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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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개인이 살아온 얘기를 단지 한 개인의 역사로 보는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것들을 수집하여 한 시대의 역사물, 아카이브로서 데이터화 하는 경향이라고 한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회고록이고 non fiction이다. 

저자 그레이스는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다. 미국인 아버지가 한국에 와있는 동안 만난 기지촌 여성 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저자가 한 살 반, 오빠가 여덟 살 반이던 1972년, 아버지가 살고 있는 와싱턴주 (미국 서부) 셔헤일리스라는 작은 마을로 엄마와 함께 이주하였으니 저자에게 한국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반은 미국인 아버지의 핏줄을 가지고 있는 외형이었지만 이민자를 혐오하던 분위기로 저자는 이방인이라는 의식과, 아메리칸도 아니고 코리안도 아닌 아메리시안 (americian) 이라는 이중의식을 가지고 학교를 다녔다. 천성적으로 활동적이고 사교적인 엄마는 딸이 학교에 잘 다니면서 인정받기를 마라는 마음으로 친구들이나 이웃을 초대해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딸에게는 꿈을 크게 가질 것을 강조하곤 했다.

제목 <전쟁 같은 맛>은 올케가 엄마에게 차려준 음식 중 유독 분유에는 손도 대지 않은 이유를 저자가 묻는 대목에서 나온다.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전쟁 같은 맛이야.”


이웃에 한국 아이나 아내가 새로 미국 가족이 되어 올 때마다 엄마는 이들을 모국어로 환영했다. 김치 한통을 손에 들고 말했다. “함 묵자.” 같이 먹어보자.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에 온 이들을 달래기 위해 엄마는 김치를 담가 주었다매일 같이 먹고 요리하는 일이 우리가 남겨 두고 떠나온 사람들과 장소에 우리를 연결시켜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엄마는 이들이 잃어버렸거나 이들에게서 지워진 한국의 친족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김치를 담그고 나누는 행동에는 엄마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고 엄마는 이를 통해 살인적인 상황에 맞부딪치며 살아내기 위한 투쟁을 이어갔다. (163-165)


한국에서 어린 아이를 입양하는 이웃을 보면 일부러 방문하여 한국음식을 만들어주기 도 하고 도움을 주고 싶어하던 엄마가한 이웃이 어린 아이가 아니라 열일곱이나 된 여자 아이를 입양한 것을 보면서는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 인간들은 애를 한 명 더 원한 게 아니야! 식모를 원한 거지!” 엄마는 울면서 말했다.

엄마는 여자 아이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걸 자선사업으로 위장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상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163, 164)


야생 블랙베리를 따다가 이웃에 싸게 파는 생활력을 보이기도 하면서 이웃에서 엄마에 대한 평판이 새로워지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되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기도 하는 엄마였다.

저자는 저자대로 불안한 가정 생활, 혹독한 사춘기, 제한된 교우 관계를 거치며 다행히 엄마가 원하는 수준의 좋은 대학에 진학을 하였고 집을 떠나 엄마를 아주 가끔씩 밖에 못 보게 된다. 그러다가 올케로부터 엄마가 이상하다는 말을 듣게 되고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따로 살고 있던 엄마에게 조현병 이 발병하였음을 알게 된다. 약물 치료를 받기도 하고 오빠네 집으로 옮겨 살기도 하는 등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지만 음식을 거부하고 바깥 출입을 하지 않으며 정체 모를 정령의 목소리를 듣는 등 엄마의 증세는 심해져 가자 저자는 시간을 쪼개어가며 엄마를 방문하는 횟수를 늘리며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노력을 한다. 

저자는 엄마의 음식 거부 증상이 음식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분유라든지아놀드 슈와제네거의 이름을 딴 아놀드 빵이라든지매우 구체적인 것임을 발견하고서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엄마의 결정이 주체성의 표현이자 거대한 권력 구조에 대항하는 작은 반란 행위임을 깨달았다. (41)


저자는 엄마의 살아온 나날들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대학에서의 전공과 관련하여 엄마의 존재와 생애를 개인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해보고자 하는 목표가 생긴다.


멀리 떨어진 대학에 진학하며 두게 된 거리, 새로 접하게 된 생각과 비판적 사고는 결국 엄마의 조현병이 생기게 된 원인을 찾는 길로 이어졌다. 새로운 것을 배워가면서 내가 품은 한은 엄마의 한과 더 끈끈히 엉켰고 감정적 응어리가 쌓이고 또 쌓이며 내가 살면서 내리는 결정에 더 많은 힘을 실었다. 우리의 한을 풀어내려 할 때마다 나는 1986년으로 되돌아 갔다. 열다섯 살에 나는 사람들이 엄마를 한 번 쓰고 쉽게 내버릴 수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았고 엄마가 당신 인생에서 제대로 된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채 이 땅 위를 유령처럼 떠돌게끔 방치됐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236)


엄마의 한을 푸는 것이 곧 이방인처럼 살아온 나의 한을 푸는 것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은둔생활을 하는 엄마가 집 담장 너머의 지평선을 상상하며 소리 내어 묻곤 했다.

저기 밖에는 뭐가 있을까?”

밖은 어디고 엄마가 있는 곳은 어디였을까.


1998년에 나는 뉴욕시립대학 대학원에 등록했고 쓸모없다고 느낄 정도로 엄마의 정신을 산산조각 낸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찾아내겠다고 결심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다음 두 문장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 모든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매춘부였어요. 그리고 쓸모없어. (325)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은 일 이년 만에 이루어진 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최소 두 세대의 삶에서 축적된 한을 풀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여성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항상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을까. 오드리 로드가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꾼다는 것>이라는 글에서 적었듯.

나의 침묵은 나를 보호해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침묵도 당신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입니다.” (460쪽 번역가의 말)


기지촌 여성이라는 특수 신분, 그리고 가족사를 밝히는 내용인만큼 확인 작업도 많이 필요했고 가족들의 동의, 공개 허용을 묻는 과정도 특별히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게 나온 책이라서, 더 귀하게 읽게 된다.

한국의 아픈 역사를 읽는 마음이 역사서를 읽을 때와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저자에게도, 독자에게도 그런 의미 있는 기록물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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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8-26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hnine님, 저도 방금 그레이스 조가 가족에게 소송당했는지 관련 기사를 찾던 중이었어요. 마지막 문단에서 말씀해주셨듯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는 등의 절차가 정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아요

hnine 2023-08-26 22:35   좋아요 1 | URL
http://geulhangari.com/archives/12147
안녕하세요. 위의 링크를 저도 여기 알라딘 친구분께서 알려주셔서 읽어보게 되었답니다. 사실 저자의 어머니로부터도 생전에 확실한 동의가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저자의 말로 밖에는 확인할 수 없어서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예상되었어요.
현재 얼마나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문제 제기가 될 소지가 있어서, 저자의 원래 의도와 노력이 좌절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양희은 님의 에세이 제목에 담박에 공감이 갔다. 

똑같진 않지만 '그러라고 해', '그럴수도 있겠군' 이라는

비슷한 말을 나도 평소에 종종 하기 때문이고 언제 그런 말을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책 제목으로 보니 더 뭔가 있어보인다.


'그러라고 해' 이 말은 즉각적으로 감정 가득 실어 하는 말인데 반해

'그럴 수도 있겠군' 이 말은 한참 후에, 어떤 때는 한밤 자고 다음 날 새벽에서야 하게 되는, 감정 많이 수그러뜨린 후 하는 말이다. 내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 또 내가 자주 하는 말은 '그래도'

'그래서'가 아니라 '그래도'.

이말도 즉각적으로 나오는 말이기 보다는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한 후 하는 말일때가 많다. 감정 깎고 부족한 이성 끌어모아, 사소한 일들에 영향받지 않겠다는 의지, 내 루틴을 계속해나가겠다는 결의, 내 인생을 그대로 진행시키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내가 만약 책을 쓴다면 책 제목으로 '그래도' 는 어떨까 상상해보았더니, 세글자는 어딘지 부족해보인다. 그럴 수 있어, 그러라 그래 처럼 다섯 글자가 입에도 잘 붙고 좋다.


<그럴 수 있어> 책 표지 그림은 양희은 님이랑 정말 닮았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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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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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斜陽)

1. 저녁때의 햇빛. 저녁때의 저무는 해. 

2. 새로운 것에 밀려 점점 몰락해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네이버 사전)


사양이라는 제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소설의 키워드 역할을 한다. 한 시대의 몰락, 집안의 몰락, 개인의 몰락, 의지의 몰락.

출판사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은 다자이 오사무는 체홉의 <벚꽃 동산>의 일본판 같은 작품을 구상하였고 제목도 <사양>이라고 정해놓았다고 한다. 그 이전에 애인이었던 오타 시즈코의 <사양 일기>를 빌려가서 읽은 바가 있고 여기에서 에피소드를 차용했다는 말도 있는데, 오타 시즈코의 <사양 일기>도 따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하니 그 내용도 궁금하다. 출간은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 1년 빨랐다. 

1948년은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실격>을 간행한 해이기도 하고 39세의 짧은 생을 스스로 마친 해이기도 하다. 갑작스런 일은 아니었다. 스무살때 고등학교 기말시험 전날 밤 하숙방에서 첫번째 자살 미수를 시작으로 다음 해엔 여자와 동반 자살 시도하여 여자만 죽기도 했다. 5년 뒤 대학에서 낙제하고 신문사 시험마저 실패하자 또 자살기도. 이후엔 복막염으로 입원중 투여한 진통제 중독으로 고생하면서 건강이 악화된다. 이후에도 자살 기도를 몇번씩. 그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상적이지 못했다. 그가 사망할 무렵은 2차 세계대전으로 자택이 파손되고 지주 제도가 해체 되는 등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 사양의 길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이즈음 그가 이 작품을 발표하자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사양족'이라는 유행어가 생길만큼 이들의 공황상태를 대변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별히 작가의 개인사, 그리고 시대적 상황과 따로 이야기할 수 없는 작품이다.


작품 속 화자는 가즈코라는 여자. 몰락한 귀족 가문의 맏딸이다. 가족으로는 홀로된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는데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고 남동생 나오지는 전쟁에 참전 중이라 실질적 가장이다. 집안은 경제적으로 기울어 도쿄의 살던 집에서 지방으로 이사를 해야했고 육체적 노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생활을 꾸려나가려 안간힘쓴다. 경제적인 목적도 있지만 정신적인 허무를 메꾸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과거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전쟁에 참전했던 남동생이 돌아오는데 가즈코는 남동생 방에서 허무와 방황의 자조적인 독백으로 가득 차 있는 일기장을 발견하고 읽게 된다.



불에 타 죽는 고통. 괴로워도 괴롭다 단 한마디조차 외칠 수 없는 고래 (古來)의 미증유. 세상이 생긴 이래 전례도 없고 바닥을 알수 없는 지옥의 느낌을 속이지 마시라. 

사상? 거짓말. 주의? 거짓말. 이상? 거짓말. 질서? 거짓말. 성실? 진리? 순수? 모두 거짓말.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시시해.

돈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잠든 채 자연사 (自然死)!


전쟁. 일본의 전쟁은 자포자기다.

자포자기에 휩쓸려 죽는 건 싫어. 차라리, 혼자 죽고 싶어.


결국 자살하는 수밖에 도리 없지 않은가.

이렇게 괴로워한들 그저 자살로 끝날 뿐이라는 생각에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인간은, 아니 남자는 '난 훌륭해.', '내겐 멋진 구석이 있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걸까?

사람을 싫어하고, 사람들도 나를 싫어한다. (63-69쪽)


소설속 화자는 가즈코이지만 남동생 나오지의 이 일기가 작가의 생각을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보이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작가는 이렇게 때로는 가즈코에, 때로는 나오지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뒤에 등장하는 소설가 우에하라의 모습에서도 다자이 오사무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나오지 만큼이나 현실 부적응자인 소설가 우에하라에 대한 가즈코의 사랑은 작가의 내면에서 전멸시킬수 없었던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신의 심판대에 세워진다 한들 조금도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아.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거야. 신이 벌하실 리가 없어. 난 털끝만큼도 잘못한 게 없어. 진짜 좋아하니까 대놓고 당당하게, 그 사람을 한 번 만날 때까지 이틀 밤이건 사흘 밤이건 들판에서 지새우더라도, 기필코. (128쪽)


작품 결말을 보면 더욱 그렇게 연관지어보고 싶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라고 한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은 후 나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는데 망설여졌었다. 그리고 결국 읽었다.

사양을 바라보고 서는 대신 가즈코는 사양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녀가 믿는 사랑과 혁명. 우리에게 끝까지 필요한 것, 사양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과 혁명일지도. 그 흔하디 흔한 말이.


남성 작가가 여자를 주인공 화자로 해서 쓴 소설들이 어떤 것들이 있나 생각해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점점 더 다자이 오사무의 애인이었다는 오타 시즈코의 일기 내용이 궁금해진다. 이 소설에 대한 기존의 의견들에서 벗어나 생각해본다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재조명해볼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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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8-17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양, 분명히 읽었는데 내용이 기억 나질 않네요. 기록을 안 해 놓으면 그래요. 그래서 알라딘에 꼭 글을 올려야 해요.
128쪽의 글은 확고함이 느껴지네요...^^

hnine 2023-08-17 22:44   좋아요 2 | URL
스포일러가 될까봐 작품 줄거리를 구체적으로 올리지 않느라고 내용 전달은 잘 안되었지요?
저도 책 읽고 나면 간단하게라도 꼭 리뷰를 올리려고 하고 있어요. 그렇게 버릇이 되어 그런지 리뷰를 안 올리고 나면 다음 책 읽는데도 속도가 안 붙더라고요.
이 작품에서 가즈코란 여성은 흔들리고 방황하면서도 확고한 면이 있지요. 제가 페미니즘을 언급한 이유가 거기 있기도 하고요.

2023-08-20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0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2 0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 그 여자 불편해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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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내는 산문집은 시집보다 덜 반가울 수도, 더 반가울 수도 있다.

좋아하는 시인의 산문집 출간 소식에 덜컥 사서 읽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산문이 시 읽기보다 더 쉬우니, 시인에 대해 더 알수 있는 기회가 되겠구나 하는 기대때문이다.

'난 그 여자 불편해'라는 제목이 '최영미 스럽다' 생각했는데 정작 그런 제목이 나온 이유를 읽어보니 그렇게 의미를 붙일 제목은 아니어서 좀 실망.

그동안 신문 잡지 등 매체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놓았다. 그래서 한 꼭지 글이 길지 않아 더욱 더 읽기에 시간 끌 게 없었다. 더운 날 몰입해서 휘리릭 읽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3부로 나누어, 1부는 세간에 잘 알려진 미투 논쟁에서 비롯한 어느 원로 시인 관련 소송, 재판 과정 이야기, 2부는 작가가 어쩌면 시 만큼 사랑하는 축구, 올림픽 이야기, 3부는 1, 2부와 딱히 관련 없는 소소한 이야기들로 구성했다.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해야 한다는 한국인들의 집단 강박, 남이 아는 건 나도 알아야 하고 시대에 뒤쳐지면 안 된다는 집착 (51쪽)


저자는 이것을 강박이고 집착이라고 했지만 나는 좀 더 소심해서 완전 공감하면서도 이렇게 용기 있게 말하는 대신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해야한다, 가능하면 남들이 하는 대로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없어서 내게 친구가 별로 없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는게 사실이고, 남이 아는 건 나도 알아야 한다며 부지런히 좇아가는 편이 못되어 시대에 뒤쳐지는 것도 사실이지 않나 생각해보게 된다.

날카로와보이는 인상과 달리 어디 나와 인터뷰 하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털털한 면도 많고 허당인 면도 많아 의외다 생각했었는데, 그녀가 수영을 배우는 과정에 대해 쓴 대목을 읽으니 역시 그게 아니었나보다. 완벽주의 기질이 보이는 것도 같다.


한동안 수영장 근처에도 가지 않다가 1990년대 어느 날 물놀이를 다시 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중등 체육 교과서를 사서 수영의 기초를 학습했다. 욕실 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머리를 담갔다 빼는 동작을 되풀이하며 숨쉬기부터 다시 배웠다. 물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고 나는 일부러 물에 빠지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골라 혼자 수영장에 갔다. 물끄러미 물을 응시하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과거가 되살아나 두려웠지만 '여기서 주저앉으면 영영 수영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내 키를 넘는 가장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바닥을 치고 올라온 그날의 자신감이 내 인생을 이끌었다.

"두려움 그 자체 외에 두려움은 없다." (75, 76쪽)


이렇게 독한 면이 있었구나. 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라도 하고 마는 승부욕이 있었구나. 

그동안 문인이면서도 문단의 중심에 속하지 못하고 외면을 당해오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켜오며, 출판해줄 출판사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 내 책을 출판한다는 당당함의 내면엔 이런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태양처럼 뜨겁지만 차갑게 식힌 문장들을 말로 내보내며 나는 떨지 않았다.


상처를 직시하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그녀들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말해야 자유로워진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7쪽,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정한 노력은 보상받는다는 환상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은 나를 속였지만 게임은 나를 속이지 않았다. (77쪽, '게임은 속이지 않는다.')



어느 덧 60대의 나이에 들어섰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당당함과 서슬이 살아있는 작가에게 나는 여전히 관심을 잃지 않고 안테나를 향하고 있다. 아직도 내 손 가까운 곳에 그녀의 시집들을 두고 수시로 꺼내 보며 그녀 특유의 생기와 생동감을 느껴보고 있는 즐거움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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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1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고은시인과의 일에서 최영미시인을 다시 봤구요. 대단하고 훌륭한 용기였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스스로 불편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 사실 참 쉽지 않잖아요. 이 책도 관심가는 책으로 넣어놨었는데 어느새 또 잊고 있었네요. 덕분에 다시 생각나서 이책을 읽게 될 거 같습니다.

hnine 2023-08-17 05:09   좋아요 1 | URL
저는 최영미 시인이 쓴 시의 팬이고 최영미 시인에 대한 팬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끊임없이 책을 사고 읽는 시간들이 쌓여, 당당하게 나의 삶을 꾸려나갈수 있는 용기로 이어질 수 있으면
하는 희망 사항입니다.
요즘 같이 더운 날 이 책으로 하루쯤 더위 휙 날려버릴수 있어요. 다 읽을 때까지 다른데 정신 팔지 않게 붙잡아주더라고요.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 꿈이 너무 많은, 꿈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21
마르탱 파주 지음, 배형은 옮김 / 내인생의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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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년 전에 읽은 책도 기억 못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는 와중에 이 책의 저자를 보고 바로 오래 전에 읽은 <완벽한 하루>의 저자임을 바로 떠올린 내가 의외였다. 리뷰를 찾아보니 2008년에 읽었다는 것을 알고 두번 놀랐다. 자그마치 15년 전에 읽은 책이라니. 물론 내용이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참 독특하고 상상력 넘치는 책이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기발하고 생각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내용의 소설이 나올 수는 없을까 아쉬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원제도 이런 뜻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마침 난티나무님께서 올리신 리뷰를 읽고서 원제와는 좀 거리가 있는 제목이라는 것을 알고 반가웠다. 

중학생 셀레나가 주인공. 자신을 가꾸는데 관심이 많고 학교생활에 모두 만족하기 보다는 신랄한 지적을 내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영리하고 당찬 소녀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갑자기, 딸 셀레나가 예술가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부모님으로부터 듣는다. 마치 선고문 같이.


"네가 예술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우린 너를 밀어주기로 했다." (22쪽)


셀레나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지 아직 잘 모를 뿐 더러 부모님에게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다.


"네가 모범생이라고 해서 평범한 과정을 거쳐 의사나 변호사, 교수나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야만 할 필요는 없어. 넌 자유롭단다. 예술가가 될 자유가 있어." (24쪽)


뒤늦게 예술에 대한 매력을 새로이 발견한 부모님은 자신들이 꿈을 이루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대신 딸 셀레나가 예술가로 커주기를 바라게 된 것이라고 추론할 정도로 셀레나는 영리한 아이였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더 잘하느라, 아이들을 교육시키느라, 아이들을 걱정하느라 무분별하게 에너지를 쏟는다. 셀레나는 부모들이 그 에너지의 4분의 1만이라도 그들 자신과 부부의 인생에 쏟는다면, 모든 면에서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셀레나 자신도 부모님의 말과 생각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삶이 더 편안해질 것 같았다. 아마도 그건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되리라. (81쪽)


평소의 내 가 생각하고 있던 바와 일치하는 말을 셀레나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어 무릎을 쳤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을 잘 들여다보면 부모 자신이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일 때가 많다. 그것을 늦게라도 부모 자신이 시도한다면 자식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부모의 노후에도 더 도움이 되고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부모의 모습 자체가 저절로 가르침이 될 수 있을텐데. 스스로 하는 것은 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시키는 것은 아무나 하지만 스스로 하는 것은 아무나 못한다.


학교에서 학기 초마다, 선생님들이 설문지를 돌려 장래 희망을 묻곤 했다. 셀레나는 늘 그 칸을 텅 빈 채로 두었다. 지금은 인생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시기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서서히 드러나는 시기였다. (99쪽)


셀레나는 자기 것이 아닌 삶을 살지 않아도 되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코앞에서 지나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어른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책임질 일이 많아지는 것이고 그래서 두렵기도 하지만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는데 흔들리지 않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부모님은 위기를 겪고 있고 셀레나가 그 결과를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셀레나의 부모님은 셀레나에게 예술가가 되라고 하고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곤경과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에 난방도 제대로 안하고 식사도 초간단식으로 때우는 생활, 부모가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제스쳐 등을 꾸며내는 모습은 읽는 사람도 웃음이 나올 지경이지만 셀레나에게는 자기를 다시 들여다보고 자기가 과연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는 충분히 제공하는 계기가 되어 준 것만은 사실이다. 좀 유치한 방법이었지만.


부모님은 자신들이 완벽한 부모가 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아이를 누구보다 더 재능 있고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사회적 압박을 견디고 있다. 또 자기 부모가 했던 잘못을 다시 저지르려 하지 않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잘못을 저지른다. (112쪽)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가 있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완벽한 부모에 가까와지려고 하는 순간 완벽에서는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결말 구실을 하는 셀레나가 부모님께 쓴 편지는 짧지만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있었다. 흥분하지 않고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으며 조목조목 자기가 전달해야 할 말만 전달하고 있었다. 오히려 어쩌면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던 부모에게 해결의 실마리까지 던지지 않았나 싶다. 부모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극단적 파행을 감행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뜻을 펴나가는 셀레나에게 오히려 한수 배우는 심정이었다.


작가 마르땡 파주는 1975년 파리 출생,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호응도가 높은 작가로서, 그의 이런 기발한 이야기 소재들의 근원에는 그의 이색적인 이력과 밑바닥 경험이 있었다. 대학에서도 일곱 분야를 전공했다고 하니 앞으로도 그에게서 나올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제목은 실제로 반대이다. 셀레나는 생각이 아주 많은 아이였다. 어른이 배워야 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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