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수를 하던 날에도 봄은 있었다. 그날도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허름한 공립 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대신 문제와 정답표로 머릿속이 가득했던 날들이었다. 안경알은 무언가를 더 잘 보기 위해 있지만, 안경테는 꼭 그만큼 시야를 좁힌다고 했던가. 안경쟁이였던 그날의 나는 안경테의 굴레에서 열람실 칸막이에 고개를 처박고는, 그마저도 문제집의 사각 글상자 만큼 좁아진 삶을 살고 있었다.


도서관의 LED조명은 절약정신이 투철하면서도 꽤나 건실한 청백색의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사방이 칸칸히 막힌 바둑판에는 영문모를 어두침침함이 가득했는데, 그것은 아마 물리세계의 빛의 조도 문제가 아닌, 이토록 빠른 사회에서 굼떠버린 청춘의 인식적 조울문제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빛에도 질감이란 게 있다. 오래된 나뭇칸을 대충 칠한 니스로 광을 낸 구식도서관에서, 야망과 눈치를 한웅큼 갖고 집밖을 떠나온 한무리의 서로다른 수컷 철새들. 그들이 자아내는 홀아비 냄새와 자욱히 뒤덮은 이산화탄소를 걷어내기엔, 청백색 LED 조명의 루멘은 너무나도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그날, 쳐다보지 않던 창문에서 모세같은 봄날이 강림했다. 가로세로 오륙십센치 남짓한 직사각형에 봄이 서 있었다. 홍해와 먹구름을 가른 차창의 봄볕에 풀잎이 기지개를 켰고, 꽃들의 색조화장에는 물이 올라 저마다의 청순을 뽐내고 있었다. 봄볕의 질감은 이렇게나 찬란하다.


최소한의 사람 구색만 겨우 갖춰, 추리닝을 비롯해 오로지 편리성만 앞세운 복장을 하고 골방에 처박혀있던 나에게 봄날이 너무 야속했다. 세상은 내가 없더라도 저렇게 화창하구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력함에 대한 고찰과 서운함이 대책없이 밀려들었다. 그날엔 도무지 연필을 쥘 수가 없었다.

 

 

 

 

 

 

 

#2


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만 용건없이 찾아와 준비없이 떠날 뿐이다. 그 어쩌지 못 하는 찬란함에 사람들은 넋을 놓는다. 봄은 사람의 기분과 관계없이 그자체로 따사롭다. 그래서 야속하고 매력적인 계절이다. 계획대로 펴주지도 일정대로 져주지도 않는 벚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학교를 하루 나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내가 새로 살게 된 하단 근교를 걸었다. 낙동강과 다대포와 승학산, 그리고 젊음의 대학로가 있다. 쏙 마음에 든다. 하단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나도 한마리 철새다. 텃새를 꿈꾸며 찾아온 철새 한마리 그게 나다.

 

 

 

서른까지는 인생을 준비하는 시기라고 했다.  그동안 나라는 인격체를 꾸려온 나는 꽤나 인생에 대한 예우를 갖추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빚없이 대학을 졸업했고, 하고 싶은 공부 젊을 때 더 해보라고 투자도 모자람 없이 하고있다. 별일이 없다면 아마도 그 준비의 마무리는 이곳이 되지 싶다.

엊그제 친구의 비보를 들었다. 뭘 어찌 도와줄 수 없는 무력함이 들었다. 닭 한마리를 보냈다. 맥주를 마셨다. 할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았다. 나를 예뻐하던 할머니가 나를 기억하면서도 자꾸 도돌이표를 찾는게 마음을 찔렀다. 나의 봄과 친구의 봄과 할머니의 봄은 모두 각자의 계절이지만 저마다의 시름이 있다.

찾아오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누가 옆에 있든, 나는 나의 사람들과 잘 살아보고 싶다. 봄날이 더이상 서운한 계절이 아니도록, 다같이 돗자리 깔고 옛추억을 우스개소리 섞어가며 노닐도록 말이다. 벚꽃이 벌써 참을성 없이 바람에 날린다. 가라. 잡지 않는다. 그치만 꼭 다음에 보자. 그땐 내가 잘할게 안녕!



-2018.4.2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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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4-02 2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당신은 글을 너무 잘 씁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죽어주셔야겠어요.

탕!!

clavis 2018-04-02 22:58   좋아요 2 | URL
저도 동감합니다 언젠가 한번쯤 아 너무 글 잘 쓰시네요 하고 싶었는데 그게 오늘이 될 줄이야..이게 다 용감하고 씩씩하신 syo님 덕분♡

프리즘메이커 2018-04-03 11:22   좋아요 0 | URL
아아닛..스사..살려주세요!!

프리즘메이커 2018-04-03 11:23   좋아요 0 | URL
북플 무한 재로그인 오류때문에 제때제때 확인을 못하네요ㅠㅜ
 


해가 떠 있는 밝은 날에 귀가를 했다. 대학원에 복학하고 아마 처음있는 일이다. 마치 고3때 야자를 하루 빼고 집에 가는 기분좋은 어색함이랄까? [오늘은 쉽니다]를 이마에 붙이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자취방 창문 바로 앞에 벚꽃이 만개했다. 유난히 선명한 봄꽃처럼, 봄에는 무언가를 도드라지게 하는 특별한 재주가 있나보다. 그 기운은 무엇이든 꽃빛처럼 선명함을 더한다. 사람의 낯빛과 옷차림에는 들뜸이 있고, 고양이의 낮잠에는 걱정하나 없는 늘어짐이 가득하고, 건물과 가로수는 세수를 아주 깨끗히 한 모양이랄까.



가불했던 잠을 갚았다. 봄에는 잠도 잘온다. 잠은 낮에 자야 제맛이다. 숨 마디마디에서 노곤함이 새어 나왔다. 배가 고팠다. 초코우유와 치즈케잌의 맛이 기가 막히다. 미각이 감지하는 봄이 왔다. 봄은 눈부시고 일상은 매번 비슷하지만, 비슷한 나날에도 맞을 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하루다.


-2018.3.29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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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에 벽시계가 생겼다. 누군가에겐 저것이 시작이겠지. 째깍째깍. 문득, 내가 쳤던 모든 발버둥들이 사실 어른 흉내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일었다. 나는 줄곧 어른답기를 원했으나, 막상 닥쳐오는 시간의 추궁에 몸서리 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른이 되기가 두렵다.


너는 그동안 무얼 했니?”

근의 공식, 아니 당신을 증명하시오

 

스무 살의 독립은 기특한 것이지만, 스물 예닐곱의 앞가림은 당연한 것이야. 아르바이트는 직장이 될 수 없고, 그곳의 월급은 새로운 용돈에 불과해. 용돈벌이 알바생과 월급쟁이 직장인의 차이는 수열의 극한을 고쳐 씌운다 해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것이지. 아무렴. 

 





2.

 

한 번 더 모험을 걸어 볼 용사, 어디 없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코인이 부족합니다. 게임오버. 나가

 


단돈 100원으로 끝판왕을 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동네 고수 형이 아니었습니다. 이럴 땐 코인 이어달리기

용돈을 다 털어봅시다비트코인처럼 동전 오락실도 역시 존버가 답입니다.

"존버를 못하면 장가를 못가요. 아~ 미운 사람~"

 

그런데 웬걸? 시간이라는 코인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호주머니에 감각이 없고, 분주한 손가락의 헛손질은 마지막을 암시하고,

어느 샌가 내 뒤에 손도장을 찍은 다른 동전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는 오락실의 법칙.

 




3.

 

방정식에 답이 없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 해가 무수히 많아서 정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불능, 아예 해가 없습니다.



우리 열차 부정, 부정 역입니다. 다음 역은 불능, 불능역입니다

 

그것은 줄어드는 가능성과 불어나는 책임과의 관계를 시간에 관한 함수로 나타낸 것입니다. 자의식 과잉은 사실 자존감의 결핍이듯, 갈 길이 많아 갈피를 잡지 못하던 스무 살은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남은 것을 주워 먹습니다.


가자 노량진으로! 오라 신림동으로!”


 



 

4.

 

새가 되려다 파충류조차 되지 못한 시조새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어른이 되려다 어린 아이로 남아버린 푸석한 화석은 여기 있습니다.

어른 연기를 열심히 했던 어린 아이가 여기 있습니다.

 

어른이라기엔 대책이 없었고 아이라기엔 연식이 오래된 중고였지만,

또 다시 어른이라는 배역을 받았습니다. 이젠 발 연기는 싫습니다.

다시 한 번 존버의 기합을 불어넣고 싶습니다.

북극곰에게 미안해. 딱 한 번만 더 타올라주렴.

꼭 푸른 불꽃이 아니어도 좋아. 불꽃만 일어다오.

 


-2018.03.10 @PrismMaker


p.s 한 동안 포스팅이 뜸했습니다. 대학원에 복학해서 그렇습니다.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못하고 논문과 아르바이트와 씨름했습니다.

종종 스케쥴과 체력껏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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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의 주인공은 학사모가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 우리 어머니였다). 


 

1992년 5월의 스물하고 두 번째 날아니 옹알이를 하다 말귀라는 게 생겨먹은 이후 처음으로 나는 어머니의 입에서 일가기 싫다는 말이 나오는 걸 들었다못난 불초자는 뒤늦게 두 가지를 깨달았는데하나는 여인의 살아온 반세기 동안 단 한 번도 내뱉은 적이 없던 말이라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그 시대의 여자 벌이'로 모질게 가정을 꾸려오면서 매일 매일 똑같이 가기 싫었을 여러 일터를 숨 한번 안 돌리고 지나쳐왔다는 거다아홉 시와 여섯 시의 바깥에서만 그녀를 봐왔던 나는 정말이지 이 여자가 '철의 여인인줄만 알았던 게다그러던 어머니가 나름대로 밥벌이의 지겨움을 최초로 토해냈으니나는 눈보라를 처음 맞은 열대지방 원주민처럼 얼어붙을 수밖에.

 


2013년 2연거푸 대학 입시에 미끄러진 어떤 모질이는 바짝 벌어들인 돈으로 부산행을 준비했다불안한 눈매를 감추지 못했던 중년의 경기도 여인은 나의 하행을 탐탁지 않아 했다모친만큼 모질었던 나는 내 벌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라며자기를 위해 쓰고 살라며 겹 띠동갑의 인생 선배에게 주제넘은 훈수를 두었고벌어둔 300만 원을 챙겨 그냥 부산에 내려가 버렸다나는 진심으로 그 여인에게 자기 욕망에 충실한자신의 삶을 되찾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내 뒷바라지에 인생을 더 희생하질 않길 바랐기에참으로 무정한 놈은 일방적으로 반년 동안 연락을 끊어버렸더란다

 


그놈결국에는 이것저것 하면서 오기 반 성질 반으로 최저생활 언저리의 돈을 꾸려 버텼고친구 하나 없던 이 땅에 제법이지 괜찮은 뿌리를 갖게 되었다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걸까그 뿌리를 믿고 어쩌면 내 힘으로 하는 마지막일지 모를 공부에 뜻이 섰기에 대학원에 들어갔고늘어난 학비를 대고자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여느 때처럼삶의 일부처럼 해왔던 일인데스물여섯이나 먹어버린 그 녀석 입에서 불현듯 "일가기 싫다"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입에 잘 안 붙이고 살던 말인데, '거참 모전자전 일세나는 너털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2015년에는 그녀의 둘째가 대학에 갔다두 번째 분신도 어미를 닮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제 돈 제가 벌어제 앞길 제가 가렸다상아탑의 돈이 굳는 덕에 벌이는 적지만 등산도 다니고 카페도 가는 버릇이 들었고종종 외식도 할 줄 알게 되었다그녀가 꽤 괜찮은 표창을 여럿 받고 졸업한 맏아들을 여전히 밥풀떼기나 흘리는 칠칠맞은 어린애로밖에 보지 못했던 것처럼나 또한 서른 즈음부터 슈퍼우먼처럼 여자 혼자 벌어 모든 것을 겨우겨우 기꺼이 떠안아 버텨내던 그 시절의 그녀만 기억했던 것이다그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짊어진 입에서 일가기 싫다는 말이 최초로 나왔더랬다그제야 나는 그녀에게서 언젠가부터 늘어버린 주름과 먹지 않는 화장의 들뜸과 잔 고장 많은반세기를 버텨낸 신체를 발견했더랬다명절에 두 번방학에 두 번 어머니를 찾는 게으르게 바쁜 아들은 갈 때마다 늙어있는 어머니의 인생에 깊은 연민을 느꼈다.

 


2017년 2월 24일 자로 나는 졸업을 했다한때 슈퍼우먼과 그녀의 두 번째 분신은 큰 걸음으로 내 자취방에 찾아왔다낯 뜨거운 말을 서로 잘하지 못하는 탓에여자는 자신의 고된 삶을 보상해주지 못한기대치에 못 미쳤던 큰 아들의 입학을 제때 축하해주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한이라고 했다그래서 별 볼일 없는 졸업식이라도 기어이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나는 결국 치우기를 포기한 냉장고를 들키고야 말았고방 청소에 일가견 있는 전문가 두 사람의 능숙한 손길과 부지런한 잔소리에 내 방은 금세 묵은때를 벗겨냈다.

 


공부했으면 참 잘했을 머리를 가진 나의 어머니는 일곱이나 딸린 동생들의 인생으로 인해어쩌다 연좌제의 늪에 빠져 대학의 문턱도 밟지 못했다어머니와의 왕래가 줄어갈수록 나의 자유는 높아만 갔지만직접 자식의 대학생활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고 또 늘 궁금해했다당신께서 참 좋아하는 해리포터 속 펜시브로 읽혔으면 하고 바라면서나는 이 글을 적는다공부를 하다 사랑을 했으며이별을 하며 글을 읽었고 아니 글에 읽혔으며생각을 적다 마음을 쏟았고밤을 기다리다 낮에서야 잠이 들곤 했으며허겁지겁 가파른 언덕의 대학을 오르내렸고유쾌한 웃음으로 여러 벗을 사귄 만큼 날 선 논리로 아울러 풍족한 적을 두었노라그게 간추린 내 대학 생활이라고깨끗해진 방에서귀에 잔뜩 얹은 한소리가 고마워서뒤늦게 이 글을 바친다



-2017년 2월 23일 @PrismMaker


※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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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운전치고 제법 능숙했다. 바람같이 달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인생의 예외란 항상 자신은 아닐거라 자신하는 사람을 빗겨간다. 우연은 행운을 담보하지 않지만, 불운은 늘 필연을 달고 온다. 항상 질주하던 우리는 달리지 않는 자동차를 인정하지 않았다. 차의 시동이 꺼졌다. 


계절비가 내린다. 세상은 아직 한 편의 수묵화다. 그러나 빗방울이 먹을 씻기면, 곧 봄이 올 것이고 꽃잎은 나름의 방식으로 부풀 것이다. 마른 햇살이 여기저기서 부스러질 것이며, 작은 도랑이 넘실거릴 것이다. 그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봄의 기운을 응원한다. 우리네 삶도 덩달아 수채화였으면 좋겠다. 2월의 마지막 날, 부산의 끄트머리에서.


-2018.02.28 @PrismM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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