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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시선 297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

 

2009년 초판 발행

 

 

 

 

 

 

 

 

 

 

 

 

 

 

 

 

이 시인을 알게 된 건 어느 분 서재에서 다음 시를 만나고서이다.

 

 

 

봄은 오네

강가에는 한 무리의 철새가 모여 있네

모여 있는 곳으로 봄은 오네

 

 

강물은 반짝이고

흐름은 졸리네

 

 

한 구의 시신(屍身)을 끌고 오네

 

 

나는 열두살

오후 세시

 

 

 

- 입춘 -  전문

 

 

 

날씨가 따뜻해지고 햇살이 어떻고, 새로 싹이 돋는 것을 보고, 이런 뻔한 말 대신 시인은

철새가 모여 있는 것에서,

얼었던 강이 녹아 마침내 반짝거리는 모습, 하지만 아직은 천천히 흐르고 있는 강물에서 봄의 기척을 느꼈다.

한 구의 시신을 끌고 온다는 표현은 겨울을 거쳐서만, 겨울을 겪어내고서야 오는 봄의 특성을 나타내었다. 봄이 가진 양면성, 봄이 보여주는 따뜻함 이면의 처절함을 인식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수수께끼 같은 마지막 연. '열두살, 오후 세시'의 의미 때문에라도 이 시를 자꾸 자꾸 읽어보고 있다.

 

 

바로 옆 페이지에 봄에 관한 시가 또 있다.

 

 

 

산비알 흙이

노랗게 말라 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푸석푸석 들떠 있다

 

 

저 밭의 마른 겉흙이

올봄 갈아엎어져 속흙이 되는 동안

낯을 주고 익힌 환한 기억을

땅속에서 조금씩

잊는 동안

 

 

축축한 너를,

캄캄한 너를,

나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나

슬픔이라고 불러야 하나

 

 

- 내가 갈아엎기 전의 봄 흙에게 - 전문

 

 

 

흙을 갈아 엎는 것 조차 시인은 건성으로 하지 못하는구나. 새로 겉으로 올라오는 흙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캄캄한 속으로, 축축한 속으로 들어갈 흙. 함께 묻혀 들어갈 겨울의 기억을 시인은 그냥 보내지 못한다.

 

우리도 곧 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을텐데. 어떤 사람은 무덤덤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새로 오는 봄에 희망을 걸 것이고, 어떤 사람은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지 못느낄 만큼 퍽퍽하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눈물도 많고 슬픔도 많을 극소수 문제적 인간들만이 이 시인의 마음이 되어 어쩔 줄 몰라할 것이다.

문제적 인간을 만난 기쁨에 몇 자 끄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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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3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3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3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4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Nussbaum 2015-01-24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에 더 덧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아직 차갑지만 봄은 또 그렇게 오고 있겠죠? 곧 이어 차례차례 등장할 hnine님의 꽃사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hnine 2015-01-24 09:14   좋아요 0 | URL
기대해주시는 분을 생각해서 꽃 움직이는 시기 그냥 지나가게 두지 않고 잘 찍어보겠습니다.
이 시집의 시들을 떠올리면 꽃을 보며 마음이 축축해질지도 모르겠어요.
 

 

 

 

 

부엌

 

 

 

 

늦은 밤에 뭘 생각하다가도 답답해지면 제일로 가볼 만한 곳은 역시 부엌일밖에 달리 없지.

커피를 마시자고 조용조용히 덜그럭대는 그 소리는 방금 내가 생각하다 놔둔 시 같고, ( 오 시 같고)

쪽창문에 몇 방울의 흔적을 보이며 막 지나치는 빗발은 나에게만 다가와 몸을 보이고 저만큼 멀어가는 허공의 유혹 같아 마음 달뜨고, ( 오 시 같고)

 

 

매일매일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고요의 이 반질반질한 빛들을 나는 사진으로라도 찍어볼까? 가스렌지 위의 파란 불꽃은 어디에 꽂아두고 싶도록 어여쁘기도 하여라.

내가 빠져나오면 다시 사물을 정리하는 부업의 공기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아도 또 시 같고, 공기 속의 그릇들은 내 방의 책들보다 더 고요히 명징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다가 먼데 보는 오 얄팍한 시집 같고,

 

 

 

 

(장석남 '젖은 눈')

 

 

 

쉼표로 끝나지만 이것이 시의 전문이다.

늦은 밤 아니라 대낮에도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있다가 답답해지면 부엌을 서성거리는 나.

 

읽고 있는 세권의 책이 여간해서 손에 안잡혀 읽다가 중단한지 거의 한달이 되어간다.

어제밤 잠자리에 들며 손에 든것도 읽고있던 세권의 책이 아니라 예전에 읽었던 시집 중 한권이었다.

처음부터 마지막장까지, 결국 전부 다시 읽고 잠들었다.

 

시집의 제목처럼, 시집 속의 시들에 몽땅 물기가 스며있었다.

마음으로 울며 읽었다.

 

 

 

 

 

 

 

그믐

 

 

 

 

 

나를 만나면 자주

젖은 눈이 되곤 하던

네 새벽녘 댓돌 앞에

 

 

밤새 마당을 굴리고 있는

가랑잎 소리로서

머물러보다가

말갛게 사라지는

그믐달

처럼

 

 

 

 

(장석남 '그믐')

 

 

 

'자화상'이라는 시도 좋았는데,

이 시도 옮겨 적고 싶은데,

이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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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1-21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엌......상상하며 읽으니 참 좋으네요^^
그믐 시 읽으니 먹먹해집니다. 곧 퇴근해야 하는데 까맣게 된 창밖 풍경이랑 시랑......슬퍼라.


hnine 2014-11-21 21:48   좋아요 0 | URL
`그믐`이라는 단어에 이미 서운함과 아련함이 들어있지요.
시를 읽으면 기분이 상승되기보다는 먹먹해질때가 많은 것 같아요. 원래 감동과 공감의 속성이 그런것인지...
요즘은 저녁 6시만 되어도 어둑하더라고요.
불금이잖아요. 즐거운 저녁시간 되실거라 믿어요 ^^

하늘바람 2014-11-2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엌이란 공간 그런곳이군요 전 왜 싫기만 했을까요 ㅎ

hnine 2014-11-22 13:50   좋아요 0 | URL
같은 장소라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것 같아요. 밥하러 들어갈때와 저 시에서처럼 늦은 밤 서성거리다 들어서는 부엌은 많이 다를테니까요.

2014-11-22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2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3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3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꾸미지 않은 시'라고 쓰기 전에,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찾기 위해 잠시 고민해보았다.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그러지 않는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 해야하는 일 중 하나가 '정확한' 표현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문학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말에 공감했다). '꾸민다'고 하면 한자의 '장식'의 의미에 더해서 '조작'의 느낌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꾸민다는 것을 꼭 이렇게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 꾸미지 않은 시라고 하지 말고 솔직한 시, 수수한 시라고 해야했을까.

 

 

 

그녀의 시집은 다 사서 읽었다고 생각했었다. 처음 이 시인의 시를 읽은 건 2005년. 신문에 소개된 그녀의 시를 보고 처음 구입한 시집은 <아이들의 풀잎 노래 (1993)> 였는데 이 시집은 친정 엄마께 읽어보시라고 드려서 지금 내겐 없다. 중학교 교사인 시인이 현장에서 아이들과 겪은 일들을 마치 일기 쓰듯이, 때론 한숨 몰아쉬며 힘든 웃음 짓듯이, 솔직하게 써내려간 한편 한편이 한번 아니라 자꾸 읽게 만들었다. 같은 직업을 가지셨던 엄마도 공감하실 것 같아 보내드린거였다.

그보다 먼저 나왔던 시집, 이후에 나온 시집은 모두 구입해서 지금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의 풀잎노래>처럼 두번째 산 시집의 제목도 수수하다 <아내 일기 (1990)>. 소설도 아니고 시집의 제목이 이렇게 평범하고 소박해도 되나? 바로 연이어 구입한 시집은 <가장 쓸쓸한 일 (2000)>이다.

교직에서 정년 퇴임을 했을텐데 그 이후로 한동안 후작 시집이 안나온다 싶었는데 이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기가 살짝 엿들은 말> 제목을 보고 또 넘겨짚는다. 그 연세에 아기 얘기를 쓴 것을 보면 손주를 보았나보다, 학교는 정년 퇴직 하셨겠지. 그래서 학교에서 보는 아이들에서 손주들로 관심사가 옮겨졌나보다 라고. 이 시인의 시는 그렇다. 생각이나 관념에서 만들어지는 시라기 보다, 생활 속에서 나오는 시, 본인이 겪어서 만들어지는 시. 그래서 꾸밈이 없고 화려하지 않다. 그런데 뭉클하다. 이 시인이라고 해서 남들은 겪지 않는 특별한 경험을 해서가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일에서도 보통 사람들은 맨 처음 느낌만 알아차리고 지나칠 것을 시인은 그 일차적인 느낌이 지나가고 난 후 슬며시, 천천히 밀려왔다 사라지는 이차적인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

 

아무리 잘 쓰여진 시라 할지라도 우리 삶의 생생한 경이로움을 다 표현해낼 수는 없다. 위대한 시는 삶 그 자체일 터이므로, 진짜 시인이란 삶의 진짜 주인으로서 하루하루 투쟁하듯 어렵게 운명을 개척해나가며 살아가는 우리 장삼이사(長三李四)들, 우리들 평범한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112쪽, 시인의 말에서 인용)

 

어린 손주들을 보며 쓴 시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인지 이 시집엔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시들이 많다.

어제 남편에게도 읽어준 시,

 

요즈음 제법 긴말 배우기 시작하는

호기심 많은 우리 아기

할머니 방 장롱 서랍 어느 구석에서인가

구리로 만들어진 옛 귀이개 찾아내선 묻는 말

"할머니, 이거 누구 숟가락이에요?"

 

(42쪽, '귀이개' 전문)

 

아이들은 저절로 시인이다.

 

시집의 발문을 쓴 사람이 소설가 '현기영'이다. 소설가가 시집의 발문을 썼나 하고 읽어봤더니, 양정자 시인의 부군이시란다. 시 중에 남편 이야기가 간간히 나오고, 특히 시인이 40대에 쓴 시집 <아내일기>중에 나오는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며 발문을 읽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 아내의 시에 대한 특별한 감상, 무기교가 특징인 그녀의 시에 대해 쓴 글 속에 담담하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내에 대한 애정과 정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시인의 이전 시집에 실린 사진과 같은 얼굴, 같은 미소이지만 이번 시집 속의 사진엔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쇠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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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10-1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이 돌아보니,
이분 시집을
제가 처음 읽을 적이 스물을 넘긴 때였고
어느덧 마흔 줄에도 이분 시집을 읽는군요.
시를 쓰신 분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어느덧 손주 이야기를 쓴다면,
시를 읽는 사람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어느덧 시골마을에서 두 아이를 건사하면서
다시금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네요 @.@

hnine 2014-10-18 17:18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은 저보다 훨씬 일찍 이분의 시를 만나셨나봐요.
이분의 시집을 네권째 읽으면서도, 남편이 등장하는 시를 여러 편 읽으면서 부군이 유명한 소설가이실줄은 상상도 못했네요. 알고 나니 고개 끄덕여지는 부분들이 있어요.
문학성이 뛰어나다기 보다 다른 차원에서 읽는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나름의 시 세계를 만들어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nama 2014-10-19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정자 시인의 남편분인 소설가 현기영, 영어교사였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기사를 읽은 게 한참 전의 일이었어요, 기억이 맞는다면요. 시 보다 이런 게 기억에 남아있네요.

hnine 2014-10-20 08:36   좋아요 0 | URL
현기영 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지요. 양정자 시인과 현기영 소설가의 약력을 보니 같은 학교 동문이기에 말씀하신대로 저도 혼자 추측을 해보기도 했네요. 새삼 예전에 읽었던 시집 <아내일기>도 다시 읽어보았고요. 현실 참여적 소설가를 남편으로 두어 힘든 시기도 여러 번 겪었던 듯 해요.
시인은 이제 정년을 꽉 채우고 퇴임한 후 한국에서, 캐나다에서, 손주들 봐주느라 새로운 생활을 하고 계시답니다.

서니데이 2014-10-2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말씀해주셔서, 얼른 테이블매트 사진을 제 서재에도 올렸어요. 시간날 때 한 번 봐주세요.^^

hnine 2014-10-22 22:46   좋아요 0 | URL
보러 갑니다~
 

 

 

 

무한도전





커튼을 올린다

시계를 본다

전원을 켜고 탄식을 읽는다

남의 밥상을 훔쳐서

내 밥상을 차린다
먹인다

먹는다

거울을 본다

노래를 한다

달력을 본다

쇼핑을 한다

버틴다

남의 글자를 읽는다

남의 삶을 엿본다

내 글자를 적어보자

포스트잇을 꺼낸다

간신히 세줄 적는다

요가를 한다

명상도 하지

내일은 혹시

다르게 시작되어

다르게 끝날지 모른다고

어제와 똑같은

명상의 한계이자 목적

잠든다

 

커튼을 올린다

시계를 본다

 

무한할 것 같은

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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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4-12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진짜로.. 와 닿아요.

hnine 2014-04-12 12:58   좋아요 0 | URL
내용이랑 너무 안맞는 제목인 것 같아 바꿀까 생각중인데, 그냥 둘까요? ^^

서니데이 2014-04-12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버틴다, 는 말이 눈에 많이 들어와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hnine 2014-04-12 19:50   좋아요 0 | URL
버티는 시간 보다는 즐기는 순간이 많은 삶이면 참 좋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지요. 버티는 걸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보통 사람은 아니겠지요?
매일 잠들며 하는 생각은 오늘 하루 무사히 보냈구나, 하지만 내일은 오늘과 좀 다른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기대인지 욕심인지, 그렇답니다. 내일도 오늘과 같았으면 하고 잠드는 날은 없는 것 같아요.

하늘바람 2014-04-1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있게 읽으며 끄덕이네요 멋져요 님

hnine 2014-04-13 04:46   좋아요 0 | URL
남들도 저렇게 살고 있을까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실 2014-04-1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상도 하시는구나.....
요즘 제 뇌의 80%는 아이들인듯요. 주말에는 특히요.
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가끔!

hnine 2014-04-14 16:24   좋아요 0 | URL
에이, 명상이라기보다 숨고르기이지요.
경주엔 잘 다녀오셨나요? ^^
다린이도 이제 부모의 간섭을 싫어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었고, 차라리 간섭 말고 제 삶을 살자 결심하는데 자꾸 잊는단말입니다 ㅠㅠ
 

 

이런 연서, 이런 고백.

참 오랜만에 읽어본다.

 

 

 

 

전부 당신 같아서 붐비는 빛 한 올도 허투루 받을 수 없습니다.

천지사방 당신이니 암만 발버둥쳐도 나는 당신한테 머뭅니다.

그래요, 당신 만날 날부터 나는 속수무책입니다.

괜스레 내 자신이 못마땅해지더니 여태껏 한 가지 병을 앓으며 좀체 차도가 없습니다.

지금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곡진하게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이 아끼는 은바퀴 두 개의 안부를 엉뚱하게 묻는 게 전부였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내 바람은 당신과 함께 가난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헤픈 봄볕을 한 줌도 자루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되지 않을 일임을 압니다.

그런데도 비워도 비워도 다시 당신이 들어차는 내 속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지천인 저 꽃잎들도 때가 되면 잎을 접을 줄 아는데,

마를 줄도 질 줄도 모르니 나는 어쩐다지요.

차라리, 철없고 씩씩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볕 때문에 눈이 시려 길게 쓰지 못하겠습니다.

각설하고 내 마음 읽으시거든 보리누름에는 걸음해주세요.

난출난출 보리잎 보며 어디쯤에 오시는 줄 알고 가만히 눈감겠습니다.

보리보다 노랗게 내 속 익기 전에 부디 당신이 먼저 와 주세요.

볕이 여간 흔전하지 않습니다.

 

 

 

 

- 김해민, <안부> 전문 -

 

 

 

원래 시집에는 줄바꿈 없이 쓰여져 있는 것을 여기 옮기면서 읽기 편하라고 임의대로 줄바꿈을 하였다.

이 편지의 상대는 사람일수도, 꼭 사람이 아니라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어떤 꿈, 바람일지도.

'처음부터 내 바람은 당신과 함께 가난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가난해도 좋다, 당신 하나로 다 채워진다는 뜻으로 읽는다.

'헤픈 봄볕을 한 줌도 자루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이런 비유,

보리누름, 난출난출, 곡진하게 (이 낱말은 한자이지만), 흔전

이런 말들을 머리 속에 담아놓았다가 마땅한 때 써보고 싶어진다.

 

 

 

 

 

봉오리 터질라치면

득음 못한 팔도의 소리꾼들

선운사 뒷마당에 모여드는데

 

 

소리공부는 뒷전으로

며칠째 무리지어 다니며

빨간 복분자술을 찾는가 싶더니

 

 

오늘 예불 절 새벽 빗속에

더러는 모가지를 꺾으며

고수도 없이

다들 한 소리 얻었단다

 

 

 

 

-김해민, <동백> 전문-

 

 

 

 

시 속에서 제목인 동백이란 말을 한번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저렇게 표현했다.

 

 

사실 이 시집에는 가슴 멍해지는 시들이 잔뜩.

 

 

 

어느 밤 응석을 부리고 싶었던지 나는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외할머니는 낮에 이웃에서

놓고 간 삶은 옥수수 중 하나를 주며 달랬다

뿌리치며 훌쩍거리다 난감한 빛이 역력한 주름

깊은 선량한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그예

울음보를 터뜨렸다

가진 것이라곤 남은 세월뿐인 외할머니

우두커니 앉아 다시 말이 없었다

 

 

 

예순 갑자 다 돌지 못하고

폭설 내리던 어느 새벽녘 버선신은 채

오르골여인과 함께

외할머니 하얀 길 떠나셨다

 

 

 

 

-김해민, <외할머니> 부분 발췌-

 

 

 

 

이렇게.

...

 

 

 

 

 

 

 

 

 

 

 

 

 

 

 

 

 

 

 

 

김해민 <외로울 때는 귀가 더 밝아진다> 2012, 화남의 시집 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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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13-12-05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떠한 삶을 살면 저러한 언어를 토해낼 수 있을까... 머리로는 조합할 수 없는, 오로지 가슴에서 솟아 나오는 말들... 새로운 우주를 하나 담아갑니다.
:)

hnine 2013-12-05 11:38   좋아요 0 | URL
Tomek님의 이 댓글도 참 멋진걸요 ^^
시 하나에 새로운 우주...
멋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