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올해의 서재에 당선되면 참 기분 좋은 일이 생기는군요^^
북플/알라딘 서재지기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9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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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분석] 문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 하락과 기성 세대의 착각


핵심 지지층으로 분류되던 20대 남성층의 문재인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이 최저로 떨어졌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오마이뉴스>는 20대의 의견을 소개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이 외에 다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온라인 공론장에서 소란이 일었다. 지난 17일 리얼미터가 발표한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에 관한 전반적인 지지율은 48.5%로 지난주와 대동소이 했으나, 당초 현 정권의 핵심 지지층으로 간주되었던 20대층에서 심각한 분열과 이탈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20대 여성은 63.5%의 지지를 보내며 굳건히 문재인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반면, 20대 남성은 29.4%로 정권에 적대적으로 돌아섰다는 해석이 줄을 이었다. SNS상에서도 20대 남성의 이탈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특히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 고용 지표 악화를 원인으로 분석한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관한 문제는 정권에 대한 불만보다 여성 혐오로 직접 이어지는 경향이 있으며, 정부는 군 복무기간 단축과 장병 월급 및 예비군 훈련비 인상 등의 처우개선 조치를 비롯해 20대 남성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다. 또 경제 지표와 고용실적이 어려웠던 것은 이명박 정부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상수에 가깝다.

젠더와 경제 문제가 맞물려 20대 남성의 불만이 축적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나는 20대 남성의 일원으로서 세대론에 입각해 20대의 개략적인 특성과 그것을 더 좁힌 20대 남성의 불만에 관한 의견을 개진하고자 한다. 이 글은 개인 의견에 불과하며 전부를 대표할 수 없음을 미리 알린다.




20대는 더 이상 진보에 조건없는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집권 여당을 비롯한 기성세대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노령층은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보수정당을 지지하지만, 20대를 포함한 2030세대는 진보정당과 더불어민주당에 우호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20대는 정당 일체감이나 이념에 이끌려 지지를 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적으로 덜 싫은 정당에 투표한다. 20대 투표에는 지지투표보다는 혐오투표의 성향이 짙게 배어있다고 볼 수 있다. 

20대는 '지금 현재' 어느 정당이 덜 싫은가를 기준으로 투표를 한다. 자유한국당이 싫어 민주당에 표를 주더라도, 언제든 회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약한 충성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지난 촛불집회 국면엔 최순실 게이트를 비롯한 보수정당의 구태적 통치 및 부정 행위를 혐오했던 것이고, 민중총궐기 당시에는 박근혜 정부의 60년대식 통치 스타일과 민주노총의 80년대식 데모 스타일 모두에 염증을 느껴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성세대는 성장과 복지, 민주화와 산업화를 축으로, 또 북한에 관해서는 형제와 주적이라는 이분법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양분해 왔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구조 탓에 부모세대보다 못 살게 될 것임을 알고 있고, 무한경쟁과 좁아진 기회의 문에서 취업대란을 겪고 있는 20대에게 위와 같은 거대 담론이 호소력을 발휘할 여지는 적다.

심리적 무력감 속에서는 양비론과 정치혐오가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이로 인해 더불어민주당은 '386 운동권들의 민주화 꼰대 정당'으로, 자유한국당은 '철지난 반공 태극기당'으로 인식되기 쉽다.




꼰대 문화를 혐오하는 20대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는 신조어가 세간에서 주목을 끌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일과 삶의 균형을 급여와 명성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구직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젊은 세대는 저임금은 참아도 장시간 노동은 못 참고, 비정규직은 참아도 직장 꼰대는 못 참는 경향이 있다. 이는 돈과 안정을 희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시간과 문화라도 지키고 싶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강명의 르포 <당선, 합격, 계급>에서는 취업시장을 깜깜이 시장으로 묘사하며, 청년세대가 구직 기준을 낮추더라도 쉽게 모험할 수 없는 구조 요인을 밝히고 있다. 근무여건이 좋은 중소기업이 있다 하더라도 도무지 그 기업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자칫 높은 임금을 포기하고 미지의 중소기업에 모험 삼아 입사한다면, 얻는 것은 유연한 문화와 정시퇴근이 아니라, 저임금, 군대식 직장문화, 장시간 노동의 3중고일 확률이 높다. 뿐만 아니라 대개의 직장에서 PPT 슬라이드 한 장 제대로 못 만드는 사람들이 과장, 부장 달고 자신보다 많은 돈 받으면서 훈계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취직 시장 바깥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된다. 고용절벽에 직면한 20대들은 인터넷 방송 BJ가 됨으로써 스스로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 제조업이 쇠퇴하고, 문화와 정보가 결합된 산업이 점차 일자리를 늘려가는 와중에 정부쪽에서 찬물을 끼얹는 '별 풍선' 하루 1백만 원 규제안이 발표된 것이다.


물론 정부가 밝힌 규제의 이유와 타당성은 충분하지만, 그 과정에서 섬세한 준비와 의견 청취가 이루어졌는지 의문이다.


한마디로 현 20대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앞 세대의 미래감각을 의심하면서도, 유일한 취미와 고용이 안 되어 직접 만든 새로운 밥벌이 시장이 침범 당했다는 불쾌감과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386에 대한 반발, 그리고 페미니즘



문재인 정권의 주축은 386-운동권-민주화 세대로 인식되고 있다. 생애주기로 미뤄보아, 사회 경제적 주축 역시 20대의 부모세대인 386 민주화세대라고 할 수 있다. 386 민주화 세대가 정치적으로 암흑기를 거치면서 민주주의 발전에 공로를 세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386세대가 누린 경제적 호황은 대한민국 역사에 다시 없을 호황이었다.

당시엔 대학 진학률 자체가 낮았고, 그중에서도 메이저 서울 대학 위주로 운동진영이 편성되었다. 일부 운동가의 희생으로 대다수가 민주화의 수혜를 입을 수 있었다. 스펙을 쌓지 않아도 제때 취업이 됐고, 빚 내서 집을 사도 집값이 올라 자산 증식이 용이했다. 자식을 낳을 쯤 사교육 시장이 열려, 군사정권으로부터 빨간줄 그인 운동가들조차 학원 사교육 사업으로 성장할 기회를 얻었다.

정치 영역에서도 민주화 세대는 운동권 몰락 이후 청년 정치인을 육성할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고 후계자를 두지 않는 정치 스타일을 고집하였다. 그 결과 청년 정치인과 청년 정치 부족 사태가 늘 선거마다 이슈가 되고 있다. 또한 현재의 경제 구조에 수혜를 입은 세대이자 책임자임에도, 호황 세대가 불황 세대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나무라는 형국에 적대심이 늘어갈 수밖에 없는 문화적 구조에 놓여 있는 것이다.

"굶어보지 않아서 간절함이 부족하다"며 20대를 호통 치는 어르신들의 분노는 노령 빈곤의 처참한 현실로 상쇄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문화적 혜택을 충분히 누렸음에도 철 들지 못해 불평불만만 많다는 20대 철부지론이나, 요즘 것들은 노력이 부족하다로 단정 짓는 노력 환원론, 20대가 투표하지 않아 보수정권이 찾아왔다는  기성 세대의 편협한 시각에는 격한 반발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문제도 그렇다. 남성 가부장의 문화를 20대 남성이 만든 것이 아니다. 도리어 봉건적 전통에서 미처 못 벗어난 산업화 세대, 운동권에서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오히려 2차 폭력을 가한 민주화 세대의 '문화적 부채'를 20대 남성이 지고 있는 것이다. 대학가에서 또래끼리 가해지는 성희롱과 성추행도 문제지만, 직장 상사를 비롯한 앞 세대로부터 가해지는 세대 간의 수직적 성폭력이 더욱 큰 문제를 유발하고 있지 않은가? 

미투 운동의 주요 혐의자는 중장년의 남성이었으나, 인터넷에서 전쟁을 벌인 건 20대 남성들과 30대 유아인이었다.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서 뭐라도 한마디 남기는 것은 20대 남성이다. 40대 50대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다. 60대 이상은 페미니즘이 낯설다.

20대 남성은 여성혐오의 무결 지대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그들도 가해자다. 그렇지만 개선의 여지와 책임소재의 비중이 잘못 책정되어 있다는 불만에는 일리가 있다.



표의 대가를 요구하는 20대 남성


20대 남성이 문재인 정권에 지지표를 거뒀다고 해서, 역사의식이 부족하거나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외려 현 정부가 민심을 정확히 읽고 경각심을 발휘하여 대책을 수립해야 할 신호인 것이다. 20대 남성의 지지철회는 '20대 철부지론'의 모욕을 참아가면서 열심히 투표해 정권을 교체해준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자문하고 있다는 시그널인 셈이다. 

기회 소멸의 시대 20대 취직의 문은 좁고, 들어가도 꼰대 문화에 점령된 일터에서 '존버'(최대한 버틴다는 뜻의 신조어)의 삶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사회적으로는 그동안 가부장제에 신음했던 여성들에게 죗값을 치러야 한다. 비관과 부채, 죄의식이 점령하고 있는 게 바로 현재 20대 남성의 응축된 심리적 정서다.

20대 남성은 변화의 압력에 갈 길을 잃고 있다. 이들은 이 상황에서도 불만을 드러내기보다 노력하고 있으며, 가부장으로 살기보다 페미니즘 도서를 읽으려 하고 있다.

스스로 사각지대에 갇혀 있다고 여기면서, 독자적으로 목소리를 대변해줄 조직력은 부재했던 20대 남성들이 직접 정권에 불만을 보이고 있다. 앞세대들로부터 상속받을 게 줄어들고 핀잔이나 들을 바에 정부에 직접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0대 남성의 모자람에 비난의 초점을 가하는 것은 더욱더 정권의 하락세를 재촉하는 일일 것이다.



본 글은 필자가 오마이 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97027&PAGE_CD=ET001&BLCK_NO=1&CMPT_CD=T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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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8-12-20 0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남성들에게 퇴로를 열어주는 글을 썼다가, 외려 네이버의 성난 사내들로 부터 400개의 악플을 맞은 나호선입니다. 다들 사는 게 많이 힘들어 작은 자극에 뚜껑이 열리는 지경에 이르렀나 봅니다.
 
문제가 되는 구절은 ˝20대 남성은 여성혐오의 무결 지대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그들도 가해자다. 그렇지만 개선의 여지와 책임소재의 비중이 잘못 책정되어 있다는 불만에는 일리가 있다.˝ 입니다. 아마 벌집을 건드린 표현은 ˝가해자˝이겠지요.
  
글을 쓰면서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와 ˝가해자˝에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제가 다니는 대학의 여자 기숙사에 같은 대학 남성이 침입하여 성폭력을 시도하다가 붙잡히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양심과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으로서 제가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처참함을 느낍니다. 동시에 꽤나 잘 빠진 글이었구나 싶습니다. 문해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피아식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분노를 배설할 수 있다는 것도 남성이 갖는 하나의 사회적 우위의 증거라는 것을 사내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오마이뉴스로 부터 합당한 고료받고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대통령은 오죽할까 싶습니다. 뭐 여튼 저는 관종이라 많은 관심(?)을 받아 재미있었습니다.

syo 2018-12-20 0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이버 메인에서 봤는데!!!

저도 주욱 읽어내리다가 ‘가해자‘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그 세 글자만으로 프메님이 당하게 될 댓글고초가 바로 예상이 되었습니다. 3만자 30만자의 글을 써도 다 삼켜 버리는 세 글자.....

그나저나 프메님은 이렇게 메인스트림을 종횡무진하시느라 알라딘 마을을 잊으신건가요....ㅠ

프리즘메이커 2018-12-20 02:00   좋아요 0 | URL
아 이게 네이버 메인에 갔군요?? 몰랐습니다...페이스북의 반응은 정반대던데요...허허 .. 요새 논문이랑 원고 쓰고 이것저것 생계유지를 한다고... 북플과 알라딘의 세계는 지하철에서의 눈팅으로만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치만 syo님으 맛깔나는 글을 읽기위해 친구목록을 내려서 직접 들어가는 수고로운? 눈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ㅎㅎ 조금 여유가 생기면 전처럼 알라딘에 더 신경을 쏟을 수 있겠지요?? ㅠㅠ

임정현 2018-12-20 0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써주셨네요. 필력도 좋으셔서 보다보니 몰입되어서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가해자‘라는 단어 눈여겨봤습니다. 논란이 되지 않으면 이상한 단어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위에 댓글창에 쓰신 글도 봤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해할 수가 없네요. 인간이 살인을 한다고 모든 인간이 살인자가 되는건가요?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남성이 가해자가 될 수 있나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단어선택입니다.

그리고
‘그러나 페미니즘에 관한 문제는 정권에 대한 불만보다 여성 혐오로 직접 이어지는 경향이 있으며, 정부는 군 복무기간 단축과 장병 월급 및 예비군 훈련비 인상 등의 처우개선 조치를 비롯해 20대 남성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다. 또 경제 지표와 고용실적이 어려웠던 것은 이명박 정부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상수에 가깝다.‘
‘첫번째 문장 페미니즘에 관한 문제는 여성 혐오로 직접 이어진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저도 현재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페미니즘의 주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들은 극단적 남성혐오를 일삼으며 한국남자 전체를 대상으로 성희롱과 욕설을 퍼붓는 부류입니다. 현재 20대 남성의 대부분은 그들을 혐오하는 것이지 여성혐오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야 할 사회이고 언젠가 짝을 이룰 사람들인데 어떻게 자신의 짝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을 혐오할까요? 현재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젠더 갈등‘은 대부분 비정상인과 정상인의 갈등 또는 비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갈등입니다. 비정상인의 범주에 속하는 부류는 ‘남성혐오 세력‘과 ‘여성혐오 세력‘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저는 이 ‘비정상인‘ 두 부류는 아직까진 일부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저보다 배운것도 많으시고 필력도 좋으십니다. 제 부족한 글에 비해 정말 훌륭한 글을 쓰셨습니다. 하지만 문제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네요. 태클로 받아들이셔도 상관없습니다.

프리즘메이커 2018-12-20 03:18   좋아요 1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 글에는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옹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가 쓰지 않은 부분과 맥락이기 때문에 크게 설명책임을 질 부분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페미니즘의 주류가 누구인지 혹은 목소리가 과대하고 크다고 해서 주류가 될 수 있는지(혹은 조직화 능력이 뛰어난 쪽이 주류인지)에 대해 어떠한 가치판단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제 다른 게시물을 보시면 저는 평소에 레디컬을 비판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래디컬과의 전쟁을 굳이 제 글 안에서 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짧은 기사의 여백상 일일히 다 설명할 수는 없는 부분이라 축약한 부분이 있다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만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임의적 구분이후, 남성들의 반발은 오로지 비정상 페미니즘에 관한 것이라는 시각에는 제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전합니다. 어느 진영이나 100% 순도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변변찮은 글재주를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밤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베터라이프 2018-12-20 1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날 한국 사회의 주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사회 계급의 아래에 있는 권리 바깥 여성들에 대해 실상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 문제일텐데요. 영국에서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이 이와 궤를 같이한다 말씀드리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페미니즘도 기존의 기득권에 대한 또다른 쟁취 운동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근래 지식과 학습으로 훈련받은 요즘 20대 남성들이 이 점에 대해 페미니즘에 대한 의구심을 보이는 것이고, 저 역시도 페미니즘 자체가 정의로운 가치 신념의 운동이라기 보다는 자본주의에서 민주화 요구가 일어나는 것처럼 비슷한 맥락의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렇게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젠더 이슈가 너무 남성을 쉽게 선악 구도로 몰고 갔고.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을 가하는 남성들한테는 그 근거에 대한 비판과 논리가 아니라 남혐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분위기 자체를 대중이 과연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느냐는 꽤 어려운 문제임에도 정부와 여성단체가 이런 상황에 대해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비난과 억측을 자제시키기는 커녕 20대 남성 탈출론과 같은 다소 의도적이기까지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가치를 어쩌면 이론 이상의 기준으로 극한의 남녀 대결의 판단 기준점으로 삼고 있는 여성들이 너무 많다는 점과 이것이 계속 남녀 대결과 선악구도로 가뜩이나 여러 이슈에서 납득하기 힘든 20대 남성들의 괴리감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과장된 표현이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을 찾으려는 분들은 많으나 페미니즘 이슈에 발 넣었다가는 지금 분위기상 결말이 쉽게 예상되지 않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어려워하는 남성들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프리즘메이커 2018-12-20 12:54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4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즘메이커님 메리크리스마스하시고 건필 아시죠?ㅎㅎ

프리즘메이커 2018-12-24 23:04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도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동시에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라고 민주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선출된 위임자는 '비선실세'라는 사적인 특수계급을 창설했고, 국민의 일반의지가 아닌 비선의 이익과 사심에 복무하며 유례없는 '국정농단'에 휘말렸다.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정상화를 위해, 촛불을 들어 권력자를 교체하는 정당한 권리를 직접 행사했다. 그러나 재판 거래 의혹에 연루된 '사법 농단'은 여전히 진통을 낳고 있다. 아직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회복 중인 셈이다.



열정이 식은 후 이성이 활약할 차례가 왔다. 시민들의 직접행동 이후 공은 다시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국정농단을 막지 못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는 국민의 대표가 촛불혁명의 후반부를 맡았다. 손상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정치권이 너나 할 것 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여기 그 고민에 도움이 되는 고전이 있다. 바로 민주주의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야 말로 최신 발명품이다




민주주의의 지적 재산권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게 있다. 그러나 상식과는 달리, 달은 아테네의 몰락 이후에도 민주주의가 전 세계 각지에서 여러 시기마다 자연발생적으로 발견되고 있음을 사례를 들어 밝힌다. 심지어 북유럽 바이킹에게서조차 팅(Ting)이라는 지방의회와 최고의회인 알팅(Althing)이라는 의회제도의 전통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민주주의를 꽃피운 아테네의 소도시 민주주의는 시공간의 제약 및 규모의 압박으로 인해 역사상에서 종적을 감추고 만다. 달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서로 직접 대화를 나눌 경우 필요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따져가며 논한다. 한마디로 대규모 공동체에 직접 민주주의는 비효율적이고 부적합한 체제였다는 것이다.




비용절감의 원칙은 민주주의에도 적용됐다. 불어난 인구와 국가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 인류는 아테네가 남긴 민주주의라는 아이디어에 '대표'라는 중세의 관행을 덧붙여 새로이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발명한다. 여기에 군주 한 사람의 자의적인 횡포를 막고자 '피통치자의 동의'를 중요시 하는 사상이 법에 집약되고, 이것이 다시 법치주의로 발전하게 됐다.




달에게 민주주의란 일종의 절차였으며,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보호하고 소수의 독단에 의한 전제정치를 방지하는 유일한 체제였다. 달은 여기에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공정한 선거, 표의 등가성, 결정과정의 개방성과 결정의 변경 가능성,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반대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을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으로 명시했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최신형 대의제 민주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불편한 동거의 미래



민주주의는 세계대전이라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맹렬한 도전에서 살아남아, 20세기를 민주주의 승리와 확산의 시대로 선보였다. 비민주 국가들이 민주화하기 시작했고, 신흥 민주국들은 민주주의를 공고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선진 민주국들은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 달려가고 있다.



로버트 달은 2014년 2월 5일 99세의 나이로 눈을 감기까지, 꼬박 한 세기를 민주주의를 탐구하며 살아낸 대학자였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 어떤 독재국가조차 자국을 민주주의라 자칭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민주주의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달은 안도하지 않았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71세에 <민주주의>를, 92세의 나이에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를 저술하면서, 말년에 집중적으로 경제적 불평등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를 탐색했다. 특히 시장자본주의와 민주주의와의 모순적인 결합과 그 불안한 미래에 관하여 진지한 고찰을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과거의 시장자본주의는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데 큰 공을 세우며 민주화를 이끌었다. 자유경쟁은 정치권력의 자원독점을 방지해, 권력자의 횡포에서 개인들을 해방하는 촉매로 기능했다. 그러나 보편적 민주화 이후, 오늘 날의 자본주의 뿜어내는 경제적 불평등은 이내 민주주의의 근간인 시민 간의 정치적 평등에 아주 중대한 손상을 가하고 있다고 달은 말한다. 경제력의 격차가 이내 정치적 발언과 참여의 기회의 격차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8년 올해 동명사에서 새로 펴낸 <민주주의> 증보판은 이전 판과는 달리, 달의 제자 이안 사피로의 보론 두 개가 추가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안 사피로는 스승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경제적 불평등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침식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덧붙였다.



그가 핵심을 가해 비판하는 것은 "돈도 곧 표현의 자유다"라고 못 박으며, 미국의 무제한 돈 선거를 촉발시킨 미 대법원의 판결이었다. 사피로에 따르면 빈곤층은 투표 밖에 참여 할 수 없지만, 부유층은 추가적으로 선거 자금을 보탤 수 있다. 그의 지적은 한마디로 부유층은 투표와 운동 두 가지 영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치적 평등이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불평등이 해친 자리에는 민주주의의 퇴행이 찾아와



달은 어떠한 현실의 정치체제도 완벽한 민주주의를 구현하지 못함을 말한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정치가 끝까지 민주주의의 이상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한마디로 민주주의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이상이지만 닮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현실인 셈이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민주주의의 긴 역사에서 숱한 퇴행과 일시적 좌절은 있었으나, 그 진보와 확산의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기본을 다시 세우려는 한국의 현 정세에 달의 <민주주의>는 적지 않은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본 서평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것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7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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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8-12-12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수정권 9년, 민주주의의 퇴행과정을 적나라하게 서술했더니 그만 편집과정에서 다 삭제되었습니다.....정말 밋밋하고 보잘 것 없네요..
 




1.  


나는 음성 매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음성은 휘발되기 쉽다. 말은 논리공백이나 비약을 얼버무려서 넘어가기 좋다. 정치 뒷담화는 재미로 듣는 것인데, 몰입하고 믿는 순간 종교가 될 확률이 크다. 팟캐스트에서는 재미(혹은 분노)와 논리가 구별이 잘 안간다. 반면, 활자에는 틈이 적다. 있어도 금방 들통 난다. 더군다나 내용을 습득하는데 나의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단단하다.

 


2.


기본적으로 자기 읽을거리는 자기가 골라야 한다. 요새 언론의 수준이 처참하고, 아무리 기레기들이 활개 친다지만 선구안을 기르는 것도 하나의 훈련과정이다. 페북에 좋은 글 쓰시는 분도 많다. 주간지 정도로 고르면 성향 안따지고 지뢰밟을 확률이 적다. 언론에 대한 반감과 신뢰성 부족으로 팟캐스트를 고른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겐 어차피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니 진짜 조선왕조로 회귀하자라는 말로 들린다. 불량식품은 맛있지만 탈이 날 확률이 높다.


 
3.



싸움의 시대가 가고 건설의 시대가 오면, 진짜 실력이 뽀록난다. 보수정권 9년에서는 사방천지가 다 적이니, 어딜 향해 던지든 누구 하나는 맞았다. 그러나 우리가 집권한 이상 무언가를 비판하는 것에서 창조하는 곳으로 영역이 옮겨온다. 그럼 전문가와 장사꾼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보수 시절에 전문가인줄 알았던 양반들이 몇몇 국면에서 본 실력의 하찮음이 드러난다던가 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해진다. 전문가는 방법을 찾지만, 장사꾼은 음모를 찾는다. 팟캐스트가 다루는 영역은 주로 후자다.

 


4.


아 무엇보다도, 정치학 4년 배우고 대학원까지 다니면, 음악 듣는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다. 굳이 재미로 듣자면 차라리 침펄토론을 보자. 팟캐스트보다 침펄 토론이 훨씬 더 유익하다. 제발 한국인이라면 호랑이 응원합시다.



-2018.11.25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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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국의 동물들이 단결한 날이 있었다. 그날 자본주의 농장은 뒤집어졌다. 왕후장상의 씨를 감별하고, 뼈에도 품질을 매기며 성골이니 진골이니 6두품이니 꼭 급을 나눠야 직성이 풀리던 호모 사피엔스의 못된 버르장머리가 동물들의 반란에 잘려나간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적 파괴의 빛이 내렸고, 차별의 제국은 평등의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모두가 평등하게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모두가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그런 신천지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승리의 감동과 혁명의 열정이 온 세상을 북돋웠다. 그러나 옛말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달콤한 달밤도 잠시, 공화국의 두뇌를 접수한 돼지와 이빨과 발톱을 과점한 개들의 눈빛이 시퍼렇게 변한다. 마침내 돼지가 위스키에 빠진 날, 혁명의 순수함과 동물들의 순진함은 그날로 끝이 났다.


 

모든 독재자는 소싯적의 영웅이었다. 영웅은 악을 무찌르고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한다. 그러나 영웅의 존재는 악마로 증명되는 법. 악마가 없는 영웅은 어떻게든 변하고 만다. 초라한 실업자거나 험악한 독재자거나. 영웅은 악마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용사는 여러 차례 괴물을 찾아다니며 무찌른다. 괴물이 없다면 만들어낸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순진한 망상이 아니다. 권모와 술수와 야심과 계략으로 만들어낸 허수아비를 베어가며 독재자에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



돼지의 탈을 쓴 공산주의나 인두겁을 한 자본주의나 모두 권력 중독자들의 타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인간의 내면이 무너지는 틈을 타, 파우스트식 계약을 넌지시 내미는 권력의 악마가 속삭인다. “그대에게 지배와 복종과 부귀영화에 사치향락이 함께하리다. 나와 계약을 맺지 않겠소?” 중요한 것은 체제나 이념이 아니다. 악마의 꼬드김에 순수한 열정을 보호할 두터운 내면이다. 오로지 인간성을 수호하는 자만이 권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

 


그러나 대개, 괴물이 죽고 난 자리에서 피를 뒤집어쓴 용사는 괴물로 타락하고 만다. 마르크스에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었지만, 속세의 권력은 용사들의 사탄이자 아편이었다. 숭배된다는 점에서 영웅과 악마는 동일하다. 한때의 용사는 단지 영웅 지망생이자 잠재적 견습 악마인 셈이다. 이제 영웅은 다시는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시켜 지배할 뿐이다.

 


내면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내지 못한 채, 외적인 부조리만 부숴내는 것은 절반의 혁명이다. 혁명은 반쪽으로 성공할 수 없다. 승리에 도취해 도덕을 재무장하지 못한 영웅은 타락한다. 신과 사탄은 항상 한 끗의 경계에 있다. 도덕 없는 힘은 천국을 삽시간에 지옥으로 만든다. 이렇듯 오웰의 동물농장은 좌절한 혁명과 변절한 영웅에 대한 일종의 추도사라 할 수 있다.

 


아아. 파스칼이여. 나는 인간의 옷을 입은 돼지의 모습과 돼지머리에 제사를 지내는 인간의 모습을 모두 기억하노라. 아아. 갈기갈기 찢긴 교향곡 <영웅>이여. 베토벤의 좌절이여. 나는 그대의 실망을 추모하노라.

 

 



2.

 

미문(美文)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던 한 사내는 정치적 격랑기에 눈을 뜬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권력의 야비함에 맞설 비판의 칼날을 간다. 통제와 검열의 시대에 작가는 오로지 외로운 혁명의 저격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며, 가장 정치적인 글쓰기로써 풍자와 문학의 게릴라로 권력과 감시의 폭력에 대들었다. 겁이 없어 비겁할 수 없었던 조지 오웰.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야비했던 철권 통치자에 날카로운 펜촉으로 맞섰던 반골의 자유인이자, 전체주의를 혐오하며 표현의 자유를 사랑했던 떠돌이 방랑 검객이었다.

 


오웰은 조준경을 통해 동물농장에서 혁명이 배신당하는 과정 및 권력 탈취가 낳은 강철 돼지들의 디스토피아를 관찰했다. 이어 그는 활자의 탄약을 장전한 뒤, 인간을 소모품으로 치부하는 온갖 전체주의의 차가운 심장을 겨누었다. 차가운 심장은 차가운 피를 흘려보내 이내 뜨거운 생각을 잠재우고 비판 의식을 거세하며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드는 전체주의적 심성을 주입한다. 부지런하고 순박한 이들은 꾀부리지 않고 그저 열심히만 할 줄 아는 착한 이가 되고 만다. 자신은 갈빗대를 훤히 드러낸 채, 돼지들의 살을 찌우면서 말이다. 착하기만 한 이들을 위한 칼로리는 없다. 동물의 법칙은 이제 동물 농장의 기율이 된다.

 


만일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도구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면, 동물농장의 비극은 언제 어디서나 재발한다는 것을 오웰은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사상마저도 이다지도 손쉽게 타락하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내가 더 열심히라는 무비판적 성실은 불만이 설 자리를 없앤다는 것을, 양 떼들의 단순하지만 큰 목소리는 묵묵부답이 보여주는 또 다른 진실을 질식시키고야 만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과한 성실함은 조작된 기록에 맞춰 진실한 기억을 수정하는 데까지 열심이었고, 감히 의심하고 비판하는 데는 심히 게을렀다. 그 결과는 성실한 복서의 노년이 요양원이 아닌 도축장이었다는 것으로 상징된다.

 

 



3.

 

한국이 싫어서, 또 한국이 좋아서, 한국 사람이라서 한국 이야기를 해야겠다.

 

 

천안함은 옳고 세월호는 나쁘다!”

 

양 떼들이 폭식을 하며 소리쳤다. 하루 치 저열함이 최고조로 폭발한다. 굶고 있는 유가족들은 멍하니 어린 양들을 바라본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프다. 스퀼러가 말한다. 지상 최고의 구조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한강 다리는, 아니 세월호는 안전합니다.”풍차는 무너졌고, 구조는 실패했다.

 


다시 양 떼들의 고함이 온 세상을 울린다. 요란 법석한 구호뿐, 천안함은 천안함대로 세월호는 세월호대로 엉터리 공화국에서 분열된 채 가라앉는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유유히 퇴장한다. 몰래 우유를 마시면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나라를 쥐락펴락하며, 우유를 빼돌리듯 세금과 기업의 곳간을 털어갔다. 검은 목록의 문화 예술인들이 있었고, 자기검열에 피로해진 시민들의 자조 섞인 농담이 있었다. “판사님 죄송합니다.”



눈치 없는 한 공무원이 민중이야말로 개돼지라며 힐난했지만, 정작 대한민국은 개와 돼지들의 시대였다. 벗어난 줄만 알았던 동물농장으로 다시 역행하고 있던 것이다. 거짓과 권력의 기만적 합작이 또다시 반복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 나는 좌절했다. 권력의 오남용이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만성질환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게다.



한국의 산업 전사들은 풍차를 타고 날아가 독일에서 중동에서, 탄광 먼지와 모래 바람과 싸우며 가난한 나라를 일으켰다. 한국의 풍차는 실제로 잘 돌았다. 그러나 한국의 복서들은 내가 더 열심히를 외치면서도, 숨이 차오르도록 발 벗고 뛰며 일하면서도, 가끔 막걸리를 마시다 참지 못한 울화로 인해 보안법 위반죄로 끌려가면서도, 마음의 양식을 쌓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이 땅의 복서들은 산업전사면서 민주투사였다. 그러나 오웰의 우울한 시선처럼 한국에서도 혁명은 매번 좌절과 배신의 연속이었다. 419일의 혁명은 516일에 좌절당했고, 518일의 운동은 군홧발에 짓눌렸으며, 6월의 항쟁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배반되었다. 하지만 성실하면서도 차근차근 민주주의를 가꾸어 내더니,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자유로운 산업 국가를 이룩해냈다. 38선 이북에서는 여전히 빅 브라더가 살아있는 것과 아주 대조적으로 말이다. 오웰은 한반도를 기점으로 반절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던 셈이다.

 


그러다 잠시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유행성 독감처럼, 수두에 걸린 신생아가 노곤한 노년에 재차 대상포진을 앓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큰 몸살에 떨었다. 나무 밑동에 이를 갈던 개들은 계엄을 준비했고, 복서는 굳건한 두 다리로 촛불을 들었다. 외신을 번역하면서. 글을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전공을 십분 발휘하면서. 그렇게 스퀼러가 설 자리를 없애버리면서. 78기의 정신으로. 이번에는 꼭 지켜내겠다는 믿음으로. 굳건한 내면이야말로 민주국가의 면역체계다. 독재국가의 뇌는 지도자의 뇌지만, 민주 공화국의 뇌는 시민들의 집단지성의 온전한 실현이다. 몸살이 멈춘다. 농장은 광장이 된다.

 


좌절했던 나는 다시 일어선다. 발굽 없는 두 다리로. 먼지 묻은 손바닥을 털어내면서. 정치적 글쓰기를 알려준 오웰을 떠올리면서. 나는 역사 곳곳에서 황제가 된 양치기 소년을 생각한다. 동시에 영웅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닫는다. 오직 한 사람만이 영웅이던 시절은 갔다. 모든 시민이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모든 영웅의 평준화, 영웅의 평범성. 악마는 더는 쉽게 꾀어내지 못한다. 타락을 권유할 영웅이 너무나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위로를, 양들에게 침묵을. 권력에는 책임을, 언론에 정직을. 역사에 반성을, 미래에 교훈을. 시민에게 자유를. 평범해서 위대한,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적을 무찌르는 무적 필법이 아닌 치유의 글을 쓰고 싶다. 한국의 흉터를 보듬고 싶다. 인간의 무의식은 절대로 지배당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권력의 비열함이 침투케 하지 못할 두터운 내면을 위해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정치적 글쓰기가 치유의 작문으로 다시 태어나길 기도하는 마음에서, 나는 우리의 희망을 응원한다. 순박한 사람들의 미소를 위하여.  


※본 서평은 협성문화재단에서 주최한 2018년 제7회 협성독서왕 독후감 공모의 입선작입니다. 서평의 저작권은 글쓴이와 협성문화재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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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11-2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믿고 보는 프리즘 님 서평 !

프리즘메이커 2018-11-29 23:42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