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 사회관에는 붙임성 좋고 귀여운 고양이가 산다/ 사진 : 글쓴이)


  우연히 터키의 길고양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곳의 고양이는 고양이답다. 마음먹은 대로 누워 편히 쉬고 걸어 다니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다가가 안긴다. 우리네 길고양이들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이 땅의 가여운 친구들은 단지 그 어떤 악의가 실리지 않은 발걸음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도망부터 치고 본다. 후미진 골목 자동차 밑바닥에 웅크려 언제 어디서든 바로 피신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어째서 같은 유전자를 가진 고양이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정답의 자명함을 뒤늦게 인식했다. 이들이 눕는 아스팔트가 정반대의 정서를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스팔트는 석유의 찌꺼기이다. 주로 길바닥을 포장하는데 쓰인다고 고등학교 기술 시간에 배웠다.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필자는 더 이상의 전문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다. 다만 포장된 도로가 갖는 객관적인 기능이 아닌, 사회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뿐이다. 이 땅에 흘겨진 시선을 포착하고 그려내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글은 추상화 일지도 모르겠다. 


  아스팔트를 덧칠한 우리 사회의 시선은 무엇이었을까? 이 사회의 구성원인 나 자신부터 돌이켜 본다. 멸시 풍토가 빚어낸 위축된 반경을 원래 그런 것인 양 당연하게 여긴 건 아닌지. 나와 너의 단 한 번은 수백 번의 폭력으로 불어 날 수 있다는 걸 간과해온 건 아니었는지. 두려움을 장난으로, 정당함을 과민함으로 치부해버린 건 아닌지. 외려 화가 가득 찬 변명부터 해오지는 않았는지. 인과를 뒤집어 책임을 전가한 건 아니었는지를 말이다. 아스팔트의 두께에는 나의 편협함과 고양이의 두려움이 퇴적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면 나 역시 아스팔트를 쌓아 올린 주주(株主) 중에 한 명임이 틀림없다.


  어느 영화 속 소녀의 대사처럼 무엇이 중한 것인지,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본다. 대를 이어 걷어 차여왔던 고양이들이 본능적으로 체득했을 공포감의 누적치를 먼저 이해하고 반성하는 것. 무엇이 고양이로 하여금 사람의 발소리에 발길질부터 떠올리도록 학습시켰는지부터 파악하는 것. 그래서 강자의 불쾌함과 약자의 공포감 사이의 제대로 된 경중을 아는 것. 그냥 걷는 누군가와 누워 쉬는 어떤 존재 사이에 어울리는 감정은 불쾌한 공포가 아닌, 문제없는 평온함이어야 한다는 것. 아스팔트 위에 깔릴 서사는 공포와 혐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인지하지도 못하고 내는 평범한 발소리조차 누군가에겐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일 수 있다. 악의 없는 평범함이 어쩌면 얼굴 없는 혐오 일지 모른다. 도망치는 고양이를 탓하기 전에 바로 이 길에 깔렸었던 수많은 발길질과 발자국부터 지워내야 한다. 이 글은 고양이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글은 못난 사람에 의해 벽에 던져져 세상을 떠난 새끼 고양이를 위한 애도이기도 하고, 못난 나의 뒷발질에 알게 모르게 몇 번이고 채였을 웅크린 소수자들을 향한 나의 진중한 사과문이자 반성문이기도 하다. 강남역과 고양이의 사잇길에서, 얼마간의 고민을 글로 적어 보낸다. 선(善)의 평범성을 위해서.


-2017년 9월 3일 @PrismMaker



※ 본 글은 2016년 부대신문 1526호 [청춘, 펜을 들다] 섹션에 실린 필자의 기고문 입니다.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5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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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열심히 수학문제를 풀고있는 동안, 나는 친구들 뒤에서 이 글을 적는다. 


 ˝엄마하고 나하고는 연결되어 있잖아, 그래서 아픈거야˝ 


  이 좋은 봄날에, 봄 기운이 꽃송이에 가득 맺힌, 밝고 따뜻한 날에 나는 이 책을 집었다. 글자가 무거웠다. 맑고 밝은 계절에, 생명이 역동한다는 이즈음에도 글자는 검었고 글은 탁했다. 







이 아이들도 봄 좋은지 알았겠지. 봄 내음 나리면 공부하기 싫고, 잔디밭 보면 주저앉고 싶고 그랬겠지. 훈풍에 봄볕 같은 아이들이 시린 물에 잠겼고 세상을 떴었다. 애석하게도 세상은 바닷물보다 더 차디찬 냉골이 됐다. 금요일엔 돌아오라니, 돌아왔으면 어제 만우절이라고 교복입고 하하호호 돌아다녔겠구나.


2년이 지났다. 속으로 아니 벌써?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내 마음도 여전히 병들어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있지? 언제고 변명않고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두렵고 무섭다. 사실 자신, 없다. 다만 이 글로 죄책감을 좀 달랠 수 있을지, 나는 비겁하게 오늘도 세상 분위기 파악 못하고 혼자 공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 부끄럽다.


장난기 어린 친구들과 장난기 어린, 자칭 선생인 내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한다. 부디 모두가 행복하길, 봄 날에 빈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잊혀진 사람들을 위해. 안녕히


               - 2016년 4월 2일 @PrismMaker


※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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