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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데리다의 파이프 담배를 문 사진은 비흡연자인 나도 한 번쯤 

담배를 피워볼까 하는 생각이 나게 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사진출처: https://twitter.com/derrida_bot)




I. 해체된 근대와 이성       

 

이성이 너희를 진리로 인도하리라.’  합리성으로 무장한 근대인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이성이 선물한 기술의 발전과 이를 주관하는 합리적 시스템이 인간을 풍요로운 천국으로 안내하리라 낙관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근대가 낳은 희대의 괴물, 나치의 탄생과 만행으로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긍정은 이성의 실패요, 근대인의 오만이었음이 드러났다. 인간의 안녕과 복리를 가져다 주던 이성이 돌변한 것이다.

 

물리학과 화학은 인간 종을 절멸시킬 만한 위력을 가진 핵무기와 생화학 가스로 변질되었다. 생리학과 유전학은 인종주의와 결합하여, 아리안 족의 유전적 우수성을 알리는 선전도구열등한유대인을 학살시킬 명분으로 둔갑되었다. 철학의 합리적 체계는 나치즘의 토대를 세웠고, 칼 슈미트 류의 법학자와 하이데거와 같은 철학자들은 나치에 부역하며 추악한 권력의 시녀가 되었다. 도구적 합리성을 앞세워 탄생한 관료제는 아이히만과 같은 생각 없는살인 기계를 탄생시켰다. 전혀 비정치적일 것 같던 근대의 영화와 미술 또한 히틀러를 신격화하고 나치를 미화하는데 동원되었다. 이성과 합리성에 관한 신화가 붕괴한 것 이다.

 

이렇듯 이성은 풍요를 가져다 줌과 동시에 파괴를 가져다 주었다. 이성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고 곳곳에서 한계에 부닥쳤다. 무엇이든 명쾌하게 구분 해내는 이성으로 수많은 것을 설명해왔지만, 더 이상 이성이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 역시 반대급부로 증가하였다. , 이성은 합리적 이면서도 비합리적이었고, 그 이면에는 편견과 권력이 늘 이성 주변을 유령처럼 배회하며 이성의 결함들을 은폐해온 것이다. 이에 수십 년간 침묵을 지켜오던 한 철학자가 애매성과 모호성의 폭력 위에 세워진 근대성의 양면성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이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 그가 바로 자크 데리다이다.

 

이 책은 데리다의 저작 중에서도 법과 폭력, 정의를 다룬 각별한 저작이다. 그러나, 심오한 내용을 짧은 분량과 익숙하지 못한 (그러나 데리다 식으로 장래에 익숙 했던 게 될) 해체주의적 필법으로 기입하여, 본인은 이 책을 읽고 소화하는데 적잖이 애를 먹었다. 본인은 한국의 대학원생이다. 12년에 달하는 의무교육 기간 동안에는 한국식 암기와 주입이라는 전 근대적방식으로 길러져 왔고, 이제 대학원에 진학하여 겨우 막 틀에 박힌 암기에서 벗어나 근대적논증에 진입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근대적인 논리적 구분에 갓 익숙해진 터라, 변명 아닌 변명으로 치열하게 읽고 공부했음에도, 감히 데리다 식 탈 근대적해체독법에 온전히 범접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미리 알린다.

 

본 서평을 다음과 같이 구성하였다. 먼저 데리다의 철학 전반에 대해서 개괄 할 것이다. 다음으로 법의 힘 의 핵심 논지를 간략하게 살펴 보겠다. 마지막으로 이 둘을 종합해 민주주의와 정의, 해체에 관한 필자의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또한, 난해하기로 유명한 데리다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욕심에, 본 책과 더불어 추가적으로 5권의 해설서를 참고하여 본 서평을 작성하였음을 알린다. 서평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하였다




II. 데리다 철학의 개괄

 

1. 음성과 대화의 독재를 해체하라

 

상에서 해체란 흔히 파괴와 비슷한 용법으로 쓰인다. 가정의 해체나 가정의 파괴가 주는 함의는 비슷하게 인식된다.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겠다는 전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파괴적이건 해체적이건 한 조직의 존재가 소멸로 인지되는 것은 매한가지니 말이다. 그러나, 파괴와 해체 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있다. , 파괴란 외적에서 특정 집합체를 해체시키는 사동의 표현이며, 해체란 집합체 내부에서 각각의 구성체들이 분리되어 나감을 표현하는 능동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성이 호령하던 세계는 내재되고 은폐된 폭력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 폭력의 중심에는 우열, 선악 따위의 이분법적 인식론이 대차게 들어서 있다. 여기서 데리다가 포착한 가장 극성스러운 이분법은 음성과 문자의 우열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이래로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화와 음성이었다. 서양 철학사에서 음성과 대화는 이성을 구현해내는 우월한 특권매체로 군림해왔고, 문자와 기록은 온전히 내용을 담지 못하고 혼동을 주는 열등한 매체로 단지 보조적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데리다가 보기엔 오히려 이성의 체계를 생생하게 구현하는 매체는 텍스트, 즉 문자였다.[1] 글자는 일종의 기호고, 기호는 누구에게나 같은 대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2] 물론, 문자기록이 군림하고 음성대화가 추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질서의 재 반복이며, 또 다른 우열세계의 폭력이다. 데리다 에게는 문자나 음성이나 같은 언어매체이고, 문자기록의 텍스트 역시 일정부분 불필요함을 갖고 있는 해체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시니피앙(기표로 번역)과 시니피에(기의로 번역)의 불일치를 우리는 해체해야 한다. 특히. 하나의 시니피앙에 여러 가지 시니피에가 산출 되는 경우[3]가 우리의 의사소통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를 보고 드는 의미란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다시 이 생각은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직접 체험치 않은 간접경험에 있다. 간접경험은 말 그대로 자신의 상상으로써, 짐작과 편견을 산출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왜곡과정을 통해 텍스트를 오해하고 또 폭력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해체 되어야 할 대상이며, 시니피앙의 본 모습을 가로막는 시니피에는 생각지 말아야 한다. , 텍스트는 텍스트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하며, 우리는 글의 해체 통해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2. 해체야 말로 정의다

 

이성의 목적을 갖고 있다. 그 자체가 진리의 세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성은 낙원으로 이끌어줄 메시아이자, 타락한 현실을 최초의 순수했던 기원으로의 회복을 위한 특급열차로 추앙 받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근대의 이성은 끊임없이 이분법적 대립항을 통해 세상을 파괴적으로 또 폭력적으로, 하지만 원래부터 그랬었던 것인 냥, ‘조작하고 재구성해왔다. 이성과 감성을 대립시켰고, 남성과 여성을 대립시켰고, 백인과 흑인을 대립시켰고 그 안에 우열과 선악과 같은 속성을 부여하면서 합리화 해왔다.


이렇게 이성이 단언하며 정립한 이분법 구도는 세상의 여러 차이를 가진 다원성을 억압하고 파괴하며, 강제적으로 이분법 구도에 편입시켜온 폭력의 산물이다. 보고 싶은 것만 단순한 대립항으로 취사선택 해온 폭력적인 인식론 속에서, ‘장래에 없는 것으로 되게 될다양한 소수는 있는 듯 없는 듯 유령과 같이 주류를 배회하며 음지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며 살아야 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남성과 여성의 대립에 LGBT[4]의 존재 자체가 은폐되고 부정되었다. 선택지는 둘 중에 하나였다. 남자 아니면 여자. 백인과 흑인이라는 논리적 구분 역시 세상의 반절인 수 많은 아시아인, 인디언과 같은 황인종이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다. 좌파와 우파의 대립도 사실 이 이분법 구도를 넘어서지 못한 채 상대적 강약과 우열의 한쪽 편 에 기생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성감성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안주하며, 인간사회에 내재적으로 숨어있던 폭력 어린 광기를 부정하거나 인지하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 결국, 봇물처럼 터져 나온 광기어린 유령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나치의 출현과 만행을 지켜만 봐야 했다.

 


이에 데리다는 해체야 말로 정의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 텍스트의 참 뜻은 무엇일까? 왜 해체는 본질을 찾는 방도이며, 정의일까? 필자는 이렇게 이해했다. 이분법의 파괴에 맞서, 이성의 구분 짓기를 해체하여 그 안에 은폐되어있고 배제된 개별자들의 차이를 복원하고 숨겨져 있던 다원성회복하는 것. ‘남녀여남이 되는 게 아니라 구분 자체가 해체되어 한 사람의 개성 있는 인격체로 존중 받는 것. 흑백의 대립이 아닌 개개인의 인격체로 해체되고 분리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리는 것. 억압되어있던 개별자들이 개성을 발현하며 숨쉴 공간시간을 내어주는 것[5] 것이 정의가 머무는 공간이며, ‘해체그 자체이다.




[1] 요즘과 같은 영상과 이미지 시대에 살고 있는 필자는 데리다의 주장에 약간의 의심을 품는다음성만큼 문자 역시 중요하지만음성과 영상과 시간적 동시성과 감각적 생생함이 모두 결합되어 있는 영상매체의 등장에 2d적인 문자가 여전히 이성체계에 더 부합할 것인가. 4d가 더 정교화되고 상상까지 재현해내는 가상공간이 등장하게 되는 근 미래에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증폭과 결합이 온존하게 될 장래에도 인간의 사유를 글보다 더 생생하고 정확하고 구체화해서 표현해낼 매체가 등장한다면, (예를 들어 영화 해리포터에서 기억을 추출하고 담아두었다가 부으면 그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직접 체험하게 되는 펜시브와 같은 것들그때에도 여전히 문자일까?

[2] 기호는 전달자의 생각전달한 내용수용자의 인식과 이해라는 3항의 일치를 가능하게 해준다.

[3] 필자는 언어의 다의성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였다.

[4] 레즈게이바이 섹슈얼트랜스 젠더의 알파벳 첫글자를 따서 만든 신조어이다.

[5] 데리다는 공간내기’  시간 내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III.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

 

1. 법에서 정의로


 

데리다는 책에 앞장에서 이라는 용어를 찬찬히 뜯어보며 논의를 시작한다. , 법은 그 정의상 폭력을 자연히 함축한다. 더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법 안에는 폭력이 항구적으로 기입되어있다. 법에 힘이 없다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또한, 법은 정의와도 연관이 크다. 정의가 없다면 법은 광기 어린 폭력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법과 폭력의 차이를 벌려주는 것이 바로 정의. 하지만 우리는 법이 정의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법은 폭력이면서도 폭력이 아니고, 정의이면서도 정의가 아니다. 애매하고 정체 불분명한 것이다.[1]

 

이를 데리다는 크게 정의의 계산 ()가능성 정의의 결정 불가능성 정의의 긴급성 의 3가지 논리적 난관을 통해, 법과 정의의 연관성에 대해 조심스레 해체적으로 읽어나간다. 먼저, 정의는 계산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해체 불가능 한 것이고, 계산 가능한 지평과 범위를 넘어선 곳에 위치해 있다. , 정의와 법은 놓여있는 층위와 세계가 다르다. 따라서. 법은 정의를 닮으려 하지만, 절대로 닮을 수 없다. 계산 가능하고 또 계산 가능한 법은 계산 불가능한 정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법 조항을 근거로 위법과 적법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정의와 부정의로 나아갈 수 없다. 만약 법적 판결을 맹목적으로 정의와 결부시킨다면, 그것은 기계적 판결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정의의 결정 불가능성이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을 빌려 선악에 대한 구분,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고, 사건의 본질과 현상을 재단한다. 하지만, 정의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정의는 결정을 항상 지연시킨다. 결정은 스스로 결정 될 수 없다. 누군가의 결단이 필요한 일이다. 무언가를 단절 시키는 행위는 계산가능하고 규정되는 것이 가능한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다. 정의는 계산불가능하고 결정불가능하고 해체 불가능한 지평너머, 즉 법 너머에 있을 뿐이다.

 

마지막 난관은 '정의의 긴급성'이다. 정의는 주로 긴급할 때 출현한다. 무고한 목숨이 사그라들기 직전에, 즉시 정의는 소환되어 부정의를 바로잡을 것을 끊임없이 명령한다. 그러나 정의는 구체적인 행동을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며, 우리 역시 정의가 요구하는 바를 정확히 계산해내지 못한다. 다만 정의는 있는 듯 없는 듯 유령처럼 배회 할 뿐이다. 따라서, 이를 구원할 메시아의 역할에 부득이하게 기대야 한다. 정의는 최악의 부정의를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법을 끌어 안는다. 그리고 부족한 법에게 끊임 없이 정의자신을 계산 하여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법은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끊임없이 해체되고 재창조된다.          

 


2. 벤야민의 이름으로

 

모든 법은 자신이 정의를 독점하려고 한다. 모든 법은 자신이 정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승인한 것인가? ‘정의가 눈앞에 대화 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면, 정의에게 직접 부여했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법이 세워지는 최초의 순간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특정 법은 폭력을 기반으로 하여, 혹은 주변폭력을 제압하여 수립된다. 그 당시에는 그 폭력과 법은 어떠한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상태에서 법은 폭력으로써 스스로를 세웠다. 이 때 이 법에 대해 가부를 말해줄 그 어떤 판단도 존재 하지 않는다. 정의상 말 그대로 최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워진 법은 나중에 정의의 이름을 갖다 붙일(명명 할) 뿐이다.

 

이렇게 모든 법은 스스로를 정당화 하기 때문에, 사실 그 기원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며, 자의적이고 폭력적인 것이다. 법은 끊임없이 정의를 사칭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그 자신을 보존한다. 하지만, 벤야민의 지적처럼, 법 체계내부에서 혁명을 시도하는 자들 역시 폭력을 정의의 이름으로 이용할 수 있다. 법을 정립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했던 주체들은, 다시 힘들게 정립한 법을 지키기 위해 도전세력으로부터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 투쟁과 폭력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따라서 법은 법 자신이 세상의 모든 폭력을 독점하려는 이해관계가 발생하며, 법 정립적 폭력은 그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법 보존적 폭력과 혼연일체가 된다[2].

 

대표적인 타락과 오염사례는 유령처럼 배회하는 경찰이다. 서로 하나인양 뒤섞여 있던 법 정립적 폭력은 법 보존적 폭력의 관계는 경찰에 의해 역전된다. 민주주의 시대의 경찰은, 절대군주시절과 같이 전면에 나설 수 없는, 나서서는 안 되는 음지의 유령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경찰은 어디에도 없지만 언제 어디서나 개입할 준비를 이미 마치고 또 개입하고 있는 중이다. 법 정립적 폭력은 경찰 없이는 법질서에 대한 도전에 맞서고 보호 할 수 없다. 따라서 경찰은 질서를 보존한다는 명분하에 스스로 입법자에 등극하여 자의적으로 법을 좌지우지한다.[3] 하지만 민주주의가 항상 존재하는 폭력을 부정하고 은폐하고 잊고 사는데, 이 틈을 타 합법을 가장한 폭력주체이자 자신을 보존하려 고용한 경찰은 합법을 빙자하여 폭력을 휘두르며 나아가 민주주의 자신의 법 정립적 폭력, 즉 입법권까지 찬탈하고 권위를 실추시키게 된다.[4]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 앞에서 우리는 법 정립적 폭력과 법 보존적 폭력, 그리고 이 둘의 뒤섞임과 타락을 목도했다. 벤야민은 위를 두 폭력간의 수단과 목적의 관계 맺기가 위와 같은 참극을 불러 왔기 때문에, 이 관계를 해체(거부)하는 순수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결국 그 권위의 신성한 토대로서 벤야민은 신을 호출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이 발상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신에게 부여 받는다는 발상이 나치에게 매혹적으로 이용당한 것은 아닌지. , 나치는 스스로 부여한 법의 정당성을 넘어서 다른 차원에 있는 정의 그 자체를 박살내려 한 것은 아닌지 말이다.



[1] 이러한 양면성에 입각 할 때, 폭력과 법, 그리고 정의에 관한 피상적 구분의 시도 역시 해체되어야 한다.

[2] 이는 이 두 가지 폭력 사이의 차이가 불분명해지고 명확한 구분이 지연되는 것을 뜻한다. , 벤야민이 시도한 구분은 이와 같은 과정으로 서로 오염되고 불분명해지기 때문에, 이 역시 해체 되어야 한다.

[3]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시위나 집회 같은 경우에서 폭력성에 관한 판단을 일선 현장에 나가있는 경찰책임자에게 맡기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경찰이 시위대를 불법이라고 간주하면 불법이 되고 합법이라고 간주하면 합법이 된다.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은 경찰은 항상 도전을 불용하고 불법으로 간주한다. , 경찰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법을 창설하고 운영하는 특권적 지위에 놓이게 된다.

[4] 법을 세우는 위대한 과정에서 나타난 폭력이 시간이 지나자 오염되어 법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파괴를 일삼는 추악한 타락으로 되풀이 되는 것을 보고 필자는 마르크스의 말이 뒤집혀 떠올랐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IV. 민주주의와 자기면역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돌입했지만, 여전히 근대성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근대성에 의존하는 우리는 여전히 구분 할 수 없는 무언가를 구분 하려 하며, 차이를 은폐하고, 존재를 부정하며, 인정을 지연하고, 공동체에서 배제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신에 의존해야 할까? 신의 신성한 폭력을 상정하고 이를 믿어야 할까? 이렇게 까지나 머리를 싸매고 파헤쳐보았는데 이런 결론에서 만족 해야 한다면 너무 허무하다.

 

동물원의 비버의 예를 들고 싶다. 우리[1] 안 비버는 항상 해체와 창조의 변증법에 놓여있다. 힘을 써 집을 지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육사가 집을 부수기 때문이다. 집을 허물지 않으면 비버는 운동부족과 나태로 인해 건강이 나빠지고 질병에 취약해 지기 때문이다. 비버는 끊임없이 집을 짓고 해체하고 다시 짓게 되는 것을 명 받는다. 비버는 완성된 집을 가질 수 없지만, 해체를 겪으며 더욱 견고하고 발전된 집을 지어내고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법 또한 마찬가지라고 본다.

 

우리는 먼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유령과 같은 폭력을 직시 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폭력이 다스리는 세계다. 위에서 경찰의 사례가 말해주듯 민주주의는 자신에 내재된, 인정하기 싫지만 존재하는 폭력을 망각하였기 때문에 타락했다. 우리도 비슷한 역사를 걸어왔다. 우리 헌정은 두 차례의 쿠데타를 맞았으며,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는 궤변을 안보를 위해 받아들여야 했다. 주권자가 제대로 된 주인 이 되는 것을 포기하며 살아야 했고, 어쩔 수 없이 타협해왔으며 합법적 폭력의 횡포를 감내하고 살아왔다. 피로 빚어낸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민간인을 사찰하고 메신저를 검열하는 등, 법의 타락한 형태는 우리 삶 곳곳에서 실체를 감추고 살아 숨쉬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체가 필요하다. 데리다는 한 강연에서 면역세포가 외부 침입 병균이 아닌, 자기 주인세포를 공격해 발생하는 특정 질병의 예를 들었다. 이는 외부침입과 질서수호라는 명분하에 민주주의를 지연시키며 결국 자기 주인세포인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많은 국가들을 비판한 것이며, 본래 의미의 진정한 자기 면역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차이를 인정하는 체제다. 해체는 차이가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타자를 불용하여 타자에 대항한다는 폭력의 빌미를 제공하기 보다는, 해체를 통해 서로 사이의 끊임없는 시공간적 틈을 내 다양한 이질적인 타자를 품어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해체란 끊임없고 무제한적인 자기 비판이다. 정의는 법에게 무한히 요구하고, 무한히 명령하여 해체하고 정립하고 정초하고 보존하고 다시 해체하기를 반복시킨다. 정의가 이름뿐인 공허한 구호가 되거나, 정의의 요구를 거스르려는 법의 타락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기존 법체계에 세찬 비판을 항상 거세게 가해 정의를 사칭하는 법을 감시하며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무제한적인 비판을 가해, 무한정한 초과 복원과 초과 개선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자기면역이라고 필자는 판단했다. 이상으로 난해하고 고생하였던 서평을 마친다. 정의로운 해체를 위하여.


[1] 여기서의 우리가 ‘we’에  해당하는 우리일지 ‘cage’에 해당하는 우리일지 판단하는 것도 데리다 식의 묘미 아니겠는가읽는 이의 자유로 해석의 공간을 내어주려 한다.



참고문헌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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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메이커 2017-10-24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글쓰기 환경은 정말이지 최악이군요...

syo 2017-10-24 06:54   좋아요 1 | URL
알라딘이 유명합니다!! 그걸루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0-24 11:2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당황스럽죠 ? 저도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글쓰기 툴이 엉망이어서..
많은 분들이 아마도 다른 곳에서 글을 쓰고 알라딘 창에 옮깁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0-24 13:47   좋아요 0 | URL
원문이랑 다르게 알라딘에 옮겼더니 띄어쓰기 엉망으로 뭉개져 있는데 도대체 고칠 수가 없어요...

sprenown 2017-10-24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결국, 데리다가 말하는 ‘민주주의‘ 란 정의를 향해 끊임없이 해체와 창조를 되풀이하는 변증법적 과정에 있는 것이네요. 의심과 비판을 통해 정의에 수렴해가는 과정...

프리즘메이커 2017-10-24 13:45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ㅎㅎ
 

대학은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는 것이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저자는 정말 대학을 잘 활용했다. 아니 정확히 대학이 부여하는 자유로운 시간을 잘 활용했다. 책이 흔한 공부법 자기계발서 포맷을 따랐지만, 나는 철학의 향취를 느꼈다. 숟가락으로 떠먹여 학점 잘 따는 법, 따위의 곁가지 보다는 대학이 부여하는 기회를 어떻게 누릴 것인가가 이 책의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대학생은 대학을 다니지 않고, 자신의 비서로 고용한다.' 나는 저자가 자유책임지는 대학생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자기계발서류를 추천하려 이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이런 날도 있구나.


 


나는 대학이 줄어들어야 하며, 평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 국민이 배움의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인생의 언제든 다닐 수 있어야 하는 열린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한국의 대학이 가지고 있는 여러 산적한 문제점을 내부자의 한명으로 정말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많은 전문가들과 정책설계자들이 인지하고 있으며,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은 전문가들에게 맡긴다. 나는 단지 한 때 학부생으로서, 현 대학원생으로서 나와 같은 인생의 시기를 겪고 있는 많은 청춘들이 대학에서 방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대학이라는 그 기회의 축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도와주는 이런 책들에 관심을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랄까?

 


대학사회가 인구절벽이니, 구조조정이니, 국립대 통합이니 요동을 치고 있다. 인문계열은 상황이 더 안좋다. ‘인구론, 문송합니다를 달고 살아야 하니까. 이과는 정규학기 커리큘럼이 촘촘하고 빼곡해 시키는 공부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다. 반면 문과는 정규학기가 널널한 대신 자유시간이 많다. 그래서 이과는 학과공부만 열심히해도 직업으로 곧바로 전공이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과는 시키는 것만 공부하면 거의 안한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상황이다. 인문계열은 전공이 직업으로 이어질 확률이 거의 없다. 애초에 목적이 직업훈련이 아니라 자기계발이니까. 그래서 인문계열인 경우에는 남는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한다. 정해진 게 없으니까. 정해진 게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가 아니다. 자유시간이 많다는 것은 휴식시간이 길다가 아니다. 이공계열이 학과수업에 빼앗기는 시간만큼 뭘 해놓아야 문과도 살길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분명 대학교육은 실패했다. 일단 가르치는 사람부터 고등학생의 발상에서 못 벗어났으니까. 전공이 직업을 담보한다는 식의 낡은 발상에서 아직도 사로잡혀 있으니까. 잘 짜여 진 관광코스처럼 전공이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로드맵을 따르면 자동으로 밥벌이가 떨어진다는 식의는 1차원적인 생각을 교육자부터 가지고 있다. 철학과의 교수들이 모여 철학과 취업률 진작을 위해 내놓은 대책이 논술 강사 지도자 과정 신설이었다. 그 사람들 학위는 왜따고 공부는 왜했대? 교수 팔자 좋다 정말. 


그냥 "우리 철학과 취업안됩니다. 다만 여기오면 똑똑해져요. 똑똑해진 머리로 뭘할지 정해오면 그때 학과가 팍팍 밀어줄게요" 이러고 말것이지. 그런데 돈 쓰지 말고 애들 어학연수, 동아리 활동지원, 아니면 면접, 발표력이라도 길러주게 도와줘라 좀. 아니면 낯가림 심한애들 친구 좀 사귀라고 술값이라도 대신 내주든가...학과차원에서 우리결혼했어요라도 한번 찍어서 사랑이나 하게 도와주던가. 능력향상을 위주로 접근해야지.. 무슨 자격증이나 만든다고..

 

 

아무튼 전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공은 직업이 아니다. 능력 계발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전공을 소재로 사고와 능력을 키우는 곳이 대학이라고 생각한다. 전공 공부를 하면서 각종 사고력, 대처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수업이 끝났으면 자율적으로 공모전을 벌이기도, 모임을 꾸리기도 하면서 각종 사회능력을 키우는 인큐베이터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향상된 능력으로 뭐 할지 정하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전공은 똑똑해지는 훈련 도구다. 똑똑한 머리로 뭐 할지는 알아서들 정해라. 그거 까지 대학에서 고등학교 학부형마냥 일일이 챙길 수도 없으며, 챙겨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그건 정말이지 대학의 존재 이유인 자유의 이념과 맞지 않다. 전공은 단지 대학에서 정해진 시간에 뭘 했는지를 알려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유 시간에 뭘 했는지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자기 소개서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클라스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고, 등록금의 가성비는 스스로 창출하는 게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학교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면죄부를 주려는 것도 아니다. 학교는 나서서 까불지 말고, 단지 자유의 판을, 애들이 놀고 공부하는데 최선을 다해 지원해주면 된다. 그럼 알아서 찾아간다학교는 탁아소가 아니고, 대학생은 유아가 아니다. 자유공간 자유시간 그 자체다. 애들이 갑자기 뭘하고 싶을 때 조건 없이 지원 해주고, 하고 싶은게 없다면 이런게 있다 알려주는 거나 열심히 잘하자. 정말 취업을 돕고 싶으면, 이상한 취업캠프 따위 만들지말고 그냥 토익 응시료나 보태줘라. 아니면 차비라도 지원해주던가.아니면 학교차원에서 외로운 애들 연애나 장려해봐. 소개팅할 커피값 정돈 한달에 한번 줄 수 있잖아. 한 두단원 보고 버릴 몇 만원짜리 교재비 말고 '교제비'를 지원해보라고. 아 잔소리 끝.  

 

아. 새벽이다. 그나저나 난 뭐 해먹고 살지

가끔은 이렇게 두서없는 글을 쓰고 싶다.

 

2017.10.15.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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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0-15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대출신이지만(이라서?) 교제비는 너무너무너무너무 와닿습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0-15 18:21   좋아요 0 | URL
제 동생도 공대생인데 두 단원 볼 교재 원서로 굳이 사라고 하는 이유가....모르겠습니다 ㅎㅎ

sprenown 2017-10-15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대학 다시 들어가고 싶네요.
정말 잘 할 자신 있는데..쩝 ㅎ ㅎ

프리즘메이커 2017-10-15 18:21   좋아요 1 | URL
대학생이라는 직업이 있으면 펑생할 것 같습니다 ㅎㅎ

cyrus 2017-10-15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시 대학에 다닐 수 있다면 대학교 도서관에서 살고 싶습니다. 대학생 때 주로 드나든 곳이 강의실, 술집이었거든요.. ㅎㅎㅎ

이 글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프리즘메이커님의 대학 전공이 궁금했습니다. ^^

프리즘메이커 2017-10-15 18:22   좋아요 0 | URL
저랑 행선지가 비슷하시군요! 전 학부는 정치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정치철학을 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일 러 두 기



 

- 박홍규 씨가 번역한  상식인권은 상식인권이 수록된 필맥 출판사의 단행본이다.

- 남경태 씨가 번역한 상식상식토지분배의 정의가 수록된 효형 출판사의 단행본이다


※ PC버전을 권장합니다.



1. 촛불혁명의 배후세력은 상식이었다.



헌법은 국가의 소산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의 소산이다. 따라서 헌법 없는 국가는 권리 없는 권력에 불과하 다. 국민에게 행사되는 모든 권력은 어떤 기원을 가짐에 틀림없다. 그것은 위임된 것이 아니면 횡령된 것이다. 그 밖의 다른 기원은 없다. 모든 위임된 권력은 신탁이지만, 모든 횡령된 권력은 찬탈이다. - 「인권 2부」, p.269 


국가가 수립돼야 하고 인류가 그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이지 특정 개인의 이익이나 세력의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다.  - 「인권 2부」, p.226


국가란 국민의 일을 처리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특수한 개인이나 가족의 소유물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럴 수도 없으며, 다만 그 부담으로 유지되는 전 공동체의 소유물이다. (…) 주권이란 오직 국민에 속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국민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국가형태를 언제라도 폐지하고 자신의 이익, 의향, 행복에 적합한 국가를 수립할 불멸의 생득권을 가진다. (…) 모든 시민은 주권자 중 하나이므로 누구도 개인적으로 그들을 예속할 수 없다. 그는 오직 법률에만 복종할 수 있다. - 「인권 1부」, pp.212-213




 

대한민국 헌법

1장 총강

1

1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중략)


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10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11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2항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2016년 겨울,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의 헌법이 유린당한 국정 농단 사태가 발생하였다. 박근혜 前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무시했다. 주권자 국민에게 5년간 위임받은 국가권력을 사유화하였으며, 특히 국민에게 양도받은 주권을 자신의 친구 최순실에게 넘겨주어 선출되지 않은 무자격한 그녀를 사실상의 사적인 특수계급으로 만들었다. 당시 대통령 박근혜의 비호아래 최순실과 그의 딸 정유라는 국가 권력을 사적인 부를 탐하는 데 동원하여 각종 특권 및 특혜를 누렸으며 뇌물을 통한 부당이득을 취하였다. 


박 前 대통령의 재임 4년간, 대한민국은 국가권력의 민주적 정당성과 법치주의의 원리가 크게 훼손되었다. 이 여파로 주권자인 국민들은 전국 각지에서 촛불을들고 광장에 나와 헌정질서 회복과 주권 회수를 요구하였고, 민의를 받은 대의기구 국회는 2016년 12월 9일 234명의 찬성으로 탄핵소추안을 가결하였으며, 마침내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탄핵인용 결정을 내리면서 그녀를 대통령직에서 파면하였다. 





헌법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자 주권자 국민의 보편적인 상식이 담긴 성문화된 최고의 권위를 갖는 문서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보통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적인 동기에서 아닌 철저히 상식적인 견지에서 거리와 광장에 촛불을 들고 나섰다. 그렇게나 많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질서 있고 평화롭게 대규모의 전국적 시위를 지속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철저히 상식에 호소하고 상식으로 하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상식의 회복을 바라는 시민들의 국정농단 촛불집회는 한국판 ‘시민혁명’ 이었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상식과 무관하다. 상식은 일상적인 의미를 가지는 데 비해 혁명은 대규모의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는 비일상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자”는 말이 가장 강력한 혁명의 구호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있다. 토머스 페인이 이 책을 쓸 무렵 아메리카의 상황이 바로 그랬다. 


- 남경태. 2012. “상식이 통하는 사회와 상식이 이상인 사회”. 토머스 페인. 『상식』, 126. 파주: 효형출판 




상식의 사전적 의미는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이다. 여기서 상식은 일반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규범적이다. 그렇기에 상식이 진보성을 띠는 상황은 극히 예외적이고 역설적인 상황인 것이다. 혁명이 진보의 기관차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혁명은 시민의 전반적인 삶의 존엄을 침해고 주권을 공적으로 대리하지 않고 사유화하는 국가권력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브레이크인 것이다. 그래서 『상식』의 의미는 몰상식과 상식의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내세운 정부를 굴복시킨 것도 바로 ‘상식의 단죄’였다.



‘상식’의 목표와 구체적으로 전개된 역사의 상황은 다를지라도, 1776년 식민지 아메리카와 2016년 촛불정국의 한국에서 상식은 분명 시민들의 강력한 행동 동기가 되었다. 상식이 진보성을 대표하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 있던 당시의 나는 피가 당기듯, 토머스 페인과 그의 대표작「상식」의 부름심을 들었다. 그러나 막상 책을 펼친 나는「상식」의 내용상 다수를 차지하며, 아메리카 독립의 당위를 설명하는 국제정치적 맥락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함께 실려 있는 「인권」과 토지분배의 정의」가 훨씬 중요한 저작임을 발견했다. 「인권」에는 세계 각국 헌법의 모태가 된 인권선언이 담겨있으며, 「토지분배의 정의」에는 현재 활발하게 진행 중인 기본소득에 관한 원형적 형태가 담겨 있었다. 페인에게는 대영'제국'으로부터 공화국 미국의 독립못지 않게 인권과 토지분배의 정의역시 상식이었던 게다.





2. 인간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




창조에 대한 모세의 견해는, 신적인 근거로 보든 단순한 역사적 근거로 보든 인간은 단일성과 평등성을 가진다는 말과 완전히 일치한다.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여기에 양성의 구분을 밝혀져 있으나, 그 밖의 다른 구분은 암시조차 없다. 설령 이것이 신적인 근거는 아니라 해도 최소한 역사적인 근거는 되며, 그것은 인간의 평등이 현대의 이론이 아니라, 기록된 이론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임을 보여준다. - 인권 1, p.135



세계에 알려진 모든 종교는 인간이란 모두 다 ‘하나의 지위’에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간의 단일성’에 입각하고 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앞으로 인간이 처하게 될 상황이 어떠한 것이든 선과 악만이 유일한 구별점이다. 아니, 국가의 법령도 범죄로 인한 지위는 만들되 인격에 따른 지위는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원리에 부합돼야 한다. (…) 이것은 인간이 바로 그 같은 관점에서 타인을 바라보고, 그 같은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인간을 그의 창조주나 그가 일부를 구성하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모든 의무와 밀접하게 관련시킨다. (…) 그것은(인간의 의무) 두 가지, 즉 사람이면 누구나 느껴야 할 신에 대한 의무와,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스스로 남에게 해주는 이웃에 대한 존경으로 이루어진다. - 「인권 1부」, pp.135-137, 괄호 글쓴이 




페인은 인간의 보편적 평등과 자연권 논거를 신의 존재와 창조의 개념을 통해 정당화하고 있다. 창조주인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여 창조했으니, 그 피조물인 인간끼리는 신의 허락 없이 함부로 위계를 나눌 수 없다. 즉 지배-피지배 관계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므로, 인간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으며, 신의 피조물인 인간은 모두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 이 때문에 신이 인간에게 내린 소유권을 비롯한 자연권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개념이 아니라 신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개념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제도는 신과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는 악한제도로 간주해야한다. 사회계약은 동등한 인간끼리 맺는 것이고, 계약의 보증은 거스를 수 없는 창조주의 뜻이며, 동등한 개인끼리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공화국만이 정의롭고 신의 뜻에 알맞는 상식적인 체제인 것이다. 




3. 기본 소득은 상식이 될 것이다.



인간은 땅을 만들지 않았으며, 설령 땅을 점유할 자연적 권리가 있다 해도 땅의 일부를 영구히 자기 자산으로 삼을 권리는 없었다. 또한 땅을 창조한 조물주는 토지 문서를 발행하는 관청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토지 재산의 관념은 어떻게 생겨난 걸까? 나는 예전에도 말했듯이 경작과 더불어 토지 재산의 관념이 형성되었다고 대답한다. 경작으로 이루어진 발전과 모태가 되는 토지 자체를 분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런 관념이 생겨난 것이다. 지금까지 발전의 가치는 자연적 토지의 가치를 크게 상회해 자연적 토지의 가치를 흡수할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모든 사람의 공유권이 개인의 경작권과 뒤섞여버렸다. - 「토지분배의 정의」, p.105



경작은 창조된 땅에 열 배의 가치를 부가했다. 그러나 더불어 시작된 토지 독점은 최대의 해악을 낳았다. 모든 나라 주민들의 절반 이상에게서 자연적 상속을 박탈하고서도 손실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전에 없었던 새로운 빈곤과 비참한 현실을 낳았다. 빼앗긴 사람들의 처지를 옹호하기 위해 내가 주장하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권리다. 그러나 권리는 처음부터 등한시 되었고, 하늘이 정부 제도의 혁명으로 길을 열 때까지는 전면에 대두되지 못했다. (…) 국가 기금을 조성해 토지 재산 제도가 도입되면서 자연적 상속권을 상실한 스물한 살 이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부분적인 보상으로 15파운드의 금액을 나누어주도록 하자. 또한 현재 살아 있는 쉰 살 이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생토록 해마다 10파운드씩 주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그 나이가 되면 주도록 하자. (1796년의 15파운드는 2016년 기준 1,426 유로에 해당하고, 원화로 약 180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글쓴이 역산) - 「토지분배의 정의」,pp.106-107 


예컨대 젊은 부부가 세상에 나올 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것과 각각 15파운드씩 손에 쥐고 시작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 이 지원금으로 그들은 소와 몇 에이커의 토지를 경작할 농기구를 구입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은 부양 능력보다 자식들의 수가 더 빠르게 증가하는 경우처럼 사회에 짐이 되기보다 유용하고 유익한 시민이 될 것이다. 

 - 「토지분배의 정의」, p.116


빈곤해지는 사람들에게 빈곤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이 이른바 문명이라는 이름을 부당하게 획득한 체제의 관행이다(자선이나 정책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 그보다는 경제적 측면에서라도 가난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 수단을 채택하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을까? 방법은 스물한 살이 된 모든 사람들에게 삶을 출발하기 위한 밑천을 지원하는 것이다. - 「토지분배의 정의」, p.117





페인은 진보의 개념을 “문명의 혜택은 보존하고, 해악을 줄이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국가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 자유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사회적 책무를 인정하였다. 특히 「토지분배의 정의」에서 비롯한 기본소득의 원형적 형태를 제시했다. 특히 페인은 기본소득이 자선이나 시혜의 영역이 아닌 ‘권리의 반환’임을 증명해냈다. 기본소득은 토지 사유제도의 발생으로 불가피하게 흡수된 토지에 대한 인류 전체의 자연적 공유권에 해당하는 상실분이기 때문이다. 지구는 모두의 것이지만 부동산은 일부의 것이다. 부동산에는 소유주의 노력과 투자가 들어있지만, 마찬가지로 태초에 인류가 1/n씩 점하는 자연적인 토지에 대한 권리도 섞여 들어있다. 문제는 토지의 성격상 두 가지 권리가 분리가 안 된다. 그래서 그 토지 그냥 땅주인이 갖고, 땅주인은 지대의 일부를 기금으로 내면된다. 국가는 이 기금을 사회초년기에 한번,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50세에 한번 기본소득으로 토지제도 운용에 따른 불가피한 권리의 상실 분만큼을 금전적으로 보상해주자는 것이다.
 



만약 이 땅의 모든 청춘들이 정착금 180만원을 갖고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면 어떨까? 적어도 학자금 대출이자에 휘둘려 빚과 빚의 악순환으로 시작하는 것보다 청춘의 기가 살지 않을까? 그 돈을 보태 사업을 벌여보기도, 해외여행을 다녀보기도, 등록금을 한번 제힘으로 내보기도 하지 않을까? 또 50대에 개인회생의 기회가 한번 더 찾아오면 어떨까? 삶을 비관하는 이들이 줄지 않을까? 갑자기 몸이 아플 때 병원비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경제적 재기를 위한 휴지기 동안의 귀한 생활비가 될 수 있지는 않을까? 매달 주는 것이 어렵다면, 인생에 딱 두 번, 아니 한번이라도 기본소득, 사회정착금을 지급하는 것은 어떨까? 여러 가지 물음이 쏟아지는 걸 보니, 20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왜 페인의 사상이 여전히 각광받고 있는지 또 아직도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알 것도 같다. 겨우 오늘의 상식을 회복한 우리사회는 아직 내일의 상식을 위해서는 갈길이 멀었나 보다.



-2017.09.30 @PrismMaker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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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그마에서 벗어나기 – 기록과 편집으로서의 역사

 

※PC버전(알라딘 서재)로 접속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중세는 억울하다. 대개 인류 지성사는 이 시대를 ‘무지의 베일’에 가린 아둔한 자들의 침체된 역사라 폄하 해버리곤 한다. 움베르토 에코를 위시한 오늘 날의 일부 석학들이 중세에 가해진 부당한 오명을 벗기기 위해 분투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여전히 일반인들의 무의식 속 중세는 단지 마녀사냥이 자행되며, 인간의 존엄을 짓누르고, 고문과 굶주림으로 점철된 암흑기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 장 베르동의 『중세는 살아있다』,최애리씨의 번역이 일품이다. 책 구석구석에 정말 친절하고 풍부한 각주를 달아 주셨다. 문장은 주술관계 한번 놓치는 일 없이 깔끔했고, 물 흐르듯 쉽게 읽혔다. 




물론 이 시대에 차마 입에 담기가 무서울 정도의 괴상망측한 일이 종종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중세를 절대 악(惡)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 근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동안의 천편일률적인 중세에 관한 도그마(dogma)에, 엄밀한 사료를 토대로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역시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혜택 받은 시대를 사는 우리의 책무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양심을 알리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쓴 플라톤의 마음처럼, 이 책의 저자 장 베르동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중세를 위해 본 책을 서술했다.



 역사는 기록과 편집의 집합이며, 집합은 다시 이미지(image)를 낳는다. 이를테면 신문이 날마다 부정적인 사건사고 위주로 기록하고 편집하는 것이, 작금의 사회에 관한 현대인들의 비관적인 인상(印象)에 기여하듯 말이다. 평화롭고 유쾌한 일은 보통 기록되지 않는다. 충격적이고 쓰라린 사건만이 기록된다. 중세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중세말의 혼돈과 타락이 중세 전체는 아닐 것이다. 중세는 약 1000년에 가까운 길고 긴 세월이었다. 우리는 늘 이것을 간과한다. 

 



2. 오이디푸스와 근대인, 그들의 시샘



새 시대가 앞 시대를 넘어서려는 것은 당연하다. 분명 근대는 중세의 반동이지만, 동시에 중세의 자식이기도 했다. 중세의 공백이 근대의 출현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중세의 조용한 유산을 근대가 요란하게 상속 받은 것이다. 중세는 조용하고 길게, 천년동안 천천히 우리 삶의 기반을 주었다.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제가 참이라면, 중세의 발전 없이 근대의 출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세는 정체된 시기라는 누명을 써왔다. 역사발전의 공백기로 치부되어 왔다. 프로이트적으로 아버지를 부정하는 사춘기 소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아니었을까? 근대인의 시샘이었으리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전 시대를 돌이켜 보면, 우선 못난 것부터 먼저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다음엔 맥락을 무시하는 오류를 종종 범할 것이고, 과잉 일반화하기 일쑤일 것이다. 근대인들이 그랬다. 근대인의 눈에 비친 중세는 언제나 비합리적이고 추하고 불결했다. 근대인들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는 자부심으로 중세를 모멸하고 무시했다. 그러나,‘나치’의 등장은 이성적이라 자부하던 근대인의 환상을 무너뜨렸다.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서나 명암은 있기 마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망각한 것이다. 

 


3.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중세 재해석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의 사람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해체’와‘복원’의 변증법이다. 어느 한 시기 전체를 한 단어로 축약해버리는 편견을 해체하고, 생략된 고유한 맥락을 복원한다. 전체를 해체시켜 개체를 분리하고, 다시 개체 하나 하나의 개성을 복원한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살아보지 못한 중세를 복기해야 한다. 작은 화소들을 공들여 모아 만든 선명한 TV 화면처럼 말이다.



중세를 포스트 모더니즘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중세가 평화롭고 풍족한 유토피아였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더 심한 지옥이었음을 밝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중세는 암흑이며 근대는 빛의 세기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중세라는 긴 시기를 긴 호흡으로 천천히 되살펴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논의가 다루지 못한 작은 부분들을 여러 각도에서 복원하는 것이다. 



논리는 선명하고 명확하게 세상을 비추고 또 구분해낸다. 그러나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 역시 짙어 지는 법이다. 짙은 어둠은 크고 뚜렷한 것들 외에 모조리 삼켜버린다. 중세가 꼭 그렇다. 천년 중세의 평화롭고 안락한 일상은 거대하고 강렬한 정치 종교적 사건들에 의해 가려져 왔다. 그래서 중세 재조명의 목표는 작고 희미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중세인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다. 중세 전체의 정치경제적 거대담론이 아닌, 중세인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로애락과 평온한 일상을 다루는 것이다. 그림자가 드리웠다고 존재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4. 중세는 살아있다



중세는 좌우보혁 할 것 없이 어떤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였다.마르크스는 자신의 독창적인 역사 발전의 단계에 한 과정으로 이 긴 시기를 우겨 넣었다. 괴팍한 성격과 풍성한 수염을 가진 한 사상가에게 중세의 자리란 단지, 폐쇄적인 장원에서 벌어지는 영주와 농노의 계급투쟁의 시대였다. 이 소용돌이에서 사회의 생산력은 극히 미약했다. 생산관계는 신분제에 예속되어 늘 굶주렸다. 지배계급은 포악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이 고난의 시기는 벗어나는 데에만 무려 1000년이 걸릴 정도로 정체된 시기였던 것이다.



자유주의자의 눈에도 중세란 정치권력을 통해 부를 독점하는 악한 체제였다. 신분특권을 이용하여 불로소득을 정당화하고 세습했다. 이 체제는 여러모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했다. 국왕과 영주는 자의적으로 사람을 가두고 죽였다. 교회는 마녀사냥과 이단재판으로 사람을 불태워 죽였다. 뿐만 아니라 세금이란 명목으로 시도 때도 없이 개인의 재산을 공권력을 이용해 강탈했다. 장원과 신분제는 자유임노동을 공간적으로 구속했고, 특권계급은 자유계약과 공정한 경쟁의 결과를 뒤집었다. 시장에서의 경쟁과 노력이 아니라 핏줄과 DNA를 통해 부를 분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중세를 저주하고 냉소했다.



하지만 중세의 실상은 이들의 비관적 비판과는 달랐다. 중세는 사람 사는 곳이었고 역으로 1000년 동안 안정된 삶은 영위하던 시기였다. 저자 장 베르동은 중세에 관한 사료들을 끌어 모아 그대로 이 책에서 풀어낸다. 기록과 편집이 부정적이고 선정적인 것들 위주로 된다는 맥락을 재차 고려해보면, 장 베르동이 추려낸 사료이상으로 중세가 사람 살만한 곳이었음을 반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웃음꽃이 피어났으며, 사랑을 했고, 여행을 다니며 목가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중세에는 가난한 적도 있었지만 풍족하게 누린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공동체의 온정이 살아 있었다. 노동시간도 오히려 근대보다 덜했으며, 축제도 많이 열렸다. 휴식과 오락거리도 풍성했다. 종교는 사람에게 권세를 부린 적도 있었지만, 대개는 삶에 녹아 도덕적 교화와 정신적 지주가 되는데 더 방점을 두고 있었다. 물론 근대인들의 주장도 부분적으로 사실이었다. 거리는 불결했으며 위생 상태는 최악이었다. 전염병이 창궐했고 흑사병으로 유럽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했다. 그러나 의학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갔고, 환자를 위한 간호와 완쾌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았다. 중세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두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발전하고 있었다.

 


단지 중세말기의 타락상을 중세 1000년을 일반화하는 논리 오류만 접어둔다면, 객관적으로 중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고찰하고 그중에서 계승할 부분을 찾아내는 현명함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생존경쟁에 허덕이며 저녁이 있는 삶을 갈망한다. 사회의 모든 책임은 옅어지고 있다. 시와 노랫말은 사장되는 추세다. 중세인들은 삶에서 여유와 유머를 추구했다. 장인정신이라 불릴 만큼 책임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낭만과 음유시인들의 발라드가 울려 퍼졌다. 이렇듯 현대의 결핍을 중세의 여유로 치유할 수 있다. 이것들이 21세기 오늘날 , 다시 중세를 되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안락한 삶에는 위생과 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중세 의사들의 합리화 노력과 고난이 담겨있다. 그동안 무수한 미신과 주술로 고통 받고 실험되어 일찍 덧없이 죽어간 많은 민초들의 희생이 담겨있다. 합리적 세상을 위해 주술의 영역을 줄여간 정치가와 철학가들의 덕을 우리가 보고 있다. 어느 사회에나 더 나은 세상 더 좋은 시대를 만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이들의 천년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날의 우리는 혜택 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바로 이 중세인 들과 우리네 일상 곳곳에 녹아있는 그들의 노고에 조롱과 비웃음이 아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박수를 칠 때가 아닐까?




-2017년 9월 26일 @PrismMaker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2015년 부산대학교 도서관 주최 '효원인과 함께하는 독서왕국'의 우수상 수상작을 발췌 및 재편집하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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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9-27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두 권의 책만 읽어서는 중세를 100% 이해했다고 보기 어려워요.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에서 중세인들의 일상생활이 ‘치열함과 열정’에 사로잡혀 살았다고 묘사했어요. 중세를 ‘어둡고 정체된’ 시대라고 생각했던 인식과 다른 시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프리즘메이커님의 글이 제 북플 뉴스피드에 뜨지 않았어요. transient-guest님이라는 분이 입력한 ‘<중세는 살아있다>를 읽고 싶어합니다’ 내용은 있거든요. 저는 그거 보고 <중세는 살아있다> 책 소개를 확인하다가 프리즘메이커님의 글을 발견했어요. 제가 프리즘메이커님의 서재 ‘즐겨찾기’를 했는데도 글이 안 뜨는 것 보면 알라딘 시스템의 오류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7-09-27 11:51   좋아요 1 | URL
아... 제가 착각했어요. 제가 프리즘메이커님의 ‘친구 신청‘을 수락하지 않아서 글이 뉴스피드에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

프리즘메이커 2017-09-27 16:11   좋아요 0 | URL
움베르토 에코의 <중세1,2,3 > 시리즈를 참 갖고 싶은데 분량과 금액이 너무나도 커서 사지 못하고 있습니다ㅎㅎ
아마도 제가 주로 PC환경의 알라딘 서재로 작업을 하고 모바일 환경에 북플로 송출을 하다보니 이런 문제가 빈번한 듯 합니다. 주로 긴 글을 쓰는 데 모바일은 컴퓨터로 애써 만든 서식들이 다 깨지더라구요.. 그럼에도 잘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

cordla2189 2017-09-28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 PC버전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1. 인문학 열풍

  



고전 읽기가 유행하고 있습니다일상에 치이는 우리 시민들에게 고전을 직접 읽고 소화할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지만 앎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그래서 대한민국의 똑똑한 사람들과 출판사는 경쟁적으로 고전을 잘 정리하고 각색해서 시중에 여럿 괜찮은 입문서를 내놓고 있습니다. 어느 책을 골라도 쉽게 잘 설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제대로 된 입문서는 독자로 하여금 직접 원전을 찾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잘 소화하고 대신 씹어주는 해설서들은 읽기엔 편할지 몰라도, 스스로 노력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빼앗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턱을 낮추는 작업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직접 떠먹여 주는 것엔 반대합니다. 인문학 열풍 이면에 있는 손쉽게 무언가를 획득하려는 태도, 지식의 이해와 체화가 아니라 잘 정리된 지식의 단편적 암기로 빠지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가이드북의 도움을 받더라도 여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소화하려는 태도를 갖고 싶습니다.


 

(▲ 개인적으로 한길사의 인문고전 시리즈를 선호합니다. 모아두면 뿌듯해서요)


2. 인간의 고유 능력

 



학부생 4학년 시절, 문헌정보학과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주요 업무는 강의실 청소였는데, 제가 청소하기로 배정받은 시간을 쓰시는 교수님은 항상 강의를 10, 15분 늦게 마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덕에 저는 졸지에 청강생이 되어 문헌정보학10분 토막 지식을 듣는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보를 다루는 그 학과의 특성답게 요새 각광을 받는 ‘4차 산업혁명에 관해 교수님이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보의 분류는 크게 3가지가 있다. 날 것 그대로의 숫자는 Data, 맥락이 부여되면 Information,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면 Knowledge. 여기서 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이 인간에게서 Data에 투여되는 단순 노동을 가져가는 것을 말한다.” 정치학밖에 모르고 살던 저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설명이었습니다. 이 설명을 거꾸로 뒤집으면 인공지능이 침범하지 못하는 인간 고유의 지적능력은 맥락을 부여하는 능력의미를 추구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강연을 듣고 고전은 사람맥락의미사이의 거친 호흡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고전을 읽음으로써 인간은 맥락부여와 의미추구라는 인간만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시대마다 또 장소마다 새로 읽힘으로써, 읽는 이의 현시점, 현 상태, 현재 원하는 바, 읽는 이가 살아왔으며 또 살아갈 역사와 사회의 특정 한 국면이 우연의 도움을 받아 맞부딪힐 때, 독특한 어떤 의미가 창출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한 사람은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으며, 같은 책도 다른 사람은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고, 사람마다 부여하는 맥락이나 창출해내는 의미, 고유한 개성이 부딪히며 나는 무늬()’ 또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고유한 지문처럼요. 인간의 고유성과 개성을 동시에 확인하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고양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 고전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요?





3. 논리와 가치


 


▲좌 : 장현근. 2011.맹자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한길사

▲우: 동양고전연구회. 2016.맹자. 민음


 

2014년 초에 맹자를 읽었습니다. KBS의 사극 정도전에서 고려의 신진사대부이던 정도전이 맹자의 역성혁명’ 부분을 읽고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겠다는 결심을 하는 부분에서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입니다정치학도로서 조선왕조를 주도적으로 설계했던 정도전의 삶과 혁명'이라는 키워드는 매력적이었습니다그래서 저는 그 당시 맹자의 수많은 대목 중 정치사상 부분을 특히 유심히 여기며 읽었습니다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는가에만 초점을 맞췄던 게지요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터진 이후, 1년 반 만에 다시 읽은 맹자는 저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었습니다그리고 저는 유독 이 한 구절에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위해가 가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 한 어린아이가 발을 헛디뎌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갑자기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선 누구나 겁을 먹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건 그 아이의 부모와 사귀려들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서 칭찬을 들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공손추 상·6 (장현근. 2011.맹자 :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 한길사. p.120)

 




어린아이 하나가 우물에 빠진 것을 목격해도 겁을 먹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람인데, 우물보다 넓은 바다에 하나보다 많은 304명의 억울한 목숨이 바다에 빠진 사건을 두고 우리 사회는 조롱과 비난과 편 가르기와 소모적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방관했으며, 심지어 동조했습니다. 이 당시 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격의 파탄공감의 부재에 큰 절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 반 뒤에 다시 읽은 맹자의 글이 정확한 인과관계와 사실관계에 입각한 논리가 정연한 글이라기보다, 당위에 호소하며 가치를 추구하는 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마디로 문장의 과학이 아니라 공감의 철학이었던 이지요. 다시 읽은 맹자는 제가 무의식적으로 듣고 싶었던 우리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라는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라는 사람맹자라는 책에서 세월호의 맥락을 부여해, 잠시 잊고 살았던 소중한 가치를 다시 얻어내고자 그렇게 발버둥을 쳤던 것이지요.


 


 

4. 기존의 사실과 새로운 의미

 



한 학기 동안 네이버 열린 연단의 고전강의를 들었습니다. 이승환 교수는 <동양의 고전 : 동양 고전 이해를 위한 방법론적 서언> 강연에서 고전 독서의 5단계를 제시했습니다. 앞의 4단계는 사실 확인을 철저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고, 마지막 단계는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나만의 새로운 해석을 보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런 과정을 조금 삐딱하게 봤습니다. 저런 복잡다단한 과정이 일반인들의 지식 접근을 차단하는 높은 문턱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턱을 낮추는 과정과 지식을 대하는 자세는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접근성을 좋게 만드는 과정과 별개로, 지식을 추구하는 업을 가졌다면 소명의식을 가지고 문구 하나하나, 문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뜯어 살피는 데 영혼을 바쳐야 한다고 막스 베버 선생의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읽었습니다.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막스 베. 전성우 역. 2013. 직업으로서의 학문.나남. pp.33~34)





그리고 좌절했습니다. 엄격한 형식요건을 갖춰야 하기에, 사실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몇 없겠구나. 두려움과 막막함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래서 신뢰감이 생겼습니다. 가짜 뉴스와 권력을 등에 업은 방송신문사가 최소한의 객관성을 의도적으로 지키지 않아 생기는 문제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적어도 학문은 그렇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석사과정을 막 밟기 시작한 제가 고전을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할지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텍스트 하나하나의 의미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을 정신무장과 나의 고집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의도적으로 빼먹지 않는 양심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동시에 강연에서 훈고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낳은 사생아였고, 고증학이 청 왕조의 폐쇄적 검열에 따른 불가피한 조처였다는 내용이 특히 귀에 잘 들어왔습니다. 동서고금의 부패한 집권세력이 객관성을 빙자해 새롭고 비판적인 의견을 탄압하는데 오용했던 역사적 상흔을 배운 탓인지, 저는 너무 사실관계에만 치중하려는 풍토가 힘없는 자들에게 불리한 여건을 만들 거라는 다소 좋지 못한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판결문의 형식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엄격함이 헌법 정신을 수호하듯, 형식의 굳건함은 가치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5. 번역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 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진우 역. 2015.공산당선언. 책세상. pp.59-60)

 




학부 2학년 때, 묘한 호기심에 공산당 선언을 읽어 보았습니다. 도대체 이 책이 뭐길래 전 세계의 절반이 붉게 물들고, 청년들의 가슴이 식지 않는 정열로 타올랐던 것일까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서점에 가 이진우 씨가 번역한 문고판 공산당 선언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불같은 성격으로는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는 저였기에, 당연히 이 책을 읽으면 가슴이 두근거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독서는 지루함이 멈추지 않았고, 실망은 곱절로 돌아왔습니다



명색이 선언문인데 글에서는 전혀 리듬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어떤 기백조차 담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뒤흔들 유령을 보낼 두 철학자의 혼백은 전혀 담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라니요. 냉정한 머리로만 한 딱딱한 번역은 내용은 담고 있으나 느낌은 전혀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글을 읽고 누가 혁명에 가담하겠습니까? 지루하고 난삽한 번역 탓에, 저는 처음 접한 맑스의 저작에 굉장한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학부 4학년의 필자는 서점가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삽화와 새로 번역된 공산당 선언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맨 마지막 장을 펼치고 앞에 언급한 해당 구절을 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봤습니다. 그래 이 맛이지. 이래야 선언문답지. 원작이 아닌 번역의 문제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스러운 일로 여긴다. 그래서 자신들의 목적이 기존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힌다. 지배 계급들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하라. 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부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일러스트 공산당 선언 · 공산주의 원리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박종대 역. 2015.공산당선언. 미메시스. p.93)

 





잘못된 번역이 놓치는 것은 내용뿐만이 아닙니다. 뉘앙스나 맥락이나 감정, 정신, 기백과 같은 부분도 함께 사라집니다. 책이 어떤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탄탄한 논리 구조와 내용의 알참도 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과 호소력 짙은 문체도 한몫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소실된 내용을 각주를 덧붙여 복원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저는 이 책이 그 시대 그 사회에 주었던 느낌을 잘 살려내는 과정도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 사람들이 왜 이 책에 매혹되었고, 오늘날의 우리는 이것을 다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차이점이 명확해지면서, 거기서 엄청난 가능성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닐까요? 그러다 보면 현재의 시점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으로 그 시대의 단점만 들추거나 덮어놓고 무조건 숭상하는 오류가 좀 줄어들진 않을까요?


 

 

6. 주체성의 실종

 


앞서 저는 인간 고유의 능력은 그 자체로는 죽어있는 단순한 숫자나 조각 사실들을 외우는 능력이 아닌, 맥락을 부여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고유의 능력이며, 고전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가장 활성화된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스스로 꾸역꾸역 거친 책을 읽으면서 머리가 트이고 사고력이 향상되고 책의 기술적인 논리와 테크닉을 파악하고, 또 나만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면서 나만의 무늬, 주체성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고전 교육은 주입식입니다. 남이 간결하게 정리한 요약본을 그냥 암기하는 방식이지요. 이렇게 해서는 어떠한 인간의 지적능력도 자극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독서는 스스로 괴롭게 고민하며 읽되, 다채로운 시각은 즐겁게 함께 공유하는 기쁨이 있길 바랍니다.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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