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는 목수네 집 헌 샅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 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낮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내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 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꿀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 석,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외로운 감정을 이렇게 잘 표현했을 수가 있나.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시.



가끔 가다 꺼내서 펼쳐 읽는 백석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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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우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8
샤를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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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 읽을 책을 네가 한번 골라줘볼래?"

부탁했더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서 아들이 골라준 책이 <파리의 우울>이다.

왜 이책이냐고 물었다.

아들이 대답하길, "파리는 우울한 도시가 아니잖아요."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파리는 우울한 도시가 아닌 것에 반해 이 책에선 우울하다고 했으니 무슨 내용인지 읽어볼만하지 않겠는냐는 뜻이다.

사실 아주 오래 전 최영미 시인이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렘브란트와 보들레르에 대해 발표한 글 ('창비문화' 1995년 1-2월호)을 읽어 알게 된 이후로 이 책은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보질 않았을 뿐 내게 생소한 책은 아니다. 

그 때 밑줄을 그어놓았던 부분이 보들레르의 시 '새벽 한시' 중 일부분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자들의 영혼이여, 내가 찬양했던 자들의 영혼이여, 나를 강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세상의 허위와 썩은 공기로부터 멀게 해주소서. 그리고 당신이여. 나의 신이여.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 아니며 내가 경멸하는 자들보다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줄 아름다운 시 몇편을 쓰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내가 여기 밑줄 그으며 읽은 때가 1997년, 20대 후반이었을 때딘데 지금도 어렴풋이 알것 같다 무슨 맘으로 밑줄을 그었는지. 


보들레르. 182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 경제적으로 부족한 환경은 아니었으나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젊은 시절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20대 중반에는 자살 기도를 하기도 했으며 잡지에 미술 비평 글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여기 저기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857년 그의 나이36세에 그 유명한 시집 <악의 꽃>을 출간하였다. <파리의 우울>은 처음에 <소산문시집>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가 제목을 바꾸어 발표한 산문시집이고 그의 나이 43세때였다. 마비 증세와 실어증 증세를 보이다가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소산문시 (Petits poems en Prose).  책을 펼쳐보면 시처럼 보이는 글은 없고 거의 대부분 산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새로운 장르의 산문 혹은 새로운 장르의 시라고 봐야할지. 보들레르 자신이 직접 소산문시라고 붙였으니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한편의 소설, 두편의 에세이가 남겨져 있지만 보들레르의 대표작이라면 <악의 꽃> 과 더불어 이 책 <파리의 우울>이라고 할 수 있는데 10년 간격으로 발표된 두 책은 매우 닮아있어서 실제로 이 책 <파리의 우울>에는 50편의 소산문시가 실려 있는데 각각에 역자의 주석이 달려있고 상응하는 <악의 꽃>에 실린 시 구절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수수께끼 같은 친구여 말해보아라,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아버지? 어머니? 누이나 형제?

     나에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소

-친구들은?

     당신은 오늘날까지 내가 그 의미조차 모르는 말을 하고 있구려.

-조국은?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위치하는지도 모르오.

-미인은?

    불멸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겠소만

-돈은 어떤가?

    당신이 신을 싫어하듯, 나는 그것을 싫어하오

-그렇군.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느냐, 불가사의의 이방인이여?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흘러가는 구름을 저기 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



('이방인' 전문)

아버지, 어머니, 형제, 조국, 여인, 신, 모두를 거부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흘러가는 구름'이다. 이 이방인의 정체는 시인 자신일 것이다. 피를 나눈 가족은 물론 속인의 무리에서 스스로를 따로 떨어뜨려놓고 생각하는 '고독'은 보들레르 시의 키워드를 이루고 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불멸의 여신이나 흘러가는 구름처럼 불멸이어야 한다. 초자연적이어야 한다. 실제로 보들레르는 자연을 본능, 욕구와 같은 차원으로 보았고 자연은 인간에게 욕구 충족을 위한 범죄를 부추길 뿐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근본적인 본능이며 이런 본능이나 자연스런 충동에 자신을 맡기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 결여된 동물과 다를바 없다고 하였다. 잘 알려진대로 보들레르의 여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이런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과 같은 차원으로서 여성은 정신적 욕구 없이 자연스런 욕구만 충동하는, 천박하고 혐오감의 대상이라고 본 것이다. 

위에서 최영미 시인도 인용한 바 있는 <새벽 1시에>라는 시는 오래 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마침내! 혼자가 되었군! 

이렇게 시작하는 시는 

가증스러운 삶이여! 공포의 도시여!

라면서 대중으로부터 분리를 해방으로 보았다. (*댄디즘 dandyism: 대중의 천박함을 경멸하고 고고한 고독을 찾는 주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유행)

그에게 시란, 예술이란 무엇이었을까.

인간의 무리, 자연의 욕구를 경멸하는 대신 보들레르는 예술과 시가 악에 물든 인간에게 인간 본래의 존엄성을 회복해준다예술의 속죄적 역할을 지향하였다.

하지만 '군중'이라는 글에서 보이는 그의 경향은 과연 보들레르의 마음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다시 한번 의문이 들게 하기도 한다.

다수의 군중과 고독, 이 두 어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적극적인 시인에게는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동등한 어휘다. 자신의 고독을 채울 줄 모르는 자는 역시 분주한 군중 속에서도 홀로 존재할 줄 모른다. 

시인은 제멋대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동시에 타인이 될 수도 있는 비길 데 없이 훌륭한 특권을 누린다. 육체를 찾아 방황하는 넋처럼 그는 자신이 원할 때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간다. ('군중' 일부)

그에게 군중이란 두가지 상태로 인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무리로서의 군중과 (그가 경멸해마지않는) 자유롭고 편파성 없는 지성으로서 다른 사람들 무리 속에 스며들어가 느껴보는 군중이다. 후자는 시인 혹은 시나 예술에 의해 다듬어진 사람들에게 가능하다. 보들레르가 파리의 우울이라고 얘기하며 파리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모습의 파리를 따로 가지고 있었듯이, 그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군중은 자기가 그 일원으로 있을 때의 군중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들어가 암행을 즐길 때의 군중이었다.

모순. 이중적. 이율배반적이며 상호보완적.

파리의 화려한 중심 이변에는 파리의 중심에서 밀려난 소외 계층이 있다. 시인의 관심을 끈 것은 화려한 중심이 아니라 밀려난 계층의 파리였다. 늙은 독신자, 낙오자, 잊혀진 자, 병든자, 창녀, 광대. 이들의 파리는 우울하다. 이들에 대한 시인의 연민이 파리의 우울의 정체였을까. 그렇다고 해도 보들레르의 이런 연민의 감정은 그의 시 속에서 연민으로 공감할 수 있게 쓰여졌다기보다 오히려 그 반대의 어휘로 표현된다. '가난뱅이를 때려눕히자'라는 그의 소산문시는 그래서 잘 해석되어야 한다.

이 글의 주석에서 역자는 '폭력에 의한 시인의 치료책이 늙은 거지에게 자존심과 생기를 되찾아준다' (276쪽)고 했다. 그 시대의 순진한 휴머니스트의 주장에 대한 보들레르의 항의이며 동시에 시인 자신의 이상을 담고 있다면서.

파리에서 외로웠던 사람, 겉으로 보이는 경박함과 그 속에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고독을 가난뱅이들, 늙은이, 병든자의 모습에서 발견하고 동일시하며, 자신을 패대기치듯이 그들을 짓밟으며 시로써 포효한 사람.


그의 우울은 보통의 우울과 다르다. 그의 고독은 우리가 마주한 고독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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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기행 2 펭귄클래식 18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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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이미 이탈리아의 로마, 베네치아, 볼로냐, 나폴리, 시칠리아를 여행하였고 이 여행기록이 <이탈리아 기행 1>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괴테는 로마를 다시 방문하기로 한다. 두번째 방문에서 10달을 머물렀으니 사실 방문이라기 보다 로마'체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1권이 비교적 여행기의 성격을 띠는 반면에 2권은 한층 성숙된 생각과 감상이 담겨 있고 작품 구상, 새로운 배움의 과정을 기록한, 한권의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었다.

두번째 로마에 머무는 동안 괴테는 <타소>, <타우리우스의 이피게니아>, <파우스트>, <에그몬트> 등 작품의 완결을 위한 구상에 많은 시간 할애하였고, 스케치와 그림 그리기에 매진하기도 한다. 

괴테에게 로마는 커다란 배움의 장이었다.

나는 금방 졸업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예술에 대한 내 지식, 보잘것없는 재능을 철저히 다듬어 완전히 무르익게 해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반쯤 되다 만 사람으로 여러분 곁에 되돌아갈 것이고, 그리움, 노력, 버둥거림과 잠행이 또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15쪽)


괴테는 문학에만 관심있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로마에 와서 제일 열심히 한 것 중 하나는 화가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과 조형예술에 매진한 것인데 그동안 성당, 박물관 등의 유명한 그림과 조각을 보러 다니며 예술의 한 분야인 미술에 대한 재능도 발굴하고 싶었나보다. 여행하는 동안 괴테와 동행해준 사람들은 시중드는 하인이 아니라 음악, 미술, 철학, 문학, 고고학등 각 분야에서 괴테의 조력자가 되어줄 사람들이었다. 이 책의 표지에서 볼 수 있는 괴테으 초상화를 그려준 티슈바인이 그렇고, 앙겔리카, 라이펜슈타인, 하케르트, 모리츠, 하인리히 마이어등, 늘 괴테의 주위에 머물며 괴테의 친구이자 교사 역할을 해주었다.


너무나 흥겨운 내 생활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쓰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풍경 그리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 이곳의 하늘과 땅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목가적인 풍경도 몇 군데 발견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주위에 늘 새로운 대상이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103쪽)


하지만 책의 끝부분에 가서는, 그림에 대한 훈련을 단념하기로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성실하게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살며 앞날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애당초 문학을 하도록 태어났으며 앞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껏해야 십 년 동안 재능을 십분 발휘해서 무언가 명작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하루가 다르게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로마에 비교적 오래 머물면서 얻은 수확이 있다면 조형 예술 훈련을 단념했다는 겁니다. (242쪽)


순간이 전부이며 이성을 가진 인간의 유일한 특권은 스스로의 삶을 주도할 수 있는 한 분별 있고 행복한 순간을 최대한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처신하는 데에 그 본령이 있다고... (111쪽)


한때 계몽주의자로서 이성을 중요시했던 괴테도 그의 친구이자 조력자인 헤르더의 글을 읽고난 결론을 말하면서, 행복한 순간을 최대한 가질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의 특권이라고 했다.


이렇게 <이탈리아 기행 2>에는 로마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고국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친분있는 사람들의 발표글, 그들로부터 받은 편지 등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중 모리츠의 논문 '미의 조형적 모방에 관하여' (264-273쪽)란 글은 나는 여기서 처음 보는 이름이지만 지금 읽어도 내용이 진지하고 공감을 불러일으켜, 앞에 종교적 성인의 글을 옮겨 놓은 부분은 설렁설렁 읽은데 반해 모리츠의 이 짧은 논문은 눈에 힘을 주어 밑줄 치며 읽었다. 괴테도 훌륭한 문학가이지만 그의 주위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참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사육제에 대한 부분도 상당 부분 차지한다. 여행객의 신분으로 사육제를 단순히 구경하는 차원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어떻게 진행이 되고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참여하는 사람들의 복장, 춤, 노래, 그것들의 의미 분석까지, 글로 썼음에도 눈에 그려지도록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써놓았다. 괴테는 사육제라는 큰 행사 속에 담겨진 인간 군상의 습성과 의미를 보고자 했던 것 같다. 로마의 많은 종교적인 축제와 사육제가 어떻게 다른가도 언급했다.

우리가 로마의 사육제를 기록할 때 과연 그런 축제를 제대로 묘사할 있겠냐는 반론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각적인 대상이며 생동감 넘치는 저 커다란 집단은 직접 눈앞에서 보아야 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구경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로마의 사육제는 사실 민중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 주최가 되는 축제입니다. (196쪽)

사육제를 구성하는 여러 행사중 '가장'을 서술한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 나라에도 탈춤, 가면극이 있듯이 로마 사육제에도 각양각색으로 가장을 하고 신분을 감춘 상태에서 현실에서 공개적으로 쉽게 오고가지 않을 말을 서슴없이 던지는 것이다. 이중에는 고대 신을 흉내내는 어릿광대도 있고 변호사 분장을 한 어릿광대, 정치인인 양 행세하는 사람도 있다. 

변호사 한명이 법정에서처럼 열변을 토하며 잰걸음으로 군중 속을 헤집고 들어옵니다. 행인들을 붙잡고 모조리 법정에 세우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유부녀에게는 정부와 바람을 피운다고 야단치고, 아가씨에게는 연애를 한다고 질책합니다. 누구에게나 창피를 주고 난처하게 만들 궁리를 합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람을 붙잡아 세웁니다. (205쪽)

가장 행렬중 퀘이커 교도들이 등장하는 것은 의외였다. 카톨릭교가 주 종교인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에 거의 있지도 않은 영국의 퀘이커 교도가 사육제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이때 로마를 방문한 외국인들, 특히 화가들은 곳곳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괴테는 사육제에 참가한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을 관찰하고 그리는 화가들도 눈에 담는다. 사육제 행사가 끝나고 끝 마무리는 어떻게 정리되는가를 보면서 질서 없이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한탄을 하기도 한다.

독일 출신의 이성적인 괴테의 눈에 사육제는 처음엔 소동과 흥분의 '짓거리'로 보였고, 아무리 예술적인 시선으로 보려고 해도 그때마다 탐탁잖고 섬뜩한 인상을 풍겼다고 했으나, 곧 그런 생각과 화해를 하기로 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일 년 내내 로마에 머물며 품위 있는 대상에 몰두하다 보니 그런 것에 익숙해진 정신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나보다 라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인파와 흥분의 행렬만 보는 괴테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파로 가득 찬 그 좁고 기다란 길은 우리에게 인생 행로를 떠올리게 해줍니다. 그곳에선 맨 얼굴이든 가장을 했든, 발코니에서든 관람석에서든 모든 구경꾼은 자신의 앞과 옆의 오직 한 곳만을 바라다봅니다. 나아간다기보다는 오히려 떠밀리면서, 자기 뜻으로 멈춘다기보다는 오히려 막히면서 더 볼만하고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곳으로 나아가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도 다시 길이 막히게 되고 급기야는 밀려나고 맙니다. (236쪽)

사육제의 한가운데서 괴테는 사람들이 한 평생 살아가는 과정을 본다.


로마를 떠날 때가 다가왔지만 그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로마에 와서 점점 더 행복해지고 하루가 다르게 즐거움도 커지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가장 머무를 만한 가치가 있을 때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실로 가슴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적이 안심이 됩니다. (260쪽)

만족한다면서도 그는 떠나면서 서운한 마음을 시로 남기며 글을 마친다.


1년 10개월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괴테는 그동안 완결하지 못하고 있던 원고들을 마칠 수 있었다.

딱딱한 공직 생활을 하면서 부와 명예는 갖췄으나 타고난 탐구욕과 다방면의 관심사를 맘껏 펼칠 기회를 충분히 펼치지 못하는 생활에 이력이 날 즈음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창작욕을 되찾아 온 괴테에게 이탈리아는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 할 수 있게 해준 커다란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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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8-20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고전에 빠지고 싶더군요.^^

hnine 2024-08-21 11:56   좋아요 2 | URL
재미없거나 지루해도 손해보는 느낌이 없지요. 재미있으면 더욱 좋고요.
고전은 오래된 책이라기 보다 오랫동안 읽혀온 책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이탈리아는 언젠가 꼭 가봐야지 하는 나라 중 하나인데, 뭔가 공부를 많이 해서 가야할 것 같아서 부담도 미리 되는 나라이기도 하지요.
 
이탈리아 기행 1 펭귄클래식 1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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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온 여행기라면 어림없다. 화보같은 사진이 보는 동안 지루할 틈을 주지 않을 뿐 더러, 구구한 설명보다 사진과 지도로 방문한 지역을 잘 보여줄 수 있어 글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200년도 더 전에 나온 이 기행문은 아무리 대문호 괴테가 썼다지만 분명 지루할거라 짐작하여 시리즈로 구입한 책들 사이에서 여태 손을 대지 않고 있던 책이었다.

1749년생 괴테가 작정하고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것은 1786년 (비교를 위해 1786년 우리나라는 조선 정조 임금 시대), 그의 나이 38세였다. 일년 십개월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기록인 이 책은 1권과 2권으로 나와 있는데 1권엔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를, 2권에는 다시 들른 로마에서의 체류기를 담고 있다. 1권만 다 읽은 상태이지만 2권으로 넘어가기 전 1권을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어 쓴다. 아마도 2권까지 다 읽은 후의 느낌은 다를지 모르고, 1권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느낌도 달라질지 모르지만 그러면 그런대로 의미가 있겠다 싶다.


시작은 이렇다.

1786년 9월 3일

나는 새벽 3시에 카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왔다.

 (*카를스바트는 현재 체코 영토)

나는 여행 가방과 오소리 가죽 배낭만을 꾸린 채 단신으로 우편 마차에 몸을 실었고, 아침 7시 30분에 자욱하게 안개 낀 아름답고 고요한 츠보다우에 도착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괴테의 아버지는 황실 고문관, 어머니는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공직에 몸을 담기도 했지만 창작 활동에 대한 관심이 커서 문학에 대한 공부는 물론,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은, 한마디로 다방면에 관심 많고, 재능있고, 궁금한 것은 부족함 없이 탐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살 수 있었던 괴테이다. 

26살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고 <파우스트>로 더욱 유명해졌을 즈음 오랫동안 꿈꿔 오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시작 부분에서 보듯이 혼자 몸으로,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않은채였다. 자아에 대한 성찰과 예술적인 탐구를 위해서였다고 하나, 그러기까지 여러 가지 상황과 사건들이 동기를 만들어오지 않았을까 싶다. 괴테의 아버지가 이미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고 하니 그 영향도 받았을 것이고 말이다.


1권에는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 여행이 주 내용이지만 거쳐간 작은 마을, 지역까지 아주 세밀하게 써놓았다. 어디에서는 누가 동행을 해주었고, 어떤 교통 수단을 이용했으며, 자연적 환경이 어떻고,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어떤 것을 보았는지, 꼼꼼하게 기록을 해놓았다. 기록도 기록이지만 관심없는 곳을 가고 관심없는 것을 관찰하지 않았을테니, 괴테의 관심과 지식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어떤 지역에 처음 발을 들이면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괴테의 경우엔 아마도 그 지역의 기후, 토양, 암석 등 자연적 특징을 세밀하고 살피고 관찰하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직업이라면 모를까 요즘에도 이런 사람은 없을것이다 싶을 정도이다. 때로 어떤 자연현상에 대해 왜 그럴까 의문을 갖고 추측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맞든 틀리든).

나는 지구라는 덩어리, 그리고 특히 그 두드러진 지반이 변함없이 항상 똑같은 중력을 미치는 게 아니라 이러한 중력이 어떤 맥동(脈動) 상태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중력이 필연적인 내적 요인, 어쩌면 우연한 외적 요인으로도 때로는 커지다가 때로는 줄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2쪽)

겉으로 나타나는 자연현상이 지역에 따라 다르고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원인을 생각해보고 그 원인은 보다 더 근본적인 데에 있을거라 확신하여 지구 중력에 까지 확장하여 추측해보는 부분이다.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타고 보는 풍경에 대한 그의 감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눈부신 햇살을 받고 석호를 통과해 가면서 나는 곤돌라 뱃전에서 뱃사공들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경쾌한 몸놀림으로 노를 저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베네치아 유파가 가장 최근에 그린 최고의 작품을 보는 듯했다. 햇살은 대상의 고유색을 현란하게 부각시켰고 그늘진 부분도 너무 환해서 어느 정도 다시 빛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115쪽)

지질과 기후, 식물에 대해서 쓴 부분은 딱딱하고 지루하다가도 이런 비유에선 그의 문학가로서의 기질이 읽힌다.

한편 산 마르코 성당의 둥근 지붕과 천장을 보며 성당이 지어질 당시 사용되었던 기술이 전해지고 있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아쉬움을 쏟기도 한다.

고대인에게 바닥을 마련해주고 기독교인에게 천장을 둥글게 해주었던 이 기술이 지금 와서는 통이나 팔찌 따위에 쓰이게 되었다. 이 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열악하다. (116쪽)

여기서 이 시대는 물론 괴테가 살던 18세기를 후반을 말한다.

아시시에서 폴리뇨로 가는 길은 (아시시는 알고 있지만 폴리뇨는 들어본 적이 없다) 네 시간이 걸리는 산길이었지만 오른편에 나무가 우거진 계곡이 펼쳐진, 지금까지 걸어온 산책로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산책길이었다니 기억했다가 나중에 나도 기회가 되면 걸어보고 싶어졌다.

폴리뇨를 여행하는 부분에서는 '이탈리아는 자연의 혜택은 가장 많이 받은 나라지만 좀 더 편리하고 새로운 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기계나 기술 면에서는 다른 모든 나라에 훨씬 뒤처져 있다'고 하면서, 무사태평 생활방식이라고까지 표현하기도 했다. 독일인의 눈으로 본 이탈리아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나보다.

예나 지금이나 혼자 여행하는 일은 자유로움을 댓가로 어려움도 혼자 몫인 것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나는 홑몸으로 아무런 준비 없이 이 나라를 돌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이제야 뼈저리게 느낀다. 서로 다른 화폐며 마부, 물가, 열악한 숙소 때문에 날마다 어려운 일을 겪는다. 나처럼 처음으로 혼자 여행하며 끊임없는 즐거움을 기대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크나큰 불행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유일한 소망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나라를 한번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익시온처럼 바퀴에 묶여 로마로 끌려간다 하더라도 아무런 불평도 하니 않으련다. (162쪽)

이탈리아로 떠날때는 혼자였긴 했지만 여행하는 대부분 동행자가 있긴했다. 티슈바인도 그런 동행인 중 한 사람이었다. 가는 곳마다 글을 쓰듯이 그는 그림을 그려 남기려는 화가였는다. 괴테는 여행하는 동안 자신과 다른 분야의 예술을 하는 티슈바인의 작업을 경이로운 눈으로 관찰하며 자주 언급해놓고 있는데 본문 중에 티슈바인이 괴테의 초상화를 그리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나는 티슈바인이 자주 주의 깊게 나를 관찰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내 초상화를 그릴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구상은 끝났고 캔버스도 이미 준비되어 있다. 나는 흰 외투를 걸친 여행객의 모습으로 실제 크기에 따라 그려지게 된다. 나는 무너져 내린 오벨리스크에 앉아 저 멀리 배경으로 로마의 캄파니아 지역의 페허를 굽어보게 된다. (207쪽)

이 그림은 현재 이 책 <이탈리아 기행>의 책 표지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그림이고 같은 그림이 민음사의 <파우스트> 표지에도 사용되었다. 


나폴리에 가서는 당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베수비오 화산에 직접 올라가는 모험을 하기도 한다. 화산 활동을 보는 것이 경이롭고 새로운, 아름다운 경험이라고 했다. 그리고 말했듯이 자연현상에 관심이 많았던 괴테였으니까.

베수비오 화산이 돌덩이와 화산재를 내뿜고 있어서 밤에는 산봉우리가 빨갛에 달아오르는게 보인다. (236쪽)


인근에 베수비오 화산이 서너 개가 더 있다 하더라도 나폴리인이 자기 도시를 떠나려 하지 않고 도시의 시인들이 이곳의 지형을 축복하고 몹시 과장해서 노래해도 이들을 나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여기서는 누구도 로마를 뇌리에 떠올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자유로운 지형에 비하면 테베레 강바닥에 위치한 세계의 수도는 나쁜 곳에 자리 잡은 오래된 수도원 같은 생각이 든다. (258쪽)

여기서 테베레 강바닥에 위치한 세계의 수도란 로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나폴리에 오면 로마는 그저 강바닥에 위치한 오래된 수도원으로 비유될 뿐이다.

나폴리에 4주 동안 머물면서 괴테는 이곳의 지형과 자연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고서 배를 타고 다음 행선지인 시칠리아 섬으로 간다. 여기서는 크니프라는 화가가 동행을 한다. 

시칠리아로 가는 배에서 배멀미를 심하게 한 것부터 시작해서 그곳에서는 그리 좋지만은 아니었던 듯. 팔라르모와 알카모 등을 방문하면서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의 시칠리아 여행이 즐겁게 생각되지 않았다. 우리가 본 것이라곤 자연의 폭력, 시대의 음험한 술책, 자신들의 적대적인 분열이 낳은 원한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인류의 부질없는 노력밖에 없었다. 카르타고인, 그리스인 및 로마인과 이들의 수많은 후손은 건설과 파괴를 일삼아왔다. (419쪽)

시칠리아의 많은 지역과 사원이 황폐화되고 허물어진채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한탄스러웠던 것이다.

시칠리아를 떠나 다시 나폴리를 거쳐 로마를 재방문하는데, 두번째 나폴리를 가보고서 이탈리아 북부 다른 도시와의 차이점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서술해놓았는데 나폴리의 생동감의 원인이 어디에 있나 나름대로 분석해보려고 했다. 역시 기후가 큰 원인. 로마를 비롯해 이탈리아 북부는 농사보다 산업에 의지해야 하는 환경, 산업이 발달한 곳이라서 일년 사시사철 노동과 근면에 적응된 생활을 해야하고 미리 대비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지만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는 더없이 좋은 자연의 혜택을 받은 곳이라서 '노동의 땅'이 아니라 '경작의 땅', '행복의 땅'이라고 했다. 풍부한 바다가 있고 경작지가 있어 식량을 제공해주니 단순히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일하는 것 같다고. 대신 수공업자들은 북부에 비해 훨씬 기술이 뒤떨어져 있고 공장도 서지 않으며 지식인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나폴리파의 어떤 화가도 위대해지지 않았고 성직자마저 안락한 생활을 하는 등, 위인들도 대부분 감각적인 쾌락과 화려함 및 오락을 추구하기 위해자신들의 재산을 허비한다고 했다. (450쪽)

어딜가나 사람들이 무척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여행객으로서 나폴리는 더 할 나위 없이 유쾌한 곳이었으리라. 

이렇게 독일에서 베니치아,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 다시 나폴리를 거쳐 괴테는 두번째 로마로 향한다. 그것이 2권의 내용이다.


읽는게 생각만큼 지루하지는 않다. 괴테의 자세한 여정과 관찰의 범위, 기록을 읽고 있노라니 같은 곳을 가도 보고 오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는것을 새삼 느낀다. 과거, 현재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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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욕심 자식욕심 두루두루 많아서 논농사 자식농사 많이 짓고 많이 생산하여서 늘그막에 보람 크신 검바골 대모 고향 가서 뵐 적마다 눈에 띄게 검불머리 흰머리 늘어가지만 마음은 언제나 대숲으로 살아 일에 게으른 젊은것들에 회초리 되고 귀감이 되는 검마골 대모 그 대모 보면 사 년 전 간경화에 두들겨 맞고 쓰러져 끝내 못 일어나신 울엄니 생각이 나서 눈시울 붉어진다 대모와 살아생전 울엄니 사시사철 이웃하고 사시면서 일 년이면 열댓 차례씩 병아리처럼 토닥토닥 잘도 싸우고 그 사이사이에 금세 변덕도 심해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온 세월이 부지기수다 대모의 맏이인 찬범아저씨 서울 가서 큰 공부 마치고 은행원으로 취직된 것이 우리 동네 제일로 큰 자랑이었는데 울엄니 다섯 마지기 자갈논으로 여섯 형제 가운데 맏이와 셋째를 높은 공부 시켜 놓으니 시샘 난 대모 그걸 못 참아 틈만 나면 시비 붙고 쑥덕공론 심하여 울엄니와 대판거리해대는 식이었다 한번은 맏이의 가을 학기 등록금 기일 내에 납부 어려워 전전긍긍 울엄니 며칠을 전전반측하다가 염의 버리고 대모 찾아가 통사정 목 놓았다는데 그 대모 벽장 속 깊이 감춰돈 목돈 꺼내 침 발라 센 후 "돈 썩어도 이 돈 못 빌려준다" 면박을 줘서 그 길로 득달같이 달려와 이불 뒤집어쓰고 "독한 놈의 여편네 징한 여편네" 치미는 울화 욕으로 달래던 엄니 그 일 끝 내 못 잊고 괴로와하다 저세상 가기 두 달 전 문병 오신 대모의 소똥 같은 눈물이 여윈 볼 흥건히 적셔놓으니 그제서야 노여움의 벽 허물어 대모의 손 굳게 잡았다 그리하여 두 달 후에는 뚝 끊었던 대모의 발걸음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집 들러 집 안팎 살림살이 당신 일로 삼아서 챙겨주시니 살아생전 울엄니 잔소리가 밤낮없이 무꽃으로 펴서 웃고 있다고 어쩌다 고향 챙기면 검바골 대모 내 손에 감이며 대추 혹은 토실한 알밤 넣어주시며 한참을 먼산 바라 눈물 글썽이신다



-  이 재무 <검바골 대모> 전문 -




시인의 어머니는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시 중에 나오는 맏이는 육남매의 장남인 시인 자신을 가리킨 듯.


소설 같은 시, 소설보다 좋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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