥업소 출신의 아이코의 평판이 좋지 않기에 요하이는 타시로의 과거가 불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거를 허락한다.그런 가운데 공개수배 프로그램을 통해 살해 용의자 얼굴을 보고는 타시로와 닮았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신고를 한다. 허나, 그 과정에서 살인자로 의심을 받은 타시로는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에 가슴아파하며  도쿄로 떠났고 타시로의 사랑을 의심했던 여자는 믿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한다. 결국 사랑은 믿음이 없이 불가능한 것이다.


오키나와로 새로 이사온 전학생 이즈미에게는 타츠야만이 유일한 친구다. 오키나와에서 여관을 하던 타츠야는 이즈미를 데리고 종종 무인도로 외출을 나간다. 맑고 투명한 오키나와 바다근처의 무인도에서 우연히 배낭여행을 온 타나카를 만나고, 둘은 개성 있고 말주변이 좋았던 그와 금방 친해진다. 과거를 말하지 않지만, 혼자 섬에 사는 타나카에게 미군철회 시위로 여관일을 소홀히 하는 아버지 대신  아르바이트를 부탁하는 타츠야. 그러나,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인 타츠야에게 여관일은 답답할 뿐이다. 게다가  이즈미가 미군들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셋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시작된다.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던 이즈미의 강간현장에 타츠야와 타나카 모두가 서로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세 명 모두가 알게 되자 서로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타츠야는 이즈미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타츠야를 원망하는 이즈미와는 반면 타나카는 다름 이유로 미군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있다. 그는 미군들이 이즈미를 강간하다 누군가가 외치는 경찰! 경찰! 이라는 소리에 도망갔다는 사실에 분노했던 것이다. 그런 타나카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타츠야는 살인의 충동을 느끼고 '믿었기에 용서할 수가 없다'며 타나카를 찌른다. 무인도 섬 안의 분노라 써있던 글씨는 영화 초반 살해된 부부의 입구에 써있던 글씨와 같았다.

살인사건 용의자라는 큰 프레임 안에 얽힌 세 가지의 이야기들은 사랑하는 사이에 의심이라는 균열이 시작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의 헤프닝이다. '믿었기에' 배신의 상처가 컸던 이들의 의심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스스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낸다. 타인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정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삶에서 아주 작은 균열은 예고치 않게 찾아오지만 그 균열을 만드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선택이다. 우리는 종종 타인을 온전히 사랑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랑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우린 종종 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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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정의론이라는 강의를 듣다가 류시화의 인생우화에서 읽은 정의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지상에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모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은 다음 다시 지상에 내려보내겠다고 한 신의 심부름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을 모았지만, 한 자루에 담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너무 많아 자루가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곳은 폴란드의 헤움이라는 마을이었는데 천사의 실수에 신은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저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며 천사를 위로한다. 그래서 헤움에는 세상에서 어리석은 바보들이 모두 모여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웃마을의 부유함이 부러웠던 바보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세상의 정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마부 이하일과 양복장이 이체크를 보내 정의를 구해오라 하였다. 배를 타고 가던 중 보물처럼 아끼는 상자에 정의가 있다고 듣자 100달러를 주고 사왔다. 정의를 사 왔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자, 그때서야 상자를 열어본 이들은 썩은 생선이 가득한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긴 여행으로 정의가 부패했다 생각하며 정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가 구입한 정의에서 악취가 나는 이유는 세상 어디나 정의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만의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정의론이라는 강의에는 정의를 찾아 길을 떠나는 무지개소녀가 나온다. 마을에 심한 기근이 들자 정의를 찾아 떠난 무지개 소녀는 공리주의 마을과 마르크스 마을, 자본주의 마을, 이데아 마을, 법치주의 마을 등 열 다섯 개의 마을을 돌아다니지만, 정의를 찾지 못한다. 결국은 헤움의 사람들처럼 무지개 소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진실을 마주한다. 현재의 삶에서 정의를 세워 가야 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쫓는 정의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진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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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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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서울 근처에 아리랑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조선왕조의 압정하에서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 진 가지에 목이 매여 죽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졌다. 그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일반 죄수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한 학자도 있었고, 조선 왕족의 적들도 있었고, 반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 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진 뒤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이 애끊는 노래가 조선의 모든 감옥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아리랑’은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 이 노래의 내용은 끊임없이 어려움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죽음만이 남게 될 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지, 삶의 노래가 아니다. 그러나 죽음은 패배가 아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 승리가 태어날 수도 있다. 이 오래된 ‘아리랑’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구절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은 죽었으며, 더욱 많은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유랑하고 있다. 그렇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는 돌아가게 될 것이다.

『SONG OF ARIRAN』

"중국에서는 맑은 강물이나 시냇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강에서 투신자살할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답니다. 중국의 강들은 그러기엔 너무 더럽지요."

"당신네 조선인들도 일본 사람만큼이나 자살을 좋아하는 모양이지요?"

"자살은 식민지 민중이 선택할 수 있는 불과 몇 안 되는 존엄한 인간의 권리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살마저도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당신이 말한 서울의 그 다리 위에는 벌써 오래 전에 일본 놈들이 푯말을 세워 두었지요. 거기에는 ‘5분만 기다리시오.’라고 씌어 있습니다. 굶주린 아기 엄마들이 종종 자기 자식을 강물에 집어던지고는 자신도 뛰어듭니다. 그래서 전담 경찰을 파견해 혼자 그곳에 와서 심각한 얼굴로 강물을 내려다보는 사람을 감시합니다. 이것이 우리 조선 사람에게 베푸는 훌륭한 친절이라고 그놈들은 생각합니다. 안둥 부근에 있는 압록강 또한 자살하기에는 딱 좋은 곳이지요. 자살하지 않으려면 강을 건너서 망명하는 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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