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구약 성경 창세기 가운데 나오는 요셉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께 들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그를 꿈쟁이 또는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기억하는데 알고 보면 그의 삶은 성실과 진실로 점철된 삶이라는 걸 알 수가 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것 같다. 그건, 하나님은 꿈이 없는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꿈이 있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표현하는 건, 나는 솔직히 삶을 살아가는데 특별한 재주가 없었다. 그나마 글쓰기에 대한 소망이 없었다면 밥버러지나 다름없이 살았을 것이다. 성격도 지극히 소극적이어서 이불 밖 세상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들어 사용하시되 반드시 훈련과 공부를 시키신다는 것이다. 사실 난 그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특별히 하나님의 일 즉 사역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 그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이 일을 하면 성실함을 몸에 베게히고, 나중엔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에서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건 지금은 그 일에 나름 신학적이고, 예배학적이며 연극학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엔 백판 아무 것도 없었다. 거기에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공부의 연장이려니 했을 뿐이다. 공부하는데 이처럼 좋은 환경이 어디있단 말인가? 따박따박 원고료도 받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엔 공짜가 없다.  

 

내가 다시 주일학교에 복귀하고, 그것이 내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는 의미라고 해서 그 다음부터 하나님의 축복만 예비되어 있고, 탄탄대로에 승승장구만 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보통 간증은 그렇게 한다. 어떻게 우연찮게 어떤 비전을 갖고 무슨 일을 해서 어떤 어려움과 시험을 겪고 후에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받았다는 식의. 그걸 일명 '욥의 서사'라고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구약의 욥기를 보라. 욥은 모진 고난과 시험 끝속에서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으므로 나중에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받았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땐 내가 그런 간증을하기엔 너무 일렀다. 그리고 난 사람이 아직 덜 여물어서일까 지금도 그때는 오지 않은 것 같다. 그저 하루하루 주님의 은혜로 산다면 그건 맞는 얘긴 것 같은데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일이란 어렵고, 살얼음을 걸으며, 지뢰 밟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지뢰는 피한다고 피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밟지 않으면 언젠가 그 누군가는 일부러라도 밟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계속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복귀해서 처음 2년 정도는 평탄하고 안정되게 일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목사님이 다른 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을 받아 가셨고, 그 밑의 목사가 승진과 함께 담당 사역자로 부임을 했다. 이 분은 먼저 목사님과는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 무엇보다 과거 내가 제자와 갈등했던 일을 문제삼아 나를 흔들어 놓았고, 이렇게 제자와 갈등하는 선생과는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주일학교를 그만두도록 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바뀌면 그 새로운 대통령에 의해 새로운 내각을 꾸리지 않는가. 하물며 새로운 리더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사람을 바꾸겠다는데 그걸 무엇으로 막겠는가. 그렇게 사람을 바꾸는 건 좋은데 그런 과정에서 한 사람의 겨우 아문 상처를 들춰 가면서까지 그만두게 만드는 것이 맞는 수순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 목사는 곧잘 양을 치는 목자에 비유된다. 백 마리의 양이 있는데 한 마리 양을 잃어버렸다면 나머지 아흔 아홉마리 양을 놔두고 그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다는. 적어도 그는 이 양 계산법에 함께 일하는 교사는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 같았다.        

 

더구나 내가 그에 대해 실망했던 건, 내가 그를 전혀 몰랐다면 모르겠는데 그전부터 안면도 있었고, 나가 일하는 걸 보고 반색하곤 했다. 그런 그가 그렇게 안면을 바꾸고 나온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나중엔 옥신각신 하는 과정에서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아이 같이 떼를 쓰기도 했는데 점잖은 분이 그러고 나오니 그도 좀 가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삼 남자들이 일을 처리하는 수준이 그렇게 높지는 않구나 싶었다). 

 

예전 같았으면 상처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런 일을 겪어 본지라 불쾌했던 건 사실이지만 상처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때로 상처는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데가 있다.

 

그땐 아이들도 학년이 바뀌는 때였던만큼 팀도 새롭게 정비해야 했는데 어느 정도 자리잡으면 나올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중에 교사 회의 때 안녕을 고하고 나오는데 그와는 따로 인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언뜻 그의 얼굴을 보니 보니 고뇌에 찬 표정이었는데 왠지 그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다시는 그를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이로써 나는 주일학교를 완전히 그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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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6-05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나 상처받은 경험이 있겠죠.
과거, 어떤 일로 상처를 받은 기억이 나면 그게 재산 같다고 여기게 돼요. 그런 상처를 견디는 시간이 없었다면 아주 나약한 사람으로 살 뻔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일도 겪었는데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래.‘ 이렇게 마음먹고 살기 위해서는 상처받은 경험이 필요하다, 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더라고요.

stella.K 2017-06-06 15:21   좋아요 0 | URL
캬~! 언니는 저를 두 번 감동시키시는군요.
사실 이 페이퍼 좀 화끈 거리는 게 있어서
하루 비공개로 했다가 전체공개로 전환한 거거든요.
그런데 용케 언니를 비롯해 세 분이 보고 가셨어요.
왠지 고맙단 생각이 들더군요.
이 별 볼 일 없는 페이퍼를 보고 가시다니 이 분들 때문이라도
얼마 안 남은 이야기 마저 완성시켜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돌아 오는 주일 날 제가 강연회를 해요.
지금까지 올린 몇 편의 이야기를 가지고.
잘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ㅠ
암튼 읽어주셔서 고맙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