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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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斜陽)

1. 저녁때의 햇빛. 저녁때의 저무는 해. 

2. 새로운 것에 밀려 점점 몰락해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네이버 사전)


사양이라는 제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소설의 키워드 역할을 한다. 한 시대의 몰락, 집안의 몰락, 개인의 몰락, 의지의 몰락.

출판사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은 다자이 오사무는 체홉의 <벚꽃 동산>의 일본판 같은 작품을 구상하였고 제목도 <사양>이라고 정해놓았다고 한다. 그 이전에 애인이었던 오타 시즈코의 <사양 일기>를 빌려가서 읽은 바가 있고 여기에서 에피소드를 차용했다는 말도 있는데, 오타 시즈코의 <사양 일기>도 따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고 하니 그 내용도 궁금하다. 출간은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 1년 빨랐다. 

1948년은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실격>을 간행한 해이기도 하고 39세의 짧은 생을 스스로 마친 해이기도 하다. 갑작스런 일은 아니었다. 스무살때 고등학교 기말시험 전날 밤 하숙방에서 첫번째 자살 미수를 시작으로 다음 해엔 여자와 동반 자살 시도하여 여자만 죽기도 했다. 5년 뒤 대학에서 낙제하고 신문사 시험마저 실패하자 또 자살기도. 이후엔 복막염으로 입원중 투여한 진통제 중독으로 고생하면서 건강이 악화된다. 이후에도 자살 기도를 몇번씩. 그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상적이지 못했다. 그가 사망할 무렵은 2차 세계대전으로 자택이 파손되고 지주 제도가 해체 되는 등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 사양의 길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이즈음 그가 이 작품을 발표하자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사양족'이라는 유행어가 생길만큼 이들의 공황상태를 대변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별히 작가의 개인사, 그리고 시대적 상황과 따로 이야기할 수 없는 작품이다.


작품 속 화자는 가즈코라는 여자. 몰락한 귀족 가문의 맏딸이다. 가족으로는 홀로된 어머니와 남동생이 있는데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고 남동생 나오지는 전쟁에 참전 중이라 실질적 가장이다. 집안은 경제적으로 기울어 도쿄의 살던 집에서 지방으로 이사를 해야했고 육체적 노동도 마다하지 않으며 생활을 꾸려나가려 안간힘쓴다. 경제적인 목적도 있지만 정신적인 허무를 메꾸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과거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전쟁에 참전했던 남동생이 돌아오는데 가즈코는 남동생 방에서 허무와 방황의 자조적인 독백으로 가득 차 있는 일기장을 발견하고 읽게 된다.



불에 타 죽는 고통. 괴로워도 괴롭다 단 한마디조차 외칠 수 없는 고래 (古來)의 미증유. 세상이 생긴 이래 전례도 없고 바닥을 알수 없는 지옥의 느낌을 속이지 마시라. 

사상? 거짓말. 주의? 거짓말. 이상? 거짓말. 질서? 거짓말. 성실? 진리? 순수? 모두 거짓말.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 

시시해.

돈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잠든 채 자연사 (自然死)!


전쟁. 일본의 전쟁은 자포자기다.

자포자기에 휩쓸려 죽는 건 싫어. 차라리, 혼자 죽고 싶어.


결국 자살하는 수밖에 도리 없지 않은가.

이렇게 괴로워한들 그저 자살로 끝날 뿐이라는 생각에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인간은, 아니 남자는 '난 훌륭해.', '내겐 멋진 구석이 있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걸까?

사람을 싫어하고, 사람들도 나를 싫어한다. (63-69쪽)


소설속 화자는 가즈코이지만 남동생 나오지의 이 일기가 작가의 생각을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내보이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작가는 이렇게 때로는 가즈코에, 때로는 나오지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뒤에 등장하는 소설가 우에하라의 모습에서도 다자이 오사무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나오지 만큼이나 현실 부적응자인 소설가 우에하라에 대한 가즈코의 사랑은 작가의 내면에서 전멸시킬수 없었던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신의 심판대에 세워진다 한들 조금도 자신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아.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거야. 신이 벌하실 리가 없어. 난 털끝만큼도 잘못한 게 없어. 진짜 좋아하니까 대놓고 당당하게, 그 사람을 한 번 만날 때까지 이틀 밤이건 사흘 밤이건 들판에서 지새우더라도, 기필코. (128쪽)


작품 결말을 보면 더욱 그렇게 연관지어보고 싶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라고 한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은 후 나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는데 망설여졌었다. 그리고 결국 읽었다.

사양을 바라보고 서는 대신 가즈코는 사양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녀가 믿는 사랑과 혁명. 우리에게 끝까지 필요한 것, 사양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과 혁명일지도. 그 흔하디 흔한 말이.


남성 작가가 여자를 주인공 화자로 해서 쓴 소설들이 어떤 것들이 있나 생각해보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점점 더 다자이 오사무의 애인이었다는 오타 시즈코의 일기 내용이 궁금해진다. 이 소설에 대한 기존의 의견들에서 벗어나 생각해본다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재조명해볼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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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8-17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양, 분명히 읽었는데 내용이 기억 나질 않네요. 기록을 안 해 놓으면 그래요. 그래서 알라딘에 꼭 글을 올려야 해요.
128쪽의 글은 확고함이 느껴지네요...^^

hnine 2023-08-17 22:44   좋아요 2 | URL
스포일러가 될까봐 작품 줄거리를 구체적으로 올리지 않느라고 내용 전달은 잘 안되었지요?
저도 책 읽고 나면 간단하게라도 꼭 리뷰를 올리려고 하고 있어요. 그렇게 버릇이 되어 그런지 리뷰를 안 올리고 나면 다음 책 읽는데도 속도가 안 붙더라고요.
이 작품에서 가즈코란 여성은 흔들리고 방황하면서도 확고한 면이 있지요. 제가 페미니즘을 언급한 이유가 거기 있기도 하고요.

2023-08-20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0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22 06: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난 그 여자 불편해
최영미 지음 / 이미출판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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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내는 산문집은 시집보다 덜 반가울 수도, 더 반가울 수도 있다.

좋아하는 시인의 산문집 출간 소식에 덜컥 사서 읽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산문이 시 읽기보다 더 쉬우니, 시인에 대해 더 알수 있는 기회가 되겠구나 하는 기대때문이다.

'난 그 여자 불편해'라는 제목이 '최영미 스럽다' 생각했는데 정작 그런 제목이 나온 이유를 읽어보니 그렇게 의미를 붙일 제목은 아니어서 좀 실망.

그동안 신문 잡지 등 매체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놓았다. 그래서 한 꼭지 글이 길지 않아 더욱 더 읽기에 시간 끌 게 없었다. 더운 날 몰입해서 휘리릭 읽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3부로 나누어, 1부는 세간에 잘 알려진 미투 논쟁에서 비롯한 어느 원로 시인 관련 소송, 재판 과정 이야기, 2부는 작가가 어쩌면 시 만큼 사랑하는 축구, 올림픽 이야기, 3부는 1, 2부와 딱히 관련 없는 소소한 이야기들로 구성했다.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해야 한다는 한국인들의 집단 강박, 남이 아는 건 나도 알아야 하고 시대에 뒤쳐지면 안 된다는 집착 (51쪽)


저자는 이것을 강박이고 집착이라고 했지만 나는 좀 더 소심해서 완전 공감하면서도 이렇게 용기 있게 말하는 대신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해야한다, 가능하면 남들이 하는 대로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없어서 내게 친구가 별로 없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는게 사실이고, 남이 아는 건 나도 알아야 한다며 부지런히 좇아가는 편이 못되어 시대에 뒤쳐지는 것도 사실이지 않나 생각해보게 된다.

날카로와보이는 인상과 달리 어디 나와 인터뷰 하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털털한 면도 많고 허당인 면도 많아 의외다 생각했었는데, 그녀가 수영을 배우는 과정에 대해 쓴 대목을 읽으니 역시 그게 아니었나보다. 완벽주의 기질이 보이는 것도 같다.


한동안 수영장 근처에도 가지 않다가 1990년대 어느 날 물놀이를 다시 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중등 체육 교과서를 사서 수영의 기초를 학습했다. 욕실 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머리를 담갔다 빼는 동작을 되풀이하며 숨쉬기부터 다시 배웠다. 물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려고 나는 일부러 물에 빠지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골라 혼자 수영장에 갔다. 물끄러미 물을 응시하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과거가 되살아나 두려웠지만 '여기서 주저앉으면 영영 수영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내 키를 넘는 가장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바닥을 치고 올라온 그날의 자신감이 내 인생을 이끌었다.

"두려움 그 자체 외에 두려움은 없다." (75, 76쪽)


이렇게 독한 면이 있었구나. 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라도 하고 마는 승부욕이 있었구나. 

그동안 문인이면서도 문단의 중심에 속하지 못하고 외면을 당해오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켜오며, 출판해줄 출판사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 내 책을 출판한다는 당당함의 내면엔 이런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태양처럼 뜨겁지만 차갑게 식힌 문장들을 말로 내보내며 나는 떨지 않았다.


상처를 직시하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그녀들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말해야 자유로워진다.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7쪽,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정한 노력은 보상받는다는 환상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은 나를 속였지만 게임은 나를 속이지 않았다. (77쪽, '게임은 속이지 않는다.')



어느 덧 60대의 나이에 들어섰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당당함과 서슬이 살아있는 작가에게 나는 여전히 관심을 잃지 않고 안테나를 향하고 있다. 아직도 내 손 가까운 곳에 그녀의 시집들을 두고 수시로 꺼내 보며 그녀 특유의 생기와 생동감을 느껴보고 있는 즐거움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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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1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고은시인과의 일에서 최영미시인을 다시 봤구요. 대단하고 훌륭한 용기였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스스로 불편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 사실 참 쉽지 않잖아요. 이 책도 관심가는 책으로 넣어놨었는데 어느새 또 잊고 있었네요. 덕분에 다시 생각나서 이책을 읽게 될 거 같습니다.

hnine 2023-08-17 05:09   좋아요 1 | URL
저는 최영미 시인이 쓴 시의 팬이고 최영미 시인에 대한 팬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끊임없이 책을 사고 읽는 시간들이 쌓여, 당당하게 나의 삶을 꾸려나갈수 있는 용기로 이어질 수 있으면
하는 희망 사항입니다.
요즘 같이 더운 날 이 책으로 하루쯤 더위 휙 날려버릴수 있어요. 다 읽을 때까지 다른데 정신 팔지 않게 붙잡아주더라고요.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 꿈이 너무 많은, 꿈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21
마르탱 파주 지음, 배형은 옮김 / 내인생의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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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년 전에 읽은 책도 기억 못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는 와중에 이 책의 저자를 보고 바로 오래 전에 읽은 <완벽한 하루>의 저자임을 바로 떠올린 내가 의외였다. 리뷰를 찾아보니 2008년에 읽었다는 것을 알고 두번 놀랐다. 자그마치 15년 전에 읽은 책이라니. 물론 내용이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참 독특하고 상상력 넘치는 책이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기발하고 생각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내용의 소설이 나올 수는 없을까 아쉬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원제도 이런 뜻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마침 난티나무님께서 올리신 리뷰를 읽고서 원제와는 좀 거리가 있는 제목이라는 것을 알고 반가웠다. 

중학생 셀레나가 주인공. 자신을 가꾸는데 관심이 많고 학교생활에 모두 만족하기 보다는 신랄한 지적을 내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영리하고 당찬 소녀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갑자기, 딸 셀레나가 예술가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부모님으로부터 듣는다. 마치 선고문 같이.


"네가 예술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우린 너를 밀어주기로 했다." (22쪽)


셀레나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지 아직 잘 모를 뿐 더러 부모님에게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다.


"네가 모범생이라고 해서 평범한 과정을 거쳐 의사나 변호사, 교수나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야만 할 필요는 없어. 넌 자유롭단다. 예술가가 될 자유가 있어." (24쪽)


뒤늦게 예술에 대한 매력을 새로이 발견한 부모님은 자신들이 꿈을 이루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대신 딸 셀레나가 예술가로 커주기를 바라게 된 것이라고 추론할 정도로 셀레나는 영리한 아이였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더 잘하느라, 아이들을 교육시키느라, 아이들을 걱정하느라 무분별하게 에너지를 쏟는다. 셀레나는 부모들이 그 에너지의 4분의 1만이라도 그들 자신과 부부의 인생에 쏟는다면, 모든 면에서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셀레나 자신도 부모님의 말과 생각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삶이 더 편안해질 것 같았다. 아마도 그건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되리라. (81쪽)


평소의 내 가 생각하고 있던 바와 일치하는 말을 셀레나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어 무릎을 쳤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을 잘 들여다보면 부모 자신이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일 때가 많다. 그것을 늦게라도 부모 자신이 시도한다면 자식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부모의 노후에도 더 도움이 되고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부모의 모습 자체가 저절로 가르침이 될 수 있을텐데. 스스로 하는 것은 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시키는 것은 아무나 하지만 스스로 하는 것은 아무나 못한다.


학교에서 학기 초마다, 선생님들이 설문지를 돌려 장래 희망을 묻곤 했다. 셀레나는 늘 그 칸을 텅 빈 채로 두었다. 지금은 인생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시기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서서히 드러나는 시기였다. (99쪽)


셀레나는 자기 것이 아닌 삶을 살지 않아도 되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코앞에서 지나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어른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책임질 일이 많아지는 것이고 그래서 두렵기도 하지만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는데 흔들리지 않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부모님은 위기를 겪고 있고 셀레나가 그 결과를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셀레나의 부모님은 셀레나에게 예술가가 되라고 하고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곤경과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에 난방도 제대로 안하고 식사도 초간단식으로 때우는 생활, 부모가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제스쳐 등을 꾸며내는 모습은 읽는 사람도 웃음이 나올 지경이지만 셀레나에게는 자기를 다시 들여다보고 자기가 과연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는 충분히 제공하는 계기가 되어 준 것만은 사실이다. 좀 유치한 방법이었지만.


부모님은 자신들이 완벽한 부모가 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아이를 누구보다 더 재능 있고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사회적 압박을 견디고 있다. 또 자기 부모가 했던 잘못을 다시 저지르려 하지 않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잘못을 저지른다. (112쪽)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가 있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완벽한 부모에 가까와지려고 하는 순간 완벽에서는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결말 구실을 하는 셀레나가 부모님께 쓴 편지는 짧지만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있었다. 흥분하지 않고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으며 조목조목 자기가 전달해야 할 말만 전달하고 있었다. 오히려 어쩌면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던 부모에게 해결의 실마리까지 던지지 않았나 싶다. 부모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극단적 파행을 감행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뜻을 펴나가는 셀레나에게 오히려 한수 배우는 심정이었다.


작가 마르땡 파주는 1975년 파리 출생,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호응도가 높은 작가로서, 그의 이런 기발한 이야기 소재들의 근원에는 그의 이색적인 이력과 밑바닥 경험이 있었다. 대학에서도 일곱 분야를 전공했다고 하니 앞으로도 그에게서 나올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제목은 실제로 반대이다. 셀레나는 생각이 아주 많은 아이였다. 어른이 배워야 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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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의 노래
공선옥 지음 / 창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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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또는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그들을 소재로 한다거나 말투를 사용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청소년이 실제로 어떻게 세상을 보고 느끼는지 그 시기를 이미 수십년 전에 지나온 사람이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십년전 내가 겪어온 일이니 기억이 잘 나지도 않을뿐 더러 설사 기억이 잘 난다하여도 그것에만 의존해서 써도 안 될 것이다. 회상록이나 자서전이 아니라 창작 소설이라면.

이 책 <선재의 노래>는 소재가 무엇이든, 수필이든 소설이든, 공선옥이라는 작가는 내가 주저 없이 읽게 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가 공선옥이라는 이름이 보여 골라든 책이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던 열세살 선재. 아버지는 한참 전에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죽었고, 엄마는 어디로 갔는지 할머니가 말을 안해주어 모른다. 물건 팔러 장에 갔던 할머니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데 병원에 도착했을때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서재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동네 어른들의 도움으로 화장을 하고 나서 혼자 며칠을 우두커니 보내던 선재는 할머니가 예전에 말한 적 있는 절골이라는 곳을 영정 사진과 유골함을 들고 찾아 간다. 선재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다. 

이제 혼자된 선재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작가 자신이 작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픈 일을 겪었고 그 슬픔 속에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열세살 선재의 슬픔에 육십살 내 슬픔이 기대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났다. 그리고 다시 봄이다. 사방에서 꽃이 피고 새 움이 돋는 봄이 왔다.


할머니 유골함과 영정 사진을 가지고 집을 나선 선재는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길에서 만난다. 혼자서 시간을 통과하고 사람들을 통과한다. 그러면서 자꾸 다짐한다. 


"나는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열세살이라는 나이를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6학년.

지금의 열세살과 작가가 살아온 열세살은 물론 많이 다르겠지만. 이 소설 속 선재는 작가가 살아왔을 시기의 그 순진한 열세살도 아니고 요즘의 열세살로도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열세살이라고 하기엔 당차고 용기도 있어보이지만 어린이로서 그래 보이기 보다는 군데군데 어른 (작가)의 목소리와 생각이 들어간 캐릭터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날, 할머니가 갑자기 내 곁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할머니는 언제까지나 내 곁에서 할머니의 모습으로 살고,

나는 언제까지나 할머니 곁에서

지금의 내 모습으로 살 줄 알았다.

그 외의 다른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날들은

언제가는 끝나게 된다. 그것은 실제 상황이다.


어른 작가의 목소리가 반쯤 덮여진 것처럼 읽게 되는 것은 나만 그런가.


스토리는 단순하고 쉽게 따라가며 읽을 수 있다. 작가의 필력이 있어 무리한 진행이나 급반전이 일어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리고 결말 조차 훈훈하게, 독자를 안심시키며 맺는다. 작가의말에서 새 움이 돋는 봄을 언급했듯이.


청소년 소설이나 동화 쓰기는 어렵다. 차라리 내놓고 내가 겪은 이야기하고 하며 쓰기는 덜 어려워보인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글을 쓰기란 아무리 기성 작가라 해도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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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1
레이몽 라디게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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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라디게. 처음 듣는 이름이다.

1903년 프랑스 출생. 

아버지는 화가였고 7남매중 장남. 어려서부터 영특했는지 장학생으로 학교에 입학하지만 학교가 별로 재미없었는지 겨우 열두살 되었을때 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서 책읽기에 집중했다. 

많이 읽으면 쓰고 싶어지는 법. 1918년 열다섯살에 짧은 글을 써서 잡지나 신문에 게재하기 시작한다. 이때 각별한 친분을 쌓게 되는 사람으로 장 콕도가 있는데 이 둘은 '르 코크'라는 작은 잡지를 창간하기도 하면서 점차 우정와 애정 사이의 각별한 관계가 된다. 

열일곱살때 <육체의 악마> 를 집필 완료하고 스무살때 책으로 출간한다. 워낙 어린 나이 작가의 출판이고 보니 출간 후 출판사의 대대적인 홍보가 있기도 했고 다른 작가들의 찬사와 비평계의 비웃음을 함께 받기도 했다. 소설도 일찍 내었지만 그의 생애도 일찍 마감했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장티푸스로 겨우 스무살의 나이에 사망하였으니까. 

열 몇살때 벌써 동시대 작가, 시인, 화가들과 어울리며 모임을 가졌으니 범재의 수준은 아닌 것이 확실하지만 그 나이에 다섯 명의 정부를 두고 연애 행각을 벌인 이력도 가지고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책 표지는 헝가리 화가 벤추르 줄러의 <나르키소스> 일부.






원화 전체는 아래와 같다.





작가의 생애가 짧았던 만큼 남긴 작품이 많을리도 없고 (한 두 작품 정도 더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겨우 열일곱에 쓴 소설이 이렇게 나중에 세계문학전집으로 발간되어 읽힐 만큼 대단한 무엇이 과연 있는 것일까?  관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제목이 주는 느낌과 작가의 이력을 보건대 소설 내용 역시 작가 자신의 일찍 시작한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애 소설, 사랑 소설이 아닐까? 그 짐작의 수준을 과연 넘어설까. 그래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호기심.

 

작가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주인공 '나'는 학교에 별로 흥미를 못 붙이고 일탈 행위를 일삼으며 다른 곳에서 재미를 찾으려 한다. 


열두살이 될 때까지 나는 카르멘이라는 소녀에게 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풋사랑도 해 보지 못했다. (8쪽)


열두살에 이미 맘에 드는 여자 아이를 점찍고 동생을 시켜 카르멘이라는 이 여자아이에게 사랑 고백 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주인공. 하지만 이 편지는 카르멘 대신 학교 교장 손에 들어가는 일이 벌어져 학교에 소문이 나고 보통의 또래들과 어울리기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주인공 역시 또래들은 시시하게 여겨 이들과 골고루 어울리기 보다는 맘에 맞는 한 친구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쪽을 택한다.


우리 또래들에 대해 그와 내가 품는 '공통의 경멸'은 우리를 한층 가깝게 해 주었다. 우리는 우리들만이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우리들에게만이 여자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25쪽)


이 시기에 터진 전쟁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방종과 무위의 생활에 빠지게 하는데 이웃집에 남편이 전쟁에 참여한 젊은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 이 소설에서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이다. 

유부녀 마르트와 당장의 행복을 쫓는 생활을 즐기면서도 도덕과 이기심, 행복의 정당성을 떠올리기도 하는 '나'는 논리를 따질 줄 아는 천재이면서 육체의 악마이기도 하다.


이성적인 결혼이라니! 말도 안된다. 각자 연애 결혼이 제공하는 이점들만을 상대방에게서 보고 있어 이성(理性)이 차지할 자리가 거기엔 없으니까. (44쪽)


기존의 결혼 제도의 헛점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으며,


무슨 상관이랴! 행복이란 이기적인 것이다. (35쪽)


행복을 인생에 추구해야할 지고의 가치로서가 아니라 행복도 사랑도 결국 이기적인 것일뿐이라는 생각을 드러내고며 비웃기도 한다.


과연 주인공 '나'는 육체적인 사랑에만 탐닉하였을까? 아니었다.


나는 자신의 비판과 가식을 스스로 꾸짖으며 마르트를 내가 전보다 더 사랑하는지 또는 덜 사랑하는지 자문해보면서 며칠을 보냈다. 내 사랑은 모든 것을 버무려서 억지를 쓰고 궤변을 부렸다.

그녀 옆에 누워 있으면 집에 가서 혼자 눕고 싶은 욕망이 항상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니, 그녀와 함께 산다는 것을 견딜수 없어지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한편 나는 마르트 없이 산다는 것 또한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간통의 형벌을 비로소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111쪽)


끊임없이 이렇게 스스로 반문하며 탐색하고 성찰하기도 한다. 차라리 열 몇 살 불 같은 열정에 몰두한 애정 행각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불륜의 관계를 유지해나가면서도 객관화하여 분석하고 탐색하고 미래를 예측해보는 피끓는 청춘이라니. 이 소설 캐릭터의 특징이자 이 작품의 차별점이 여기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관계가 지속되어 감에 따라 여자는 점차 훨씬 연하인 주인공 '나'에게 복종적이 되어가고 그런 여자를 보며 만족스럽기 보다는 현타가 옴을 느끼는 주인공은 자책하며 이 관계가 파괴로 가고 말 것을 예감까지 한다. 


내 기분에 맞춰 마르트를 이끌어 왔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차츰차츰 나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바로 그 점에 대해 나는 자책을 했고 또한 그것이 우리들의 행복을 의식적으로 파괴했다. 그녀가 나와 닮았다는 것, 게다가 그것은 내 작품이라는 사실들이 나를 즐겁게도 해 주고 또한 화나게도 했다. (118쪽)


읽으면서 밑줄 쳐 놓았던 이 대목을 지금 리뷰 쓰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대단한 심리 묘사이며 명쾌하고 논리적 사고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나'는 결국 마르타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내가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간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결코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것을 책임지게 되었던 것이다. (122쪽)


연인의 임신 소식을 듣고 난 '나'의 반응이다.


죽을 뻔 했던 사람은 죽음을 안다고 믿는다. 어느 날 마침내 그 죽음이 나타나면 그는 그 죽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죽음은 아닌데 ......." 하고 죽어 가면서 말하는 것이다. (181쪽)

마지막 반전까지.

내용과 소재는 풋내기 십대와 유부녀 사이의 불륜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17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 놀랄만큼 심리 묘사, 내면 묘사가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되며 사랑과 행복에 대한 통찰, 비판적 시각, 주인공이 사랑과 방탄을 구별해가는 과정들을 예리하게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을 발표하고 나서 쏟아진 문단의 관심에 대해 작가 라디게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써놓은 글 일부를 옮겨본다.

신동 취급을받는 것은 작가로선 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잘못은 '열일곱살에 쓴 소설'이라는 실없는 말 속에, 기괴한 것이라고 까지는 하지 않으나 하나의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지. 

아름다운 날의 저녁나절에 그날의 새벽에 대해 이야기하는 힘찬 매력을 비난하진 않지만 밤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새벽을 이야기 하는 흥미도, 전혀 다른 것이긴 해도 결코 적은 일은 아니다. <누벨 리테레르, 1923년 3월 10일 호>

밤이 오기까지 아직도 멀었는데 새벽에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

이제 새벽에 대해서 밖에 얘기할 수 없게 된 작가.

이 작가 레몽 라디게에게 신동이란 호칭을 붙여준 사람은 장 콕토였고, 라디게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비탄에 빠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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