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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평점 :
#완전한 행복 #완행리뷰대회 #행복과불행의경계선
『28』이나 『7년의 밤』과 소설의 분위기가 비슷했다. 배경이 7년의 밤에 등장하던 외딴 시골집, 음침하며 고구마 수십 개는 먹은 것같은 답답함과 숨 죄어옴이. 읽다보니 어딘가 익숙한 스토리다. 아니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우리 일상의 사건일지도 모르는. 마치 현실이라는 세상을 데칼코마니로 찍어낸 것처럼, 리얼함의 행간이 잔인함을 뿜으며 앞으로 전진만 한다. 어디선가 보았던 언젠가는 들었던, 언제부터 이런 이야기들이 익숙해졌던 것일까?
『완전한 행복』의 주제는 단연코 ‘행복’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행복은 최고의 선이며 궁극적인 목표라는 말에 동의하며 산다. 누구나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고 그렇게 찾아오는 행복에 고단한 삶을 애써 위로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보니 흔히들 하던 말처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고, 더군다나 행복은 외모순이 아니었으며, 또한 돈에서 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는 누구는 성적을 조작하고 성형에 목숨을 걸며, 돈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산다. 여기서 보듯 행복은 쟁취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 될 때 불행은 시작된다. 더군다나 완전한 행복이란, 지극히 주관적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는 점에서 행복과 불행의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우연히 보았던 만화삽화가 갑자기 떠올랐는데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럽고 불행했던 10층 여자가 투신하면서 층층을 바라보며 자살을 후회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완벽한 사랑을 받고 산다는 9층의 아내는 매일 맞고 살았고 공부를 잘한다는 8층의 아이는 일진이었고, 잘생긴 8층의 변호사 남자는 게이였다. 삶은 이처럼 어이없이 행복과 불행의 경계를 오가며 조롱한다. 타인의 삶은 멀리서 보면 행복해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고만고만한 불행이 움트고 있다.
소설에도 완벽한 남자가 등장한다. 아니 완벽해 보이는 남자가 있다. 주인공 유나가 완전한 행복을 위해 간택했던 남자의 이름은 차은호. 직업과 성격 모든 것이 완벽할 것 같았던 남자. 그녀의 완전한 행복에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고 말도 잘 듣는 아이 같았다. 그녀에게 존재하는 완벽한 딸 지유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완성해 줄 것만 같은 남자. 차은호에게도 불완전한 면이 있긴 했다. 천식을 앓고 있던 아들 차노아. 노아는 완전한 행복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삶에서 빼야만 했다. 행복은 뺄셈에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 믿는 여자이므로.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 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그녀는 베란다 유리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먼 지평선을 넘어다보는 듯 한 시선이었다. 실제로 보이는 건 유리문에 반사된 실내풍경뿐일 텐데.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아들 노아가 죽고 나서야 유나에게 의구심을 품게 되는 은호. 유나의 커피를 마신 후 운전하다 졸음운전으로 사망한 동거남, 유나를 회사에서 쫓아내려 했던 장인어른의 마지막 찾잔, 이혼소송 이후 실종 된 전남편, 노아의 죽음 전 마셨던 모과차까지 유나외 완벽한 왕국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작은 균열은 서서히 깨어지더니 실체까지 다가가게 되자, 서서히 공포에 잠식되어가던 은호. 이제까지 자신의 행복을 위협하는 존재들이나 등을 돌린 이들은 가차 없이 제거해왔던 일들이 드러나면서 유나의 마지막 화살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미친이를 상대할 수 있는 정상인은 없었다.
아름다웠던 유나, 긴 생머리에 솜털 같은 웃음을 짓던 그녀. 그 왕국에서 지배당하며 살아갈 때 남자 은호는 행복했다고 했다. 한때 사랑했던 여자의 광기를 보면서 문득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유언이 떠올랐다.
‘내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라…….’
행복과 불행의 그네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소설속의 그녀. 그녀는 우리 사회가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싶어 하는 행복의 집합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 유학파이며 외모 역시 완벽하고 부유하기까지 했다. 그 행복의 재단을 쌓아올리기 위한 타인은 언제나 희생양이다. 갑 과 을, 또는 교주와 신도라는 기울임의 관계가 곧 유나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녀의 세계에서 그녀는 곧 신이었고 하느님이었고 창조주였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다. 기울어진 관계가 자기자리를 찾아가는 관성의 법칙처럼 수평을 향해 갈 때문이 행복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불행으로 그녀의 왕국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다만 늘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겐 행복할 권리와 타인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렇게 기울어진 뒤틀린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아내가 남편을, 자식이 부모를, 엄마가 딸을, 남편이 아내를. 이처럼 불행한 관계 속에서 행복하기가 더 힘들어지고 있다. 행복과 불행 그 경계선은 어디쯤일까. 기울어진 관계가 수평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일까 다시한번 돌아보게 된다. 나와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는 안녕한가. 수직이 아닌 수평의 관계, 그것이 우리가 행복한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일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