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르소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시큰둥하고 무덤덤하게 세상을 삽니다. 이미 가버린 과거의 추억보다 오늘의 기쁨이 중요합니다. 어제, 아니면 오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만, 그것은 삶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여인과 몸을 섞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친구를 사귀는데, 그 친구의 치정문제에 엮입니다. 남의 싸움에 휘말린 뫼르소는 졸지에 아랍인을 죽여 재판을 받습니다. 칼날에 햇빛이 번뜩여 총을 쏘았답니다. 판결이 나옵니다. 사형.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뫼르소라는 한 이방인에 대해 카뮈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고작 몇 가지 전혀 관계없는 상황으로 한 인간의 내면과 인생 전반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원래 미친 사람이 결국 저질렀구나’를 원하는 사회의 시선은 뫼르소라는 사람의 인생을 제 입맛대로 짜 맞춥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솔직을 강요하는 세상의 위선, 이것이 바로 카뮈가 지적하는 ‘부조리’인 것이지요.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믿는 의지의 인간형이 있습니다. 사는 거 마음대로 되는 게 몇 없으니, 큰 기대하지 말자 믿는 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할 수 있다’의 긍정형 인간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인간이 있다면, ‘꼭 뭐가 되어야 하오?’라고 반문하는 잘생긴 룸펜도 있습니다. 사소한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도저히 잠 못 드는 사람, 귀찮음이 억울함에 앞서는 뫼르소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오해의 간격이란 결코 좁힐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책은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합니다. 망막에 맺혀 마음을 거쳐 간 활자의 수만큼, 지면의 여백에 한 사람의 세계가 가득 채워지는 것. 그래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알 도리가 없는 타인의 내면을 부드럽게 훔쳐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가 고집스럽게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인간 내면의 복잡함, 세상만사의 우여곡절을 조금씩 알게 되면, 한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너무나 어려워집니다. 누군가는 예의 없이 함부로 넘기도, 벽에 숨기도 합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읽고 싶습니다. 우리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가끔은 가깝게 하고 살자고 말입니다. 이방인들의 독서, 우리는 모두 경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저는 편견 덩어리에 앞으로도 성급한 실수를 반복하여 저지를 테지만, 적어도 한 권씩 거쳐 가는 책과의 만남 속에서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어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 어쩌면 조금도 가까워질 수 없는 당신과 나는 한 달에 한 걸음씩, 일 년이면 열 두 발자국이나 가까워질지 모른다는 묘한 설렘을 기대합니다. 당신의 서사를 탐냅니다. 한 이방인이 다른 이방인에게.

나호선 (정치외교학 석사 17)


본 서평은 필자가 <부대신문>에 기고한 것입니다.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7802&fbclid=IwAR0ETDqUgxjkuqMmIJT9hkWMglS-u-RltfdDdBrBFfhSZdMfCx6st1ZQOE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로운 불로소득이 있다. 사람이 인공지능에게 완패하고 로봇이 일자리를 잡아먹는 세상에서 바람직한 불로소득을 꿈꾸어 보자고 말하는 책이 있다. 시장을 움직일 돈을 더 이상 노동하는 사람의 월급이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상상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있다. 바로 기본 소득과 기초 자본을 다루는 정치철학자 김만권 박사의 신간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이다.

저자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초래할 기술 실업 사회에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대안으로 기본소득과 기초 자본을 소개하고 있다. 책에서는 기본 소득과 기초 자본은 크게 분배 방식과 금액, 설계 목적에 따라 설명하면서도 그 역사적 기원과 논의의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먼저 기본소득은 지속가능한 소비를 위한 '사회적 배당금'으로, 매월 일정한 액수를 조건 없이 시민권에 근거하여 분배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저자는 기본소득은 최종소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기본소득은 한 사람의 최소생계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기본소득에 추가적인 노동소득을 보태어 더 높은 의욕과 생활 수준을 기대하게끔 보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다르게 기초 자본은 세상의 첫걸음을 떼는 성년기에 도달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인생을 계획할 목돈을 나눠주자는 '사회적 상속금'에 해당한다. 기초 자본은 생계유지와 소비 창출의 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목돈을 제공하여 아예 다른 삶을 살아볼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기초 자본은 불평등한 결과를 뒤늦게 보정하는 것이 아닌, 사회가 상속하는 유산으로 모두가 해볼 만한 출발선을 만드는 것에 방점을 둔다고 저자는 말한다.

ad뿐만 아니라 저자는 로봇 문명의 혜택을 인간이 누리자며, 로봇세를 거두어 기본 소득을 제공하자 주장하는 빌게이츠를 비롯해서, 기본소득 논의에 동참한 세계적인 경제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기본소득과 기초 자본에 대한 논의는 시대착오적인 좌파들의 불온한 선동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제기된 일종의 '시장안보' 정책이자, 현실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진행 중인 유의미한 실험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각장의 시작을 카드 뉴스로 시작하며, 생소한 개념을 핵심만 간추려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신선한 형식이 인상 깊다. 또한 어려운 학술용어를 빠뜨리지 않으면서도 전반적으로 쉽고 간결한 언어로 서술하고 있다. 강연문의 구어체는 단숨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감을 제공하면서도, 전달된 내용의 신선함과 깊이가 알맞게 배합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노동자의 부족은 곧 소비자의 부족'이라는 간단한 시장의 이치를 통해, 부족할 소비를 창출하면서, 고착화된 불평등을 해갈시킬 새롭고도 유력한 두 가지 대안을 두고 모두가 함께 고민해보자는 제안인 셈이다.

동시에 이 책은 기본소득과 기초 자본에 대한 구체적인 재원 마련 방식과 외국의 사례들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담아둔 해설서의 역할을 한다. 저자가 세간의 편견에 맞서가며 두 가지 제안 중에서 하나의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가는 재미가 이 책의 또 다른 별미일 것이다.

위기와 기회는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서 온다. 실업의 공포는 분배의 상상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 새로운 미래와 시대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해묵은 편견과 변화의 조류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지적인 게으름일지도 모른다.

잘 계산된 현실은 유토피아가 될 수는 없어도 디스토피아는 극복해낼 수 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해법이 필요하다. 우리사회가 더 나은 미래를 그린다면, 더욱더 기초자본과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본 서평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것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1053&PAGE_CD=N0002&CMPT_CD=M0117)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8-10-22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메님 왜이렇게 오랜만에.....ㅠ

프리즘메이커 2018-10-22 20:48   좋아요 0 | URL
대학원에서 갈렸습니다...ㅠㅜ 논문발표한다고 엊그제 대전갔다가...이제 여유가 생겨서...쿨럭 ㅠㅜ

syo 2018-10-22 20:49   좋아요 1 | URL
화....화이팅.....(눈물을 훔치며 돌아선다)

북다이제스터 2018-10-22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자들의 ‘시장안보’ 정책이라는 말씀에 저도 ‘한표’...

프리즘메이커 2018-10-22 21:57   좋아요 0 | URL
크...여기 한표 더 얹습니다
 
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공평하게 암울한 미래를 맞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과 유전자는 잉여인간들에게 자비와 아가페를 선사할 수 있을까? '인간적이다'라는 말에서 낭만이 아닌 열등을 느끼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평범함의 생물학적 종말, 그 토대에 놓인 모든 사회 시스템의 소멸. 기술 진보가 선사하는 불운한 포르노를 훔쳐 본 느낌이다. 


2018-08-25 @PrismMake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정학적 변두리에서 중심지로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절반 밖에 모르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이 근대 서구 외교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면, 임진왜란은 오늘날의 동아시아 질서를 열어젖힌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저자 김시덕은 민족주의 과잉의 거북함과 친미사대의 단순함을 모두 비판하며, 풍부한 사료에 입각해 임진왜란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의 역사를 넓은 안목으로 새로 풀어썼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냉전질서의 한복판에 있는 한반도는 당시 중화질서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대륙의 한족 정권은 수-당과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병합에서 막대한 출혈을 입자, 한반도의 국가들과 모종의 타협을 이루어낸다. 천년이나 지속된 사대 관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해양 세력인 일본은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반도의 완전한 정복을 꾀했으며, 대륙의 한인 세력은 해양의 일본 세력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로서 한반도를 이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서 대륙과 해양 세력 간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대두한 사건이었다. p.9


또한 저자는 한반도의 주된 안보위협은 해양세력 일본이 아닌 대륙세력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몽골과 여진족이 포함되는 대륙의 유목 민족들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저자는 왜란 초기 조선군의 졸전을 색다르게 묘사한다. 남부의 조선군이 일본군으로부터 급속도로 쉽게 허물어진 까닭은 조선의 정예군이 주적인 야인들을 대적하기 위해 북방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종교전쟁과 국제노예무역, 그리고 임진왜란과 대항해시대

임진왜란을 종교 전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 역시 신선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했지만, 각지에서 할거하는 종교 세력을 완전히 통제·장악 하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불교와 가톨릭이 정치세력화하며 강세를 보였다.

조선침략의 쌍두마차였던 불교도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는 조선침략이 불교를 통해 일종의 호국(護國)전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고, 가톨릭의 대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는 반도의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거룩한 전쟁이 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불교도의 깃발을 내건 가토 기요마사와 군종 신부를 데리고 다녔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임진왜란은 일종의 성전(聖戰)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대륙세력에 맞선 해양세력으로서의 일본을 독자 문명으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일본은 중화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권이 되기 위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해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네덜란드의 도움과 거래를 통해 탈 중국적인 시각을 갖추며 세상을 차근차근 알아갔다. 아래는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의 해부학과 의학을 받아들였을 때 일본인이 받았던 충격에 관한 생생한 묘사이다.

유럽의 해부도를 입수했으니 실물과 대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막부의 허가를 받아 사형수의 몸을 해부해보니, 과연 인간의 몸은 한의학서의 설명과는 다르고 유럽 해부학서의 도판과 같았다. 중국책과 유럽책에 그려진 인체 구조가 그토록 다르니, 저자가 "중국인과 중국인 아닌 사람 간에는 (몸에) 차이가 있는 것인가?"라고 고민한 것도 이해가 가는 바다. p.155


특히 일본은 전국시대 당시 일본인 포로를 노예로 공급하는 등,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이미 국제 노예 시장 편입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또한 임진왜란의 포로로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노예무역의 상품으로 팔려나갔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 노예무역을 일삼던 대항해시대와 임진왜란은 이렇게 연결된다.


삼국지적 세계관의 탈피를 위하여 

임진왜란은 통일된 일본 열도의 힘과 이에 맞선 반도국 조선 및 대륙의 명국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이 대충돌의 여파로 인한 동아시아의 힘의 공백은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에게는 일대의 기회였다. 그는 파죽지세로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통일하고 몽골족까지 아우르며 후금을 건국한 이후, 두 차례의 조선정벌과 명나라와의 일전 끝에 중화질서의 새로운 맹주로 등극한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가 된 청나라는 당시 시베리아로 확장 중이던 러시아 제국과 불쾌한 만남을 갖게 되고, 조선은 청나라의 강권에 따라 나선정벌에 연루되어 러시아와의 첫 접촉을 겪는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이미 네덜란드를 통하여 러시아 제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야망을 파악해 미리 대비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조선 당국이 러시아와 직접 전투를 벌였음에도 직접적인 정보수집에 실패한 것(혹은 무관심했던 것)을 우리 역사의 가장 아쉬운 대목 중 하나로 꼽는다.

이에 저자는 조선의 중국에 외교 안보를 기계적으로 추종하였던 편협한 사고방식 및 한-중-일 3개국으로만 세계를 바라보는 '삼국지적 세계관'의 큰 귀책사유를 돌리며 이를 벗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제 4의 세력 러시아가 나타나 향후 아관파천 및 러일전쟁을 비롯하여 조선 내정에 깊게 관여하였고, 이후 소련의 38 이북 분할과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운명의 핵심 축이 되었던 것은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이든 중국이든 어느 한 나라에 군사-정치-경제 등 모든 부문을 전적으로 의존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다. p.13

어떤 한국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거나 미국과 중국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한국의 역사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존재를 과소평가하고 미국과 중국의 존재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바람에 중요한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p.167


이 책은 저자의 간결한 필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 덕분에, 부록을 제외한 370페이지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벅차다는 느낌 없이 술술 읽힌다. 문헌학자인 저자의 적절한 사료배치 및 흥미진진한 일화소개가 책의 읽는 맛을 더한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다소 생소하고 불쾌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이면은 물론 파편적 지식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한데 엮어줄 것이다.



※본 서평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것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71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의 반작용이다. 페미니즘의 탄생 자체가 휴머니즘이 역사로서의 인간의 범위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소외시킨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보편의 논리보다는 당사자라는 입장에서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데 그게 잘 안된다. 많은 연습이 필요한 듯하다.

-

1. "문재인 재기해"라거나 "유좆당선 무좆탄핵"이라는 구호가 시위중에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원래 직접시위는 그런 메세지 까지 안고가는 거다. 분노가 논리적이면 왜 직접 시위까지 하러 나왔겠나. 촛불집회에도 군데군데 "이석기를 석방하라"라는 함정카드가 숨어 있었다. 진짜 재기하라고 해서 재기할 것도 아니고, 생식기의 유무로 지도자 당락이 결정된 것도 아닌데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 그냥 "허허 거참"하며 뭔가 화난게 있나보다 하고 넘어가는 편.

-

2. 자유를 사용했다면 책임을 지면 된다. 지지율이 70%에 달하며 전에 없이 몰카퇴치를 비롯해 실효성있는 여성 정책에 갓 나선 대통령을 겨냥했다면, 그 유명세를 이용해 자극을 줄지 도리어 안좋은 인상을 풍겨 역효과를 낳을지 그 누구도 모른다. 그 영향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활용할지는 아마 직접 시위에 가담했거나 지근거리에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정하고 책임지면 된다. 문재인을 공격해서 주목받았으면 됐다거나, 문재인을 공격하는 바람에 4시간치 시위내용이 덮혀버렸다거나는 알아서 판단할 문젠것 같다. 다음 시위기획에 반영하면 된다.

-

3. 일부의 의견이라던가 이런건 내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남자의 한 사람으로, 그 다른 의견을 어디서 들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꽤 이 이슈에 관해서 오래전부터 주시하고 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사서 읽고 있는데, 이쪽도 엄연한 분야라 그런가 유행이 있는 모양. 그다지 다양한 의견이 있는지는 느끼지 못했다. 다양한 의견 중에서 넷페미니즘의 강성 의견이 과대 대표되는 것인지, 아니면 가부장제의 강고함 앞에서 그것 외에 아예 자라지 못한 것인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마 나의 무지 탓이거나 접근성에 크게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지 싶다.

-

4. 다만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강경하고 선명한 목소리가 득세하기도 좋고 주목받기도 좋고 꺾이기도 좋다. 기득권의 횡포가 강할수록 모종의 강대강의 구도가 고착되는 경향이 있고, 치받음 끝에 더 약한쪽이 진다. 담론과 행동이 크게 지속적으로 일고 있으니, 그 동력으로 정치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 같다. (운동에서 정치로 넘어가면 게임의 난이도와 복잡성이 한껏 올라간다.정치는 무언갈 생산해야하니까.).이대로 소모적으로 끝이날까봐 걱정스럽기도 하나... 자유란 실패할 기회로 사용하는 것마저 포함되니까.. 좌충우돌하다 보면 열정과 피로 사이에서, 누적되는 실패와 성공사이에서 또 다음단계로 진화하겠지 낙관하고 싶다.

-

5.정체성 정치의 한계라기보다는 그냥 140자로 이즘과 니즘을 설파하려는 넷담론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네이버 댓글로 정치학을 배울 수 없고, 나무위키로 역사를 배울 수 없고, 인스타그램으로 문학을 배울 수 없다. 140자로 진행되는 논쟁은 그냥 소모적이고 피로만 줄뿐이다. 나의 인식을 바꾼 것은 활자라기 보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이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가 뭐 생각 뒤죽박죽인데 이만하고 자야겠다.

-2018.07.08 @PrismMaker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yrus 2018-07-09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재인 재기해‘가 혐오발언이라는 주장을 듣고 웃었어요. 대통령이 언제부터 사회적 약자였나요? ㅎㅎㅎ

프리즘메이커 2018-07-09 23:05   좋아요 1 | URL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문재인보다는 ‘재기해‘라는 단어에 방점을 둔 것이겠죠. 재기해는 운지해의 미러링이니까요. 일베식 어법에대한 비판이고 그 비판도 나름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양손잡이 2018-07-10 09:51   좋아요 3 | URL
재기해 남기해 태일해 주혁해 등등의 단어를 쓰는 순간 모든 당위성을 잃는다고 봅니다. 저런 표현을 쓰는 게 현재 페미니즘 운동의 주류에다가 자정작용도 없어서 여러가지로 걱정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