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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 꿈이 너무 많은, 꿈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21
마르탱 파주 지음, 배형은 옮김 / 내인생의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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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년 전에 읽은 책도 기억 못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는 와중에 이 책의 저자를 보고 바로 오래 전에 읽은 <완벽한 하루>의 저자임을 바로 떠올린 내가 의외였다. 리뷰를 찾아보니 2008년에 읽었다는 것을 알고 두번 놀랐다. 자그마치 15년 전에 읽은 책이라니. 물론 내용이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참 독특하고 상상력 넘치는 책이었고 우리 나라에서도 이렇게 기발하고 생각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내용의 소설이 나올 수는 없을까 아쉬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원제도 이런 뜻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마침 난티나무님께서 올리신 리뷰를 읽고서 원제와는 좀 거리가 있는 제목이라는 것을 알고 반가웠다. 

중학생 셀레나가 주인공. 자신을 가꾸는데 관심이 많고 학교생활에 모두 만족하기 보다는 신랄한 지적을 내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영리하고 당찬 소녀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갑자기, 딸 셀레나가 예술가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부모님으로부터 듣는다. 마치 선고문 같이.


"네가 예술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우린 너를 밀어주기로 했다." (22쪽)


셀레나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은지 아직 잘 모를 뿐 더러 부모님에게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다.


"네가 모범생이라고 해서 평범한 과정을 거쳐 의사나 변호사, 교수나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야만 할 필요는 없어. 넌 자유롭단다. 예술가가 될 자유가 있어." (24쪽)


뒤늦게 예술에 대한 매력을 새로이 발견한 부모님은 자신들이 꿈을 이루기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대신 딸 셀레나가 예술가로 커주기를 바라게 된 것이라고 추론할 정도로 셀레나는 영리한 아이였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더 잘하느라, 아이들을 교육시키느라, 아이들을 걱정하느라 무분별하게 에너지를 쏟는다. 셀레나는 부모들이 그 에너지의 4분의 1만이라도 그들 자신과 부부의 인생에 쏟는다면, 모든 면에서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셀레나 자신도 부모님의 말과 생각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삶이 더 편안해질 것 같았다. 아마도 그건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되리라. (81쪽)


평소의 내 가 생각하고 있던 바와 일치하는 말을 셀레나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어 무릎을 쳤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을 잘 들여다보면 부모 자신이 과거에 이루지 못한 꿈일 때가 많다. 그것을 늦게라도 부모 자신이 시도한다면 자식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부모의 노후에도 더 도움이 되고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고, 부모의 모습 자체가 저절로 가르침이 될 수 있을텐데. 스스로 하는 것은 시키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시키는 것은 아무나 하지만 스스로 하는 것은 아무나 못한다.


학교에서 학기 초마다, 선생님들이 설문지를 돌려 장래 희망을 묻곤 했다. 셀레나는 늘 그 칸을 텅 빈 채로 두었다. 지금은 인생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시기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서서히 드러나는 시기였다. (99쪽)


셀레나는 자기 것이 아닌 삶을 살지 않아도 되고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을 코앞에서 지나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어른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책임질 일이 많아지는 것이고 그래서 두렵기도 하지만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는데 흔들리지 않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부모님은 위기를 겪고 있고 셀레나가 그 결과를 감수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셀레나의 부모님은 셀레나에게 예술가가 되라고 하고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곤경과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에 난방도 제대로 안하고 식사도 초간단식으로 때우는 생활, 부모가 경제적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제스쳐 등을 꾸며내는 모습은 읽는 사람도 웃음이 나올 지경이지만 셀레나에게는 자기를 다시 들여다보고 자기가 과연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기회는 충분히 제공하는 계기가 되어 준 것만은 사실이다. 좀 유치한 방법이었지만.


부모님은 자신들이 완벽한 부모가 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아이를 누구보다 더 재능 있고 매력적인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사회적 압박을 견디고 있다. 또 자기 부모가 했던 잘못을 다시 저지르려 하지 않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잘못을 저지른다. (112쪽)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가 있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완벽한 부모에 가까와지려고 하는 순간 완벽에서는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결말 구실을 하는 셀레나가 부모님께 쓴 편지는 짧지만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있었다. 흥분하지 않고 감정에 치우치지도 않으며 조목조목 자기가 전달해야 할 말만 전달하고 있었다. 오히려 어쩌면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던 부모에게 해결의 실마리까지 던지지 않았나 싶다. 부모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극단적 파행을 감행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뜻을 펴나가는 셀레나에게 오히려 한수 배우는 심정이었다.


작가 마르땡 파주는 1975년 파리 출생,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호응도가 높은 작가로서, 그의 이런 기발한 이야기 소재들의 근원에는 그의 이색적인 이력과 밑바닥 경험이 있었다. 대학에서도 일곱 분야를 전공했다고 하니 앞으로도 그에게서 나올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제목은 실제로 반대이다. 셀레나는 생각이 아주 많은 아이였다. 어른이 배워야 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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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의 노래
공선옥 지음 / 창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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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또는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그들을 소재로 한다거나 말투를 사용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청소년이 실제로 어떻게 세상을 보고 느끼는지 그 시기를 이미 수십년 전에 지나온 사람이 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십년전 내가 겪어온 일이니 기억이 잘 나지도 않을뿐 더러 설사 기억이 잘 난다하여도 그것에만 의존해서 써도 안 될 것이다. 회상록이나 자서전이 아니라 창작 소설이라면.

이 책 <선재의 노래>는 소재가 무엇이든, 수필이든 소설이든, 공선옥이라는 작가는 내가 주저 없이 읽게 되는 작가들 중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가 공선옥이라는 이름이 보여 골라든 책이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던 열세살 선재. 아버지는 한참 전에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죽었고, 엄마는 어디로 갔는지 할머니가 말을 안해주어 모른다. 물건 팔러 장에 갔던 할머니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데 병원에 도착했을때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서재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동네 어른들의 도움으로 화장을 하고 나서 혼자 며칠을 우두커니 보내던 선재는 할머니가 예전에 말한 적 있는 절골이라는 곳을 영정 사진과 유골함을 들고 찾아 간다. 선재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다. 

이제 혼자된 선재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작가 자신이 작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픈 일을 겪었고 그 슬픔 속에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열세살 선재의 슬픔에 육십살 내 슬픔이 기대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났다. 그리고 다시 봄이다. 사방에서 꽃이 피고 새 움이 돋는 봄이 왔다.


할머니 유골함과 영정 사진을 가지고 집을 나선 선재는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길에서 만난다. 혼자서 시간을 통과하고 사람들을 통과한다. 그러면서 자꾸 다짐한다. 


"나는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야."


열세살이라는 나이를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6학년.

지금의 열세살과 작가가 살아온 열세살은 물론 많이 다르겠지만. 이 소설 속 선재는 작가가 살아왔을 시기의 그 순진한 열세살도 아니고 요즘의 열세살로도 보이지 않는다. 과거의 열세살이라고 하기엔 당차고 용기도 있어보이지만 어린이로서 그래 보이기 보다는 군데군데 어른 (작가)의 목소리와 생각이 들어간 캐릭터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날, 할머니가 갑자기 내 곁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할머니는 언제까지나 내 곁에서 할머니의 모습으로 살고,

나는 언제까지나 할머니 곁에서

지금의 내 모습으로 살 줄 알았다.

그 외의 다른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은 날들은

언제가는 끝나게 된다. 그것은 실제 상황이다.


어른 작가의 목소리가 반쯤 덮여진 것처럼 읽게 되는 것은 나만 그런가.


스토리는 단순하고 쉽게 따라가며 읽을 수 있다. 작가의 필력이 있어 무리한 진행이나 급반전이 일어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리고 결말 조차 훈훈하게, 독자를 안심시키며 맺는다. 작가의말에서 새 움이 돋는 봄을 언급했듯이.


청소년 소설이나 동화 쓰기는 어렵다. 차라리 내놓고 내가 겪은 이야기하고 하며 쓰기는 덜 어려워보인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글을 쓰기란 아무리 기성 작가라 해도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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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1
레이몽 라디게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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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라디게. 처음 듣는 이름이다.

1903년 프랑스 출생. 

아버지는 화가였고 7남매중 장남. 어려서부터 영특했는지 장학생으로 학교에 입학하지만 학교가 별로 재미없었는지 겨우 열두살 되었을때 학교를 그만 두고 집에서 책읽기에 집중했다. 

많이 읽으면 쓰고 싶어지는 법. 1918년 열다섯살에 짧은 글을 써서 잡지나 신문에 게재하기 시작한다. 이때 각별한 친분을 쌓게 되는 사람으로 장 콕도가 있는데 이 둘은 '르 코크'라는 작은 잡지를 창간하기도 하면서 점차 우정와 애정 사이의 각별한 관계가 된다. 

열일곱살때 <육체의 악마> 를 집필 완료하고 스무살때 책으로 출간한다. 워낙 어린 나이 작가의 출판이고 보니 출간 후 출판사의 대대적인 홍보가 있기도 했고 다른 작가들의 찬사와 비평계의 비웃음을 함께 받기도 했다. 소설도 일찍 내었지만 그의 생애도 일찍 마감했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장티푸스로 겨우 스무살의 나이에 사망하였으니까. 

열 몇살때 벌써 동시대 작가, 시인, 화가들과 어울리며 모임을 가졌으니 범재의 수준은 아닌 것이 확실하지만 그 나이에 다섯 명의 정부를 두고 연애 행각을 벌인 이력도 가지고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책 표지는 헝가리 화가 벤추르 줄러의 <나르키소스> 일부.






원화 전체는 아래와 같다.





작가의 생애가 짧았던 만큼 남긴 작품이 많을리도 없고 (한 두 작품 정도 더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겨우 열일곱에 쓴 소설이 이렇게 나중에 세계문학전집으로 발간되어 읽힐 만큼 대단한 무엇이 과연 있는 것일까?  관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제목이 주는 느낌과 작가의 이력을 보건대 소설 내용 역시 작가 자신의 일찍 시작한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연애 소설, 사랑 소설이 아닐까? 그 짐작의 수준을 과연 넘어설까. 그래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호기심.

 

작가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주인공 '나'는 학교에 별로 흥미를 못 붙이고 일탈 행위를 일삼으며 다른 곳에서 재미를 찾으려 한다. 


열두살이 될 때까지 나는 카르멘이라는 소녀에게 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풋사랑도 해 보지 못했다. (8쪽)


열두살에 이미 맘에 드는 여자 아이를 점찍고 동생을 시켜 카르멘이라는 이 여자아이에게 사랑 고백 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주인공. 하지만 이 편지는 카르멘 대신 학교 교장 손에 들어가는 일이 벌어져 학교에 소문이 나고 보통의 또래들과 어울리기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주인공 역시 또래들은 시시하게 여겨 이들과 골고루 어울리기 보다는 맘에 맞는 한 친구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쪽을 택한다.


우리 또래들에 대해 그와 내가 품는 '공통의 경멸'은 우리를 한층 가깝게 해 주었다. 우리는 우리들만이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우리들에게만이 여자들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25쪽)


이 시기에 터진 전쟁은 '나'로 하여금 더욱 더 방종과 무위의 생활에 빠지게 하는데 이웃집에 남편이 전쟁에 참여한 젊은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 이 소설에서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이다. 

유부녀 마르트와 당장의 행복을 쫓는 생활을 즐기면서도 도덕과 이기심, 행복의 정당성을 떠올리기도 하는 '나'는 논리를 따질 줄 아는 천재이면서 육체의 악마이기도 하다.


이성적인 결혼이라니! 말도 안된다. 각자 연애 결혼이 제공하는 이점들만을 상대방에게서 보고 있어 이성(理性)이 차지할 자리가 거기엔 없으니까. (44쪽)


기존의 결혼 제도의 헛점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으며,


무슨 상관이랴! 행복이란 이기적인 것이다. (35쪽)


행복을 인생에 추구해야할 지고의 가치로서가 아니라 행복도 사랑도 결국 이기적인 것일뿐이라는 생각을 드러내고며 비웃기도 한다.


과연 주인공 '나'는 육체적인 사랑에만 탐닉하였을까? 아니었다.


나는 자신의 비판과 가식을 스스로 꾸짖으며 마르트를 내가 전보다 더 사랑하는지 또는 덜 사랑하는지 자문해보면서 며칠을 보냈다. 내 사랑은 모든 것을 버무려서 억지를 쓰고 궤변을 부렸다.

그녀 옆에 누워 있으면 집에 가서 혼자 눕고 싶은 욕망이 항상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니, 그녀와 함께 산다는 것을 견딜수 없어지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한편 나는 마르트 없이 산다는 것 또한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간통의 형벌을 비로소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111쪽)


끊임없이 이렇게 스스로 반문하며 탐색하고 성찰하기도 한다. 차라리 열 몇 살 불 같은 열정에 몰두한 애정 행각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불륜의 관계를 유지해나가면서도 객관화하여 분석하고 탐색하고 미래를 예측해보는 피끓는 청춘이라니. 이 소설 캐릭터의 특징이자 이 작품의 차별점이 여기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관계가 지속되어 감에 따라 여자는 점차 훨씬 연하인 주인공 '나'에게 복종적이 되어가고 그런 여자를 보며 만족스럽기 보다는 현타가 옴을 느끼는 주인공은 자책하며 이 관계가 파괴로 가고 말 것을 예감까지 한다. 


내 기분에 맞춰 마르트를 이끌어 왔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차츰차츰 나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바로 그 점에 대해 나는 자책을 했고 또한 그것이 우리들의 행복을 의식적으로 파괴했다. 그녀가 나와 닮았다는 것, 게다가 그것은 내 작품이라는 사실들이 나를 즐겁게도 해 주고 또한 화나게도 했다. (118쪽)


읽으면서 밑줄 쳐 놓았던 이 대목을 지금 리뷰 쓰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대단한 심리 묘사이며 명쾌하고 논리적 사고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나'는 결국 마르타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내가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간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결코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최악의 것을 책임지게 되었던 것이다. (122쪽)


연인의 임신 소식을 듣고 난 '나'의 반응이다.


죽을 뻔 했던 사람은 죽음을 안다고 믿는다. 어느 날 마침내 그 죽음이 나타나면 그는 그 죽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죽음은 아닌데 ......." 하고 죽어 가면서 말하는 것이다. (181쪽)

마지막 반전까지.

내용과 소재는 풋내기 십대와 유부녀 사이의 불륜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17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 놀랄만큼 심리 묘사, 내면 묘사가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되며 사랑과 행복에 대한 통찰, 비판적 시각, 주인공이 사랑과 방탄을 구별해가는 과정들을 예리하게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을 발표하고 나서 쏟아진 문단의 관심에 대해 작가 라디게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써놓은 글 일부를 옮겨본다.

신동 취급을받는 것은 작가로선 좀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잘못은 '열일곱살에 쓴 소설'이라는 실없는 말 속에, 기괴한 것이라고 까지는 하지 않으나 하나의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지. 

아름다운 날의 저녁나절에 그날의 새벽에 대해 이야기하는 힘찬 매력을 비난하진 않지만 밤이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새벽을 이야기 하는 흥미도, 전혀 다른 것이긴 해도 결코 적은 일은 아니다. <누벨 리테레르, 1923년 3월 10일 호>

밤이 오기까지 아직도 멀었는데 새벽에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

이제 새벽에 대해서 밖에 얘기할 수 없게 된 작가.

이 작가 레몽 라디게에게 신동이란 호칭을 붙여준 사람은 장 콕토였고, 라디게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비탄에 빠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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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를 주는 빵집, 오렌지 베이커리 - 아빠와 딸,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꾼 베이킹 이야기
키티 테이트.앨 테이트 지음, 이리나 옮김 / 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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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대신 빵이 할 일 다 했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탄수화물 제한식이, 저탄고지식 등이 유행하는 마당에 약 대신 빵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밥 아니면 빵을 주식으로 매일 매끼 먹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저탄고지니 하면서 빵을 비롯한 밀가루 음식을 먹지 않을수록 건강에 좋다고 하는건지. 이것에 대해 설파하는 것은 지금 할 일은 아니고 아무튼 이 책에서는 그와 반대로 열 다섯살 키티와 그의 가족이 빵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고질적인 건강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이 책의 공동저자이며 오렌지베이커리를 공동 운영하고 있는 키티는 겨우 열다섯살 소녀이다. 영국의 옥스포드 지방 와틀링턴이라는 작은 마을, 평범한 가정의 막내딸 키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열두살 무렵부터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우울증을 앓게 되면서 일상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게 된다. 아무것에도 단 몇 분도 집중을 못하고 바깥 출입도 못했다. 부모가 번갈아가며 옆에 있어주어야 하니 당사자인 키티뿐 아니라 가족 모두가 무너지는 느낌 속에 절망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원인을 찾아보고 회복하려고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아동 청소년 정신건강센터에도 가보지만 진전이 없던 와중에 어느 날 키티가 의외의 것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어느 날 아빠가 빵을 만들었다. 아빠가 반죽을 만들려고 밀가루와 물과 소금을 볼에 넣고 섞는 동안 나는 멍청하게 주방 의자에 앉아 있었다. 끈적끈적하고 활기 없고 질벅질벅한 반죽이 꼭 내 머릿속 같았다.

다음 날 내가 겨우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는 볼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전날 밤처럼 흐느적거리는지 보려고 티타월을 들어 올리자, 반죽은 이제 달표면 같았다. 반죽에는 부드럽게 기포가 일었고 기포 하나가 터지면 다른 기포가 일었다. 반죽은 살아있었다. (21쪽)


빵 반죽 속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숨어있었을 줄이야.

이제 키티는 아빠와 함께 빵을 굽기 시작했고 베이킹을 하며 서서히 삶을 되찾아간다. 빵에 대해 배우기 위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배워오기도 자기가 만든 빵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한다. '기쁨의 베개', '핀란드식 엉덩이', '헤이즐넛과 다크초콜릿 베어 클로' 등. 그뿐 아니라 키티가 베이킹을 하는데 사용하는 오븐, 냉장고, 스타터 등도 모두 이름을 갖고 있다. 키티는 점점 더 베이킹에 빠져들었고 키티를 도와주느라 아빠는 그의 직장 보다 우선순위를 두어야했다. 

점점 더 많은 빵을 구워 팝업매장을 열고 사람들은 이들의 빵을 좋아해주었다. 가족들이 모두 나서 도와주어 본격적인 가게를 내게 되었고 열정을 쏟아붓는다. 

가게 벽에 오렌지 나무를 그리고 오렌지 열매마다 후원해준 사람들의 이름을 써서 붙이는가 하면 빵의 재료를 그 지역에서 생산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SNS를 통해 알게된 베이커의 초대를 받아 코펜하겐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던 키티에게 일어난 일이다. 


이 책의 원제는 Breadsong. 빵이 내는 소리를 뜻한다. 오븐에서 빵을 꺼내면 뜨거운 오븐 속의 온도에서 막 나온 빵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 탁탁 갈라지는 소리를 내는데 이것이 마치 노랫소리 같다고 브레드송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드 커버에 책이 아주 얇지는 않다. 뒷부분 반은 빵 레시피가 실려있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 나온 빵은 '미라클 오버나이트 빵'. 물론 베이커인 키티가 붙인 이름이다. 우리가 흔히 무반죽빵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재료를 보면 정말 간단하다.









"우리는 세가지 재료로 빵을 만듭니다.

밀가루, 물, 소금.

아, 그리고 하나 더. 시간."


열다섯 살 키티의 심리 치료에 빵은 약 대신 할 일을 다 했다. 키티의 부모는 키티의 마음이 치유된 것에 만족하여 억지로 다시 딸을 학교 교육 제도에 돌려보내기를 그만 두고,  대신 필요한 교육 내용을 개인적으로 집에서 배울 기회를 주기로 한다.


딸과 아빠가 어떻게 오렌지 베이커리를 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키티의 심리 치유 과정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고 다양한 빵의 레시피 북이기도 하다. 책 속의 그림은 아빠가 그렸고 레시피는 키티가 작성했으며 글은 부녀가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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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8-03 1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어도 막 뭔지 모르게 위로가 되네요~~^^

hnine 2023-08-03 12:18   좋아요 2 | URL
저는 ‘빵‘이라는 글자 보고 골랐는지 제목에 있는 ‘위로‘라는 단어는 나중에야 봤어요.
빵 냄새, 밥 냄새. 먹기도 전에 마음이 푸근해지고 행복해지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건 왜그럴까요.
이 책에선 빵을 만드는 과정도 나오지만 빵집을 오픈하기까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어요) 과정도 함께 나오는데 여러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만큼 고비를 많이 넘더군요.
훈훈한 책이랍니다.

잘잘라 2023-08-03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eadsong, 미라클오버나이트빵, 오~ 앤 원 모얼, TIME!
hnine님 사진 리뷰 감사합니다.

hnine 2023-08-03 12:23   좋아요 1 | URL
빵 굽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빵을 굽는데 아무리 단축해도 한계가 있는 단계가 발효 단계이지요. 1차 발효, 중간 발효, 2차 발효 등등. 빵을 만들어볼까 하다가 결국 귀차니즘에 지고 마는 이유가 바로 시간때문인것 같아요.
매끈하고 아름다운 빵보다 투박해보이는 그러나 정성이 들어간 빵들 레시피가 많이 들어있어요. 사진 올린 저 돌덩이 같이 생긱 빵을 키티도 처음 만든 빵이라고 하는데 제가 제일 좋아하는 빵이기도 합니다.

stella.K 2023-08-03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그렇게 간단한가요? 말에 의하면 통밀이 좋다고 하던데 그것도 아닌가봐요. 빵이 하기는 무척 힘들다고 하던데 책은 궁금하긴하네요.^^

hnine 2023-08-03 12:25   좋아요 3 | URL
발효 빵 만들때 발효 시키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렇지 원래 필요한 재료는 많지 않아요.
통밀을 사용하면 일반 밀가루 쓸때보타 발효가 좀 안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다락방 2023-08-03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럴 수 있다고 저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저도 반죽하면서 기분이 나아진 경험이 있어요. 반죽 치대면서 어느 순간 빈죽 향이 달라질 때, 아 이걸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저도 읽어볼래요!

hnine 2023-08-03 23:27   좋아요 1 | URL
빵을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다 이해할거예요. 반죽하면서의 느낌, 발효 과정에서의 변화, 구워지는 동안의 변화, 미각 이전에 촉감과 후각으로 전해지는 만족감.
다락방님 이 책 읽으시면 분명히 여기 나와 있는 레시피중 최소한 몇개는 만들어보실 것 같은데요.
‘다락방 베이커리‘, 이름 괜찮지 않나요?

책읽는나무 2023-08-0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기억 님 페이퍼에서 보았을 때도 눈에 띄던데 예쁜 책이로군요.^^
브레드쏭.....음식할 때 나는 어떤 소리들은 정말 음악소리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던데 브레드쏭도 있었군요.
듣고 싶다. 브레드쏭^^
오븐 숫자판이 고장 나서 빵은 잘 안 만들다 보니 들을 수가 없군요.ㅜㅜ

hnine 2023-08-03 23:33   좋아요 1 | URL
오븐이 고장났으면 전기 밥통을 이용한 레시피라도....^^
저는 빵 만드는 것도 좋아하고 먹는 건 더 좋아하고 그런데, 만들어서 함께 먹어줄 사람이 없어서 안만들어요. 저희 집에선 저 밖에 빵 소비할 사람이 없어서요.
빵이 금방 만들어지는 음식이었다면 저 책의 저자가 심리 치유되는데 도움이 안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시겠지만 빵을 만들다보면 빵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게 숨도 쉬고 형태도 바뀌고 색깔도 달라지고 심지어 소리도 내니까요.
예쁜 책 맞습니다~ ^^
 
누구도 울지 않는 밤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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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사놓고는, 적과 흑 1,2, 파르마의 수도원 1,2를 다 읽느라 몇번을 뒤적거리며 책꽂이에 꽂아둔채 있어야했던 책을 단 며칠 만에 다 읽었다.

몇년 전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과 <잃어버린 이름에게>를 연달아 읽은 후 기다려온 김이설의 소설집이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각 문예지에 따로 발표되었던 10편의 단편이 올망졸망 한권으로 묶여 나왔다. 이렇게 한권으로 묶여 나오긴 했지만 작가는 그 6년이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고 말한다. 각별할 수 밖에 없겠다. '올망졸망'이라는 말이 안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한편 한편 기대를 안고 읽어간 애정의 표현이 그렇게 나왔다.


<모면> 2017 문학사상 

형부가 소장으로 있는 모델하우스 단지의 분양 대행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자.

엄마보다 더 엄마 같았던 이모와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뜻밖의 관계, 밖에서 보는 형부의 행태와 그런 형부의 행태를 눈치채고 있지만 드러내지 않는 언니, 사무실에 드나드는 남자의 은근한 호의에 대해 불신감을 떨칠 수 없으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 마땅히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은 채 과거의 경험들로 현재를 모면 또는 회피하고 있는 여자의 심리가 담담하고 심심하게, 읊조리듯 그려져 있다 (이런 읊조림이 더 무섭다. 한이 내재하고 있으니까).


<내일의 징후> 2017 쓺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인데 '징후'라는 말을 붙였다. 내일을 예측하게 하는 것들, 즉 예후라는 뜻일 것이다. 동해횟집이라는 공통의 장소를 중심으로 이렇게 저렇게 얽혀 있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짧은 가운데서도 긴박감 있고 재미있다. 그들의 사정이 따로, 그리고 겹치며 펼쳐져 혼돈스러울 것 같은데 단편 속에 또 작은 제목을 붙여가며 여러 인물들의 속사정과 상황이 전달되는, 치밀한 구성이 돋보인다.


<축문> 2017 문학과 사회

돌아가신 분의 기일에 그분을 기리기 위해 작성하는 글을 축문이라고 하는데, 이 단편 작품 전체가 하나의 축문 역할을 한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첫 기일에 맏딸이 음식을 장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마 남자 아닌 여성 작가의 소설에 단골로 포함되는 것 중 하나가 음식을 만드는 구체적인 과정 묘사가 아닐까. 직접 해보지 않으면 어려울 디테일들이 살아있다. 

제사를 지내는 방식, 돌아가신 분을 추도하는 이 가족만의 방식은 매우 독특해서 거짓 울음이 없고 형식이 모든 것을 지배하지 않는다. 이 책 제목이 된 누구도 울지 않는 밤은 아마도 이 단편의 마지막 문장 다행히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이었다에서 인용된 것이리라. 죽음에 대해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새로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환기의 계절> 2020 문학과 사회

결혼한 여자에게 딸의 존재는 잠재된 지원군 같은 것이다. 때로는 엄마 본인보다 딸이 더 엄마의 앞날과 행복을 걱정한다. 반평생을 함께 산 남편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염려와 관심이다. 하지만 엄마가 자식과 남편을 보는 마음은 또 다르다. 누가 더 밉고 곱고의 문제를 떠나서, 오래 살아오다 보면 남편에게서 어쩔 수 없이 나의 일부분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로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내가 나를 쉽게 내칠 수 없는 것처럼 남편을 내칠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딸이 이해 못하는 지점이다.

엄마의 답답한 상황이 딸에게서 패러렐로 진행되는게 포인트. 갈등이 두배가 되는 상황인데, 과연 딸은 엄마에게 바라는 결정을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치유정원에서> 2021 황해문화

작가의 예전 소설의 흔적을 보는 듯한 작품이었다. 완전한 절망, 상실, 끝, 허무. 다시 일어날 에너지라든가 의지라든가 그런것 없어보임. 초기에 그녀의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주저하는 이유이기도 했었다. 우리가 회피하고 싶은 현실의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절망이나 상실 역시 완전한 것이 있을수 있을까?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가족을 잃고 사랑을 잃고 일터를 잃는다. 그녀를 일으켜세우는 것은 독자의 몫.


<계절이 바뀌는 곳> 2021 리디북스 전자책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생활능력 없고 무능한 엄마, 어릴 때부터 병을 앓고 있어 어린애처럼 돌봄이 필요한 여동생을 가족으로 둔 세연. 엄마는 이런 집안 형편을 이해해주고 남자 없는 세연 집일에 직접 도움이 되어 주고 있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민수와 세연이 결혼하기를 권한다. 그러다 세연은 우연히 민수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고 절망한다.

'계절이 바뀌는 곳'이란 제목은 중의적이다. 주인공 세연의 현재가 곧 다른 모양으로 바뀌게 될 상황에 직면하여 세연은 다짐한다.

여기는 끝이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아직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290쪽)


<반 뗀 라지?> 2021 리디북스 전자책

베트남어로 "당신의 이름은 뭐예요?" 라는 뜻이다. 딸을 두고 집을 나간 베트남 엄마를 만나기 위해 두연은 간단한 베트남어를 외우고 있는 중이다.

그 사이 사위가 환해졌다. 두연은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갈 수 있는 한 제일 멀리가고 싶었다. 이제 정말 서둘러야 했다. (258쪽)

이 단편의 마지막이다.

진즉 떠났어야지 두연아. 어서 떠나.


<가족의 일생> 2011 학산문학

집나간 엄마, 편모 혹은 편부, 부모자식 사이 같은 역할을 하며 자라온 자매 등은 단골 설정이다. 특히 이번 소설집엔 배경과 직업군이 다양한데 이 단편에서 남자의 직업은 배달 라이더이다. 모처럼 착한 남자가 등장했는데 끝은 또한번의 시작의 되풀이를 알릴 뿐이다.


<긴하루> 2021 엄마에 대하여

하루 동안의 이야기이다. 자기 딸은 자기 처럼 안 살았으면 하는 엄마와, 내가 엄마처럼 될 것 같냐고 자신하는 딸. 

인생이란 시련의 파도를 넘어가는 과정이었지만 누군가는 그 파도에 물거품이 돼버리기도 한다. (312쪽)

 

<그래도 되는 사이> 2022 리디북스 전자책

그래도 되는 사이라는 말 속에 여러 가지를 유추하게 된다. 살아가면서 그래도 되는 사이가 되어주는 관계를 가진 사람은 다른 어떤 것을 가진 것보다 든든하리라.

생이 이제 많이 남지 않은 엄마, 그런 엄마를 끝까지 옆에서 지켜주고 싶어하는 아저씨, 뒤늦게 엄마를 알아가는 딸, 한동안 동거를 해오다 결혼을 허락받으러 갔던 날 동거를 끝내고 짐을 빼 떠나기로 하는 남자 친구. 

그제서야 성운과 내가 그래도 되는 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69쪽)


아파트 건설 현장 분양 사무소, 횟집, 수목원, 버섯 농장, 플라스틱 사출 공장, 배달 업무 노동자, 이삿짐 용역, 이자카야, 부동산 사무실. 열편의 단편이다보니 배경과 주인공들 직업들이 다양한 것은 당연한 것 같지만 매우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재미를 더한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마치 그 현장을 들여다보는 듯, 이야기에 생기가 더 해져 더 실존적으로 느껴진다고 할까.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한 가족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다 똑같은 무게를 지니고 있지 않은 가족 구성원, 그 관계, 상처. 인간이 사는 모습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작가의 고정 관념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든, 어느 곳을 배경으로 하든, 가족으로 비롯되고 가족으로 다시 회귀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누구도 울지 않는 밤이란 없다. 내가 울고 있는 동안 그 누군가도 울고 있을 것이며, 내가 웃고 있는 동안에 그 누군가는 울고 있을 것이다. 내가 웃고 우는 동안 그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또 기다린다. 작가의 다음 소설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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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3-07-31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이설 좋아해요. 저는 첫 한 편 읽었네요.

hnine 2023-08-02 10:13   좋아요 1 | URL
첫 단편 제목이 추상적이지요 ‘모면‘.
세계문학전집 조금씩 들여놓기 시작한 이후로 한국 소설들 읽는 시간이 예전 만큼 안되는데도 출간 소식 들으면 바로 구입하게 되는 작가들이 몇 있지요. 김이설님도 그중 한분.
보물선님도 김이설 작가 좋아하시고, 피아노도 좋아하시고, 그림도 좋아하시고... ^^

자목련 2023-08-02 09:01   좋아요 1 | URL
저도요^^

2023-08-01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1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