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카프카 - 카프카와 브로트의 위대한 우정
막스 브로트 지음, 편영수 옮김 / 솔출판사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번 카프카의 <일기>를 읽고 혼쭐이 났다.

일기만큼 그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무엇보다 어렵게 쓰이지 않았다는 것과 어느 정도 관음증을 만족시켜준다는 점에서 일기를 읽는다는 건 만만찮은 재미와 흥미를 갖게 만든다. 그런데 카프카는 그것을 완전히 무산시켰다. 누가 어려운 작가 아니랄까봐.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를 외로움이 느껴졌다. 카프카를 좋아하는 독자도 많다만 나는 좀처럼 좋아지질 않으니.

 

카프카의 일기에 혼쭐이 났다면 다시는 도전을 안 할 것 같은데 또 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또 도전을 하고 말았다. 이번엔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그의 친구가 쓴 책이다. 이번엔 좀 쉽지 않을까 아니 읽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먼저 읽은 것에 비하면 그나마 읽히긴 한데 나을 것은 없다. 그 알량한 읽힘도 책 자체가 좋아서라기 보단 그나마 읽어준 것이 있어 읽혔다고나 할까? , 이렇게 어려운 작가에, 이렇게 어려운 친구라니.

 

글쎄. 이 책을 규정하기를 평전이라고 했는데 글쓴이가 당대 카프카 못지않은 지식인이었으니 오죽 할까 싶기도 하지만 나는 왠지 평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면 단번에 네가 카프카를 알아?’ 타박과 오해를 받을 테니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다.

 

물론 평전이 맡긴 맡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 개인으로 볼 때 카프카에 대한 (친구라도) 존경과 경의의 뜻으로 쓴 일종의 고급진 에세이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글도 보면 앞에 나오는 전기에서 저자가 느끼고 봤던 일인칭 시점에서 카프카를 묘사하기도 했다. 평전은 그 보다 더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저자 자신의 카프카에 대한 감정과 주관적 느낌이 들어갔다는 점에선 평전이라고 보기엔 다소 애매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또 전기 이후에 나오는 카프카의 신앙과 학설, 작품에 나타난 절망과 구원 등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카프카의 문학을 학문적으로 잘 정립하려 했는지 그 애정과 열정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것을 보면 평전은 평전일 것이다. 그 사람에 짐작이 아닌 직접 보고 느끼고 연구한 것을 쓴 것이니까.

 

책을 읽으려고 펼쳐든 순간 도대체 카프카가 저자에게 어떤 존재였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새삼 부럽기도 했다. 나에 대한 평전은 고사하고 내가 죽고 난 뒤 내가 어떠한 사람이었다고 글 한 줄이라도 남겨줄 사람이 나게 과연 있는가? 난 또 그러리만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왔을까? 거기에 대해 나는 결코 긍정할 수가 없다.

 

<일기>를 읽었을 땐 무조건 어렵다고만 느꼈고, 이 책 역시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저자로 인해 카프카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난 이 책에 좀 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사실 카프카에 대해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을 땐 시쳇말로 좀 찌질 하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평생 아버지를 어려워했고, 그렇게 많은 글을 썼음에도 늘 자신은 글을 조금밖에 못 썼다고 자책하며 살았다. 게다가 전업 작가가 된다는 건 아예 꿈도 꾸지 않았고 평생직장을 그만두지도 못했다. 게다가 결혼을 번복했으며 더구나 자기네 집을 돌봐주던 가정부와 결혼할 생각도 가졌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그는 한마디로 사회부적응자는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 읽어보면 이런 판단이 얼마나 섣부른 판단인지를 반성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카프카는 지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문학에 뜻이 있었음에도 법학 학위까지 받았고, 저자의 말에 따르면 조용하고 겸손하지만 어느 순간 농담도 잘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관용과 확고한 사람으로도 묘사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 브로트가 언젠가 니체를 사기꾼이라며 비판하고 성토하는 자리에서 카프카는 그렇지 않다며 반박했고 그 후 브로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둘은 평생지기로 살았다.

 

카프카의 연애도 그렇다. 일개의 가정부와 결혼할 생각을 했었다면 그는 연애는 해 봤을까 싶기도 하겠지만 그는 확실히 연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밀레나에게 그렇게나 많은 편지를 보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고 적대자가 없었다고 브로트는 말한다. 또한 그가 평생직장에 다녔던 건 밥벌이를 위한 직업과 글쓰기 예술은 날카롭게 서로 분리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저널리즘이 표현하는 직업과 글쓰기의 혼합을 거부했다고. 그것을 브로트는 직업과 소명을 얻기 위한 투쟁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글 써서 돈을 못 벌 것이라는 판단 하에 직장을 병행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직장을 다녔던 것이다.

 

뭐 이런 것만 보더라도 카프카가 얼마나 성실하고 선량하며 유쾌한 사람인지 짐작이간다. 그러므로 그의 사후 세간의 이목에 의해 덧씌워진 잘못된 이미지를 좀 벗겨낼 필요도 있어 보이고, 이 책은 그러기에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브로트와 카프카가 친구가 된 후로 그 둘은 거의 매일 만났고 필요하면 하루에 두 번도 만났다고 한다. 과연 대단하다 싶다. 우린 아니 적어도 난 아무리 좋아하는 친구라도 거의 매일 만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에 들이는 공력도 공력이지만 매일 만나면 아무리 좋아하는 친구더라도 좀 질리지 않을까? 그럴 수 있는 이면엔 서로 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새삼 궁금하기도 하다.

 

이 책서도 카프카의 일기와 편지가 빠지지 않는다. 카프카는 작품도 작품이지만 이제 일기와 편지로 더 유명한 하지 않을까? 그의 시대나 요즘이나 편지를 주고받는 인간관계란 흔치 않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부러운 것도 사실이고 꽤나 지적여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말 보단 글로써 풀어내려고 했던 카프카가 뭔지 모르게 짠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건 왜일까? 그건 하나의 깊은 확신이기도 하겠지만 말로써 풀어내지 못하는 그의 내적인 한계가 있어서는 아닐까? 그냥 네 멋대로 생각해 본다. 그래서도 그는 작가로 충실했던 거고.

 

,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 중 또 하나는 고독이라는 건데 이 책 그 이미지도 다소나마 걷힌 느낌이다. 이렇게 몰랐던 (또 알더라도 잘못 알고 있는)카프카를 알아가는 건 (작가들의 삶을 알아가는)나에겐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이다. 이 책 카프카에 대해 가장 직접으로 알 수 있는 책은 아닐까 한다. 카프카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복근에 힘을 뽝 주고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8-03-27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는 작품 속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독특한 내면 세계가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직장이나 옆집 이웃으로 만났다면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실은 만나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어쩐지.^^:
stella.K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세요.^^

stella.K 2018-03-28 14:2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막상 그 사람의 실재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걸 편견이라고 하는 거겠죠?
저는 이 책으로 카프카가 조금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긴 하지만
여전히 카프카는 아니 어쩌편 독일 문학(폴란드가 포함된)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ㅠ

2018-03-28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28 14:2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우리나라에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있지만 누구 하나 그의 친구가 평전을 써줬다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는데 역시 그 사람에 그 친구라고 해야할까요?
부럽기도 하고. 저 주위의 사람들은 저를 어떻게 평가할지
것도 참 그렇더라구요.ㄷㄷㅋㅋ

서니데이 2018-03-30 0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매일같이 공기가 좋지 않은 날이 이어지고 있어요.
알레르기와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stella.K 2018-03-30 13:30   좋아요 1 | URL
아, 네. 서니님도요.^^

희선 2018-04-01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프카 소설은 거의 읽지 못하고, 《카프카 평전》(이주동)을 봤어요 한국 사람이 쓴 거예요 한국 사람이 써서 잘 읽히고 괜찮습니다 작품 이야기도 조금 하지만... 카프카가 살던 때는 편지를 많이 썼지요 카프카는 브로트한테 자기가 쓴 글 다 태우라고 했지만 브로트는 책으로 냈어요 브로트만 그런 건 아니군요 카프카가 마지막에 사귄 여자도 카프카가 쓴 글을 가지고 있다가 책으로 냈는지 자손한테 물려줬는지... 이건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카프카가 쓴 글을 없애지 않아 지금 사람이 읽는 거네요


희선

stella.K 2018-04-02 13:25   좋아요 1 | URL
아, 읽으셨군요.
이책은 문체가 좀 어렵더군요.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이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해를 돕도록 썼을 테니.

맞아요. 태우지 않고 출판을 했으니 우리가 읽은 거죠.
그런 점에서 브로트나 카프카의 마지막 연인에게 고마워해야죠.^^

서니데이 2018-04-01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주는 미세먼지가 많았지만, 날씨가 매일같이 따뜻해지는 시간이었어요.
오늘도 따뜻한 날이예요. 바깥에는 꽃이 피는 시기이고요.
stella.K님, 오늘 부활절입니다. 기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부활을 축하합니다.^^

stella.K 2018-04-02 13:30   좋아요 1 | URL
아,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의 성경공부 리더님이
부활절 계란을 선물로 주시더군요.
어제 못 먹고 좀 아까 점심으로 먹었습니다.ㅋ

내일 모레 비오고 조금 추워질 거라더군요.
아무래도 한식이 지나야 완전 봄날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미세먼지 보통이라더니 좀 뿌옇더군요.
외려 오늘이 좀 낫나요?
5월까지는 미세먼지낀 날이 많을 거라네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요.^^

2018-04-03 0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3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80년대 글동네의 그리운 풍경들
정규웅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0년대는 나에게 왠지 모를 원죄의식이 있다.

어려서부터 작가가 꿈이었던 내가 그 꿈을 버렸던 건 순전히 80년대를 잘못 인식한 때문이었다. 즉 당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단 말이다. 80년대 하면 군사독재로 대비되던 시절이었다. 민주화와 최루탄(또는 화염병), 주사파, 전두환의 정권 탈환 등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 문학만이라도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청정지역으로 남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마저도 참여문학이었으니. 숨이 막혔다. 더구나 그 시절엔 민주화 하면 빨갱이 공산당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어 문학 역시 오염됐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정말 머리가 크긴 커졌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건 들이는 노력에 비해 남는 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 읽고 말 책. 그나마 거들떠라도 보면 다행이다. 쳐다도 보지 않을 책이 쳐다라도 보는 책 보다 훨씬 많은 세상에서 내 책이 후자에 들 가능성을 보장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독자로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인데 그럴 때 작가는 어떤 마음이겠는가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 참담함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우연찮게도 90년대 중반에 들어설 무렵 모처에서 작가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땐 그나마 또 그렇게 되려고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가서야 되겠나 그런 마음으로 다시 작가의 꿈이 살아나고 있을 때였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원했던 장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가는 작가였다. 그땐 정말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 신춘문예 따위는 가볍게 제치고, 우리나라 대표문학상 이를테면 이상이나 동인 문학상 수상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첫발을 내딛었다는 게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쉽게 얻은 기회는 또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나락에도 길은 있더라. 다시 못 일어날 것만 같은 내가 다시 일어나 찾아간 곳은 시인 김정환 선생이 하시는 창작 학원이었다. 창작은 학교에서나 배우는 건줄 알았는데 이런 학원이 있다는 게 신기했고 거길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어찌 보면 신선이 사는 곳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80년대 참여문학을 했던 작가들이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내심 놀라웠다. 그토록 거부했던 내가 참여문학의 당사자들을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그들은 하나 같이 강의 도중 지나간 세월을 얘기했다. 하긴, 그때가 90년 대 중반으로 그들 가슴속엔 그 뜨거웠던 80년대를 아직 잊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빨리 그 시절을 잊고 사는 것 같았다. 또 그 때문에 내 눈엔 그들이 더 초라하고 외롭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80년대를 견뎠던 그들의 기백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신선같이 앉아 수강생들에게 글쓰기나 가르친단 말인가. 물론 그들의 하는 일이 원래 글을 쓰고 그렇게 필요하면 후학도 가르치고 하는 일이겠지만 뭔가 모를 낮선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은 또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시절 문학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저 엄혹한 80년대 참여문학을 해서 내가 숨이 막혀 문학을 멀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참여문학이 나를 거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즉 난 현실인식을 전혀 하지 못하는 미욱한 독자였던 것이다.

 

책은 앞부분에서 한수산 작가의 필화사건 다루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아는 지인과 술자리에서 몇 마디 시국을 논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지 않는가. 그 앞에 자유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런 나라에서 비판 좀 했다고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이게 빨갱이 공산주의와 다를 게 뭐가 다르단 말인가?

 

박완서 작가는 문학의 효용은 우리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위안을 주고 힘이 돼주는 것(195p)이라고 했다. 어느 시대고 어렵지 않은 시대는 없었겠지만 이 시대의 작가들은 거의 대부분 4, 50년대에 태어나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던 시대다. 그 시절 그들의 나이는 대략 3, 40대의 나이었을 것이다. 가장 혈기가 왕성하고 그들의 붓끝이 가장 날카로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들이 민중을 대변하고 대신 울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대신해줄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보는 시각이 전혀 틀리지마는 않은 것이 얼마 전 읽은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에서 그런 말을 한다.    

 작가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을 끊임없이 소환해낸다. 우리 전통 장례 풍습으로 치자면 유족과 함께, 유족들을 대신해 곡해주는 사람들인 셈이다. 우리 문학은 민주화를 통해 ‘5월 광주에 대한 막중한 부채의식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빠르게 현실에서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중략)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하도록 가르친 문학이 1990년대 이후 위기에 직면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소설 보다 현실이 더 극적인데 누가 문학 작품을 사서 읽겠느냐는 지적도 있지만,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현실과 직접 대면하려는 자세마저 보기 어려워진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183p). 

 

그렇다면 내가 그 창작 학원에서 본 80년대 작가들이 90년대가 되면서 신선 같아 보였던 것은 아주 잘못 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의 이슈가 주어졌을 때 전력투구하다 그것을 달성하거나 사라져버리면 그 순간 노쇠해져 버리는 것이다. 80년 대 참여 문학을 했던 그 쟁쟁했던 작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지금 또 생각하는 건, 그 시절 문학이 정말로 참여문학 일색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대세였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작가들이 참여문학을 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또 이것을 두고 작가들 간에 파가 나뉘어졌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1982년부터 내가 어떤 책을 읽어왔나 소위 완독 리스트를 기록해 왔는데 그해의 베스트셀러를 읽기도 했다. 물론 그건 별로 참여문학의 성격을 띠지 않는 책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참여문학 일색은 좀 과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80년대에 문학 활동을 했던 작가들은 80년대 주류문학이 해체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미리 앞서 내다보고 활동을 했을지 그건 모를 일이다. 그 시대의 문학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작가 보단 평론가나 기자들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우린 또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작가가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의 활동상을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 책이 나와 줘서 얼마나 반갑던지. 무엇보다 저자가 신문사 문화부 기자 출신이다. 난 이런 문화부 기자들이 쓴 책을 좋아한다. 그들이 직접 발로 뛰고 간결한 문장으로 써낸 책들이 좋은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작가와 작품의 이면은 잘 모를 수 있다. 그럴 때 기자들은 그런 걸 취재해서 독자들에게 알려줄 수가 있다. 작가는 너무 힘들다. 물론 세상에 힘들지 않은 직업이 몇이나 되겠냐만 난 다음에도 생이 있다면 그땐 작가를 취재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

 

책은 80년대 활동했던 문인들을 다룬 만큼 물론 민주화를 비껴가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당대 문학이 참여문학만을 의미하지 않듯 한 작가, 한 작가 그들 문학의 특징과 삶을 잘도 포착해냈다. 읽다보면 이렇게나 많은 작가들이 자기 색깔을 내며 활동할 때 나는 너무 우리나라 문학을 과소평가하고 홀대해오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70년대는 나도 한창 자라느라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80년대는 뭔가 사고 체계도 얼마만큼 자리를 잡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난 우리 문학을 보는 안목을 키우지 못했다.

 

지금도 난 우리나라 문학이 재미없는 줄 안다.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 어느 점에선 틀린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들이 문학을 생산하면 독자는 소비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 사이를 연결시켜고 유통시키는 중간자들(평론가, 기자, 서평가 등)의 역할이 너무 미약했던 건 아닌가 한다. 뭔가 여기저기서 얻어 들리는 말이 있어야 사 볼 생각도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엔 문학 권력에 대한 비판 소리가 높다. 작가(가 되려는 자)와 심사위원간의 유착이 어느 정돈지 나 같은 독자는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것에 대한 좋고 나쁨의 평가의 몫을 독자에게 돌려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자나 평론가를 포함한 서평자들은 어디에 뭐가 있다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좀 더 충실히 해줘야 하지 않을까?

 

특이한 건 저자는 현존하는 작가 몇몇을 빼놓고 매번 그 작가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그러고 보면 80년대 쟁쟁했던 작가들이 지금은 거의 사라진 느낌이다. 다른 누구는 몰라도 나 개인으론 이청준과 박완서, 박경리 이 세 작가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글을 쓰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저자가 옛 사람이긴 한가 보다. 간혹 읽다보며 여류라는 말을 여과 없이 쓰고 있어 눈에 거슬렸다. 이건 교열 과정에서라도 뺏어야 했던 건 아닐까? 모처럼 선물 같은 책에 이것 하나가 오점으로 남았다. 다음엔 출판사의 좀 더 세심한 배려를 기대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8-03-17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단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박완서, 박경리 같은 원로작가들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분들이 살아있었더라면 쭉정이 작가들이 설치는 문단을 비판했을 거예요.

stella.K 2018-03-17 12:26   좋아요 0 | URL
그나마 조정래나 황석영 작가가 아직은 건재하잖아.ㅋ
정말 80년대 작가는 읊을만한 작가가 있는데
90년대부턴 과연 30년 뒤에도 기억될만한 작가가
얼마나 있을지 몰라. 기껏해야 김영하나 은희경
김연수 정도가 될 것 같은데 80년대 작가에 비하면
현저하지. 문학의 위상을 키우지 못한 탓도 있는 것 같아.ㅠ

2018-03-17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17 12:31   좋아요 0 | URL
와우, 아직도 신춘문예 응모! 대단하네요.
사실 우리나라는 등단 나이를 설정해 놓는 경향이 있죠.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말 정도로 잡고 있잖아요.
그 나잇대 등단하면 거의 천재죠.
등단한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신춘문예도 신춘문예지만 일반인도 글을 써서
등단할 수 있는 창구가 많이 열려야 할 텐데
우리나라는 참 그런 게 많지 않아 아쉬워요.ㅠ
 
길 위의 독서 - 바람구두 인생 서평
전성원 지음 / 뜨란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저자를 알게 된 건 오래 전 알라딘이 서재라고 하는 개인 블로그를 개설한 초창기 때였다. 지금이야 개인 블로그 하나쯤 운영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때는 뭐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운영을 해야 할지도, 누구와 인사를 하고 친구를 맺어야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는 수줍게 내 서재에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었다.

 

그는 지금도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긴 제목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게 무려 2000년부터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개인 홈피를 운영하면서 알라딘 서재가 생기자 함께 운영을 한 것인데, 저자의 서재를 방문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평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쓰기도 많이 쓰지만 다방면의 글들이 올라와 있다. 알고 봤더니 그는 <황해문화> 편집장이었다.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글은 직업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나의 서재에 먼저 다가와 인사해줬다는 건 나에게 꽤 자존감을 높여줬던 것도 사실이다. 내 허접한 서재에 뭐 그리 볼 것이 있다고. 게다가 내가 성격상 낯가림이 좀 있는 편이라 아무나 덥석덥석 아는 척 하는 성격도 못되는데 이렇게 먼저 손내밀어줬으니 고마울 밖에.

 

그렇게 시작된 저자와의 인연은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시간을 같은 알라디너로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어느 곳이나 그렇듯 떠나는 사람이 있고 머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머무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을 지켜봐야 한다. 머무는 사람은 떠나나는 사람을 강제할 수 없다. 물론 그 토록이나 많은 글을 쓰는 걸 보면 그는 자신의 홈피를 근거지로 또 어디선가 활발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또 나의 성격이란 늘 다니는 경로로만 다니는 습성이 있어 평소 그의 글을 좋아함에도 굳이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사람에게 정말 촉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보다.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도 그랬다. 이 책이 나오기 전 문득 생각이 나곤했는데 그의 책이 예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디선가 무엇을 하고 있겠거니 했더니 세상에 나오려고 이렇게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실하면서도 각잡힌 글을. 그의 글은 감히 따라할 수는 없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정리되고 서평의 좋은 모범을 보는 것 같다. 물론 보고 싶으면 그의 서재로 가 살짝 보고 나오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뿐 주인 없는 서재에 가기란 생각 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기운과 손이 닿지 않는 집이 흉가가 되듯 서재 또한 주인이 없어 소통하지 못하면 그저 방기될 뿐이다.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나 역시 아날로그 세대라 그런지 좋은 글은 책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인터넷에서 야금거리고 있는 건성에 차지 않는다. 책은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맛도 있고.

 

하지만 책이라는 게 그만큼 내가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마음에만 있지 못 읽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책중에 내가 그 책을 읽는다는 건 그야말로 억겁의 인연이 있어야 읽는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 책도 나에게 그런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평소 저자가 덕을 많이 쌓았거나 아니면 알라딘에서 내게 먼저 아는 채 해 준 공덕 때문일 것이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 마침 어느 고마운 알라디너가 책 선물을 하고 싶다기에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이 책을 지목해 덥석 받아버리고 야금야금 읽었다.

 

뭔가의 인연이 있는 사람의 책을 읽는다는 건 오랜 친구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는 느낌과 맘먹는다. 전기도 전신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시절 편지는 인간관계의 끈을 이어주는 주효한 매체였을 것이다. 나 어렸을 때만해도 편지 한 통을 받으려면 평균 4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편지 한 통을 보내고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일인지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선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책은 어느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한 사내의 신산한 삶의 고백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분명 서평 집이면서 신산한 삶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다니. 그 뜻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틀리지 않다면, 사람이 인생을 4, 50년쯤 살면 뭔가 갈무리를 하고 싶어진다. 내가 어느 집 자식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경험하고 누구를 만나왔는지 어떤 형식으로든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쓰고 싶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적 분위기는 그것을 쉽게 허용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아직 젊은 사람이 무슨 자서전이냐고 타박을 놓을 수도 있고, 설혹 쓴다고 하더라도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남의 삶을 들여다 볼 시간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나도 2년 전 책을 낼 기회가 있었을 때 호기롭게 이참에 나의 독서 경험을 빙자한 일종의 자서전을 모의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내 전 생애를 통해 볼 때 밥 먹고 잠자는 일 외에 가장 오래 해 왔던 일이 그거였으니까. 하지만 내 책을 내준 출판사 사장 겸 편집장이 그냥 여태까지 써왔던 서평을 다듬으면 좋겠다는 말에 두 말도 않고 모의를 접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얼굴 붉혀지는 이야기지만 그러지 않기를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 이미 난 내 책에서 내 지나 온 삶을 언뜻언뜻 얘기했으니 아쉬움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저자는 언제고 본격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써 봐도 좋지 않을까? 그렇잖아도 그는 <황해문화>를 벌써 20년째 편집 일을 하고 있다. 매번 그것을 발행하기까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긴 하다. 모르긴 해도 그는 아마 10년 내에 이 일을 감행하지 않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우리가 책을 읽는가?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독서를 그저 취미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또 아직 자신의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겐. 한 권의 책이 나의 내면을 깨는 도끼가 되려면 우린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른다. 나의 내면은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며 깨줄 책은 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가능성을 믿기에 우린 꾸준한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닐까? 동시에 독서는 부단한 축적물이기에 그런 책을 못 만났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거야 말로 오만일 것이다.

 

책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책을 읽었던 크게든 작게든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 그것이 뭔가의 행동을 하게 만들고 결정짓게 만든다.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 온 사람들은 더더욱. 그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왔고 커서는 노동을 하다 대학을 갔으며 거기서 운동(데모)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몇 개의 경로를 거쳐 지금의 <황해문화> 편집장이 됐다고. 그게 과연 책없이 가능했을까?

 

젊었을 땐 책을 전투적으로 읽었던 것 같다. 책을 무조건 빨리 많이 읽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 드니 그것이 좀 달라졌다. 저자가 왜 이렇게 썼을까를 생각해 보고, 나라면 이것을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읽은 책에 나의 지나간 삶을 조금 조금씩 묻어 놓는다.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제의가 되고, 그가 쓰는 문장은 제물이 된다. 그래서 나이 들어 갈수록 그의 글은 더 깊어지고, 비문이 적어지며, 신중해진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카프카의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또한 그건 정확히 자서전이 아닌 고백록이나 참회록쯤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자기 삶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거나, 이 책처럼 책속에 넌지시 묻어놓는 저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근한 예로 (이미 쓴 적이 있긴 하지만)나는 몇 년 전에 읽은 인디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의 두 번째 에세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에세이가 소설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가 다소 놀란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이 어떤 사람 보기엔 다소 부담스럽게 여길지 모르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난 이렇게 솔직한 글을 쉽게 내칠 수가 없다.

 

속 얘기는 웬만치 친하지 않으면 얘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책에 썼다는 것은 그 책을 읽은 독자하고만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와 작가는 한층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또 그것은 그만큼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책을 보는 기준이 달라진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떤 책은 정말 지적이고 매끄럽긴 한데 삶이 드러나지 않는 책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독서를 하고 책을 썼을 텐데 삶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독서의 재생산물인 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작가가 아닌 독자가 쓰는 것으로서(독후감이 됐건 서평이 됐건) 어떻게 나의 삶을 드러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지적 허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많이 감동하는 책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말을 말했다. 교양이란 한 인간을 세상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소유는 이 세계 속에 나만의 고유한 자리를 갖는 것이요,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교양)을 바탕으로 세상과 교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세상을 소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314p) 이것은 책을 읽지 않고 사색하지 않는 사람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마침내 그만의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그만의 세계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블로그 활동을 하다보면 자신의 본명 대신 닉네임을 쓰고, 자기 블로그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내 블로그에 이름 하나 제대로 붙여줄 생각을 못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물었던 것 같다. 닉네임의 뜻이 뭐냐고. 그런데 그에게 만큼은 묻지 못했던 것 같다. 바람구두야 천재 시인 랭보에게서 따온 것일 테고, 그 긴 블로그 이름은 뭘 뜻하는 거냐고 묻지 못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블로거들이 물어봤을까? 거기에 나의 궁금증까지 더하기가 뭐했다. 그의 블로그를 탈탈 뒤져보면 알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 자연스럽게 알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그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웠었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의 서평 글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를 에워싼 체제의 외부를 상상하려면 너무도 익숙한 기존의(자본주의적) 문화와 결별하는 절차와 형식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문화망명이라고 불렀다.(290p) 다른 설명이 뒤에 나오지만 이것만 읽어도 그의 서재명의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의 글엔 그다운 저항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한 권의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이냐는 사람 저마다 선택하기 나름이겠지만, 확실한 건 그 책에 대한 사전 정보와 얽힌 사연을 알게 되면 훨씬 의미 있고 읽기가 수월해진다. 그래서 이런 서평집이 요긴해지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편집의 달인(?)답게 읽은 책을 요약을 잘 해 놓고 있어 굳이 그 책을 힘들 게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고 아는 척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다. 독서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효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반대로 이게 그런 내용이었어? 하며 읽어 볼 마음이 비로소 생기게 만드는 것도 있다. 그래서 서평집은 유용하다. 사실 저자와 나는 독서 취향이 많이 다르다(물론 저자가 한 수 위다). 다르기 때문에 책을 보는 시야가 더 넓어진 느낌이었고, 실제로 몇몇 책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결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이었을 텐데 보관함에 넣어 놓기도 했다. 한마디로 서평집은 지은이의 독서와 삶이 녹아져 있어 읽는 맛이 다르다. 우리가 이런 기쁨과 보람이 없다면 뭣 때문에 서평집을 읽겠는가? 이 책은 특히나 더 기쁘고 반가웠다.

 

이 책을 읽으니 앞으로 당분간은 촉을 곤두세우며 저자를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는 또 어디선가 변함없이 열심히 책을 편집하며 왕성히 글을 쓰며 부단히 소통을 꽤하고 있을 것이다. 난 그런 그에게 말없는 응원과 우정 어린 관심을 보낼 것이다.

언제나 건필하시길.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8-03-11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하루에 백권 이상이 출간된다는 말을 듣고(요즘은 하루에 몇 권 출간되는지 모르겠고.) 책의 홍수 시대에 사는 것 같아 꼭 책을 낼 만한 역량 있는 사람만이 책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게 생각해요.
모두가 한 번씩 책을 내서 자신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 뭐가 반성할 점이고 뭐가 후회할 점인지 아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만 해도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거든요. ㅡ그런데 이게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성추행 사건이 있던 누구가 그렇게 많은 책을 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 사건으로 인해 그 책들을 수거해 판매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출판사의 결정 소식을 들었어요. 그의 글쓰기는 그를 조금도 성숙시키지 못한 모양이에요. 그의 글쓰기는 가짜였던가 봐요. 그래서 저는 헷갈리게 되었어요.

stella.K 2018-03-11 18:38   좋아요 0 | URL
저도 언니와 같은 생각을 해요.
분명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되죠.
그런데 책이라는 게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도 참 그렇더라구요.
결론은 모두가 내되 역량있는 사람이 되서 내야되는 것 같았요.ㅋ

예전에 어떤 분이 그런 말씀하더군요.
어떤 사람은 멋진 집을 지어놓고 막상 자신은 그집에서
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쓴 글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상누각인 거죠.
그글이 아무리 훌륭해도.
사상누각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해치게 되는 거죠.
이번 미투 운동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2018-03-11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로역정 (양장, 조선시대 삽화수록 에디션)
존 번연 지음, 김준근 그림, 유성덕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사실 이 작품은 오래 전에 한 번 읽은 적이있다.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읽게되는 작품아닐까? 세상에 책이 하도 많아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두 번 이상 읽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게된 것은 겉표지에도 나와 있지만 조선시대 삽화가 무려 42점이나 수록되어 있다는 말 때문이기도 하며,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님이 당시 우리말로 번역된『텬로력뎡』을 읽고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 냈다는 말 때문이기도 하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사실 난 이 시기가 궁금하다. 그것은 언젠가 우연히 손양원 목사의 전기를 읽고 난 후부터였는데, 손양원 목사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순교할 수 있는 밑바탕엔 바로 이 평양 대부흥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양 대부흥의 밑바탕엔 이 책의 영향이 있었다니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땐 이런 배경 없이 읽었는데 배경을 모르고 읽을 때와 배경을 알고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를테니 감흥도 남다르지 않을까? 

 

장정도 최대한 옛날 조선시대 책 분위기가 나게 꾸몄다. 옛날 문자가 발달되기 전에는 '텬로력뎡'이라 썼다는 것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책이 처음 번역된 것은 1895년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th Gale)이 부인 해리엇(E. G. Harriet)이 이창직의 도움을 받아 번역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서양 소설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최초의 번역 소설이란 말은 나도 오래 전에 들은 것 같다.

 

이 책은 한마디로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가 온갖 어려움과 유혹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마침내 천국에 이른다는 단순해 보이는 설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면이나 이야기 흐름속에 성경 말씀을 정말도 꿰었다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도대체 성경을 몇 번 읽으면 이런 서사가 가능한지 모르겠다. 

 

사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로 하고 그 믿음을 일생 동안 믿음을 지켜 나간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중간에 믿음에 대한 회의와 위기가 오기도 하고, 그래서 믿음의 길을 떠나기도 하고 떠났다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잘 믿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포기하고, 그 반대로 살아 있을 땐 온갖 방탕한 생활을 하다 죽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 이를두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인간적으로 이중 가장 좋은 건 세상에서 해 볼 거 다해 보고 마지막에 예수님 믿고 턱걸이로 천국 들어가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고. 그만큼 믿음을 지키며 산다는 게 어렵다는 얘기다. 

 

믿음은 마라톤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래서 멘토가 필요하다. 더구나 100세 시대다. 옛날엔 신앙 하나면 그 모진 세월을 견딜 수 있고 핍박도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앙 말고도 위로 받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무궁구진하게 많아졌다. 또한 온갖 이단 사설도 세분화되고 조직적이 되었다. 또한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교회안에서도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신앙의 순수함을 잃지 않도록 격려 받는다는 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신앙을 가져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래서 천로역정은 시대와 상관없이 오늘 날에도 신앙인이라면 성경과 함께 꼭 읽어야 할 필독서다.   

 

책에 나온 기산 김준근의 그림을 처음에 보면 김홍도를 연상케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풍속화가였다. 그런데 또 자세히 보다보면 중국의 느낌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것으로 봐 기산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텬로력뎡>은「천로역정(합질)」이라는 이름으로 2017년 5월 29일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제685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소장 가치가 있어 보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8-02-1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아는 분의 초대로 어느 교회에서 천로역정 연극을 보았어요.
큰 내용은 알지만, 연극으로 바로 앞에서 보는 느낌은 또 달랐던 것 같아요.
한글의 예전식 표기법은 조금 더 중국어의 느낌에 가까운 것 같고, 그리고 조금 더 오래된 책 같은 느낌이 듭니다.
stella.K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stella.K 2018-02-13 16:51   좋아요 0 | URL
아, 연극으로 보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이 대본처럼 구성이 되어 있어서
연극하기 딱 좋겠다 싶더군요.

그런 오래된 느낌 때문에 소장하고 싶더라구요.^^

2018-02-14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4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02-1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웃겨요. ˝가장 좋은 건 세상에서 해 볼 거 다해 보고 마지막에 예수님 믿고 턱걸이로 천국 들어가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고.˝ - 저도 이런 생각을 했던 1인이거든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웃겨요. ㅋ

stella.K 2018-02-14 13:51   좋아요 0 | URL
ㅎㅎ 웃긴가요? 그런 생각 누구나 하지 않나요?
저는 13살 때부터 신앙 생활을 했는데요
진짜 너무 일찍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좀 누릴 거 다 누려보고 이 나이쯤 시작해도 늦지 않을 텐데...ㅋㅋㅋ
 
고백 에클레시아 -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
양광모 지음 / 선율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랫동안 사역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냥 교회 예배만 왔다 갔다 하니 무슨 사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카페 목회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었을 때야 알게 되었다. 하긴 예배를 꼭 교회에서만 드리라는 법 있나? 벌써 오래 전부터 서울의 알만한 교회는 예배당이 아닌 학교 강당을 이용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다. 교회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도 계시고, 병원, 교도소, 양로원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니 카페라고 계시지 않을 리 없다. 결국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한 사람들의 모임이니 장소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그 옛날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을 때 동굴에서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북한의 지하 교회 사람들은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21세기다. 최첨단 4차 산업을 부르짖을 때 교회는 여전히 20세기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런데 난 왜 이 책에서 사역의 다양성과 희망을 보기 보단 왠지 모를 우울함과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처음에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읽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기존의 것과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 내가 현재 너무 건강하고 스마트한 교회를 다녀서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예배만 드리는 선데이크리스챤으로 전락한 탓일까? 아니면 욕하면서 닮는다고 나도 한때는 모든 교회의 칭송을 받는 교회를 다녔지만(현재도 다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하기는 정말 쉽지 않아 울기도 많이 울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어느새 동화되고 닮은 것인가? 그러나 나는 평신도로서 그렇게 상처 받고, 울면서 교회를 다닐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선 한 번도 회의를 해 본적은 없다. 싫으면 그 조직에서 나오면 그만인 것이지 교회 자체를 부정하고, 신앙을 배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과의 갈등의 문제였지 조직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늘 날 대형 교회가 비판을 받고 있다. 하도 비판을 받으니까 이것도 하나의 트렌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분명 대형 교회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형 교회는 문제가 없는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 모이는 곳은 어디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 대형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소형 교회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확신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건 말의 오판이며 논리의 비약이다. 하나님이 언제 그에게 이것을 판단하고 비판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요는 그도 교회를 다닐진대 비판하는 데는 빠르고 기도하는 데는 느리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그것부터 점검해 봐야할 일은 아닐까?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무슨 대형 교회를 옹호한다고 오해할까봐 그것도 조심스럽긴 하다. 요는 그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그런 과격하고도 이분법적인 비판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토기장이의 비유에 대해서 나온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을 때 어떤 그릇은 귀히 쓰일 그릇으로, 어떤 건 천히 쓰일 그릇으로 빚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토기장이가 그 용도에 맞게 빚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형 교회의 비판이 어디에서 나왔겠느냐는 것이다. 상대적인 열등감을 느끼는 소형 교회 목회자들에게서 나왔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형 교회 자체의 내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동시에 사이비 종교의 음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은 영적으로 봤을 때 분열케 하는 사탄 마귀의 짓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대형교회의 부정과 부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모범적인 교회가 어느 날 사회적 이슈가 되고 비판을 받을 때 평신도로서 그것을 감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난 그런 교회를 지금도 다니고 있다. 나라고 그런 교회 다니고 싶겠나?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다. 왜 다니고 있는지. 늘 다니던 교회를 다니는 관성 때문이라고 말 한다면 섭섭한 말이 될 것이다. 그 교회 말고도 좋은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중 하나를 선택에 옮겨가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됐다. 다른 건 고사하고 은혜 받은 교회는 함부로 못 떠나겠는 것이다. 선대 목사님이 한때 기독교계 명망 있는 지도자였고, 그분의 기독교계에 미친 설교와 공로라는 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런 교회에서 조차 상처를 받았다. 상처만 받았다고 한다면 못 다닐 교회가 내가 지금 현재 다니는 교회다. 분명 은혜를 받았기에 나는 교회가 공격을 받고 비판을 받을 때 같이 비판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다. 이건 또 신비라고 밖에는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말을 구구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교회 사역자들은 평신도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목회자들은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있게 하셨다고 교인들에게 철석 같이 가르쳐 놓고 그들은 정작 교회에 있지 않은 것 같다. 평신도는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교회와 함께 순교할 마음이 있는데 과연 교회 사역자들은 그럴 마음이 있는지 묻고 싶기는 하다. 새로운 목회를 해 보겠다고 잘 나가던 교회를 사임을 했다. 거기에 나름의 이유와 기도로 씨름한 나날과 명분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면서 지금까지 알아왔고 격려해줬고 격려 받았던 교인들을 두고 발길이 떨어지던가? 잘 나가는 교회 목사들은 떠나는 뒷모습도 멋이 있더라. 그리고 당장 떠나지 않더라도 교회 안에 서서 각 지역을 거점 삼아 2년마다 한 번씩 뺑이 돌리더라. 그러니 목사와 평신도 간에 무슨 정을 쌓겠는가? 저 목사는 길어야 2년 후면 헤어질 사람. 물론 기도 부탁 정도는 하고 그러면서 사람을 파악하는 정도지 오래 두고 볼 사이는 못 되더라.

 

남자들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어디나 그렇지만 교회도 남성 목회자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비해 평신도는 여성이 많다. 언제나 그렇지만 여성은 대화를 원하는데 남자는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듣는 귀는 발달되지 못했다. 내가 이 책이 가면 갈수록 별로라고 생각했던 건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라고 했으니 생생히 살아있는 그야말로 활어회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도 내내 가르쳤을 목회의 신학적 원리를 이 책에서조차도 반복하고 있더란 것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이야기는 없고, 교회에서 세례 받을 때 간증문처럼 그 카페를 다니면서 은혜 받은 성도들의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귀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기존의 교회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뭔가 형식과 틀을 과감하게 깰 필요도 있을 것 같은데 교회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소형화시킨 건 아닌지.

 

나름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목회자들은 제사장의 옷을 벗고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즉 말씀만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중간자적 목회자의 탄생을 기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그것에 근접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글속엔 아직도 뭔가 자신이 없던 걸까? 뭔가 끊임없이 자신의 목회 형태를 설명하려고 하고, 합리화하려고 하는 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마치 기업을 세일즈 하는 것처럼. 하긴 이제 5년 된 사역이라고 하던데 증명 보다는 설명이 더 많은 시기 아닌가? 한 사역이 뭔가를 증명하려면 적어도 1015년은 두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카페 목회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우려하는 것도 없지 않다. 결국 거기서 은혜 받고 교인이 된 사람들이 훗날 어떻게 될 건지. 물론 그것까지 신경 쓸 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성 교회에 대한 편견만 높아져 결국 진입하지 못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눌러 앉을 건지.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와 목적이 또 다른 측면해서 오염되고 훼손되는 건 아닌지. 분명 기성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교회가 새로워지려는 노력은 명백히 필요한 거지만, 교회는 기성 교회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알 수 없는 신앙의 깊이와 넓이가 있다.

 

책을 보면 교회가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고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난 이게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한국 초대교회 시절 사경회를 하면 거의 하루 종일 했다고 한다. 얼마나 말씀 듣는 게 좋으면. 게다가 우리나라 교육열 끝내주지 않는가? 물론 저자가 지적이 처음도 아니고 나름 타당성은 있다. 하지만 그게 본질적인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는 있다. 평신도들은 옛날의 평신도들이 아니다. 옛날엔 사회가 단순하지만 지금은 복잡하다. 그러므로 뭐든 취사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고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제는 뭐든 편중이고 편식이 문제 아닌가?

 

이런 식으로 해서 마치 기성 교회는 없어져야 할 암적인 존재로 몰아가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주범(?)이 한때 그런 교회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면 그 민망함은 또 어쩔 것인가? 그건 마치 괜찮은 집을 지어놓고 게스트 하우스나 마당에 텐트쳐 놓고 지내는 집주인은 아닌지.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다 못 짓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지었다. 모름지기 왕이 지었으니 얼마나 화려했겠는가? 하지만 우린 솔로몬이 화려한 성전을 지었다는 것뿐 그 성전이 어떻게 운영이 되었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오늘 날 교회가 너무 화려하다고 사회에서 뭐라고 하면 그것에 동조한다. 교회는 화려할 수도 있고 아담할 수도 있다.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교회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공간이다. 거기에 존재하는 목회자와 주요 임직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며 관리자일 뿐이다. 오늘 날 교회가 목회자의 권한이 큰 건 유감이긴 하다. 아마도 그건 우리나라의 가부장 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또 그것이 아니면 성도들이 목사를 쥐고 흔든다. 언제나 그렇듯 조화는 없고 극과 극만 있다. 중요한 건 교회에 깃든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기존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개척을 해야 하는 것인지는 분명 그 목회자의 몫일 것이다.

 

교회도 조직이고 보면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조직이 섞지 않으려면 자정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 자정 능력이 그 조직의 몇 퍼센트면 가능하겠는가? 5 퍼센트다. 이건 그냥 상징적인 숫자일 뿐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근거는 있다. 성경을 보면 의인 다섯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을 했다. 오늘 날 교회가 그토록이나 문제가 많다면 벌써 없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줄어들지언정 존재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한 가지는 얘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러 방면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치유하는 교회를 자처했던 모 교회는 정말 유독 새신자 보다는 기성 신자들이 많았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치유 받고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라고 했다. 모순을 지적할지 모르지만 그 교회도 나름 큰 교회다. 어느 교회는 새신자만 등록 가능한 교회도 있다. 그 교회도 나름 큰 교회다.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의 목회가 됐던 사명을 받아서 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맡겨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 문제가 너무 많아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한다. 물론 세상적으론 틀리지 않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하나님 편해서 그게 과연 최선인지는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하는 것이 나중엔 차선의 것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저자의 목회를 비판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책을 읽어 보았더니 평신도에 대해 잘 모르기는 기성 교회 목회자와 무엇이 다른지 몰라서 나의 평소 생각을 밝히는 것뿐이다.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하던 기성 교회 목회를 하든 크게 봤을 때 평신도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단지 선택만 할 뿐이다. 결국 목회자란 그가 옳은 선택,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도전을 주고 협력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목회자는 평신도가 자신의 사역에 협력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게 잘못 됐다기 보다 선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아무튼 저자의 건투를 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8-02-0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규모가 큰 교회보다 작은 교회가 문제점이 더 많을 듯합니다. 한 사람의 권력이 크게 작용하는 곳도 역시 작은 교회일 듯해요.
정들만 하면 2년 후 떠나는 목사 - 이것은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하는 걸 피하려는 목적도 있는 건가요?

stella.K 2018-02-08 13:29   좋아요 0 | URL
캬~! 역시 예리하시군요.
그런데 알려지기는 큰 교회가 문제가 많은 것처럼
그렇게 보도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작은 교회라고 문제가 없겠냐는 거죠.
마치 작은 교회는 동정을 받아야할 거처럼 되고.
물론 작은 교회에서 힘들 게 목회하시는 분들 계시죠.
그니까 제 말은 교회뿐 아니라 무엇을 보더라도
장단점을 보고, 긴 안목에서 보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완벽한 조직이나 단체는 없으니까요.

그건 맞아요. 그런데 그것도 장단점은 있는 거죠.
같은 사람 2, 3년 봐주기는 어려울 수도 있거든요.
저도 어떤 일을 하건 그 조직에서 2, 3년 이상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제가 워낙에 그런 체질이 못 되서
상처 받는 일도 많답니다.ㅋㅋ

2018-02-08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