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프리다 칼로 지음, 안진옥 옮기고 엮음 / 비엠케이(BMK)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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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 절절 끓는, 프리다 칼로의 맨흔적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할 줄을 몰랐던, 한없이 젊고 건강할 뿐 제 청춘을 가늠하고 감당할 줄 모르던, 스무 살 때, 프리다 칼로를 처음 만났다. 부서진 여자였다. 온몸이 산산조각났으나 살아 견디는 느낌은 무엇일까. 2000년대 중반 대학가, 프리다 칼로를 여성해방과 사회주의의 투사의 프레임을 씌어 조명하는 시도가 많았다. 프리다 칼로를 그렇게 읽으려는 사람들은 프리다 칼로가 천재지만 바보라 하였다. 디에고 리베라는 너무 어린 프리다 칼로를 잡아먹어 그의 온 정신과 삶을 뒤흔든 천하의 나쁜 남자, 그에게 평생을 휘둘린 천치 같은 프리다 칼로. 역시 페미니스트나 공산주의자가 될 일말의 싹수가 없었던 걸까. 열강을 뒤로 하고 귀가 먼 채 그의 그림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세상에 단둘만 있는 느낌이 들던 그때, 나는 다른 시공을 살았던 그가 몹시 궁금했고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가 수없이 그린 자화상 중에 가장 마음을 파고들고 떠나지 않았던 1944년 작 <부서진 기둥>.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처럼 나는 그 사람이 아픈느낌을 알게 한 여자, <부서진 기둥> 그 자체로 가슴에 새겨진 사람 프리다 칼로. 

 

 

이미지로 기억된 대상은 스위치를 켜고 끄듯 한 순간에, 그에 대한 모든 시간과 감정들이 살아난다. 5, 동아일보사를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췄다. 사벽에 커다란 <부서진 기둥>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10여 년 전의 덩어리가 속을 찢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올해도 프리다 칼로 전시회가 열린다고? 작년에 소마 미술관에서 멕시코 정부 특별 허가로 프리다 칼로 국내 최초 전시회가 있었기 때문에 다음 전시회까지 한참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 한가람 미술관 전시회는 프리다와 디에고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멕시코 올메도 미술관의 소장작품 초대전. 작년에 100여 전시품 중 프리다 칼로 그림은 단 6개밖에 없었으니, 60여 전시품 규모의 올해 전시도 큰 기대는 접어야겠지만 2년 연속 한국에서 그의 그림과 물건들을 접할 수 있다니 설레고 또 설렜다.

 

그러던 차에 지난 6월 프리다 칼로가 죽기 전 10년 동안 쓴 일기를 모두 엮은 <프리다 칼로, 내 영혼의 일기>BMK에서 출간되었다. 번역을 맡은 안진옥 우리나라에서 라틴 미술 전시하면 이 분과 마주치지 않기 힘들 정도로 국내 라틴 미술 통으로 유명한 스페인라틴 미술 전문 기획자(언어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아르헨티나 유학파)이자 큐레이터고 미술관장이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10여권 책을 낸 출판사라는데 잘 몰랐다. 그럼에도 책을 제대로 훑어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책을 선택한 것은 역자 안진옥에 대한 신뢰 때문이기도 하였다. 큐레이터도 미술 전공자도 아닌, 먹고 살기 바쁜 평범한 월급쟁이라 그의 활동은 기사로만 접했었는데도 호기심과 존경심을 일으키는 분이었다. 물론 구하기 힘든, 프리다 칼로가 직접 그리고 쓴 프리다 칼로 자료란 점에서도 무조건 집을 가치는 충분하다. 2004년에 다빈치 출판사에서 프리다 칼로의 편지와 일기, 강연자료들을 발췌해 엮은 책이 나온 적이 있는데 현재 절판 상태라 이 책이 현재 국내에서 유통 중인 유일한, 프리다 칼로의 책이다.

 

디에고 시작

디에고 제작자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남자친구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애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 =

디에고 우주

일관성의 다양성 - .p.113 

 

 

 

 

여러모로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책이었다. 서지사항부터 특이했다. 역자가 직접 책 판권에 참여했으며, 편집 등 책과 관련한 연락처가 북디자인을 맡은 아르떼와 연결되어 있으며, 출판사 비중만큼 공급처(일원화)가 다루어져 있다. 그런 그들이 만든 책이 어떤 책인지 열심히 살펴보며, 원서를 찾아보았다. 1995년 출간된 원서(2005년 한 차례 개정)의 제목은 그냥 프리다 칼로의 일기El Diario De Frida Kahlo’이다. 프리다 칼로의 일기장 자체도 굉장히 전시와 연구 가치 높은 작품으로 봐도 손색이 없는데, 그 사본을 직접 훔쳐보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책이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상 우리가 그걸 그대로 볼 수 없는 일. 비엠케이의 번역본이 대단히 섬세했던 대목은 원서에 일기의 번역을 더하며 원문의 지워놓은 표시나 색깔 구분, 글자의 크기 같은 것까지 최대한 살려놓았다는 점이다.

 

원서의 경우 일기 사본을 다 보여준 후 책 뒤에 각 일기에 대한 해설을 달아놓았다. 그러나 비엠케이의 한국어 번역판은 그 해설을 원문 번역 다음에 놓음으로써 일기 원문-일기 번역-일기 해석을 함께 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원서가 독자 스스로 프리다 칼로에 집중하고 일기 사본 그대로 열람하게 해놓았다면, 한국어 번역판은 독자가 프리다 칼로의 일기를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재편집한 상태이다. 다만, 1쇄의 경우 원문과 일일이 대조해보면 오타가 몇 개 나오는데 웬만해선 찾기 힘들다. 프리다 칼로가 가장 육체적으로 쇠약했던 말년에 썼던 일기, 아주 사적인 기록인 만큼 찢고 더하고, 지우고를 반복해놓은 일기이기에 스페인어에 유창하더라도 완벽하게 독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글마저 그림처럼 느껴져 일기 자체가 작품처럼 느낀다고 앞서 표현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첫 번째 신념은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반혁명-제국주의-파시즘-종교-어리석음-자본주의-부르주아가 꾀하는 계략의 전 범위에 억압받는 계급을 위한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서는, 계급이 없는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혁명에 동참해야 한다. 두 번째, 혁명의 동지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레닌-스탈린-을 읽어야 한다. 내가 혁명 운동에 있어 가치 없는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혁명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죽지 않고, 절대 무익하지 않다. - p.166

 

 

사실 이 책의 기획과 존재는 프리다 칼로에게 대단히 잔인하다. 유명한 그를 조금이라도 더 탐하고 싶어 기어이 죽기 년 10년간의 일기를 책으로 펴낸다는 것, 분명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니다. 그 책을 소중하게 여기며 탐하는 독자 역시 예의 있지는 않는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삶과 예술이 고통 그 자체였던 화가를 잔인하게 더듬고 장렬하게 신음한다. 10여 년 전 감히 품었던 소원을 푸는 시간이었다. 그와 그의 그림에 조금의 감흥과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우스운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처음 그의 삶과 그림을 접해 꽂혔던 스무 살의 여자아이는 그를 너무 사랑해서 그의 고통까지 함께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이미 죽은 그의 고통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그를 더 알고 최선으로 마음을 건네고 싶었다.

    

마치 원서의 제목인양 한글과 영어로 영혼의 일기Diary of the Soul’라고 표현한 것은 국내 대표적인 미술 스테디셀러 중 하나인 예담의 <반 고흐, 내 영혼의 편지>를 의식한 것도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프리다 칼로의 일기이든 내 영혼의 일기이든 상관없다. 그저 남(출판사)이 붙인 것이니. 중요한 것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프리다 칼로의 일기장 사본을 읽으며 그의 마지막 10년을 함께 걸어보는 시간이었고, 일기가 뿜어대고 있는 한 사람(일기장의 주인) 그 자체였다. 프리다 칼로는 프리다 칼로이다. 한 사람을 처절하게 사랑했고, 공산주의에 빠졌으며, 장애와 사고로 평생을 아팠지만, 여성으로서의 자신에 천착했지만 그 어떤 것도 프리다 칼로를 규정하는 전부일 순 없다. 변태처럼 집요하게 그의 일기를 훔쳐 읽으며, 그의 취향이나 사상, 고민, 작품세계들을 깨닫고 머릿속에서 조합하며 그를 좀 더 깊게 이해하려 애썼다. 물론 이것도 일기로 기록된 10년 동안의 프리다 칼로일 뿐 프리다 칼로 전부는 아니지만.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자랑이다. 그의 그림은 국보로 분류하여 까다롭게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생전의 그를 처음 발굴한 것은 프랑스였고, 처음으로 개인전을 가진 곳은 미국이었다. 그렇게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린 지 12년 만에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가 아닌 화가 프리다 칼로로 살기 시작하였고 죽기 1년 전에야 멕시코에서 개인전을 하였다. 멕시코 최고의 국립학교의 의학도였을 만큼 명민한 그였지만 시대와 육체가 비극이었다. 그 역시 수없는 사랑에 빠졌지만 사랑스러운 뚱뚱보 코끼리 리베라를 평생 아꼈던 여자, 그토록 아기를 원했지만 기형으로 3번이나 유산하며 끝내 엄마가 되지 못한 여자,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그리고 아름답게 자신의 삶을 이어나간 여자. 프리다 칼로의 이 일기는 절절 끓는, 그의 맨흔적이다. 변태 같은 뒤틀린 애정이라 손가락질하더라도 기꺼이 삼켜볼 용광로이다. 그럴 수 있어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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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초등학생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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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른 초등학생] 나를 껴안는 시,간

 

 

 

3 3월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고, 학교에서 자기에게 편지쓰기를 시켰다. 태어나서 처음 내게 썼던 편지, 수능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을 때 학교에서 그 편지를 다시 돌려주었다. 나는 나에게 그 어떤 토닥임이나 응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의고사 몇점을 달성했는지,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수시를 썼는지 한참 묻다가 내 미래를 확신하며 끝냈다. ‘믿는다는 나를 껴안을 줄 몰랐던 내가 내게 건넬 수 있는 가장 큰 애정 표현이었다. 그마저도 잘하지 못했다. 나를 껴안는 법을 배우기 전에 나는 이미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었다. 다섯 살에 갓난아기를 업고, 여섯 살에 다섯 살 아이를 밥 먹이고, 일곱 살부터 큰집살림을 시작하고, 여덟 살에 급우들이 토한 것을 치웠다.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 결핍을 애인에게서 채우려고 했다. 그리고 너는 여자가 아니라 엄마(아내)인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온 심장이 산산조각났다. 누군가 아이답지 않은 아이를 볼 때 가장 슬프다고 하였다. 애어른인 것을 의식한 적이 없는 줄 알았지만, 그런 평가에 발작적으로 반응하며 상처받았다.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2013년 작 에세이 <어른 초등학생(원제 상동)>이 최근 박정임의 번역으로 나와 읽었다. 좋아서, 눈가가 자꾸 시큰하였다. 마흔셋의 어른’ ‘(마스다 미리)’초등학생’ ‘에게 책으로 말을 거는 이야기다. 일단 책을 말하는 책으로서 태도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서평집 등 책을 말하는 책을 쓰는 수많은 작가들이 (멋진 독서 가이드를 만들겠다는) 사명감이나 (남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우월감에 빠져 독자들을 외롭고 불편하게 한다. 안 그래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땐 잘 안 들어오고 고독감에 휩싸이는데 젠체하기까지 하면 더욱 멀게 느껴진다. <어른 초등학생>은 책들을 말하나 어떤 꼭지도 그런 느낌이 없다. 두고두고 기억나는,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그림책 스무 권을, 그 책을 읽던 때의 일화와 맞물어 소개한다. 그리고 각 꼭지가 끝날 때마다 해당 책의 출판 정보(표지, 제목, 작가)를 언급해두었다. 이 책을 번역출간한 이봄(문학동네 계열사)은 번역 여부와, 번역 정보, 해당 책에 대한 짧은 소개도 담았다.

 

 

나는 그림책을 아주 좋아한다. 사서가 얼굴을 기억해 아이는 언제 데려 오냐고 묻는 어린이도서관이 몇 곳 있을 정도로 미혼 치고, 유관 직업이 아닌 것 치고 즐겨 읽는다. 그리고 내가 좋아해서 읽으면서도 나름대로 아이와는 어떻게 읽을지를 고민해보곤 한다. 그래서 내가 아이였을 때 읽었던 그림책을 지금 아이들이 어떻게 읽을까가 무척 궁금했고 어린 나를 키웠던 소중한 그림책들의 상당수가 지금은 나오지 않음을 아쉬워하였다. 그런 점에서 <어른 초등학생>이 무척 부러웠다. 일본에서는 1969년생 작가가 초등학생 때 읽은 그림책이 지금도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스무 권의 그림책 중 절판된 것은 단 한권이라 그걸 찾으러 체코(체코 그림책이었다)다 여행간 이야기가 만화로 실려 있다. 물론 그림동화나 전래동화 같은 몇 백 년을 살아남아 부모와 자식이 당연하게 공유하는 그림책들도 많지만 이런 나온 지 몇 십 년밖에 안 된 현대그림책도 오랫동안 읽히며 공유하고 싶다.

 

  

에세이와 만화를 통해 구현되는 어린 마스다 미리의 이야기는 어른 마스다 미리의 회상으로 살린 것이다. 그래서 어른의 시선이다. 이 어른은 어린 자신이 애틋하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자꾸 말을 걸고, 안아주려 한다. 아이었을 땐 몰랐던, 어른이 되어서야 알고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은 어른의 자기애적 오지랖일 뿐, 어린 당시의 자신은 굉장히 씩씩했고 생각이 없었으며 충분히 아이스러웠다고. 다만 몰라서 친구에게 상처 입히고, 몰라서 어렵게 생각했던 것이 약간 아쉬울 뿐. 내가 눈물 지으며 <어른 초등학생>을 읽고 한참 책을 품고 있었던 것은 과거의 자신을 대하는 현재의 마스다 미리에 나를 투영시켰고, 너무나 공감했기 때문이다. 외모와 생기는 못해졌지만 나는 30대를 겪고 있는 지금의 내가 좋다. 나에 대해서 좀 더 너그럽게 대하고, 나를 토닥이는 여유를 서른이 넘어서야 알았다. 그렇게 알고 싶었던 나를 껴안는 방법을 어른이 된 지 10년이 지나서야 저절로, 조금씩 깨닫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무럭무럭 늙어가는 이 시간의 순간순간이 즐겁다. 나의 어른 초등학생을 곱씹게 해준 멋진 어른 마스다 미리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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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소록 - 선비, 꽃과 나무를 벗하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1
강희안 지음, 이종묵 옮김 / 아카넷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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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소록] 꽃과 나무, 6세기, 세 사람

  

 

 

꽃다발 말고 화분을 선물하는 이성을 만나면 청혼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동물만큼 식물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4년 전 아카넷의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시리즈 발간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첫 책이 강희안의 <양화소록> 역해본이란 것을 알고 언젠가 꼭 읽겠다고 마음에 두고 있었다. <양화소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지이자 우리 역사에서 화훼와 분재를 다룬 저술 중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책이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으로 30쪽 정도이고, 주제와 내용상 한국 고전을 읽을 때 우선순위로 잘 두지 않는 책이다.(세조 때로 추정되나 정확한 집필 시기를 알 수 없고 독립 저술로 발표되지 못하고 강 씨 집안의 문집에 실린 상태로 알음알음 발췌 필사되었다) 국산 전문 원예지의 효시 격이라고는 하나 스스로 경험한 바를 기록한 관찰일기에 가까운 책이다. 게다가 6세기 전의 이야기, 수많은 종이 멸종한 시간이다.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는 단순한 텍스트의 번역을 넘어 깊이 있이 있는 학술 번역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필자의 개인적 역량에다 학계의 연구 성과를 더하여, 텍스트의 번역과 동시에 해당 주제를 통관하는 하나의 학술사, 혹은 문화사를 지향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의 고전이 동아시아의 고전, 혹은 세계의 고전으로 발돋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p.6

 

 

수많은 고전 번역본이 나온다. <양화소록>의 경우도 이 책 출간 전 을유문화사의 번역본이 오랫동안 정본(?)처럼 기능해왔고, 이 책 출간 이후에 나온 눌와의 번역본도 그해 디자인이 좋은 책으로 수상되기도 했고 만듦새가 괜찮다. 그럼에도 4년 동안 마음을 바꾸지 않고 아카넷의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으로서의 <양화소록>을 집은 것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이종묵 교수의 역해 때문이었다. 어찌나 살을 많이 붙였는지, 원문의 근 10배 분량이다. <양화소록>의 역해자이기 전에 국문학자이고 시리즈의 기획의원으로서 이종묵 교수는 고전 독서의 의미에 큰 초점을 둔다. 아무리 좋은 글이고 현재적 의미가 있더라도 고전은 과거의 글이고, 그래서 현재의 프레임에서 의미 있는 번역본을 제안하고 읽힐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풍부한 역해로 새로운 책처럼 느껴질 정도이기에 아카넷의 <양화소록>을 읽고 을유문화사나 눌와의 <양화소록> 원문 번역만 읽으며 비교 독서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원문] 앞서 보았듯이 서향화는 고려 말 원나라를 통하여 들어왔다. 그로부터 강희안이 <양화소록>을 편찬한 것은 100여 년 남짓 지나서이다. 그러니 이때까지도 서향화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고 또 그 재배법을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강희안의 집 사우정에 서향화가 있으니 중국의 문헌을 조사하고 또 스스로 재배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서향화를 키우는 법을 익혔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인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가꾸는 정성이었다. 그렇게 하여 아름다운 서향화를 얻었다. - 7.서향화 (p.211)

  

 

그래서 아카넷의 <양화소록>은 독서를 통해 꽃과 나무6세기의 시간을 세 사람이 연결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책이다. 15세기부터 21세기, 강희안과 이종묵 교수와 독자 세 사람이 같은 꽃과 나무를 보고 생각하는 시간. 이종묵 교수는 <양화소록>에 영향을 준 더 오래된 책부터 <양화소록> 이후로 조선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 유관 저술과 예술작품들을 소개함으로서, 강희안과 독자와의 시간적 간극을 촘촘히 채워준다.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노송, 만년송, 오반죽, 국화, 매화, 난초와 혜초, 서향화, 연꽃, 석류꽃, 치자꽃, 사계화와 월계화, 산다화, 자미화, 일본철쭉, , 석창포, 괴석 17가지의 화훼물을 다룬다. 그에 화분에서 꽃나무를 키우는 법이나,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 등 자신의 화초 가꾸기 노하우를 공유한다. 원예에 대한 그의 태도와 글쓰기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가 <양화소록>에서 그러했듯 수많은 선비들이 <양화소록>을 구해 읽고, 인용하고, 영감을 받아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렸다. 영조 시기 유박의 경우 <화암수록>이라는 원예 전문서를 쓰며 <양화소록>의 부록이라고 헌정하기도 하였다. 


 

[원문] 세상 사람들은 여러 꽃의 이름과 품종에 익숙하지 못하여 산다를 동백이라 하고 자미화를 백일홍이라 하며, 신이화를 향불화라 하고, 매괴화를 해당화라 하고, 해당화를 금자화라 한다. 같고 다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진짜와 가짜를 서로 혼동한다. 어찌 꽃의 이름만 그러하겠는가? 세상사가 모두 이와 유사하다. - 13.자미화 (p.320)

 

강희안의 원예 취미는 군자의 도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수양 성격의 양반 문화, 선비 문화이다. 예나 지금이나 식물을 가꾸고 기르는 일은 손도 많이 가고 여러모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고급 취미이다. <양화소록>은 저자의 지위상 당대 최상위 취미유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것은 취미 규모의 과시보다 이 취미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희안은 관물찰리(대상을 보고 그 이치를 헤아림)하기 위해 꽃과 나무에 애정을 쏟았다. 강희안은 식물을 키우는 양생과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양생이 같으며, 화훼를 돌보며 그 이치를 살피고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 선비의 공부라고 보았다. 학자이자 관리이고 왕의 인척이기 전에 조선전기 대표 예술가이기도 했던 강희안. 이리저리 꺾꽂이를 하고 접붙이며 식물의 외양을 만드는 그의 원예도 혼이 살아 숨쉬는 예술로 느껴진다. 또 그에 영감을 받아 바로 시를 짓는다거나 과거의 서책을 찾으며 사색하고 흥을 향유하는 것은 어떻고.


 

[원문] 주상전하가 등극한 지 23년 된 해 봄, 일본에서 철쭉 몇을 진상하였다. 주상께서 내정에 두게 하였는데 그 꽃이 피자 단엽에 꽃송이가 무척 크고 빛깔은 석류와 비슷하였으며 겹겹으로 꽃받침이 붙어 있었다. 오래도록 꽃이 지지 않아, 색이 자색이고 천엽인 우리나라 품종과는 그 고움과 추함이 모모와 서시의 차이 이상이었다. 주상께서 아름답게 여겨 감상하시고 상림원에 나누어 심게 하고 바깥사람들에게 숨겨 아무도 이를 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행히 내가 인척이었기 때문에 한 종실 사람에게 작은 뿌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성품을 알지 못하여 하나는 화분에 심고 하나는 땅에 심어 시험을 해보았다. 땅에 심은 것은 얼어 죽었지만 화분에 심은 것은 탈이 없었다. 몇 년 사이에 가지가 번성하더니 4~5월이 되어 다른 여러 꽃이 진 후에 꽃을 피웠는데 자태가 농염하여 붉은 비단처럼 흐드러졌다. 실로 누추한 우리 집에서 감히 감상할 것이 아니었다. 객이 왔기에 화분 하나를 보여주었더니 아무도 무슨 꽃인지 알지 못하였다. - 14.일본철쭉 (p.331)


 

남귤북지가 정말인지 의심하며 한양에서 귤을 키우는 데 성공하고 그를 기록하는 대목에서 그의 탐구열을 엿볼 수도 있었다. 또 당대의 인식에 반기를 들며 산다와 동백, 자미화와 백일홍을 구분하는 등 치열하게 식물의 종을 공부하면서 즐기는 자세에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 원문, 그리고 이종묵 교수가 추가로 보여주는 온갖 선비들의 글에서 엿보이는 원예에 대한 열정과 함께 가장 부럽게 느껴졌던 것은 정신적 여유였다. 아카넷의 <양화소록>의 내용 중엔 지금은 다시 구분이 달라졌거나, 무엇인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시중에서 취급하지 않는 꽃도 있다. 이렇게 다른 시간, 다른 시선의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이 있음에도 세월에 변치 않는 가치(정신)가 있기에 이 책에 푹 빠질 수 있었고, 이 책이 지금도 고전으로 기억되는 것 같다.  흔히 가드닝이나 원예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서양 책 위주로 참고하고 먼저 집는데, 꽃과 나무를 벗하는 선비의 기록 <양화소록>을 통해 한국적 정원 미학을 생각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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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섬 > 우리는 윤동주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_<시인 동주> 안소영 작가와의 만남 (2016.03.18 창비 서교 사옥)

2016년 창비 책읽는당 페이스북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

매월 창비에서 정한 창비책 한권을 읽는 북클럽인데, 3월 선정 도서는 안소영 작가의 <시인 동주>였다.

작년에 나온 책이지만 지난 2월 영화 <동주>가 개봉했기도 했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등 윤동주 관련 서적이 인기던 때이기에 즐겁게 함께 읽었다.

 

 

 

 

 

 

 

 

 

 

 

 

 

 

 

 

평소에 전기 소설보다는 역사 사료로 직접 인물을 접하는 것을 좋아하는데다가

안소영 작가의 책들은 성인보다 청소년에 더 타깃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해

<시인 동주>로 그의 책을 처음 읽어 보았다. 책은 예상했던 것처럼 읽기 쉬웠는데 책을 읽고 너무나 작가가 궁금해졌다.

엄청난 취재량과 그 자료를 정갈하게 정리해 독자들에게 보여 주고 책 속에 나왔던 동주의 지인들을 한 사람 한사람 정리해 다시 보여주는 섬세함이란. 대상(윤동주)에 대해 보통 애정과 열정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운좋게 알라딘에서 연 <시인 동주> 안소영 작가와의 만남 이벤트에 초대되어

감사한 마음으로 다녀오게 되었다.

 

 

평소처럼 합정역에서 내려 창비서교사옥에 가는데 알라딘 중고 서점 합정점 발견!!

COFFEE라고 써 있는 걸 보니 카페도 겸하는 것인가??

이 날 사진 찍고 아직도 못 가봤다. 곧 가겠지.

 

 

 

로비에서는 <위니를 찾아서>를 한창 주력 홍보하고 있었다.

이날 작가와의 만남 참석자에게는 <위니를 찾아서> 책갈피를 줬다.

 

 

강의 전에 시간 여유가 좀 있어서 카페 창비에서 다시 책을 훑어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혹시 책을 당일 사올 사람을 위해 카페 창비에 마련되어 있었던 <시인 동주> 매대

 

 

 

 

안 갔으면 두고두고 한이 맺혔을 만한 열강이었다.

창비에서는 간단히 책에 대해 소개하고, 동주의 시를 함께 나누고, 질문을 좀 받고, 사인회까지 해서

1시간반~2시간 정도의 행사를 예상했던 것 같은데

책과 꼭 닮은 안소영 작가님 책에 대하여 동주에 대하여 얼마나 주옥 같이 귀한 말씀을 많이 나눠주시던지

정신 없이 듣느라 바빴다. 질문이 끊이질 않아 강의만 1시간 반이 훌쩍 넘어, 사인회까지 끝나니 10시가 넘어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작가님은 <동주와 몽규>로 책 제목을 짓고 싶었다고 했다.

송몽규라는 존재를 나도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는데

 

1. 자료가 너무 적어서

2. 취재한 내용만으로 책을 끌고 나갈만한 작가로서 역량이 부족해서

3. 취재하면 할수록 윤동주란 인물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윤동주에 집중한 <시인 동주>를 썼다고 한다. 

 

제목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고민하셨다고 하는데

'시인'이란 말을 꼭 붙여주고 싶어서 이렇게 지었다고 했다.

"윤동주는 그토록 시인으로 불리길 꿈꿨으나 단 한번도 시인으로 불리질 못하고 죽은 청년입니다."

 

<책만 읽는 바보>, <다산의 아버님께>, <갑신년의 새 친구>, <시인 동주>

지금까지 쓴 책이 전부 전기 소설인 게 궁금하였는데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져서 사료들을 보다가 이덕무로 시작해 문제의식과 관심이 점점 현대로 향해가고 있다고 하셨다. 개화기의 청년을 다룬 <갑신년의 새 친구>를 쓰며 그렇다면 식민지 현실에서 청년들의 삶은 어떨지에 대해 궁금해졌고, 생각 끝에 택한 사람이 윤동주였는데 취재를 하며 윤동주에 대해 너무도 아는 게 없음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직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차기작이 된다면 대한민국 어느 시대의 청년의 삶을 다뤄보고 싶다고.

 

안소영 작가는 자신의 책이 소설로 볼 수 있을까란 말을 했는데

객석에서도 이 책을 역사책으로, 국문학 자료 등으로 보며 수업에서 활용하거나 공부한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우리가 지금 배우는 윤동주 이미지 대부분은 1976년 <나라사랑>이란 잡지에서 동주의 연희전문학교 벗들이 회고한 것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듣고 놀랐다. 노인이 나라는 비록 암흑기였지만 인생에 가장 혈기 왕성하고 빛났던 청춘을 떠올리며 친구를 생각하다보니 윤동주는 자연스럽게 실제보다 더 청초하고 맑고 순한 사람으로 포장되었다고 한다.

 

안소영 작가가 윤동주 시인에 대해 책을 쓰기 전 가장 궁금했던 점이

한 사람이 어떻게 서정시인과 저항시인이 가능할까였다는데 그래서였다.

실제 윤동주는 훨씬 내면이 강하고, 이지적이며, 무언가를 끝까지 파고드는 성품이었다고.  

 

책에 이미 있는 내용들을 다시 살피기도 했지만

작가가 어떻게 책을 썼는지 많이 알게 되어 좀 더 책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한껏 얻어간 강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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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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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들의 집] 무대화된 현실, 삐걱거림의 판타지아

 


 

수년 전부터 나는 도시 난민을 소재로 한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가족 공동체의 해체를 비롯해 삶의 기반을 상실한 채 실제적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유대가 붕괴되면서 심각하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존재들이다. 나는 이 훼손된 존재들을 통해 새로운 유사 가족의 형태와 그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고 싶었다. 이는 삶의 생태 복원이라는 나의 문학적 지향과도 맞물리는 것이었다. - 작가의 말 (p.247)


 

성북동엔 아몬드나무 하우스가 있다. 1층에 고흐의 <꽃 핀 아몬드나무>가 걸린 이 4층집은 북카페지만 영업은커녕 로스팅머신도 없고, 기실 마마의 품속으로 모여 든 고아같고 난민같은 이들이 같이 사는 공동 주택이다. 누구 하나 평탄한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아몬드나무 하우스의 동거자들은 서로의 사연은 알고는 있지만 함께 짊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한 데 살면서 가족의식을 키워나가는데 마마는 숨소리조차 없는 침묵으로 그들의 욕망을 묵살한다. 이 기묘한 집에 마마의 제안을 받은 김명우가 집사로 들어온다. 마치 아몬드 나무 하우스의 완성은 김명우인 것처럼 그가 입주하자 장사가 시작되고, 이야기가 폭주한다. 마마, 명우, 난희, 보라, 현주, 윤정, 정민, 윤태가 얼키고 설켰던 시간들.


일독을 마쳤을 때 너무나 괴상한 기분이었다. 처음엔 완성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피에로들의 집>도시 난민유사 가족이라는 매력적인 주제가, ‘영화그림음악이 종횡무진 하는 현란한 양념을 얹어, ‘슬럼프세월호라는 작가의 내외적 작가의 문제와 결합한 소설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전혀 섞여 있지 않다. 분명 한 편의 소설인데, 조각조각 구획화된 글로 읽힌다. 교과서 같은 결말 처리에 그 동안 읽었던 모든 것들이 허무하고 평이하게 느껴지며 온 힘이 빠진다11년 만에 완결한 장편소설이라면, 그 소설은 역작 아니면 졸작일 확률이 높다. 이 소설은 후자구나 하고 진저리쳤던 한참 동안의 시간을 정리할 찰나 다른 생각이 스쳤다. 원래 이런 소설, 이상하고 낯선 소설이라고.

 

 

순간 나는 절망 이후에 찾아온다는 체념과 마주하고 있었다. 말해 무엇하랴만,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잃고 삶을 허비하게 되면 어떤 기회라도 늘 다른 이의 몫으로 돌아가게 마련이었다. - p.13

 

누군가와 헤어졌다는 사실보다 그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뒤에 남겨진 자의 더한 고통이자 혼란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사라짐의 의미도 조금씩 변해갔다. 한동안은 그녀를 탓하고 원망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후 긴 자책의 시간이 찾아왔고 지금은 그녀가 오직 살아 있어주기를 바라는 간곡한 마음과 강요된 체념만이 남게 되었다. - p.50

 

저야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저런 얘기를 듣다보니 난민을 거둬 보살피는 대모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봐야겠죠. 지금 아몬드나무 하우스에 살고 있는 이들 모두가 실은 난민이나 고아 같은 존재들이니까요. 어쩌면 당신도 난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마마로 살아가는 거겠죠. 남달리 외롭게 살아온 분이거든요.” - p.93

 

 

<피에로들의 집>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김명우가 지인들에게 늘 듣는 소리가 있다. 말을 연극 대사조로 한다는 것. 가만히 보면 <피에로들의 집> 자체가 무대화한현실 이야기이다. 소설 자체가 현실에 바탕을 둔 허구(이야기)인데 <피에로들의 집>은 그 소설을 다시 연극화함으로써 현실과의 이질감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보니 이 책이 동시대에 실재하는 인물과 장소와 사물의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 작위적인 판타지로 느껴졌던 것이 비로소 수긍이 간다. 완벽하게 작가가 설계한 세트장 서울 위에 펼쳐지는 인형극을 보는 느낌이랄까. 계간지 연재 당시 제목이 피에로들의 밤이었다는 걸 듣자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작가는 소설의 무게중심을 피에로의 ‘속성’에서 연대로 맞추기 위해 ‘밤’을 ‘집’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 책은 연극(피에로)이 끝나고 난 뒤()의 심정으로 읽는 연극이라고.


 

제목을 의식하지 않으면 처음 <피에로들의 집>은 대단히 디테일이 살아 있는 섬세하고 현실적인 소설처럼 느껴진다.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의 묘사부터해서 배경 설명이 매우 자세한데다가 실재했던 것이나 그를 비슷하게 바꾼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몬드나무 하우스의 이야기로 들어가면서 인물, 구성, 전개가 상투적이고 단순해진다. 여기에서의 섬세한 묘사는 현실성을 높이는 게 아니라 소설을 더욱 극적이고 작위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그래서 인물 각자는 비련의 주인공 심정으로 자기 삶에 몰두하지만 독자들은 심드렁하다. 예상한 지점에 대모는 아프고 입주자들은 퇴장한다. 다들 적절할 때에 사고나고, 떠나고, 만나고, 죽는다. 그 모든 일에 김명우가 있으며 남의 인생 해결과 자기 성장을 동시에 도모한다.


 

, 기성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때로 무차별적으로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걸까요? 더군다나 기득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더욱 거칠어지죠. 그런 난폭한 방식으로 자기 보상을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 같은데도 말예요.”

그는 계속 얘기하고 싶은 눈치였고 나는 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텔레비전을 통해 사회적 재난을 시청하면서 그때마다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는 부류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저녁을 먹고 나서 일가족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한가롭게 차를 마시면서 말예요. 타인의 불행을 목격하면서 내가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상대적인 안도감을 느낀다는 거죠.” - p.147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다름 아닌 박윤정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는 지난겨울 그녀가 여행했던 행로를 따라 내가 지금 이곳에 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김현주와 정민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면서, 내가 다시 아몬드나무 하우스로 돌아가기 위해 떠나왔다는 사실을 절로 알게 되었다. 거기엔 내가 해결해야 할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 p.244

 

 

그 와중에 작가는 세월호로 힘든 심정이나(당시 연재를 중단했었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티나게 드러낸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우며 총체적 난국이다. 하지만 제목을 의식하고 보면 이 책의 모든 괴상함이 삐걱거림의 판타지아로 느껴진다. 아마추어스러움, 진부함, 현실적인 비현실 등 책 안에서 수없이 부딪히고 있는 이질감과 한없이 흠처럼 느껴졌던 것을 모두 피에로라는 상징 뒤로 숨길 수 있다. 과장, 공허, 거짓, 조롱 등 광대놀음 그 자체로. 정서는 무대 중이 아닌 무대 후로. 그렇게 보면 더러는 낭만적이고 더러는 측은하며 만감이 교차해 제법 독후감이 괜찮아진다. <피에로들의 집>은 그래서 호불호가 극명히 갈릴 소설이다. 누군가는 열광하고 의미 부여하며 소설을 한참 곱씹고 즐기겠지만, 누군가에겐 작가 이름을 다시 확인하며 기함하고 실망할 소설이다.

 

윤대녕 작가와 <피에로들의 집>의 가장 큰 적은 작가 자신, ‘윤대녕의 네임 벨류(문단의 위치). 문단의 중요 스승이자 중견작가가 정통 문예지(계간 문학동네)에 연재발표한 소설이 아니라 신인 작가가 쓴 소설이었다면 분명 더욱 후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형식적 실험, 아이디어만 건질만한 평작이었다. 숱한 퇴고를 했음에도 책 속에 작가가 글을 쥐어짜는 고통이 곳곳에 느껴졌고, 여러모로 반듯하고 모범적이었지만 그래서 감탄하지 못하는 소설이었다. 윤대녕 스스로도 오랫동안 지향하고, 구상하고, 시도했던 주제라고 밝혔듯 <피에로들의 집>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소설은 반드시 다시 나올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 미래가 있다면 프로토타입으로 견뎌볼 만한 소설이다.





주요 온라인 서점에서 출간 기념, 소진시까지 '윤대녕 필사노트' 증정 中

4-5mm 두께의 손바닥 노트다. 윤대녕의 전작을 발췌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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