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33
외로운 것들이 갈수록 착해지는 게 싫어서
비명이 말랑해지도록 내버려두는 건 죽기보다 싫어서
버려진 것들은
낡아가지 않고 죽어버리라고
종일 휘파람을 불었다.
먹다 버린 빵처럼 떼어먹히고
세상 밖으로 자꾸 몸이 기울 때
이승이었던가
비가 오면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면
맨드라미 붉은 목을 찾아
아무리 마음을 세워봐도
이건 나보고 죽으라는 건지 살라는 건지
다시 오더라도 이렇게 오는 것은
아니었다고
나는 죽더라도 온 힘을 다해 죽을 거라고 다짐했다.
- 이승희, 「110-33」전문 -
여름의 우울
누군가 내게 주고 간 사는 게 그런 거지 라는 놈을 잡아와 사지를 찢어 골목에 버렸다. 세상은 조용했고, 물론 나는 침착했다. 너무도 침착해서 누구도 내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할 것이다. 그후로도 나는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놈을 보는 족족 잡아다 죽였다. 사는 게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이의 표정을 기억한다. 떠나는 기차 뒤로 우수수 남은 말들처럼, 바람 같은. 하지만 그런 알량한 위로의 말들에 속아주고 싶은 밤이 오면 나는 또 내 우울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골목을 걷는다. 버려진 말들은 여름 속으로 숨었거나 누군가의 가슴에서 다시 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고양이도 개도 물어가지 않았던 말의 죽음은 가로등이 켜졌다 꺼졌다 할 때마다 살았다 죽었다 한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밤. 난 내 우울을 펼쳐놓고 놀고 있다. 아주 나쁘지만 오직 나쁜 것만은 세상에 없다고 편지를 쓴다.
- 이승희, 「여름의 우울」전문 -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 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
- 이승희,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전문 -
맨드라미라는 꽃을 본지 오래되었다.
예전엔 동네 담벼락이나 집 마당 한쪽에 한여름 상징처럼 피어 있는 걸 종종 볼수 있었는데.
붉다는 말로는 모자랄 것 같은 강렬한 붉은 색, 두툼하게 주름잡힌 꽃잎은 마치 비로드 천으로 만들어 붙인 것같아보였던 꽃.
이름도 특이했다 맨드라미.
그렇게 강렬한 이미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맨드라미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맨드라미는 단지 꽃에 국한된 것이 아닐수도 있다. 나의 어느 한때 모습일수도 있고, 나의 신념일수도, 사랑일수도, 절대의 가치일수도 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이 시인은 이름만 보면 여성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남자 시인이다.
시집을 전자책으로 구입하는 적은 거의 없는데 배송일까지 못기다리고 빨리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전자책으로 구입하였다.
좋은 시는 따로 노트에 적어놓기로 하고.
그러다가 시집 전체를 첫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몽땅 워드로 타이핑 하고 말았다.
노트북 모니터 창에 e-book과 워드를 동시에 띄워놓고, 좋은 구절엔 회색으로 표시도 해가면서 한자 한자 타이핑. 이것도 필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필사의 효과는 충분히 누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시집 뒤 이경수 평론가의 해설마저 눈으로만 읽고 지나가기 아까웠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정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하다.
가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은 죽음을 늘 생각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살고 싶은 의지의 다른 표현임을 시인은 숨기지 못했다.
시로 표현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웠던 때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시인은 고백처럼 얘기했다. 우울을 겪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그것을 보는 시각도 여러가지이겠지만, 이승희 시인의 시에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잘 표현된 우울은 그냥 억눌러진 우울보다 어떻게 다른 효과를 낳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집이었다.
이 시집을 베껴쓰는 동안 다른 책은 손을 못댈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