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고 나서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연령 제한때문에 못 볼 영화란 없다는 것을 알고 쾌재를 불렀다. 더구나 이 무렵 혼자 밥먹고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영화보기를 본격적으로 즐기게 된 것이. 지금처럼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볼수 있는 때도 아니었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그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 극장에 가서 보는 것이 대부분인, 지금 생각해보니 불과 내가 대학생때일 적 이야기인데 참 먼 옛날 얘기 같은, 그런 때의 이야기이니까.
누구와 무슨 영화를 보러 언제 갈까, 약속을 정할 필요도 없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틈새 시간을 이용해서 보고 왔다. 학교 주변에도 작은 소극장이 많았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 종로까지 몇 분 안 걸렸으니 학교에서도 공강 시간에 나가서 보고 다시 학교로 돌아올 때도 많았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서는 영화 전단지를 모아두는 습관도 생겼다. 노트 한 권을 정해 그곳에 극장 티켓도 버리지 않고 붙여 놓았었는데 이건 다음에 친정에 가면 어디 구석에 아직도 박혀 있는지 찾아보아야겠다.
-영국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시기. 인터넷은 물론 방에 TV도 없던 나는 시간 있을 때마다 걸어서 갈 정도 거리의 영화관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일을 하다가 중간에 비는 시간이 좀 길어질라치면 어느 새 학교를 빠져나가 영화관으로 가고 있었다. 3년 반 동안 일주일에 한편 정도는 너끈히 보았으리라. 혼자 갈 때도 있었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때로는 친구와 갈 때도 있었는데 혼자 지내는 생활이 외로왔기 때문인지 이 시기에는 누구와 함께, 특히 맹숭맹숭 동료 보다는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함께 갈 때가 제일 좋았다.
-아이를 가지면서 영화와는 어쩔 수 없이 잠시 결별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일단 시끄러운 소리가 뱃속의 아이에게 전달되는 것이 안좋을 것 같다는 남편의 의견에 나도 어느 정도 동의했고, 그 시기가 나에게는 영화는 언감생심일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어느 정도 자라서 극장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영화 선택에 있어서 내 취향, 그런 것은 99% 무시, 아이가 볼 만한 영화 쪽으로 선택해야 했고 지금도 계속 그러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나의 영화보기 자체에 대한 의욕도 사그라든 것인지, 아니면 요즘 워낙 충격적이고 혼란스런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인지, 예전에 내가 영화를 보면서 누리던 휴식과 정신적인 위안을 얻기가 힘들다고 결론, 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내가 그동안 영화에서 얻고자 했던 것이 휴식과 위안이었다고 해서 단순, 말초적인 만족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 거리를 던져 주고, 감동도 주는, 내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영화들이 좋았는데, 차츰 그런 영화들 보다는 좋게 말하면 너무 버거운 생각 거리랄까, 아니, 생각 거리라기 보다는 혼란 거리를 더해 주는 영화, 속도감과 재미, 발상은 뛰어날지 모르나 '감동'을 주지는 않는 영화들을 굳이 시간을 쪼개서 찾아가 봐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어 시큰둥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며칠 전 우연히 어느 분의 서재에서 영화를 보는 이유에 대한, 그동안 나의 생각을 바꿔 놓은 한 줄의 글을 보았다. 나의 영화보는 취미는 다시 바뀔 것인가?
다음은 최근에 본 영화 세편이다.
<내니 맥피 2>는 엠마 톰슨이 제작하여 올해 초 영국에서 개봉한 영화이다. 시대 배경이 2차세계대전 무렵, 장소는 영국의 시골 마을이다. 영화 대사로 보나 시각적으로 보나 이야기 자체로 보나, 영국 영화 티가 제대로 나는 영화이다. 억지 설정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요즘 만들어지는 다른 영화들에서 보는 억지 설정과는 좀 다른, 충분히 훈훈하게 봐줄 수 있는 귀여운 억지랄까? 아이도 나도 재미있게 보고 왔다.
지난 번에 <카모메 식당>을 보았다고 했더니 stella님께서 <안경>도 한번 보라고 추천해주셔서 본, 같은 감독의 영화 <안경>. 그러니까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만든 영화를 만든 순서대로 세 편을 본 셈이다. <요시노 이발관> --> <카모메 식당> --> <안경> 이 감독에 대해 없던 관심이 마구 생겼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 자기 만의 색깔을 가지고 그것을 지켜가며 꾸준히 작품을 해나간다는 것 자체가 참 돋보이지 않는가? 더구나 간단한 제목으로 상징하는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더 그랬다.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이, 자기에게 없어서 안될 분신 같은 물건 중의 하나인 안경을 두고 온 것을 알고 낭패스런 표졍을 하다가 할 수 없다는 듯이 안경 없이 가던 길을 계속 가는 장면,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구나 발견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포인트를 찾았다고나 할까.
어제 밤에 본 프랑스 영화 <8명의 여인들>도 꽤 괜찮았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다가 드디어 보게 된 영화. 재미있고 없고를 떠나서 아무튼 프랑스 영화는 어딘가 달라. 이 다름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영화에 대해 많은 지식이 없는 나는 그 차이점을 뭐라고 규명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보았다면 한참을 영화 얘기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영화였다. 8명의 여자들을 하나의 이야기 속으로 엮어 들어가게 하는 구성력이 수준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