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국의 동물들이 단결한 날이 있었다. 그날 자본주의 농장은 뒤집어졌다. 왕후장상의 씨를 감별하고, 뼈에도 품질을 매기며 성골이니 진골이니 6두품이니 꼭 급을 나눠야 직성이 풀리던 호모 사피엔스의 못된 버르장머리가 동물들의 반란에 잘려나간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적 파괴의 빛이 내렸고, 차별의 제국은 평등의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모두가 평등하게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모두가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그런 신천지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승리의 감동과 혁명의 열정이 온 세상을 북돋웠다. 그러나 옛말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달콤한 달밤도 잠시, 공화국의 두뇌를 접수한 돼지와 이빨과 발톱을 과점한 개들의 눈빛이 시퍼렇게 변한다. 마침내 돼지가 위스키에 빠진 날, 혁명의 순수함과 동물들의 순진함은 그날로 끝이 났다.
모든 독재자는 소싯적의 영웅이었다. 영웅은 악을 무찌르고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한다. 그러나 영웅의 존재는 악마로 증명되는 법. 악마가 없는 영웅은 어떻게든 변하고 만다. 초라한 실업자거나 험악한 독재자거나. 영웅은 악마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용사는 여러 차례 괴물을 찾아다니며 무찌른다. 괴물이 없다면 만들어낸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순진한 망상이 아니다. 권모와 술수와 야심과 계략으로 만들어낸 허수아비를 베어가며 독재자에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
돼지의 탈을 쓴 공산주의나 인두겁을 한 자본주의나 모두 권력 중독자들의 타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인간의 내면이 무너지는 틈을 타, 파우스트식 계약을 넌지시 내미는 권력의 악마가 속삭인다. “그대에게 지배와 복종과 부귀영화에 사치향락이 함께하리다. 나와 계약을 맺지 않겠소?” 중요한 것은 체제나 이념이 아니다. 악마의 꼬드김에 순수한 열정을 보호할 두터운 내면이다. 오로지 인간성을 수호하는 자만이 권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
그러나 대개, 괴물이 죽고 난 자리에서 피를 뒤집어쓴 용사는 괴물로 타락하고 만다. 마르크스에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었지만, 속세의 권력은 용사들의 사탄이자 아편이었다. 숭배된다는 점에서 영웅과 악마는 동일하다. 한때의 용사는 단지 영웅 지망생이자 잠재적 견습 악마인 셈이다. 이제 영웅은 다시는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시켜 지배할 뿐이다.
내면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내지 못한 채, 외적인 부조리만 부숴내는 것은 절반의 혁명이다. 혁명은 반쪽으로 성공할 수 없다. 승리에 도취해 도덕을 재무장하지 못한 영웅은 타락한다. 신과 사탄은 항상 한 끗의 경계에 있다. 도덕 없는 힘은 천국을 삽시간에 지옥으로 만든다. 이렇듯 오웰의 『동물농장』은 좌절한 혁명과 변절한 영웅에 대한 일종의 추도사라 할 수 있다.
아아. 파스칼이여. 나는 인간의 옷을 입은 돼지의 모습과 돼지머리에 제사를 지내는 인간의 모습을 모두 기억하노라. 아아. 갈기갈기 찢긴 교향곡 <영웅>이여. 베토벤의 좌절이여. 나는 그대의 실망을 추모하노라.
2.
미문(美文)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던 한 사내는 정치적 격랑기에 눈을 뜬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권력의 야비함에 맞설 비판의 칼날을 간다. 통제와 검열의 시대에 작가는 오로지 외로운 혁명의 저격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며, 가장 정치적인 글쓰기로써 풍자와 문학의 게릴라로 권력과 감시의 폭력에 대들었다. 겁이 없어 비겁할 수 없었던 조지 오웰.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야비했던 철권 통치자에 날카로운 펜촉으로 맞섰던 반골의 자유인이자, 전체주의를 혐오하며 표현의 자유를 사랑했던 떠돌이 방랑 검객이었다.
오웰은 조준경을 통해 『동물농장』에서 혁명이 배신당하는 과정 및 권력 탈취가 낳은 강철 돼지들의 디스토피아를 관찰했다. 이어 그는 활자의 탄약을 장전한 뒤, 인간을 소모품으로 치부하는 온갖 전체주의의 차가운 심장을 겨누었다. 차가운 심장은 차가운 피를 흘려보내 이내 뜨거운 생각을 잠재우고 비판 의식을 거세하며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드는 전체주의적 심성을 주입한다. 부지런하고 순박한 이들은 꾀부리지 않고 그저 열심히만 할 줄 아는 착한 이가 되고 만다. 자신은 갈빗대를 훤히 드러낸 채, 돼지들의 살을 찌우면서 말이다. 착하기만 한 이들을 위한 칼로리는 없다. 동물의 법칙은 이제 동물 농장의 기율이 된다.
만일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도구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면, 『동물농장』의 비극은 언제 어디서나 재발한다는 것을 오웰은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사상마저도 이다지도 손쉽게 타락하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내가 더 열심히”라는 무비판적 성실은 불만이 설 자리를 없앤다는 것을, 양 떼들의 단순하지만 큰 목소리는 묵묵부답이 보여주는 또 다른 진실을 질식시키고야 만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과한 성실함은 조작된 기록에 맞춰 진실한 기억을 수정하는 데까지 열심이었고, 감히 의심하고 비판하는 데는 심히 게을렀다. 그 결과는 성실한 복서의 노년이 요양원이 아닌 도축장이었다는 것으로 상징된다.
3.
한국이 싫어서, 또 한국이 좋아서, 한국 사람이라서 한국 이야기를 해야겠다.
“천안함은 옳고 세월호는 나쁘다!”
양 떼들이 폭식을 하며 소리쳤다. 하루 치 저열함이 최고조로 폭발한다. 굶고 있는 유가족들은 멍하니 어린 양들을 바라본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프다. 스퀼러가 말한다. “지상 최고의 구조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한강 다리는, 아니 세월호는 안전합니다.”풍차는 무너졌고, 구조는 실패했다.
다시 양 떼들의 고함이 온 세상을 울린다. 요란 법석한 구호뿐, 천안함은 천안함대로 세월호는 세월호대로 엉터리 공화국에서 분열된 채 가라앉는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유유히 퇴장한다. 몰래 우유를 마시면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나라를 쥐락펴락하며, 우유를 빼돌리듯 세금과 기업의 곳간을 털어갔다. 검은 목록의 문화 예술인들이 있었고, 자기검열에 피로해진 시민들의 자조 섞인 농담이 있었다. “판사님 죄송합니다.”
눈치 없는 한 공무원이 민중이야말로 개돼지라며 힐난했지만, 정작 대한민국은 개와 돼지들의 시대였다. 벗어난 줄만 알았던 동물농장으로 다시 역행하고 있던 것이다. 거짓과 권력의 기만적 합작이 또다시 반복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 나는 좌절했다. 권력의 오남용이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만성질환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게다.
한국의 산업 전사들은 풍차를 타고 날아가 독일에서 중동에서, 탄광 먼지와 모래 바람과 싸우며 가난한 나라를 일으켰다. 한국의 풍차는 실제로 잘 돌았다. 그러나 한국의 복서들은 “내가 더 열심히”를 외치면서도, 숨이 차오르도록 발 벗고 뛰며 일하면서도, 가끔 막걸리를 마시다 참지 못한 울화로 인해 보안법 위반죄로 끌려가면서도, 마음의 양식을 쌓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이 땅의 복서들은 산업전사면서 민주투사였다. 그러나 오웰의 우울한 시선처럼 한국에서도 혁명은 매번 좌절과 배신의 연속이었다. 4월 19일의 혁명은 5월 16일에 좌절당했고, 5월 18일의 운동은 군홧발에 짓눌렸으며, 6월의 항쟁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배반되었다. 하지만 성실하면서도 차근차근 민주주의를 가꾸어 내더니,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자유로운 산업 국가를 이룩해냈다. 38선 이북에서는 여전히 빅 브라더가 살아있는 것과 아주 대조적으로 말이다. 오웰은 한반도를 기점으로 반절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던 셈이다.
그러다 잠시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유행성 독감처럼, 수두에 걸린 신생아가 노곤한 노년에 재차 대상포진을 앓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큰 몸살에 떨었다. 나무 밑동에 이를 갈던 개들은 계엄을 준비했고, 복서는 굳건한 두 다리로 촛불을 들었다. 외신을 번역하면서. 글을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전공을 십분 발휘하면서. 그렇게 스퀼러가 설 자리를 없애버리면서. 7전 8기의 정신으로. 이번에는 꼭 지켜내겠다는 믿음으로. 굳건한 내면이야말로 민주국가의 면역체계다. 독재국가의 뇌는 지도자의 뇌지만, 민주 공화국의 뇌는 시민들의 집단지성의 온전한 실현이다. 몸살이 멈춘다. 농장은 광장이 된다.
좌절했던 나는 다시 일어선다. 발굽 없는 두 다리로. 먼지 묻은 손바닥을 털어내면서. 정치적 글쓰기를 알려준 오웰을 떠올리면서. 나는 역사 곳곳에서 황제가 된 양치기 소년을 생각한다. 동시에 영웅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닫는다. 오직 한 사람만이 영웅이던 시절은 갔다. 모든 시민이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모든 영웅의 평준화, 영웅의 평범성. 악마는 더는 쉽게 꾀어내지 못한다. 타락을 권유할 영웅이 너무나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위로를, 양들에게 침묵을. 권력에는 책임을, 언론에 정직을. 역사에 반성을, 미래에 교훈을. 시민에게 자유를. 평범해서 위대한,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적을 무찌르는 무적 필법이 아닌 치유의 글을 쓰고 싶다. 한국의 흉터를 보듬고 싶다. 인간의 무의식은 절대로 지배당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권력의 비열함이 침투케 하지 못할 두터운 내면을 위해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정치적 글쓰기가 치유의 작문으로 다시 태어나길 기도하는 마음에서, 나는 우리의 희망을 응원한다. 순박한 사람들의 미소를 위하여.
※본 서평은 협성문화재단에서 주최한 2018년 제7회 협성독서왕 독후감 공모의 입선작입니다. 서평의 저작권은 글쓴이와 협성문화재단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