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샀던 표지 디자인은 놀랍게도 제법 괜찮은 실물을 보였다. 그러나 인용문 폰트가 넓고 투박한 고딕체라 영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장과 장을 구분하는 속지는 책 사진으로 되어있는데, 영 밋밋하고 대충 채운 것 같다. 


1. 이 책은 못 썼다. 비전공자라 깊이는 내가 모르겠고, 그의 전작에 비해 글을 쓰는 폼이 많이 하락했다. 문장이 밋밋하다. 특히 <청춘의 독서> <내 머리로 이해하는 역사 이야기>와 챕터가 상당수 겹친다. 안에 자주쓰이는 표현 '지표면의 절반을 물들였다' 라던가 '사피엔스'라는 표현이라던가 '국정교과서'라던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자주보였던 기시감이 드는 문구들이 반복된다. 


또한 자꾸 글을 쉽게 쓰려고  젊은 인터넷 용어를 어설프게 쓰려하는데 그거야말로 유작가 특유의 필체가 갖는 힘을 깨버린다. 이것은 <국가란 무엇인가> 개정판부터 보이는 현상인데, ex)   "흙수저" "헬조선 "이명박근혜"  <역사의 역사>에서도 군데군데 그런 표현이 눈에 보인다. 힘을 너무빼다가 무게가 사라졌다.  루니도 늙고, 유시민도 늙나보다. 내가 이 책에 가할 비판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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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렇지만 대중 교양서 혹은 인문 에세이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것 같다. 마치 특히 페이스북을 위시한 일부 '책잘알' 계층에서는 이 책을 논문 비평하듯이 계보를 쫙 꿰면서 호되게 비평하는 데(물론 멋있다. 나도 저렇게 한 분야를 쫙 꿰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과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같이 학계가 대중을 하대하는 사회에서, 학술 논문도 아닌 교양서에 굳이 저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다. 사실 학계는 대학 신입생을 가르칠 수준의 기초 입문서도 자체적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괜한 무게잡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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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차피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어렵다고 안팔리고, 쉽게 쓰면 수준 낮다 얻어 맞는게 이 영역이다. 목차를 구성하는데도 장사를 위해서는 이미 유명한 책, 최근 각광받는 책을 상당부분 깔고 들어가야한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책은 한 두권 추려 넣어야지 이것저것 다 넣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거야 말로 전문가/전공자들이 해야할 일이지 교양 작가에게 바랄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본인이 자신과 맞지 않은 책난이도를 골라놓고 거센 비평을 하는 건 꽤나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출판시장은 책을 극단적으로 많이 읽는 계층과 아예 안읽는 계층/어쩌다 한두권 읽는 계층으로 양분되어있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하는 난이도의 책을 낼 수 가 없다. 따라서 유시민이 겨냥하는 주요 독자층이 일반인, 고등학생 정도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것은 교양 인문학이라는 장르의 한계면서 , 동시에 책잘알 계층을 구조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는 탓이 크다. 쉽게 말해 비평의 번지수를 잘못 잡았다 뭐 그런셈인데, 고인물들은 브론즈 말고 상층부에서 노세요!! 라고 쉴드를 칠려해도 이 책은 여전히 유시민 특유의 문장의 힘과 울림이라는 점을 잘 못살렸다는 점에서 못썼다.  


4. 이 책에 혹평을 하고있는 유시민의 열렬한 팬인 내가, 이 책에 관한 혹평 중 가장 기분 나빴던 것은 학계에 계신 사람들의 평이었다. 월드컵 기간 내내 축구 보는 눈 없다는 소리에는 분개하면서, 갑자기 교양서에서는 자기 전공이라며 수준과 영양가를 논평하는 게 무슨의미가 있는 지 잘 모르겠다.그냥 이 책의 대상은 뉴비인거고, 노는 물이 다른 것인데.. 학계에 있는 분이라면 수준 낮다 열올릴 에너지로 더 좋은 안내서를 쓰는데 좀 써주십사..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탁도 하고 싶기도 한데, 내로남불이면서...쓸데없는 권위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축구에 대한 전문가vs 일반인 논쟁을 보는 것 같달까?  442포메이션과 433의 상성관계라거나, 토털사커의 역사 및 현대축구에서 풀백의 중요성을 굳이 가볍게 즐길 사람,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에게 권하는 건 전문가가 아니라 그냥 지적 과시라고 생각한다. 교양서에 왜 이것 빼고 저건 피상적이고 이건 왜 이렇게 썼고 영양가 없다 따질 때가 아니다. 



5. 


학계는 자체적인 교양서 하나 대중의 언어로 쉽고 직관적으로 못 쓰면서(아니 쓸 관심이 없으면서) 수준 못따라온다며 구박하는 어떤 엘리트주의가 혐오스럽달까? 한국 교양 생태계가 이미 무너져서, 시민은 비롯하여 대학생들 조차 쉽게 쓰인 책들을 찾는 형편에 훈수질이라니.. 너무 속이 편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학계에 발걸친 사람들이 그런 소리 하면 안되는 거다. 나는 중학교때 이런 책을 읽었는데 그 수준도 못미친다 말하는  사람이 계셨는데, 그냥 본인 잘난거 어필하는 거다.



뭐 우리 나라도 언젠가는 학계와 대중을 잇는, 학자와 작가가 혼합된, 재미와 깊이를 모두 갖춘 전문 저술가들이 탄생했으면 좋겠다. 그동안 유시민은 훌륭한 지식 소매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연필이 꽤 무뎌진 것 같다. 때마침 유시민의 썰전 하차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안식년을 응원한다. 이건 순 팬심이다. 더 좋은 책으로 다시 뵙기를 고대한다. 


-2018.6.30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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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6-30 2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기본적으로 책에 소개된 원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시민 선생의 글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읽은
내용에 대한 소개니까요. 원전을 만나지 않고,
개설서/교양서를 읽게 되면 자신이 아닌 타인
의 시선이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차지하게 되
는 게 아닐까 우려가 됩니다.

사실 우리나라 학계에서 유시민 선생급의 팔리
는 교양서를 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
까. 방송을 해서 미디어에 노출도 되고 그래야
하는데, 너무 연구에 매진하시느라 아마 그럴
시간이 없으신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해봅
니다.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까 생각 중입니다.

프리즘메이커 2018-06-30 20:32   좋아요 2 | URL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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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서와 금서 사이에서





쟁의 전장에서 원치 않게 지적 보증을 서야하는 억울한 책들이 다. 보통 이 책들은 이념 진영의 성서(Bible)로 불리는 데, 그 유명세와는 달리 제대로 읽은 사람이 드물다. 대표적으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공산당 선언』이 그렇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쓰고 밀턴 프리드먼이 나중에 출판 50주년 기념 서문을 덧붙인 이 책『노예의 길』또한 그에 못지않은 악명(惡名)을 가졌다. 단순히 한 권의 책을 넘어서 방대한 세계관과 심오한 의미로 좌우 사상적 영토를 담았다지만, 세간에 오르내리는 건 오직 그 이름뿐이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는 다투지 않지만, 좌파와 우파는 늘 다툰다. 좌뇌와 우뇌는 각자의 영역을 도맡아 하나의 육신을 협력하여 다스리지만, 보수와 진보는 하나의 국가에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을 주입하기 위해 사사건건 다툰다. 이데올로기란 흡사 종교와 비슷한 속성을 가졌다. 그래서 종종 철학의 양극단은 서로의 성경에 사기죄의 혐의를 덧씌우곤 한다. 서로가 서로의 확신범이다. 양분되는 이념의 지형에서 빈번히 전투가 벌어진다.



2. 저기, 읽고 싸웁니까?



민주사회에서는 총칼대신 말글로 싸운다. 언어의 격투장에서는 뼈대가 부실한 의견은 도태되고 굳건한 의견은 채택된다. 완력의 전쟁이 아닌 지성의 논쟁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보일 지적 성실성을 요구받는다. 제대로 된 독해와 경청하는 자세. 사실검증과 충분한 논증, 숙고와 소화과정을 통해 나만의 정제된 의견을 표출할 지적 노동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경쟁과정에서 의견들이 더욱 세련되고 단련될 뿐만 아니라 그 수준이 고양되는 효과가 있다.


문제는 그 책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정작 그 책을 읽지 않고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분명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는 동등히 보장되지만, 그 표현의 수준과 질이 동등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논쟁에는 승부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책의 명성, 저자의 권위로 상대방의 정당한 의견을 묵살하는 '논쟁의 불로소득'을 누리며 '성전'에 임한다. 책에는 잘못이 없다. 책의 그 이름값이 실추되는 것은 종이에 적힌 내용보다는 추종자들의 무지의 소산일 가능성이 크다. 명성에 호소하는 논증방식이 이념의 십자군을 낳는 게다.





3. 『노예의 길』의 노예가 된 사람들




하이에크는 이 책에서 무수한 철학적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자연력을 최대한 쉽게 끌어 내는 시장 메카니즘과 경쟁의 원리, 인간의 인지능력의 한계와 계획의 불가능성,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립불가능성 계획경제의 전체주의로의 경로의존성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진보적 성향에 가까운 필자가 '불온도서'『노예의 길』 을 읽고난 단상은 하이에크의 위험하지만 탄탄한 논지가 아닌, 하이에크를 받아들이는 어떤 세태에 관한 의구심이었다.


사상의 독재를 경계했던 하이에크와 노예가 되지 말라고 쓴 『노예의 길』이 정작 수많은 이념의 노예를 낳았다는 것을 그는 알까? 그의 책 노예의 길이 정작 또 다른 차원의 노예를 자처하는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을 그는 알까? 정작 이념의 십자군들은 책의 가르침과 반대로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책의 복음을 전파하겠다며 앞장서는 이들이 외려 책을 펼쳐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니 정말 아이러니 한 일이다. 상대방의 책은 물론, 자신들의 책마저 제대로 읽지 않았다. 생산적인 논쟁이 이뤄질 수 있을까?


아무래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끼리 도무지 말이 될 리가 없다. 이것이 지적 노동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정말 그 책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지, 그런 말을 했다면 제 맥락에 맞게 말뜻을 전달한 건지 확인하고 변명할 기회를 누군가는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나는 이 말 한마디를 던지기 위해 오늘도 피곤한 독서를 자처한다. "이념적으로 가장 편협한 자들이야말로 실은 지적으로 가장 게으른 자들이다."


-2018.04.13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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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힘 - 공부의 시작과 끝, 논문 쓰기의 모든 것
김기란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와 나의 동생은 같은 배에서 나와 한 배에서 자랐지만,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외향적이지만 동생은 집돌이이며, 나는 골수 문돌이 정치학도이지만 그는 수학적 역량이 출중한 공학도이다. 그런데 선동에 능한 나의 영향을 어떻게 받았는지, 그 전자공학도가 갑작스레 복수전공으로 정치외교학과를 신청했다고 했다. 나와 밥상머리에서 주고 받은 토론이나 문제의식이 꽤나 신기하고 재밌었다고 했다. 동생은 나보다 강성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이 물었다. 선톡을 하는 경우가 잘 없는 데, 뜬금없이 선거제도가 왜이리 복잡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학 석사과정을 밟으면서도 그 질문에 대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어, 적지않아 당황을 했더랬다. "음 글쎄..세상이 발전해서 제도도 같이 자랐나?" 터무니없는 대답을 했다. 동생은 나를 정외과 알파고라고 불렀었는데, 알파고 resign....


좀 기다리니 자기가 알아서 답을 내렸다. "아 그거네, 하도 독재 해쳐먹으니까 그거 못하게 할라고 반칙 막을라고 제도가 복잡해지는 거네. 꼼수를 못부리게 더 촘촘히 정교하게." 직관이자 통찰이자 현답이었다. 짜식. 군생활 잘하고 있으려나...형보다 먼저간 내 아우여... 날 놀리지 말거라..


책을 읽다 불현듯 이 일화가 떠올랐다. 논문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표절을 막기위해, 연구의 엄격한 윤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절차와 규칙이 엄격하고 복잡해진 것이다. 엄격한 형식논리를 지켜야만 한 마디를 보탤 수 있다. 선행연구들의 도움을 받아 분과학문 나름의 체계에 맞춰 그 논리 구조를 지켜야지만 믿을 수 있는 '지식생산'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발전과 더불어 학문의 공적의미를 비롯해 볼 때 번거롭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논문은 화려한 문장력이나 세상을 뒤흔들 천재적 발상을 담는 글이 아니다. 논문을 쓴다는 것은 하고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신뢰성 있는 방식으로 하는 과정을 뜻한다. 적어도 논문에서는 형식이 내용에 앞선다. 이것저것 재보고 뜯어보고 앞뒤를 가리면서, 엄격한 형식이 담보하는 윤리성 위에서 논리와 체계와 트렌드를 모두 갖춰야만 하는 일종의 종합예술인 셈이다. 


대학원에 복학했다. 엊그제 지도교수를 배정받아 다음학기면 학위논문 프로포절을 준비해야한다. 학위과정은 여전히 장인에게 기술을 배우는 도제식 시스템이기 때문에, 설계론이나 방법론은 체계적인 학습과정이 있다기 보다는 따로 찾아 물어물어 공부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샀다. 그래도 내가 논문 쓸 쯤 나와서 다행이다. 까마득 했는 데, 그래도 그 규칙에 대해 갈피를 잡은 것 같다. 


-2018.03.28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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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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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된 책이다. 여기 사례로 나오는 07학번은 이미 30대가 되었고, 09학번은 김광석의 노래가 절절히 와닿을 스물아홉이 되었다. 그 사이 힐링 열풍과 인문학 열풍이 불었다. 그러나 이 책이 지적하는 20대들의 차별의 위계질서는 여전히 강고하다. 해서 좀 된 책이 오히려 숙성된 묵은 맛을 깊게 드리운다. 책에게는 여전히 읽힐 가치가 있다는 데서 행운이지만, 사회 전체에는 여전히 같은 문제를 더 심하게 앓고 있다는 데서 불행일 것이다.




존재감과 인정욕, 남들과 달라지고 싶은 차별화가 낳는 차별. 그렇게 탄생한 투명한 골품제.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야 어찌됐든'이 윗세대의 차별이었다면, '과정이 공정했다면 결과야 어찌됐든 받아들여야'가 우리 시대의 차별이다. 한번의 노력이 평생 가길 원하는, 마치 그 기업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것 마냥 자기소개서에 소설을 꾸며 적는 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문학 수업인, 생존과 자아실현을 동시에 이룩하고자 하나 어느 하나도 제대로 허락치 않는 시대에 고생하는, 바닥의 기준이 워낙 높아져 위대하기보다 평범해지기 조차 어려운 20대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서술은 구어체에 가깝게 쉽게 쓰여져 있다. 눈의 흐름 그대로 읽어 나갈 수 있다. 뿐만아니라 저자의 경험과 저자가 표집한 사례들이 나는 20대의 대표성을 뚜렷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다니면서 한번쯤 보아왔을 그런 사례들 말이다. 이렇게 가끔은 구성원 밖에 있는 사람이 내부자보다 더욱 객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내가 대학에 20대로 있기 때문에 어느정도 편향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비웃음과 조롱, '니 주제에?' 주제파악이라 적고 깔봄이라고 읽히는 냉소의 연쇄가 학력의 위계질서를 타고 20대의 말초신경과 무의식까지 잡아먹은 것이다. 각자가 뭘하든, 어디서 얼마를 벌든, 좀 존중해주면 어디 덧날까? 자기 인생. 손 안벌리고 스스로 책임지고 있다는 것, 그 발버둥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받아 마땅한데 말이다. 치열하게 깔보는 소리 좀 이제 그만 들을 순 없을까?



-본 리뷰와 리뷰 속 사진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희망은 ‘뜨거운 가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돈이 있어야지만 가슴도 뜨거워질 수 있단 얘기다. p.212

이처럼 아무도 ‘키‘라는 걸 경쟁의 잣대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키‘는 경쟁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p.216

그렇게 ‘힐링‘이라는 단어가 굳이 필요 없는 세상이 등장할 때, ‘아픈 청춘‘의 수는 서서히 줄어들 것이다.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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