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연서, 이런 고백.
참 오랜만에 읽어본다.
전부 당신 같아서 붐비는 빛 한 올도 허투루 받을 수 없습니다.
천지사방 당신이니 암만 발버둥쳐도 나는 당신한테 머뭅니다.
그래요, 당신 만날 날부터 나는 속수무책입니다.
괜스레 내 자신이 못마땅해지더니 여태껏 한 가지 병을 앓으며 좀체 차도가 없습니다.
지금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곡진하게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이 아끼는 은바퀴 두 개의 안부를 엉뚱하게 묻는 게 전부였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내 바람은 당신과 함께 가난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헤픈 봄볕을 한 줌도 자루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되지 않을 일임을 압니다.
그런데도 비워도 비워도 다시 당신이 들어차는 내 속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지천인 저 꽃잎들도 때가 되면 잎을 접을 줄 아는데,
마를 줄도 질 줄도 모르니 나는 어쩐다지요.
차라리, 철없고 씩씩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볕 때문에 눈이 시려 길게 쓰지 못하겠습니다.
각설하고 내 마음 읽으시거든 보리누름에는 걸음해주세요.
난출난출 보리잎 보며 어디쯤에 오시는 줄 알고 가만히 눈감겠습니다.
보리보다 노랗게 내 속 익기 전에 부디 당신이 먼저 와 주세요.
볕이 여간 흔전하지 않습니다.
- 김해민, <안부> 전문 -
원래 시집에는 줄바꿈 없이 쓰여져 있는 것을 여기 옮기면서 읽기 편하라고 임의대로 줄바꿈을 하였다.
이 편지의 상대는 사람일수도, 꼭 사람이 아니라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어떤 꿈, 바람일지도.
'처음부터 내 바람은 당신과 함께 가난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가난해도 좋다, 당신 하나로 다 채워진다는 뜻으로 읽는다.
'헤픈 봄볕을 한 줌도 자루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이런 비유,
보리누름, 난출난출, 곡진하게 (이 낱말은 한자이지만), 흔전
이런 말들을 머리 속에 담아놓았다가 마땅한 때 써보고 싶어진다.
봉오리 터질라치면
득음 못한 팔도의 소리꾼들
선운사 뒷마당에 모여드는데
소리공부는 뒷전으로
며칠째 무리지어 다니며
빨간 복분자술을 찾는가 싶더니
오늘 예불 절 새벽 빗속에
더러는 모가지를 꺾으며
고수도 없이
다들 한 소리 얻었단다
-김해민, <동백> 전문-
시 속에서 제목인 동백이란 말을 한번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저렇게 표현했다.
사실 이 시집에는 가슴 멍해지는 시들이 잔뜩.
어느 밤 응석을 부리고 싶었던지 나는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외할머니는 낮에 이웃에서
놓고 간 삶은 옥수수 중 하나를 주며 달랬다
뿌리치며 훌쩍거리다 난감한 빛이 역력한 주름
깊은 선량한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그예
울음보를 터뜨렸다
가진 것이라곤 남은 세월뿐인 외할머니
우두커니 앉아 다시 말이 없었다
예순 갑자 다 돌지 못하고
폭설 내리던 어느 새벽녘 버선신은 채
오르골여인과 함께
외할머니 하얀 길 떠나셨다
-김해민, <외할머니> 부분 발췌-
이렇게.
...
김해민 <외로울 때는 귀가 더 밝아진다> 2012, 화남의 시집 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