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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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글은 담백하다. 어려운 용어를 쉽게 사용한다. 거부감이 전혀 없이 뇌에 흡수되어 전신으로 소화하는 느낌이 든다. 김정운의 신간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를 읽으며 슈필라움이라는 공간에 대해 배웠다. 심리적 위안과 물리적 공간이 만났을 때 존재하는 시간을 ‘슈필라움’이라 한다. (‘놀이(spiel)’와 ‘공간raum’이 합쳐진 ‘슈필라움’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가 여수의 작은 섬에 일본에 단기 유학으로 미술을 배우고 와서 차린 화실이 김정운의 슈필라움이다.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은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겹지 않은 공간,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슈필라움’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공간을 꿈꾼다. 나만의 공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며 오롯이 나의 시간이 흐르는 공간을. 서재가 있음에도 거실에 상을 펴고 쭈구려서 글을 쓰곤 하였다. 자판기의 글자들은 모두 지워진 상태였고 모니터는 작았지만, 왠지 모르게 청승맞아 보이지만 고집스럽게 나만의 공간이란 애착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오래되고 낡은 무엇이, 작은 상 앞에 앉았을 때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던 것은 심리적 위안이라는 것은 물리적인 공간이 확보되어야 얻어지기 때문이다. 여수 섬에서 보는 너른 바닷가의 출렁임을 화폭에 담아내며 김정운이 느꼈던 슈필라움의 시간들을 읽노라니 누구에게나 그런 공간 하나쯤 욕심내보는 것이 로망이지 않을까싶다.

 

살면서 나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며 살까? 김정운이 말하는 여수의 슈필라움의 이야기 보다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역시나 문화박사로서 심리학박사로서의 말빨이다. 아재개그와 곁들여 세계의 현상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안그래도 점점 나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과의 벽을 높고 두텁게 쌓고 있었는데 세상 속의 내 작은 슈필라움을 떠올려보니 조금씩 벽이 다시 허물어진다. 그것은 사람은 외로운 존재인 동시에 타인과의 삶을 통해 성장해가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리라.

 

◆책 속의 한 구절
습관적으로 ‘나쁜 이야기’만 소셜 미디어로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들과 ‘친구’를 맺으면 아주 고통스럽다. 밤새 ‘나쁜 이야기’만 쌓여 있기 때문이다. 죄다 남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이야기뿐이다. 희한하게 ‘사회정의’로 정당화하며 즐거워한다. ‘나쁜 이야기’에 서로 ‘좋아요’를 죽어라 눌러댄다. 각자의 소셜 미디어에 쌓이는 ‘나쁜 이야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모여 앉아도 남 욕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타인의 관심을 얻기에 ‘나쁜 이야기’가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를 생각해보자. ‘저기 바나나가 있다.’는 정보와 ‘호랑이가 나타났다.’라는 정보 중에 내가 지금 살아남는 것과 관련해 어느 이야기가 더 중요할까? 당연히 ‘저기 호랑이가 있다’는 나쁜 이야기다. 바나나는 내일 먹어도 된다. 그러나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무시하면 바로 잡아먹힌다. ‘나쁜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보다 생존에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가 ‘나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바로 이 원시적 본능이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잠시만 한눈 팔아도 목숨이 날아가던 원시시대 이야기다. 문명화된 사회한 날것의 위험들을 제어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갖춰진 상태를 뜩한다. 그런데도 사방에 ‘나쁜 이야기’들뿐이다.

 

‘나쁜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불안한 인간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불안한 이들이 불안을 유포해 혼자만 불안하지 않으려는 아주 웃기는 현상이다.-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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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년의 공부 -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필요할 때, 맹자를 읽는다
조윤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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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도 여전히 맹자가 유효한 이유


덥다 못해 뜨거운 6월의 태양아래 그동안 공부하던 모든 과정을 마쳤다. 만감이 교차하며 공부의 의미를 새겨보던 중 맹자의 『 이천 년의 공부』를 한 자 한 자 읽어보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현재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 것은 동양철학이었다. 공자에서 맹자, 채근담, 사기, 관중, 한비자, 손자 등 동양철학은 하나의 층위를 이루며 내면을 단단하게 해주었다. 물론 여전히 외부의 환경에 따라 흔들리고 상처받고 있지만, 동양철학을 알지 못하였을 때의 나와 현재의 나는 상황에 따른 이해나 대처가  확실히 달라져 있음을 느낄 때, 철학이 삶에 작동하는 긍정의 피드백이 상당한 힘이 되어줌을 깨닫곤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용기가 필요하다. 젊었을 때는 용기가 분기탱천하여 어떤 일에도 두려움이 들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 어떤 일에든 머뭇거리게 된다.  처음 공부를 시작하였을 때 주저하였던 것은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은 반드시 있기에 두려움으로 주저앉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 같다. 


맹자가 제나라에서 왕의 책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고향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이다. 맹자가 관직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하자, 제선왕은 맹자를 붙잡지 않았다. 맹자를 떠나보내기는 아쉽지만 맹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 곁에두기에는 부담스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맹자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고 제자 충우는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라며 맹자가 귀향하는 게 된 것을 원망하냐고 물어보았다. 이에 맹자는 ‘천하를 태평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이 시대에 오로지 나밖에 없는데 누굴 원망하겠냐는 말을 하였다. 이 일화를 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데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덕목이 바로 이런 자긍심이 아닐까 했다.


살아가다보면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일희일비한다면 마음이 상할 뿐 아니라 사기가 떨어져 새롭게 도전하기도 어렵다. 또한 실망해 자책하거나 자존심을 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두 번의 실패로 자신의 가치를 편하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 나는 큰일을 할 수 있다.’ 는 당당한 자신감과 ‘나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의로운 확신이다. 당당한 자신감과 의호운 확신, 이것이 어려운 상황의 타개책이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p46


극단의 물질주의와 오염된 성공주의가 지배하는 세태에서 맹자가 말하는 인자무적仁者無敵: 인자는 적이없다)는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공자가 말하였듯  ‘관대하게 대하면 많은 사람을 얻게 되고, 신의가 있으면 백성이 믿고 따르게 된다. 민첩하게 하면 공을 이루게 되고, 공정하게 하면 사람들이 기뻐하게 된다(논어). 


혐오를 부추기고 자신과 다른 타인이 쉽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 상처를 주고받는 삶이 일상이 된 작금의 시대에 맹자의 인자무적과 여민동락, 반구저기의 정신은 혐오를 사랑으로, 증오를 연민으로 바꿀 수 있게 하는 힘이 담겨 있다.이제까지  타인을 향한 혐오의 증오의 화살을 나에게로 돌리게 되면 타인의 관점에서 나를 , 나의 관점에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공감의 힘은 내면을 다스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 바로 이 부분이 현대에도 맹자가 유효한 이유이다.


《채근담》에는 “문장이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기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절할 뿐이고, 인품이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적절할 뿐이고, 인품이 경지에 이르면 별다른 특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스러울 뿐이다.”라고 실려 있다. 이 문장은 말과 글을 넘어 세상의 모든 일에 적용되는 지혜가 담겨 있다. 지나치게 남다른 것을 추구하다보면 오히려 보편성을 잃고 복잡해진다. 핵심을 짚지 못하고 증언부언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극치에 도달하면 단순해지고 본질에 충실해진다. 단순함과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최상이다. 말과 학문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기반을 두면서도 깊은 뜻이 담긴 말이 가장 좋은 말이다.

“말이 비근하면서도 가리키는 바가 깊으면 좋은 말이고, 지키는 것이 요약되어 있으면서 베푸는 것이 넓으면 그것이 좋은 도다. 


맹자가 가르쳐주는 말과 수양의 최고 경지다.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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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개
이언 매큐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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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1946년 두 마리 개의 형태로 나타난 악과의 조우를 통해 신을 만났다.(버나드는 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다.) 어떤 사악한 원칙이 있다인간의 만사를 주관하며 주기적으로 나타나 개인이나 국가의 삶을 지배하고 파괴했다가 철수해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힘.-p27

 

이데올로기(이념)이라는 말은 현대에 흔히 쓰이는 용어이다정치와 사회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 관념과 신념믿음을 말할 때 쓰여 우리에게는 꽤 익숙한 언어이다이언 매큐언의 검은개를 읽으며 이데올로기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떤 면들이 있을까를 연상하곤 하였다. 1940년대 지금과는 달리 이념의 극단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이 소설의 배경이기 때문이다공산주의자와 파시즘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시대였으며 민주주의 태동과 동시에 제국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이야기이다이데올로기의 풍요 속 영적 빈곤과 갈등에 허덕이던 시대가 바로 1940년대가 아닐까한다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극우와 극좌라는 극단의 갈등 속에서 어떤 계기로 인해 이념의 전환을 하게 되는 정치인들의 고민 같은 것이다사회와 정치라는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며 자신의 신념과 관념을 증축해가는 것이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는 과정이라면 그 옷이 공산주의나 파시즘의 색을 지녔더라도 개인의 경험과 사건에 의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온도를 가진 것이 이데올로기이다.

 

버나드와 준의 경험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 과정을 거치는지를 보여주는 회고록이다둘 다 젊었을 때 공산주의였고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같은 생각같은 뜻을 가진 한쌍이었다하지만이들이 공산주의 노선에서 탈피하며 서로 다른 이념을 향하자 둘은 극단의 부부가 되었다버나드가 합리주의라면 준은 신비주의자이고버나드가 인민위원이라면 준은 기권자이다버나드는 과학자이지만 준은 직관론자이며 모든 면에서 양극단에 서있다도저히 한때 사랑했던 사이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사위 제레미는 이런 장인 장모를 보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회고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한다준이 이제 죽어가고 있었고준이 천작하여 평생을 집착한 검은개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머니의 세계관과 아버님의 세계관을 모두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어떤 이들은 내면의 여행을 하고 다른 이들은 세상을 개혁하는 데 힘쓰는 게 가장 좋은 일 아닐까요문명을 일구는 것은 다양성이 아니던가요?”-p71

 

 

버나드와 준에게 검은 개의 의미는 이데올로기의 변화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위협적이었고 공포 그 자체였던 검은 개 두 마리로 인해 이때부터 신비주의자로 급변한다이데올로기란 사회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그 토대위에 만들어진 신념을 의미한다검은개를 악의 신으로 믿으면서 세상의 모든 일은 신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이들 가족 모두의 삶에 터닝포인트였다합리주의자였던 버나드와 신비주의자 준은 평생을 서로 저주하며 싸우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다음날 과수원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치는데 준이 나타나 지금 다듬는 나무와 그 아름다움은 신의 창조물이라고 말했다버나드는 이런 나무와 다른 수목이 진화의 산물임은 익히 아는 사실이며 그걸 설명하는 데 신은 필요없다고 말했다. -p170

 

이데올로기가 영원할 거라는 착각을 우리는 수도 없이 하고 살지만준에게 닥쳤던 검은 개로 인해 삶의 모든 것이 어그러지듯이 이데올로기는 정치와 사회라는 외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또한 한 개인의 신념이라는 것은 강력한 것들의 상징 앞에서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버나드와 준은 신념을 지녔지만역사적 사건 앞에서 그 신념을 지켜나가지 못한다사회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한편으로는 시대의 낙오자이기도 하다어쩌면 이데올로기 앞에서 우리는 모두 낙오자인지도 모른다정치와 사회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부유하며 떠돌아다니는 이념의 허울아래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는  개인의 삶을 반추하는 듯한 소설이다이언 매큐언의 메시지는 그래서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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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락 - 꽉 안아주고 싶은, 온몸이 부서지도록 월간 정여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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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정여울의 아홉 번째 책 와락을 읽는다. 와락... 누군가를 안으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나에게 스며드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천형 같은 삶을 매일 살아내는 것이 숙제처럼 느껴지곤 할 때, 고개 숙인 사람들. 갈대가 조용히 속으로만 울음을 삼키듯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사는 이들을 와락 안았을 때 잔잔히 전해지는 아픔의 전도를 느낄 때 이상하게 위안이 되는 순간들이 있다. 산다는 것이 혼자만의 아픔인줄 알았는데 누구나 다 그렇게 아파하며 성장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와락 당신을 껴안는 순간, 우리는 각자의 개체로만 존재하기 시작함을 깨닫는다. 포옹을 하면, 그 사람을 많이 아끼고 많이 애틋하게 여겨야만 느낄 수 있는 깊은 공감의 아우라 같은 것이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서 피어나 존재와 존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사다리를 놓는 듯한 행복한 착시가 느껴진다.-p13

 

이번 와락의 주제와 어울리는 화가는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정여울은 와락이라는 의태어와 어울리는 화가가 구스타프 클림트라며 그의 그림에서 포옹의 의미를 떠올린다. 신과의 은밀한 사랑을 성취하는 장면을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게 표현한 다나에와 아름다운 금빛 포옹장면을 그린 키스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예술을 집대성 해놓은 것만 같다.

 

영화에서나 또는 문학에서 보여지는 와락포옹하는 감동적인 순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오래전 보았던 영화 미 비포 유가 떠올랐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비운의 사고로 죽음만 생각하는 남자와 젊음과 건강을 가졌지만 지독히도 가난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일과 사랑, 돈과 명예 모든 것을 다 가졌던 남자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자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는 가장 친했던 친구와 사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고 흐트러진 베개조차 자신의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6개월 뒤 안락사를 자처한다. 그러던 가운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집안의 경제를 책임져왔던 루이자가 간병인으로 나타난다. 가족들 뒷바라지에 자신이 하고싶은 것을 한 적이 전혀 없던 루이자는 매일 죽고 싶어 하는 남자 윌과 난생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 미술관을 가고 해변으로 여행을 간다. 매사 신경질적이고 부정적인 윌은 루이자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세상과 담을 높이 쌓고 자신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가고 있는 윌에게 루이자는 너무도 투명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벽을 허물어간다. 촌스럽고 모든 것이 서툴러 실수투성이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차가운 눈빛을 지닌 윌의 눈도 조금씩 부드러운 반달모양으로 변해간다.

 

포옹의 순간은 번짐의 순간, 피어남의 순간, 타오름의 순간이다.-p13

 

그렇게 죽고 싶어 하는 남자 윌은 매일 아침 루이자가 보고 싶어 눈을 뜬다. 영화는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만큼 슬프지만, 젊고 건강미 넘치는 여주인공을 보면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윌과 루이자가 포옹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동에 전율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생에도 한 번쯤은 타인을 내 삶에 끌어들이는 포옹이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깊이 안아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순종과 사랑의 표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껴안아야 하고 타인을 포옹하며 이 천형 같은 삶을 지속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정여울의 와락은 서로가 서로를 와락 껴안아주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담은 책이다. 아무라도 와락 안아주고 싶은, 너와 나 사이의 높은 벽을 뛰어넘고 싶어지는 와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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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새 아시아 문학선 22
메도루마 슌 지음, 곽형덕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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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판도라 

 

일본인들에게 오키나와는 어떤 의미일까.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 영원한 이방인이며 영원한 타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곳이 오카나와이다.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와 문학에는 미군들의 성폭행 사건이 반드시 등장한다. 그 이유는 오키나와가 한때 미군정 치하에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유였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지만, 일본 내 미군시설 면적의 약 75퍼센트가 오키나와 미군기지이다. 아시아의 하와이라 불리 울 정도로 아름다운 섬이지만, 오키나와의 역사는 그 아름다움에 가리워진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미국령이었다가 다시 일본에 속하는 와중에 오키나와인들은 미군 수용소에서 짓밟히며 속박당한 채 살아야했으며 태평양전쟁시에는 가미가제 특공대에 젊은 영혼들을 자살부대에 보내야 했다.

 

무지개 새의 저자 메로루마 슌은 오키나와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키나와의 이런 불편한 진실에 천착하여 오키나와의 현실을 고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물방울로 아쿠카가와 문학상을 수상하며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를 탁월하게 그려내었다는 평을 받는 그는 무지개 새에서는 미군의 폭력이 오키나와라는 섬을 어떻게 망가뜨려 놓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움에 가려져 그 안에 어떤 비극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문학을 빗대어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가쓰야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폭력조직 두목 히가를 만나면서 가쓰야는 히가의 충실한 오른팔로 철저히 길들여진다.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자신을 폭행한 이에게 동화되어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한 모습이다. 히가의 오른팔 역할을 하며 히가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쓰야는 동급 아이들에게 상납금을 받고 폭력으로 타인을 길들이는 법을 배운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약에 취한 여자를 매춘에 이용하고 상대 남성을 사진으로 협박한다. 히가는 약에 취해 매춘을 더 이상 하지 못하면 다른 여자로 교체해 준다. 그러던 가운데 만난 마유라는 여자가 들어온다. 마유를 돌보면서 가쓰야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우연히 마유의 등에 새겨진 무지개 새문신을 보면서 부터이다. 마유의 등에 있는 무지개 새는 가끔 반짝거리기도 하며 가쓰야에게 묘한 환상을 심어주는데 안타깝게도 무지개 새의 머리는 누군가 지진 담뱃자국으로 사라졌다. 여러 가지 빛깔의 무지개 새 문신을 볼 때마다 가쓰야는 알 수 없는 상념에 빠지곤 하지만 머리가 없는 무지개 새는 마유와 가쓰야를 포함하여 오키나와인들이 날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만 같았다.

 

가쓰야에게는 오키나와에서 장사를 하는 엄마 그리고 두 형과 누나가 있다. 이들과의 대화는 최근 일어난 미군들이 소학교 학생들을 집단 성폭행 한 사건에 초점이 되어 있다. 이 사건으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시민들의 집단 시위가 일어나고 있지만, 엄마와 두 형은 미군들에게 군용지 대여료를 받아먹고 사는 사람들이 할 행위가 아니라는 비난을 한다. 누나 히토미만 소학생을 성폭행한 미군을 비난하는데 가쓰야만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소학생 시절 누나가 미군에게 성폭행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히토미는 동생 가쓰야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 일을 함구하게 하였고 가쓰야는 모른 척 하는 것으로 둘 사이의 비밀이 되어 있었다. 엄마와 두 형제들이 나누는 대화는 아마도 오키나와인들 대부분이 미군정에 갖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일 거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미군들에 의한 성폭행이 거의 일반적인 분위기에서 오키나와인들은 폭력에 쉽게 노출되어 길들여져 갔던 것인지 가쓰야가 중학교 때부터 접하는 폭력의 수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약에 취해 이미 망가져 버린 마유 역시도 소학교부터 당한 성폭행으로 삶은 이미 재생 불가 상태였다. 마유가 접하는 남자손님은 중학생 딸을 둔 마유학교 선생님이였다. 마유는 선생에게 잔인한 복수를 하고 가쓰야는 폭력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약에 취해 더 이상 매춘을 할 수 없는 상태인 마유를 보며 가쓰야는 처음으로 히가를 피해 도망가기로 하는데 전설의 새인 무지개 새가 사는 얀바루 숲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곳은 베트남 전쟁 당시 특수무장을 한 군인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상적인 곳이었으며 히가를 피해 숨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미 가쓰야와 마유에게 희망은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가쓰야는 무지개 새를 볼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폭력에 길들여진 가쓰야는 답답할 정도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다. 히가가 가진 힘 앞에서 굴욕적이고 비굴할 정도로 복종하고 성폭행을 당하는 여성들을 촬영하면서도 연민을 가지지만 절대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캐릭터이다. 그러면서도 가라데 유단자이며 가족들에게 충실한 막내 역할을 하는 평범하면서도 훌륭한 인성을 가졌다. 오키나와의 교육이 바른 방식이었다면 절대로 나쁜 길에 들어설 수 없는 건실한 젊은이다. 그런 그가 여성을 사고 팔며 포로노를 찍어주고 히가라는 악당의 편에 선다.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 같은 감정표현조차 할 줄 모르지만, 마유를 만나면서 삶이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마유의 무지개 새문신을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혐오를 품는다. 얀바루 숲에만 사는 무지개 새를 보면 어떤 사람을 살고 어떤 사람은 죽는다는 전설이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무지개 새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것이다. 삶이 지옥인 이들에게 무지개 새가 주는 의미는 스스로 삶을 바꿀 수 있는 의지가 전혀 없는 가쓰야와 마유 같은 약자들은 오키나와인에게 신적인 존재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마유의 칼이 가쓰야를 향하자 그는 죽음조차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그래 모두 죽어 없어지면 된다.”

 

무지개 새, 이 책은 가짜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극으로 치닫으며 벼랑 끝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불편할 뿐 아니라 불친절하다. 남성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여성들은 너무 쉽게 짓밟히고 오키나와인은 미군들의 성폭행 사건이 비일비재해도 어린 여자들을 밤에 내보낸 부모들 탓이라며 먹고 살게 해주는 미군들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는 말로 미군들을 옹호한다. 가쓰야는 가라데 유단자이면서도 히가라는 절대 권력을 가진 자에게 비굴할 정도로 복종하며 산다. 결국 그 악마가 찾지 못하는 얀바루 숲으로 도망을 선택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처럼 자신을 폭행하는 사람에게 감정이 동화되어 폭력을 정당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비이성적인 모습이 오키나와 사람들이 감당하고 있는 역사의 무게이다. 아름다운 섬, 아시아의 하와이, 치유의 명소로 이미지를 덧칠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미군들의 폭력으로 집단적 몸살을 앓고 있으며 그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깊게 뿌리내려져 있다. 메도루마 슌l의 무지개 새는 어쩌면 일본인들은 절대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 상자일지도 모르겠다. 상자를 연 순간 어느새 튀어나와 오키나와인 사이에 섞여 금단의 악들이 일본을 물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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