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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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의 작가 필립 로스의 <아버지의 유산>은 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소재는 다르지 않다. 

그는 또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구나. 이번엔 그의 아버지가 죽기까지의 과정을 쓴, 소설이 아닌 실제 이야기이다. 

묵직하고 절제된 묘사 방식으로 인해 소설 <에브리맨>을 소설이 아닌 느낌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소설이 아닌 이 책도 소설과 톤이 크게 다르지 않아 이번엔 마치 소설을 읽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원제는 patrimony. 


부모의 죽음, 부모가 죽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하지 못할 특별한 경험이고, 이후 삶에 영향을 미친다. 한때 그의 몸을 빌어 세상에 나왔고 그의 손에 의해 길러졌으며 그의 말과 행동이 나의 세상을 열어나가는 안내서 역할을 해왔던 그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참담하고 허무하다.

'유산'이란, 물질적인 것을 뜻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유산의 일부일 뿐, 그보다 더 결정적이고 중요한, 피할 수 없는 정신적인 것들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나 자신도 경험해보고 알았다. 필립 로스도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말을 그런 의미로 썼을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어떤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인 것을 봐도.

그는 이 책에서 아버지의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가 자라온 이야기를 하고, 그가 어떤 남편이고 아버지였는지 이야기한다. 그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원리원칙주의자였는지. 어머니에겐 다정한 남편이라기 보다 불친절한 독불장군 같았으며 그의 강박적 고집스러움은 어머니를 말년에 신경쇠약으로 몰아갈 뻔 하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허투로 돈을 소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집안의 청결은 더 이상 강조될 수 없을 정도였다. 한편 아버지는 말단 보험회사 직원으로 출발하였지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근면 성실과 철두철미한 직업 정신은 그를 지점책임자의 위치에 올려놓기 까지 했다. 그런 경력은 아버지로 하여금 평생 완벽한 모범가장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게 했다. 

그렇게 철옹성 같던 아버지가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고 혼자가 되자, 어떤 공동시설에도 가는 것을 거부하고 잘 먹지도 않으며 하루 종일 울고 있는 날이 늘었다. 필립 로스와 그의 형은 자주 아버지를 방문하고 안부를 살피며 아버지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지만 말을 잘 듣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오른쪽 눈의 시력 이상, 안면신경마비, 청력 이상의 증상으로 찾은 병원에서 아버지에게 내린 진단은 뇌에 대형 종양이 있다는 것이었다. 수술로 회복되리란 보장이 없어 병원에서도 크게 권하지 않는 단계였고 다른 치료법이 없는 상태라서 그래도 수술을 해봐야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뇌에 큰 바늘을 넣어 조직을 떼어내야 하는 검사 과정조차 나이든 아버지에게는 반죽음같은 소모적인 과정이었다. 수술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선택, 어느 선까지 수술을 하느냐, 어느 지점까지 인위적 생명 연장 장치를 유지하느냐 등, 죽는 과정은 결코 조용한 이별의 과정이 아니었다. 그런 결정의 과정도, 환자 본인의 죽어가는 생리적 과정 자체도 끊임없는 '일'이었고 죽는 이는 '일꾼'이더라고 썼다. 

나는 아버지가 호흡 유지 장치를 달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해도 반드시 다가올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상황을 상기했다. 나는 그 모든 것, 모든 것을 보면서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나는 최대한 아버지한테 가까이 몸을 기울이고 아버지의 움푹 파이고 망가진 얼굴에 내 입술을 갖다 대고 간신히 힘을 내 마침내 속삭일 수 있었다. 

"아버지, 보내드릴 수 밖에 없겠어요."

아버지는 몇 시간째 의식을 잃고 있어 내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나는 스스로 충격을 받고 놀라고 울면서 다시 또다시 나 자신이 그 말을 믿을 때까지 아버지한테 그 말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었다. (278)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필립 자신도 심장 바이패스 수술을 받는 경험을 함으로써 아버지의 입장을 더 절실하게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그때 아들의 병실에 자기가 있어줬어야 한다며 아들을 나무랜다. 


읽기는 금방 읽었는데 읽고 나서 울적한 기분은 오래 갔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이 그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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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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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요즘 한국의 젊은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 2014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2020년에 처음 단행본 소설 <당신의 4분 33초>을 낸 이서수 작가는 등단 이후 출간까지 오랜 공백기간이 있은 듯이 보이지만 출간을 바로 했든 그렇ㅈ 않든 글을 써온 시간이 짧지는 않은 작가 같다는 느낌을 읽는 동안 굳혀가게 되었다. 

법학과를 졸업했지만 졸업후 그리고 등단하고난 후까지도 자차로 택배배송, 북카페, 각색 작가등의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이런 경험은 소설 속에 주인공의 직업으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황산벌청년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젊은 작가상등을 수상했고, 장강명, 서유미, 임성순 작가등과 함께 월급사실주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 <젊은 근희의 행진>은 작가의 2014년 신춘문예 등단작에서부터 2022년 발표작까지, 거의 10년이라는 기간동안 발표해온 소설 열편을 묶었다. 내 경우엔 이런 소설집을 읽을때 읽는 속도가 제일 빠르기도 하지만 이 책의 경우 열편의 소설이 가족노동이라는 일맥상통하는 주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지루할 틈 없이 읽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미조의 시대 

키워드: 압박면접, K-장녀, 이부망천, 구인 구직, 주택 임대

공시생 7년차에 여전히 헛꿈을 쫓아다니는 오빠 대신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미조는 엄마와 새 전세집을 알아보고 다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평생 모은 오천만원의 가치를 실감하면서 여섯번째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한다는 이중의 부담까지 안고 사는, 이것이 미조의 시대인 것일까.

인간을 육체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간이지만, 정신적으로 학살하는 것은 시대야. (37)


엉킨 소매

키워드: 임신중지, 불법점유, 세 여자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에는 세 여자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들이 눈에 띈다. 혼전임신 6주만에 남자친구와 합의하에 임신중지를 결정한 여자 옆에서 남자친구 대신 여자 친구 둘이 함께 해준다. 임신중지에 대해, 여자의 몸에 대해, 세 여자는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면서도 서로를 외면하지 않으며 서로의 앞날에 기꺼이 엉키고자 한다.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키워드: 프리랜서, N잡러, 코로나, 수동적공격성, 세 여자

혼자 사는 여성이 독립하는 과정엔 발 없는 새로 살아야 하는 시기가 있다. 집이 없다는 것, 어디에도  내려앉아 쉴 곳 없다는 것은 계속 공중에 날고 있어야 하는 시간을 의미하고 있다.


내려앉으려는 참새만 보면 계속 내쫓았어. 결국 참새는 공중을 계속 날다가 힘없이 떨어져 죽었어. 너무나 고단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견디다가. 근데 사영아,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집이 없는 우리도 그 참새 같다는 생각. 정착하지 못하는 우리가 바로 그 참새 같다는 생각. 어디에도 내려앉아서 쉴 수가 없잖아. (120)



젊은 근희의 행진

키워드: 뮌하우젠증후군, 반지하, 삼모녀, 유튜버, 관종, 유교걸, 인스타사기피해    

20대 근희, 30대 문희 자매의 이야기이다. 30대 언니 세대가 동생 근희 세대를 보는 관점,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겨우 받아들이기는 하나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20대와 30대 사이에도 이렇게 다른 가치관과 행동 방식의 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소통이 넘쳐나면서도 소통에 목마른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연희동의 밤

8년째 드라마작가를 꿈꾸며 각본을 쓰고 있는 언니와, 꿈은 포기하고 마지못해 회사를 다니며 경제고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동생. 언니는 가망없는 꿈을 한탄하고, 그런 언니에게 동생은 하루 빨리 포기하고 현실에 발을 딛으라며, 연희동 일대 술집들을 돌아다니며 얘기를 이어간다. 둘은 모두 꿈의 실패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저는 지금까지 진짜 인생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아니었어요, 여기가 진짜고 거기가 가짜였어요. (173)

꿈과 현실 사이가 너무 아득할때 어떡해야하는가. 꿈이 가짜같을 때.


나의 방광 나의 지구

키워드: 신혼부부, 신도시아파트, 과민성방광, 스트레스, 은행신탁상품

내집 마련을 위한 고군분투 얘기는 흔하다. 이것을 지구 얘기로 끌고 가는 것을 보며 이것이 작가이구나 새삼 감탄했다. 이것이 소설 속 내용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현실, 팩트인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새 커플이 되어 새로운 사회에 진입하자 마자 느끼는 벽이 너무 높고 아득하다라는 것이 씁쓸하다.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분하다는 듯이 숄더백을 내던지며 외쳤다. 그의 귀에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다.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해서 집이 없는데?

어찌된 일인지 성실히 살아온 그들에겐 집이 없었다. (204)


그녀는 집을 사랑하는 대신 지구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지구가 그녀의 집이 될 것 같았다. 

지구를 소유할 수 있는데 왜 24평짜리 아파트를 소유하지 못해 안달해야 할까?

지구는 정말이지 끝내주게 넓고, 인간이 지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 아름답다. 소유하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소유가 가능하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 것이 되니까. (231)


재활하고 사랑하는

키워드: 어지럼증, 전정신경염, 재활운동, 과중한 업무, 이석증, 공시오류

각자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커플의 이야기. 스트레스는 신체적 이상으로 연결되어 어지럼증을 유발하고, 병원에서는 재활운동을 권하는데 그것과 더불어 이 커플의 관계도 재활이 필요한 단계로 가고 있다.


그는 매미를 먹었다

키워드: 덮밥집, 매미소리, 비수기, 울음, 기다림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중 가장 좋은 점수를 주고 싶었던 단편이었다. 사람소리가 아니라 매미소리를 내며 우는 주인공의 심경이 독자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썼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매미, 그리고 나무라는 공간적 배경의 연결도 좋았다.


현서의 그림자

키워드: 숙모, 사촌동생현서, UFO, 외계인, 안락한 현실

2014년 <K의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단편이다. 앞의 작품들에 비해 인위적 터치가 남아있는 것 같은, 특히 마무리 부분이 아쉬웠던 작품이다.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

키워드: 구제옷, 타임캡슐, 창고형빈티지

비맞은 젊음의 초상이라고 할까. 구제 혹은 빈티지, 히피 혹은 쓰레기로 보여질수 있는 그들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2014년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오랜만에 동시대 우리 작가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제대로 느꼈다.

가난의 깊은 경험과 고찰을 기반으로 가족, 고용, 노동, 젠더에 대해 한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열 가지 다른 노래를 들었다는 느낌이다. 기대되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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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길로 돌아갈까?
게일 콜드웰 지음, 이승민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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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를 같이 나오고 한동네 살았던 친구가 있다. 등하교를 같이 할때 매일 만나면서도 매일 할 말이 끊이지 않았다. 더 많은 얘기를 나누기 위해 가끔 우리는 더 먼 길을 택해서 집에 가곤 했다. 책 제목이 나의 그런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의 저자 게일 콜드웰은 친구 캐럴라인과 함께 그들의 개를 산책시키며 걷는 동안 많이 얘기를 나누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탄 후에도 대화가 깊어지면 먼 길을 택해 집에 돌아가곤 했다.

개들이 지그재그로 산길을 달려올라가는 동안 캐럴라인과 나는 이야기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안 너무 많고 너무 깊은 대화가 이어지는 기나긴 오후 여정을 우리는 분석산책이라 불렀다.

"집까지 먼길로 돌아갈까?" 차에 오를 때면 캐럴라인이 말하곤 했다. 그럼 우리는 서둘러 헤어지지 않으려고 서머빌이나 메드퍼드의 혼잡한 길로 접어들었다. (40)

작가 답게 '분석산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게일은 친구 캐럴라인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와의 추억을 기리는 책을 내며 그 말로 제목을 삼았다. "Let's take the long way home." 살아서 캐럴라인이 그 말을 할때 그것이 이런 책의 제목이 될줄 상상을 못했으리라. 

게일과 캐럴라인은 싱글이라는 점, 글 쓰는 일을 한다는 점, 식구 대신 큰 개를 키우고 있어서 자주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는 점 등의 공통점이 있었다. 인생의 한 기간를 알콜 의존의 시기를 경험했다는 것도 중요한 공통점이었고 그래서 캐럴라인이 여전히 거식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던 상황을 게일은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개를 산책시키는 일 말고 둘이 공유한 많은 시간은 운동이었다. 캐럴라인이 거식증을 극복하는데 중요한 통로가 된 로잉, 그리고 수영을 함께 했는데 때로는 경쟁이 되기도 했지만 운동으로 정신을 극복하고 자기의 중심을 흔들리지 않게 바로잡는다는 것에 일치하였다.

둘의 성격이 아주 비슷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생각의 중요한 줄기가 비슷했으니 깊은 우정을 쌓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캐럴라인은 모범생 스타일에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성격이었고 게일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신 그런 캐럴라인의 성격을 알아볼줄 알았고 그래서 캐럴라인을 더 배려할 수 있었으며 그녀 행동의 이면을 뚫어볼 수 있게 했다.

어릴때면 몰라도 성인이 된 후 나이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캐럴라인과 게일은 여덟살 차이가 났지만 간섭은 최소로 하면서 피해야 할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며 서로의 생활에 깊이 스며드는 방식을 알아갔다. 개 외에 가족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각자 남자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으며 우정이 방해가 되지 않았다.

캐럴라인이 암 진단을 받고나서 급속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을 향해 가는 동안 게일은 거의 정신줄을 놓다시피 한다. 친구의 마지막이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해 게일이 애쓰는 대목이 어찌나 구체적이고 생생하던지 읽으면서 가슴이 저렸다.

캐럴라인의 마지막 며칠, 친구가 힘들어하며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지켜본 게일은 캐럴라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동안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와중에 애견 클레먼타인까지 세상을 떠나고 게일은 살아서 남은 사람의 고통의 시간을 살아낸다. 

책의 마지막에 인용한 나바호족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옛날 나바호족 사람들은 러그를 짤 때 어울리지 않는 실을 한 가닥씩 넣고 그 도드라지는 색이 바깥 테두리로 이어지게 했다. 그 의도된 결함은 러그 안에 갇힌 에너지를 풀어주고 또다른 창조로 이어지도록 길을 낸다는 뜻에서 영혼의 줄이라 불렸으며, 이 줄의 유무로 진품을 가릴 수 있다.

인생에서 굳게 품을 가치가 있는 이야기에는 모두 이런 영혼의 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희망이라 부르든 내일이라 부르든, 내러티브의 뒷이야기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다만 이것 없이는 우리의 의식과 함께 모든 것이 안으로 무너져 파열될 것이다. 우주가 역설하는바, 모든 고정된 것은 유한하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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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살지 못하는 당신에게 - 논어에서 찾은 나의 이립
이지훈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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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과거없이 존재하지 않고 미래로 연결되지 않는 현재란 없다. 살아있는 한 현재 속에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새삼 그렇게 살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뜼일까. 

과거는 과거로서 새기고, 미래는 미래로서 계획해야 하는데 과거에 얽매여 현재를 그르치거나 미래를 위해 지나치게 현재를 희생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우리는 이미 손에 갖고 있는 것은 신경쓰지 않고 놓친 것을 아쉬워하는데 시간을 소비하며 앞으로 갖고 싶고 되고 싶은 목표에 집중한 나머지 당장 한치 앞을 못보는 인간의 운명인데 열치 앞을 조망하며 현재를 고통속에 보내기도 한다. 그렇다고 현재만 생각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은 아니니, 어느 정도라고 선을 긋듯 정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더 어려운 일이고 끊임없이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을 확인해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누군가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공평한 과제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지훈 변호사는 자기의 인생 경험을 개인적인 경험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자기의 경험에 변호사로서의 전문적인 지식을 더하여 방송, 저술, 개인방송 운영등의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적극적 활동가이다. 마흔 여섯 해를 살면서 한동안 개인적으로 헤어나기 어려웠던 시기를 보냈고, 극복하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논어>를 읽으면서 얻은 통찰을 이용,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겪을 수 있을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자기가 알게 된 것을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논어>의 내용을 많이 인용하면서도 고리타분하거나 귀에 이미 익숙한 내용들만이 아니라 새로운 대목들이 많았다. 

흔히 우리는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안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것은 곧 '성장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68)

<논어>를 읽으며 그녀가 깨달은 것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이립 (而立)'인데,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어렵다. '사리로써 나답게 바로 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모든 것은 나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으로, '이기 (利己)'와는 다른 뜻이다.


우리의 삶은 덕이라는 그릇을 점점 넓혀가 결국에는 그릇이하는 형태가 없어질 때까지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갑니다.

공자는 나보다 못한 사람과는 친구 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무우불여기자, 無友不如己者). 이 말은 광장한 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여기서 너와 나를 비교하는 기준은 경제력이나 신분이 아니라 배우려고 애쓰는 자세, 즉 '호학(好學)'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성장하지 않는 사람을 '곰팡내 나는 치즈'라고 표현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의 사교는 값이 너무 싸다. 우리는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각자 새로운 가치를 획득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우리는 하루 세끼 식사 때마다 만나서 우리 자신이라는 저 곰팡내 나는 치즈를 새로이 서로에게 맛보인다.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이 견딜 수 없게 되어 서로 치고받는 싸움판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의 범절이라는 일정한 규칙들을 협의해놓아야 했다." (146)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가?

내 또래 어떤 사람을 만나면 만나는 시작부터 헤어지기 까지 자녀들 얘기만 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없고 '엄마'라는 신분만 있다. 안테나는 늘 자식을 향해 있다. 혹시 부족한 것이 없나. 내가 해줄 것은 없나.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만남을 가지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헛헛하다.

북극성이 할 일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다른 별들은 알아서 질서를 잡아갑니다. 내가 나로서 나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 부모님, 배우자, 자녀, 친구, 회사 동료 등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가 자기 자리를 잡아 갑니다. (157)


삶을 살면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감정은 '외로움'입니다. 사람의 성장은 이 외로움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외로움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사람은 끊임없는 성장의 동력을 얻게 되지만, 외로움에 압도당한다면 매번 잘못된 선택을 하다가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170)


착한 사람은 좋은 배우자가 아니다

그럴까? 남에게 착하게 보이는 사람, 남에게 착하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 갖는 함정을 말하는 것이리라.

공자는 '인자만이 제대로 사랑하고 (能好人, 능호인) 제대로 미워할 줄 안다 (能惡人, 능오인)'고 하였습니다.

착해서가 아니라 지금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대로 화를 내는 것은 제대로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다가 화를 내야 하는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고, 사리에 맞게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논리적으로 화를 내지도 못합니다. 그러고는 좋은 말로 포장하며 정신승리 쪽을 선택합니다. (306)

나도 지금까지 자신 없는 항목.


누군가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원망을 덕으로 갚는 것은 어떨까요?"

공자의 답변이 기대됩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덕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무엇으로 갚을 것이냐?

원망은 직으로 갚고 (이직보원 以直報怨) 덕은 덕으로 갚는 것이다 (이덕보덕 以德報德)." (307)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자신이 한때 실패를 겪지 못했더라면 이런 새로운 깨우침의 기회는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살아있는 동안 실패를 겪지 않을 수는 없고, 그때마다 좌절하고 하향 곡선을 그려갈 것인지, 슬퍼하고 절망한 후 결국 다시 일어나 배움과 깨우침의 기회로 삼을 것인지.


저자의 바람대로 이런 여성들이 주위에 많아졌으면 좋겠다. 

논어를 글자로만 휘리릭 읽는 대신 의미를 읽어들여 나름의 통찰의 기회로 삼기를 희망하는데 여전히 그러질 못하고 이렇게 다른 사람이 전하는 말로써만 끄덕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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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살인 클럽 목요일 살인 클럽
리처드 오스먼 지음, 공보경 옮김 / 살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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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소설이 이야기, 서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문학 분야라고 한다면 독자 입장에선 기왕이면 그 이야기가 재미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같은 글쓰기라도 사실을 기반으로 정리하는 글을 쓰는데 소질이 있는 사람보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지어내는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 소설을 쓰면 훨씬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즐겁게 작업을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오스먼 (1970~ ) 은 작가가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참 재미있게 말을 하는 사람일 것이다. 대본 작가, 편집자, TV 진행자이며 프로듀서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도 한 리처드 오스먼은 영국 서섹스 (Sussex) 출신으로 케임브리지에서 정치와 사회학을 공부했다. 2020년에 느닷없이 발표한 첫 소설 <목요일 살인 클럽>이 백만부 이상 판매되며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이어서 바로 다음 해 <목요일 살인 클럽>의 주역들이 그대로 등장하는 두번 째 책 <두 번 죽은 남자>를 출간했다. 나는 두 번 째 책 <두 번 죽은 남자>를 얼마 전에 먼저 읽고난 후라서 그런지 이 책이 더 빨리, 더 재미있게 술술 읽혔다.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이야기의 종점이 되는 것은 맞지만, 읽다보면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각각 다른 성격과 직업 출신의 네 어르신들(!)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머리를 쓰는 방법과 추진해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지켜보는 것을 더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직접 물어보기보다 은근 슬쩍 떠보기, 넘겨 짚기, 둘러 말하기 라는 영국 사람들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화도 너무나 재미있고, 분명 작가가 지어냈을 이야기임에도 마치 일부러 지어낸 것이 아니라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나 상황을 옆에서 보면서 전달하는 것 뿐인 듯한 작가의 묘사 방식도 능청스러우면서 감탄스러웠다.

이 시리즈로 다음 소설이 또 나오면 좋겠다. 안그러면 서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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