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 조 병 화 -
나에게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
와글와글 타오르던 무성한 여름은
제자리 자리마다 가라 앉아
귀중한 생명들을 여물게 하였읍니다
보시다시피
어젠 담당할 수 없이 숨찬 계절이었읍니다
이제 돌아갈 것을 돌아가게 하여주시고
총총히 서 있는
잎 떨어진 나무 상수리 지나는 바람에도
생명을 알알이 감지할 수 있는
소리 없는 가을을 나에게 주십시오
기름진 미운 얼굴을 거두고
기도를 올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수수 세월이 지나는 나의 자리
검은 수림처럼 그대로 말 없이
잃어버릴 것을 잃어버리게 하여 주시고
나에게 남을 것을 남게 하여 주십시오오
제 5시집. - 사랑이 가기 전에 - 에서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는 조병화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고 1955년 발행되었다.
어느 소녀에 의하여 읽게된 이 시집은 내가 대학 들어 가고 나서인 1955년 겨울인것 같다.
조병화 선생은 이때 서울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고 계실때여서 한동안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기억되군 하였다.
그 소녀, 지금쯤은 손주, 손녀 여러명 있는 할머니가 되었음직 한데 도무지 그림이 안 그려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