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평소 그의 영화를 좋아해 볼 마음을 먹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기에 보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웬걸 그의 영화가 아니었다. 아마도 감독의 이름과 영화 제목이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고 생각해 착각을 불러일으켰나 보다. 그렇게 멋모르고 보기 시작한 영화가 완전 빠져들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토니 타키타니.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그람은 잘 그리지만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성인이 되어 어느 여인의 가슴을 그리는데 정교하지만 느낌이 없다. 그냥 인형의 가슴을 그리는 것만 같다. 그런 것을 보면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는 악단의 연주자로 그의 곁에 있지 않았던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고독은 그의 친구다. 늘 조용하고 표정 없는 얼굴이다. 결국 그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우연찮게 한 여인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고독이 그의 친구였기 때문에 이런 것은 그의 생애 없을 줄 알았다. 그는 너무 많이 외로웠기 때문에 이젠 아내가 없으면 불안하다.


아내는 너무 사랑스럽다. 하지만 사랑스럽다는 건 사랑하기에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다. 아내에게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건 옷을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는 쇼퍼홀릭이라는 것. 화구 외에는 살 것이 없는 토니와 옷이 자신의 빈 영혼을 채워준다고 믿는 아내 에이코와의 결혼은 처음엔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사는 옷과 신발은 집에 그득하다 못해 포화상태다. 결국 그는 가볍게 아내에게 옷 사는 것을 자제해 줄 것을 부탁하고, 아내는 노력해 보겠다고 답한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말에 허물어지고 극단적 선택인지 아니면 우발적 사고인지도 모를 사고로 죽고 만다.


        

다시 홀로 남게 된 토니는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흔적을 지워야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아내를 처음 만났던 방법 그대로 자신의 일을 도와줄 비서를 구하는데, 아내와 똑같은 사이즈와 발 크기를 가진 여자를 구한다. 그는 새로 온 비서에게 유니폼 삼아 아내의 옷을 입고 일해 주길 바란다. 그것을 통해 아내를 잃어버린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정말 빠져들게 만든다. 무엇보다 미장센이 갑이다. 영화는 처음 시작부터 어떤 공간을 보여주기보단 큰 창을 자주 보여준다. 어린 토니의 집 주방 창문, 성인이 돼서 그가 일하는 사무실 창문, 결혼한 후 신혼집 주방, 침실도 온통 큰 창문이 보인다. 시점은 (거의 대부분)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구도다. 관객의 관음증을 최대한 만족시키겠다는 전략인 걸까. 그게 또 호퍼의 도회적이면서도 쓸쓸한 이면을 보여주는 그림을 연상케도 한다. 입체적인 공간감을 일부러 배제하고 회화적 느낌을 극대화 시켰다. 또한 주요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는 멀리서 슬로모션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와 등장한다. 그리고 간간히 보여주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숲. 일단 그런 것만 유심히 봐도 감독이 뛰어난 미술적 감각이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영화엔 가급적 내레이션을 안 쓰는 것이 좋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는데, 이 영화는 굳이 그걸 지킬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내레이션은 보통 등장인물의 생각이나 감정을 설명할 때 또는 낯설게 보기를 유도할 때 사용되겠지만, 이 영화는 연극에서의 방백처럼 등장인물이 직접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쇼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내가 토니의 말 한마디에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또 그런 아내를 사랑하는 토니를 보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린 어쩌면 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할 줄 모르고 그 사람의 옷이라고 하는 빈껍데기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죽어야 비로소 부재에서 오는 고독과 공허를 통해 그 사람의 영혼을 깨닫게 되는 인간의 비극성. 무엇보다 토니는 아내와 같은 사이즈의 여인을 구해 옷을 입게 하므로 위로를 넘어 광적으로 변해 가려고 하는 자신을 자각한다. 그런데 비해 졸지에 고급스러운 옷과 신발을 입게 된 토니의 새로운 비서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왜 울었을까? 뭔가 압도된 듯하다. 이 화려하고 멋진 옷을 두고 간 나오코는 어떤 여자였을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 것처럼 감독은 현대인의 물질만능주의를 꼬집으려 했던 건 아닌지. 또 그것은 영화 초반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토니의 여자의 가슴을 그린 것과 뭔가 연관성이 있어 보이기도 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렇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루키 마니아라면 영화 제목에서부터 알아봤을 것이다. 하지만 난 하루키를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개인적으로 하루키 원작의 영화를 본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언젠가 <상실의 시대>을 본 적이 있는데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봐서 그런지 꽤 괜찮았다. 그땐 꽤 괜찮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 작품은 가히 좀 놀랍다 싶다. 보통은 원작을 영화화하면 잘해야 본전이란 선입견이 있기도 하지만, 내가 볼 때 이 영화는 하루키의 원작을 200% 끌어올린 작품은 아닐까 한다.


누구는 하루키는 장편에 강한 작가라고 하는데 그것에 반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단편에서 감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이란 단편은 정말 도시에서의 가난을 위트 있게 그린 작품으로 그 이미지가 잊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 중에 나오는 이 작품은 어디서 영감을 얻었을까? 소소하게도 한 장의 티셔츠라고 한다. 마우리 섬에서 '토니'라는 서양식 이름에 '타키타니'라는 성이 붙은 기묘한 이름이 쓰인 1달러짜리 티셔츠를 구입한 하루키는 그 셔츠를 입을 때마다 토니 타키타니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에 착안해서 이 이야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감독은 또 그 작품을 보면서 머릿속에서 하나하나의 영상적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게다가 전편에 흐르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은 뭔가 고독하면서도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잘도 표현해 주었다. 이쯤 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모든 예술인들의 뮤즈는 아닐까? 이제 마니아뿐만 아니라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필히 하루키를 알아야 하는 하나의 문예 사조를 이룬 것만 같다. 하긴, 그는 언젠가 오리지널리티를 얘기했었다.    


사람들은 인간은 어차피 고독한 존재니 고독을 벗 삼으라고 한다. 고독은 스스로 있는 존재임을 확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고독은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만들고 누군가를 향하게 되어 있다. 고독한가? 당신의 고독 끝에 누가 있는지를 직시해 보라. 그렇다면 그가 자신이 사랑해야 할 존재인지도 모른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랬다고 그 영혼은 바스러지기 쉬운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아무리 사랑해도 꽉 끌어안으면 쉽게 깨지는 크리스털 술잔 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 차라리 고독하기를 선택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어쩌면 하루키를 읽으며 자신의 고독을 위로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오랜만에 하루키의 소설이 읽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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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8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0-02-28 18:1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아 좋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기도 하죠.
그게 인간인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페크(pek0501) 2020-02-2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작품을 상실의 시대를 비롯해 네다섯 권 읽었는데 썩 좋다할 것은 없었는데
신간이 나오면 또 사고 싶은 묘한 작가예요. 가끔 반짝이는 문장을 쓸 줄 아는 작가라서
그런지... 작가의 명성도 한몫 하겠지요.

stella.K 2020-02-29 15:15   좋아요 0 | URL
저랑 같으시네요. 이 작품 때문에 <렉싱턴의 유령>을 보고 싶기도 한데
영화가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그럼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읽고 싶단 말이죠.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