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국의 동물들이 단결한 날이 있었다. 그날 자본주의 농장은 뒤집어졌다. 왕후장상의 씨를 감별하고, 뼈에도 품질을 매기며 성골이니 진골이니 6두품이니 꼭 급을 나눠야 직성이 풀리던 호모 사피엔스의 못된 버르장머리가 동물들의 반란에 잘려나간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적 파괴의 빛이 내렸고, 차별의 제국은 평등의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모두가 평등하게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모두가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그런 신천지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승리의 감동과 혁명의 열정이 온 세상을 북돋웠다. 그러나 옛말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달콤한 달밤도 잠시, 공화국의 두뇌를 접수한 돼지와 이빨과 발톱을 과점한 개들의 눈빛이 시퍼렇게 변한다. 마침내 돼지가 위스키에 빠진 날, 혁명의 순수함과 동물들의 순진함은 그날로 끝이 났다.


 

모든 독재자는 소싯적의 영웅이었다. 영웅은 악을 무찌르고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한다. 그러나 영웅의 존재는 악마로 증명되는 법. 악마가 없는 영웅은 어떻게든 변하고 만다. 초라한 실업자거나 험악한 독재자거나. 영웅은 악마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용사는 여러 차례 괴물을 찾아다니며 무찌른다. 괴물이 없다면 만들어낸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순진한 망상이 아니다. 권모와 술수와 야심과 계략으로 만들어낸 허수아비를 베어가며 독재자에 이르는 과정인 것이다.



돼지의 탈을 쓴 공산주의나 인두겁을 한 자본주의나 모두 권력 중독자들의 타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인간의 내면이 무너지는 틈을 타, 파우스트식 계약을 넌지시 내미는 권력의 악마가 속삭인다. “그대에게 지배와 복종과 부귀영화에 사치향락이 함께하리다. 나와 계약을 맺지 않겠소?” 중요한 것은 체제나 이념이 아니다. 악마의 꼬드김에 순수한 열정을 보호할 두터운 내면이다. 오로지 인간성을 수호하는 자만이 권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

 


그러나 대개, 괴물이 죽고 난 자리에서 피를 뒤집어쓴 용사는 괴물로 타락하고 만다. 마르크스에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었지만, 속세의 권력은 용사들의 사탄이자 아편이었다. 숭배된다는 점에서 영웅과 악마는 동일하다. 한때의 용사는 단지 영웅 지망생이자 잠재적 견습 악마인 셈이다. 이제 영웅은 다시는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시켜 지배할 뿐이다.

 


내면의 순수한 열정을 지켜내지 못한 채, 외적인 부조리만 부숴내는 것은 절반의 혁명이다. 혁명은 반쪽으로 성공할 수 없다. 승리에 도취해 도덕을 재무장하지 못한 영웅은 타락한다. 신과 사탄은 항상 한 끗의 경계에 있다. 도덕 없는 힘은 천국을 삽시간에 지옥으로 만든다. 이렇듯 오웰의 동물농장은 좌절한 혁명과 변절한 영웅에 대한 일종의 추도사라 할 수 있다.

 


아아. 파스칼이여. 나는 인간의 옷을 입은 돼지의 모습과 돼지머리에 제사를 지내는 인간의 모습을 모두 기억하노라. 아아. 갈기갈기 찢긴 교향곡 <영웅>이여. 베토벤의 좌절이여. 나는 그대의 실망을 추모하노라.

 

 



2.

 

미문(美文)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던 한 사내는 정치적 격랑기에 눈을 뜬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권력의 야비함에 맞설 비판의 칼날을 간다. 통제와 검열의 시대에 작가는 오로지 외로운 혁명의 저격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며, 가장 정치적인 글쓰기로써 풍자와 문학의 게릴라로 권력과 감시의 폭력에 대들었다. 겁이 없어 비겁할 수 없었던 조지 오웰.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야비했던 철권 통치자에 날카로운 펜촉으로 맞섰던 반골의 자유인이자, 전체주의를 혐오하며 표현의 자유를 사랑했던 떠돌이 방랑 검객이었다.

 


오웰은 조준경을 통해 동물농장에서 혁명이 배신당하는 과정 및 권력 탈취가 낳은 강철 돼지들의 디스토피아를 관찰했다. 이어 그는 활자의 탄약을 장전한 뒤, 인간을 소모품으로 치부하는 온갖 전체주의의 차가운 심장을 겨누었다. 차가운 심장은 차가운 피를 흘려보내 이내 뜨거운 생각을 잠재우고 비판 의식을 거세하며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드는 전체주의적 심성을 주입한다. 부지런하고 순박한 이들은 꾀부리지 않고 그저 열심히만 할 줄 아는 착한 이가 되고 만다. 자신은 갈빗대를 훤히 드러낸 채, 돼지들의 살을 찌우면서 말이다. 착하기만 한 이들을 위한 칼로리는 없다. 동물의 법칙은 이제 동물 농장의 기율이 된다.

 


만일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채, 도구로서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면, 동물농장의 비극은 언제 어디서나 재발한다는 것을 오웰은 밝히고 있다. 특히 그는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사상마저도 이다지도 손쉽게 타락하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내가 더 열심히라는 무비판적 성실은 불만이 설 자리를 없앤다는 것을, 양 떼들의 단순하지만 큰 목소리는 묵묵부답이 보여주는 또 다른 진실을 질식시키고야 만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과한 성실함은 조작된 기록에 맞춰 진실한 기억을 수정하는 데까지 열심이었고, 감히 의심하고 비판하는 데는 심히 게을렀다. 그 결과는 성실한 복서의 노년이 요양원이 아닌 도축장이었다는 것으로 상징된다.

 

 



3.

 

한국이 싫어서, 또 한국이 좋아서, 한국 사람이라서 한국 이야기를 해야겠다.

 

 

천안함은 옳고 세월호는 나쁘다!”

 

양 떼들이 폭식을 하며 소리쳤다. 하루 치 저열함이 최고조로 폭발한다. 굶고 있는 유가족들은 멍하니 어린 양들을 바라본다.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프다. 스퀼러가 말한다. 지상 최고의 구조작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한강 다리는, 아니 세월호는 안전합니다.”풍차는 무너졌고, 구조는 실패했다.

 


다시 양 떼들의 고함이 온 세상을 울린다. 요란 법석한 구호뿐, 천안함은 천안함대로 세월호는 세월호대로 엉터리 공화국에서 분열된 채 가라앉는다. 책임져야 할 사람은 유유히 퇴장한다. 몰래 우유를 마시면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나라를 쥐락펴락하며, 우유를 빼돌리듯 세금과 기업의 곳간을 털어갔다. 검은 목록의 문화 예술인들이 있었고, 자기검열에 피로해진 시민들의 자조 섞인 농담이 있었다. “판사님 죄송합니다.”



눈치 없는 한 공무원이 민중이야말로 개돼지라며 힐난했지만, 정작 대한민국은 개와 돼지들의 시대였다. 벗어난 줄만 알았던 동물농장으로 다시 역행하고 있던 것이다. 거짓과 권력의 기만적 합작이 또다시 반복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 나는 좌절했다. 권력의 오남용이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만성질환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게다.



한국의 산업 전사들은 풍차를 타고 날아가 독일에서 중동에서, 탄광 먼지와 모래 바람과 싸우며 가난한 나라를 일으켰다. 한국의 풍차는 실제로 잘 돌았다. 그러나 한국의 복서들은 내가 더 열심히를 외치면서도, 숨이 차오르도록 발 벗고 뛰며 일하면서도, 가끔 막걸리를 마시다 참지 못한 울화로 인해 보안법 위반죄로 끌려가면서도, 마음의 양식을 쌓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성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 이 땅의 복서들은 산업전사면서 민주투사였다. 그러나 오웰의 우울한 시선처럼 한국에서도 혁명은 매번 좌절과 배신의 연속이었다. 419일의 혁명은 516일에 좌절당했고, 518일의 운동은 군홧발에 짓눌렸으며, 6월의 항쟁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배반되었다. 하지만 성실하면서도 차근차근 민주주의를 가꾸어 내더니,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자유로운 산업 국가를 이룩해냈다. 38선 이북에서는 여전히 빅 브라더가 살아있는 것과 아주 대조적으로 말이다. 오웰은 한반도를 기점으로 반절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던 셈이다.

 


그러다 잠시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유행성 독감처럼, 수두에 걸린 신생아가 노곤한 노년에 재차 대상포진을 앓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큰 몸살에 떨었다. 나무 밑동에 이를 갈던 개들은 계엄을 준비했고, 복서는 굳건한 두 다리로 촛불을 들었다. 외신을 번역하면서. 글을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전공을 십분 발휘하면서. 그렇게 스퀼러가 설 자리를 없애버리면서. 78기의 정신으로. 이번에는 꼭 지켜내겠다는 믿음으로. 굳건한 내면이야말로 민주국가의 면역체계다. 독재국가의 뇌는 지도자의 뇌지만, 민주 공화국의 뇌는 시민들의 집단지성의 온전한 실현이다. 몸살이 멈춘다. 농장은 광장이 된다.

 


좌절했던 나는 다시 일어선다. 발굽 없는 두 다리로. 먼지 묻은 손바닥을 털어내면서. 정치적 글쓰기를 알려준 오웰을 떠올리면서. 나는 역사 곳곳에서 황제가 된 양치기 소년을 생각한다. 동시에 영웅의 시대가 끝났음을 깨닫는다. 오직 한 사람만이 영웅이던 시절은 갔다. 모든 시민이 영웅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찾아왔다. 모든 영웅의 평준화, 영웅의 평범성. 악마는 더는 쉽게 꾀어내지 못한다. 타락을 권유할 영웅이 너무나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위로를, 양들에게 침묵을. 권력에는 책임을, 언론에 정직을. 역사에 반성을, 미래에 교훈을. 시민에게 자유를. 평범해서 위대한,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적을 무찌르는 무적 필법이 아닌 치유의 글을 쓰고 싶다. 한국의 흉터를 보듬고 싶다. 인간의 무의식은 절대로 지배당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권력의 비열함이 침투케 하지 못할 두터운 내면을 위해서. 그 자체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 정치적 글쓰기가 치유의 작문으로 다시 태어나길 기도하는 마음에서, 나는 우리의 희망을 응원한다. 순박한 사람들의 미소를 위하여.  


※본 서평은 협성문화재단에서 주최한 2018년 제7회 협성독서왕 독후감 공모의 입선작입니다. 서평의 저작권은 글쓴이와 협성문화재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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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11-29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믿고 보는 프리즘 님 서평 !

프리즘메이커 2018-11-29 23:42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뫼르소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시큰둥하고 무덤덤하게 세상을 삽니다. 이미 가버린 과거의 추억보다 오늘의 기쁨이 중요합니다. 어제, 아니면 오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만, 그것은 삶의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여인과 몸을 섞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친구를 사귀는데, 그 친구의 치정문제에 엮입니다. 남의 싸움에 휘말린 뫼르소는 졸지에 아랍인을 죽여 재판을 받습니다. 칼날에 햇빛이 번뜩여 총을 쏘았답니다. 판결이 나옵니다. 사형.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뫼르소라는 한 이방인에 대해 카뮈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떻게 고작 몇 가지 전혀 관계없는 상황으로 한 인간의 내면과 인생 전반을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원래 미친 사람이 결국 저질렀구나’를 원하는 사회의 시선은 뫼르소라는 사람의 인생을 제 입맛대로 짜 맞춥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솔직을 강요하는 세상의 위선, 이것이 바로 카뮈가 지적하는 ‘부조리’인 것이지요.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믿는 의지의 인간형이 있습니다. 사는 거 마음대로 되는 게 몇 없으니, 큰 기대하지 말자 믿는 저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할 수 있다’의 긍정형 인간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의 인간이 있다면, ‘꼭 뭐가 되어야 하오?’라고 반문하는 잘생긴 룸펜도 있습니다. 사소한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도저히 잠 못 드는 사람, 귀찮음이 억울함에 앞서는 뫼르소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오해의 간격이란 결코 좁힐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책은 타인의 삶을 상상하게 합니다. 망막에 맺혀 마음을 거쳐 간 활자의 수만큼, 지면의 여백에 한 사람의 세계가 가득 채워지는 것. 그래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알 도리가 없는 타인의 내면을 부드럽게 훔쳐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가 고집스럽게 책을 읽는 이유입니다.


인간 내면의 복잡함, 세상만사의 우여곡절을 조금씩 알게 되면, 한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너무나 어려워집니다. 누군가는 예의 없이 함부로 넘기도, 벽에 숨기도 합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읽고 싶습니다. 우리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가끔은 가깝게 하고 살자고 말입니다. 이방인들의 독서, 우리는 모두 경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저는 편견 덩어리에 앞으로도 성급한 실수를 반복하여 저지를 테지만, 적어도 한 권씩 거쳐 가는 책과의 만남 속에서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되어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 어쩌면 조금도 가까워질 수 없는 당신과 나는 한 달에 한 걸음씩, 일 년이면 열 두 발자국이나 가까워질지 모른다는 묘한 설렘을 기대합니다. 당신의 서사를 탐냅니다. 한 이방인이 다른 이방인에게.

나호선 (정치외교학 석사 17)


본 서평은 필자가 <부대신문>에 기고한 것입니다.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7802&fbclid=IwAR0ETDqUgxjkuqMmIJT9hkWMglS-u-RltfdDdBrBFfhSZdMfCx6st1ZQO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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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불로소득이 있다. 사람이 인공지능에게 완패하고 로봇이 일자리를 잡아먹는 세상에서 바람직한 불로소득을 꿈꾸어 보자고 말하는 책이 있다. 시장을 움직일 돈을 더 이상 노동하는 사람의 월급이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상상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있다. 바로 기본 소득과 기초 자본을 다루는 정치철학자 김만권 박사의 신간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이다.

저자는 인공지능과 로봇이 초래할 기술 실업 사회에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대안으로 기본소득과 기초 자본을 소개하고 있다. 책에서는 기본 소득과 기초 자본은 크게 분배 방식과 금액, 설계 목적에 따라 설명하면서도 그 역사적 기원과 논의의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먼저 기본소득은 지속가능한 소비를 위한 '사회적 배당금'으로, 매월 일정한 액수를 조건 없이 시민권에 근거하여 분배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저자는 기본소득은 최종소득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기본소득은 한 사람의 최소생계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기본소득에 추가적인 노동소득을 보태어 더 높은 의욕과 생활 수준을 기대하게끔 보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다르게 기초 자본은 세상의 첫걸음을 떼는 성년기에 도달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인생을 계획할 목돈을 나눠주자는 '사회적 상속금'에 해당한다. 기초 자본은 생계유지와 소비 창출의 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목돈을 제공하여 아예 다른 삶을 살아볼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기초 자본은 불평등한 결과를 뒤늦게 보정하는 것이 아닌, 사회가 상속하는 유산으로 모두가 해볼 만한 출발선을 만드는 것에 방점을 둔다고 저자는 말한다.

ad뿐만 아니라 저자는 로봇 문명의 혜택을 인간이 누리자며, 로봇세를 거두어 기본 소득을 제공하자 주장하는 빌게이츠를 비롯해서, 기본소득 논의에 동참한 세계적인 경제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기본소득과 기초 자본에 대한 논의는 시대착오적인 좌파들의 불온한 선동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제기된 일종의 '시장안보' 정책이자, 현실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진행 중인 유의미한 실험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각장의 시작을 카드 뉴스로 시작하며, 생소한 개념을 핵심만 간추려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신선한 형식이 인상 깊다. 또한 어려운 학술용어를 빠뜨리지 않으면서도 전반적으로 쉽고 간결한 언어로 서술하고 있다. 강연문의 구어체는 단숨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감을 제공하면서도, 전달된 내용의 신선함과 깊이가 알맞게 배합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노동자의 부족은 곧 소비자의 부족'이라는 간단한 시장의 이치를 통해, 부족할 소비를 창출하면서, 고착화된 불평등을 해갈시킬 새롭고도 유력한 두 가지 대안을 두고 모두가 함께 고민해보자는 제안인 셈이다.

동시에 이 책은 기본소득과 기초 자본에 대한 구체적인 재원 마련 방식과 외국의 사례들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담아둔 해설서의 역할을 한다. 저자가 세간의 편견에 맞서가며 두 가지 제안 중에서 하나의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따라가는 재미가 이 책의 또 다른 별미일 것이다.

위기와 기회는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서 온다. 실업의 공포는 분배의 상상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 새로운 미래와 시대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해묵은 편견과 변화의 조류를 수용하지 않으려는 지적인 게으름일지도 모른다.

잘 계산된 현실은 유토피아가 될 수는 없어도 디스토피아는 극복해낼 수 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해법이 필요하다. 우리사회가 더 나은 미래를 그린다면, 더욱더 기초자본과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본 서평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것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81053&PAGE_CD=N0002&CMPT_CD=M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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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0-22 2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메님 왜이렇게 오랜만에.....ㅠ

프리즘메이커 2018-10-22 20:48   좋아요 0 | URL
대학원에서 갈렸습니다...ㅠㅜ 논문발표한다고 엊그제 대전갔다가...이제 여유가 생겨서...쿨럭 ㅠㅜ

syo 2018-10-22 20:49   좋아요 1 | URL
화....화이팅.....(눈물을 훔치며 돌아선다)

북다이제스터 2018-10-22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자들의 ‘시장안보’ 정책이라는 말씀에 저도 ‘한표’...

프리즘메이커 2018-10-22 21:57   좋아요 0 | URL
크...여기 한표 더 얹습니다
 
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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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공평하게 암울한 미래를 맞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과 유전자는 잉여인간들에게 자비와 아가페를 선사할 수 있을까? '인간적이다'라는 말에서 낭만이 아닌 열등을 느끼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평범함의 생물학적 종말, 그 토대에 놓인 모든 사회 시스템의 소멸. 기술 진보가 선사하는 불운한 포르노를 훔쳐 본 느낌이다. 


2018-08-25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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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변두리에서 중심지로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절반 밖에 모르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전쟁이 근대 서구 외교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면, 임진왜란은 오늘날의 동아시아 질서를 열어젖힌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저자 김시덕은 민족주의 과잉의 거북함과 친미사대의 단순함을 모두 비판하며, 풍부한 사료에 입각해 임진왜란 이후 전개된 동아시아의 역사를 넓은 안목으로 새로 풀어썼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냉전질서의 한복판에 있는 한반도는 당시 중화질서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대륙의 한족 정권은 수-당과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을 통해 한반도의 병합에서 막대한 출혈을 입자, 한반도의 국가들과 모종의 타협을 이루어낸다. 천년이나 지속된 사대 관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해양 세력인 일본은 대륙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반도의 완전한 정복을 꾀했으며, 대륙의 한인 세력은 해양의 일본 세력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로서 한반도를 이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임진왜란은 한반도가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서 대륙과 해양 세력 간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대두한 사건이었다. p.9


또한 저자는 한반도의 주된 안보위협은 해양세력 일본이 아닌 대륙세력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몽골과 여진족이 포함되는 대륙의 유목 민족들이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저자는 왜란 초기 조선군의 졸전을 색다르게 묘사한다. 남부의 조선군이 일본군으로부터 급속도로 쉽게 허물어진 까닭은 조선의 정예군이 주적인 야인들을 대적하기 위해 북방에 집중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종교전쟁과 국제노예무역, 그리고 임진왜란과 대항해시대

임진왜란을 종교 전쟁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 역시 신선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했지만, 각지에서 할거하는 종교 세력을 완전히 통제·장악 하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불교와 가톨릭이 정치세력화하며 강세를 보였다.

조선침략의 쌍두마차였던 불교도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는 조선침략이 불교를 통해 일종의 호국(護國)전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고, 가톨릭의 대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는 반도의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거룩한 전쟁이 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불교도의 깃발을 내건 가토 기요마사와 군종 신부를 데리고 다녔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임진왜란은 일종의 성전(聖戰)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대륙세력에 맞선 해양세력으로서의 일본을 독자 문명으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일본은 중화질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권이 되기 위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해왔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네덜란드의 도움과 거래를 통해 탈 중국적인 시각을 갖추며 세상을 차근차근 알아갔다. 아래는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의 해부학과 의학을 받아들였을 때 일본인이 받았던 충격에 관한 생생한 묘사이다.

유럽의 해부도를 입수했으니 실물과 대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막부의 허가를 받아 사형수의 몸을 해부해보니, 과연 인간의 몸은 한의학서의 설명과는 다르고 유럽 해부학서의 도판과 같았다. 중국책과 유럽책에 그려진 인체 구조가 그토록 다르니, 저자가 "중국인과 중국인 아닌 사람 간에는 (몸에) 차이가 있는 것인가?"라고 고민한 것도 이해가 가는 바다. p.155


특히 일본은 전국시대 당시 일본인 포로를 노예로 공급하는 등,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이미 국제 노예 시장 편입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또한 임진왜란의 포로로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노예무역의 상품으로 팔려나갔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 노예무역을 일삼던 대항해시대와 임진왜란은 이렇게 연결된다.


삼국지적 세계관의 탈피를 위하여 

임진왜란은 통일된 일본 열도의 힘과 이에 맞선 반도국 조선 및 대륙의 명국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이 대충돌의 여파로 인한 동아시아의 힘의 공백은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에게는 일대의 기회였다. 그는 파죽지세로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통일하고 몽골족까지 아우르며 후금을 건국한 이후, 두 차례의 조선정벌과 명나라와의 일전 끝에 중화질서의 새로운 맹주로 등극한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가 된 청나라는 당시 시베리아로 확장 중이던 러시아 제국과 불쾌한 만남을 갖게 되고, 조선은 청나라의 강권에 따라 나선정벌에 연루되어 러시아와의 첫 접촉을 겪는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이미 네덜란드를 통하여 러시아 제국의 동아시아에 대한 야망을 파악해 미리 대비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조선 당국이 러시아와 직접 전투를 벌였음에도 직접적인 정보수집에 실패한 것(혹은 무관심했던 것)을 우리 역사의 가장 아쉬운 대목 중 하나로 꼽는다.

이에 저자는 조선의 중국에 외교 안보를 기계적으로 추종하였던 편협한 사고방식 및 한-중-일 3개국으로만 세계를 바라보는 '삼국지적 세계관'의 큰 귀책사유를 돌리며 이를 벗어나야 함을 역설한다. 제 4의 세력 러시아가 나타나 향후 아관파천 및 러일전쟁을 비롯하여 조선 내정에 깊게 관여하였고, 이후 소련의 38 이북 분할과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운명의 핵심 축이 되었던 것은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이든 중국이든 어느 한 나라에 군사-정치-경제 등 모든 부문을 전적으로 의존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다. p.13

어떤 한국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거나 미국과 중국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한국의 역사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존재를 과소평가하고 미국과 중국의 존재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바람에 중요한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p.167


이 책은 저자의 간결한 필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 덕분에, 부록을 제외한 370페이지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벅차다는 느낌 없이 술술 읽힌다. 문헌학자인 저자의 적절한 사료배치 및 흥미진진한 일화소개가 책의 읽는 맛을 더한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다소 생소하고 불쾌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이면은 물론 파편적 지식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한데 엮어줄 것이다.



※본 서평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것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7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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