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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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이 책을 붙들고 있었다. 워낙에 책을 오래 읽기도 하거니와 중간에 다른 책을 읽어야 할 경우엔 며칠 또는 몇 주씩 방치해 두기도 했다. 변명 같지만, 그런 게으른 독서가 가능했던 건 미니멀리즘하고  디테일의 강점을 앞세우며, 약간은 지루한 듯 하지만 왠지 보기를 포기할 수 없게 일본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이 책에 배어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영화로는 <행복한 사전>이 언뜻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 소설도 영화화하면 좋지 않을까를 내내 생각하면서 읽었다. 아니면 착하면서 실사에 가까운 느낌의 애니메이션이나. 더욱이 건축 설계를 소재로 했다는 게 이색적이기도 하다. 내가 평생 건축 설계에 관한 책을 읽는다면 몇 번이나 읽게 될까. 한마디로 요즘에 보기 힘든 만연체의 문장에 회상 문학이 더해졌다.  


제목이 좋다. 여름은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다. 물론 끈적하고 숨 막히는 한 여름은 나도 힘들지만 상큼한 초여름과 한풀 꺾여 왠지 보내기 아쉬운 늦여름은 붙잡고 싶으리만치 좋아한다. 게다가 주인공 도오루는 어느 설계 사무소에 취직이 됐는데 합숙을 하며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게 왠지 나를 부럽게 만든다. 가끔 가족을 떠나 목적이 같은 사람과 몇 개월을 먹고 자며 뭔가의 작업을 같이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왠지 설렐 것 같다. 물론 팀워크가 좋지 않으면 힘들 수도 있겠지만 소설의 흐름을 봤을 때 그런 건 전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목적이 같으면 성격이 여간 못 되지 않고서야 팀워크가 나쁠 수 없다. 자기 이름을 내건 설계 사무소의 무리이 슌스케가 수장으로 있고, 모인 사람들은 한결 같이 온화하고 절제되어 갈등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인다. 뭐 그게 작가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상명하복을 중시하고 개인보단 전체를 중시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비해 우리나라는 상명하복이란 말에 거부감부터 드러낸다. 꼰대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앞에선 아부하고 뒤로 뒷담화하는 민족 아닌가. 뭐 그만큼 존경할만한 어른이나 선배가 없어서라고 할 수도 있고, 앞에서 보이는 것과 뒤에서 보이는 것이 다른 인간의 이중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조직에서 살아 남기는 해야겠고. 


무라이 슌스케라면 나라도 존경할 것 같다. 정말 신뢰와 존경이 뚝뚝 묻어난다. 그렇다고 자신을 알아 달라고 행동을 과장되게 하지도 않는다. 그저 말없이 조용하게 자신의 일을 할 뿐이다. 조용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다. 또한 도오루를 비롯한 그 밑에 있는 사람들도 그를 닮았다. 역시 한 조직은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그를 따라가는 것 같다. 슌스케가 도오루에게 하는 말은 그대로 어록으로 만들어도 좋을 듯하다.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189p)


"한 점의 틈도 그늘도 없는 완벽한 건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것은 아무도 못 만들어. 언제까지나 주물럭대면서 상대방을 기다리게 할 만한 것이 자신한테 있는지, 그렇게 자문하면서 설계해야 한다네." (286p)     


"고객이 시키는 대로, 납기를 지키기 위해서 일하라는 건 물론 아닐세. 만일 고객이 불평하거나 변경해 달라고 했을 때 마감이 임박할 때까지 주물럭거리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 자네가 잘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어. 그런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라도 늘 시간은 봐 둬야 하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설계사무소가 있는 것은 한정된 시간을 시간을 사람 수로 늘리기 위해서이기도 해. 혼자 하면 하루 걸릴 일이 둘이 하면 반나절이면 끝나지. 도서관 설계 같은 것은 나 혼자 하다가는 오 년이 지나도 안 끝나. 내가 자네들한테 맡기는 것도, 자네들이 나한테 맡기는 것도 협동이라는 거지. 제자니 보스니 하는 상하 관계하고는 별개야. 신뢰지, 그렇지 않으면 같이 일 할 수 없어." (287p)


이밖에도 밑줄 긋고 곱씹고 싶은 말이 많다. 읽으면서 새삼 건축도 사람이 하는 일이구나 싶다. 무엇보다 건축도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인만큼 사람을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지 이 책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승효상이나, 유현준, 김진애 같은 건축가가 나와서 건축의 중요함, 필요성, 철학 같은 것을 일반인에게도 깨우쳐 줘서 다행이긴 하지만 난 솔직히 건축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글이나 그림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고칠 수도 있는데 건축은 그렇지가 않다. 한번 지어 놓으면 못해도 50년이고 100년을 넘길 수도 있다. 쉽게 고칠 수 없다는 얘기다. 물론 중간에 보수도 하고 리모델링도 한다지만 고치는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나 같이 가난한 서민은 꿈도 못 꿀 일이라 관심이 없다. 물론 주마간산식으로 무슨 조형물 작품 감상하듯 할 수는 있겠지. 무엇보다 우리 같은 일반인은 건축 설계 보단 도시와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쪽이 더 강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유현준 교수는, 건축이란 말이 아직은 일반 대중에게 익숙한 단어가 아니어서 가급적 도시란 말로 대체해서 쓴다고 했다. 그런 걸 보면 건축이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예전엔 건축하는 일이 그렇게 대접받는 직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 그럴까를 생각하면 그것도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시 일본인들이 대거 우리나라에 들어와 속수무책으로 의식주 전반을 잠식해 들어갔을 것이다. 그 시대야 말로 상명하복에 굴복해야 했으니 무슨 우리나라만의 건축 철학을 담을 수 있었겠는가. 그야말로 위에서 까라면 까는 거지.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나라는 건축물은 부동산으로 분류한다. 공공재 보단 사유재산의 개념이 더 많다. 더구나 도시 계획하면 철거민과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든다. 서글픈 일이 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런 사회학에서나 다룰 법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오로지 건축 설계의 일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과연 이런 문학 작품이 이전에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똘똘 뭉쳐 뭔가를 해낼 것만 같은 사무소 사람들은 뜻밖에도 슌스케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흩어지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슌스케의 나이가 이미 고령이라 언제까지나 건강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야기의 말미는 그로부터 29년이 흐른 후 주인공 도오루가 옛날 슌스케 사무소를 다시 방문하는 것에서 끝나는데 묘하게도 나는 거기서 감정이입이 되고 말았다. 다시 찾아간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사람들 저마다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만드는 공간이나 장소가 있다. 도오루에겐 슌스케 사무소가 특별했을 것이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고, 가히 스승이라고 해도 좋을 슌스케를 만나고, 결혼으로 이어질뻔한 여인을 만났으며 주변 경관도 좋아 오래도록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을 29년 만에 찾았다면 평생 안 찾아볼 생각을 했을 것도 같다. 분명 도오루에겐 꽤 의미 있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분명 좋고 의미 있는 시절이었다고 해서 그곳을 다시 찾아가는 일은 여간해서 잘하지 않는 것 같다. 나도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서너 정거장만 가면 나의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 같이 살았던 동네가 나오는데도 나는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지난 달 오랫동안 알고지나 온 지인을 그가 사는 동네에서 만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내가 입학한 초등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 지인은 나를 잡아끌듯 그 초등학교에 한번 가 보자고 해서 못 이기는 척 간 적이 있다. 다시 찾은 학교는 소인국의 어느 건물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건물이고 운동장이고 어쩌면 그렇게 아담하던지. 처음 그곳에 갔을 땐 엄청 크고 넓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 초등학교를 3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전학을 갔는데, 분명 운동장 한쪽에 큰 수영장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시절 물기 없는 수영장 안에서 체육 수업을 받기도 했는데 다시 찾아가 보니 수영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운동장이 넓지 않고 수영장의 쓰임새가 그리 많지 않아 나중에 메워 버리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 시절엔 학교의 자랑거리였는데. 그렇게 사라져 버리니 내 기억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아 마음 한편이 휑했다.    


그뿐인가, 그때는 교문 앞 길은 탁 트여 있었고, 교문 앞에 문방구가 두 채가 있었는데 무슨 건물만 다닥다닥 붙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얼마나 낯설던지. 문득 왜 사람들이 추억의 공간으로 가기를 주저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가보면 머릿속에서만 어른 거리지 그 공간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괜히 뭔가 추억이 손상된 것 같아 기분이 착잡해지는 것이다.이 책의 주인공도 나와 비슷하지 그렇지 않을까. 인생이 한 번이듯 지나 온 곳 역시 한 번이면 족하다 싶다. 그래도 그 지인 덕에 옛 초등학교도 가보고 모처럼 옛 추억에 잠겨 한참 서로 어린 시절을 얘기했었다. 


아무튼 요즘 보기 드문 소설에 보기 드문 문체를 장착했다. 만연체의 느린 문장을 좋아하거나 견딜 수 있다면 기꺼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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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5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6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20-02-16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너무 좋았어요. 특히나 아침에 연필 깎는 장면은 와, 그 묘사가 정말 섬세하더라고요. 스텔라님 모교 찾아가신 얘기 너무 좋네요...저도 3학년까지 다니고 전학갔었는데...

stella.K 2020-02-16 13:55   좋아요 0 | URL
ㅎㅎ 그 장면이 있었나요?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 것도 같네요.
사실 이책 처음 봤을 때 끌리긴 했는데 결정적으론 브랑카님 글 보고
읽을 생각을 했죠. 벼르고 벼르다 중고샵에 있길래 최근 읽기 시작했느네
너무 오래 띄엄띄엄 읽은 것 같아요. 나중에 다시 한 번 읽어야 할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꾸만 멀어지는 어린 시절이 아쉽기만 하네요.
브랑카님도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