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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   름 >

 

                            - 이      덕      진 -

           

      뜻대로 살다
      소리없이 사라지는
      목숨입니다

       누구를 위함도 아닌
       나를 위한 행각도 아닌데
       타고난 습성때문에
       떠다니는 나그네올시다

       솜보다 가벼웁고
       무쇠보다 무거운
       생각이 있어


 
      루억만년을 두고 두고
       정처없이 떠도는 슬픔속에
       영영 타협이 싫은 생리가 있읍니다

 
       지금은 햇빛이 찬란한 정오
       나의 가벼운 나래는
       나의 영원한 나의 청춘

 
       끝이 없는 방랑에서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은 있었읍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멍든 가슴을 열어
       나의 고향을 찾으면
       아 !  꿈속에 피는 향수가 있읍니다

 
       나의 고향은 나의 젊음,
       나의 고향은 나의 영원한 방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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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2-28 11:46   좋아요 0 | URL
좋네요! ^^

水巖 2004-02-28 16:26   좋아요 0 | URL
좋지요? 그 시절엔 줄줄이 외우곤 했는데요. 이젠 몇줄도 생각이 안나네요.
그때 외우던 것들 생각나네요. 제목 만.
<삼일독립선언서>, 오상순의 <짝 잃은 거위르 곡하노라>, 박종화의<청자부>.....
그리고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 한다> 장문(長文)도 거침없이 외우고 경쟁하던 친구야! 지금은 어데서 무얼하느냐?

 

         비 내리는 밤

 

                         - 김    상    화 -

 

     

      보슬비 내려

      엄마없는 아가들의

      가슴을 젖게하는

      밤------

 

      밤이란,

      빗길따라 가라앉는

      별들의 흐느낌

      소리 내잖는

      외로운 사람들의

      절규하는 눈물이었다

 

      비 내리는 맨 밑바닥

      낙엽같은 인생의

      이부자리 안에서

      서로의 손목을 쥐여보는것은

      그림자같은

      행복을 잡자는것,

 

      행복은

      빗길에 씻기운

      녹슬은 지붕

 

      보슬비내려

      엄마없는 인생과

      녹슬은 지붕을

      씻어가는 밤

 

      외로운 사람끼리

      손목을 잡어야 했다.

     

  그 시절엔 눈물이 날것 같었다.  지금도 오랜만에 읽어보니 예전 생각이 되돌아와 마음이 짜안하다.  얼핏 피난 생활도 같고 엄마없는 어린것들을 잠 재워 놓고 비내리는 밤 한숨 짓는 홀애비의 근심이 서린 외로움이 지금 늙은 내 가슴에도 젖어 드는것은 왜 일까?

  손목을 잡을 사람도 없구나. 녹슬은 지붕도 보이지 않고 절규하는 눈물도 없다.  밤이 있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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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의 의식 

    

                                              - 김    상    화 -                                               

          

                  웃으며 살기엔
                  너무나 지루한 인생이였읍니다

 

                  눈물을 흘리기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였읍니다

 

                 삶의 보금자리를 찾고져
                 
나의 양심은 언제나
                
검은 빛갈의 제복을 입어야 했읍니다

 

                 웃음과 눈물이
                 
빗줄기에 무너져버린
                
 이 고장........

 

                  나는 지금
                 
양심의 성문밖에 서 있읍니다

 

                  이따금
               
  향락, 애욕, 출세하는것들이 그리워지면

 

                 인스피레이숀이라는 출납구에서
                
 외화처럼 양심을 교환하기도 합니다

 

                 이윽고 성내로 들어가는 시간이 옵니다
                
양심을 버린 중장 병사가 되어
                
사람들과 사귀어야 했읍니다

 

                  " 악수의 니힐 ! "

 

                  우정이란 현금보다 정확하지 못한
               
  꾸겨진 종이 돈이였읍니다

 

                  한 손으로 친구의 손을 잡고
               
  왼손으론 호주머니속의 지폐를 헤아려야 했읍니다

 

                  꾸겨진 지폐와
                 
꾸겨진 우정 

 

                  나는 또다시 성문밖으로 물려가려 합니다.

 

                  웃으며 살기엔 너무 지루한 인생
                 
눈물을 흘리기엔 너무나 짧은 양심의 성문밖.........

 

 

  언제 어느 신문에 게재된 시였는지 모르겠다.  6.25 사변이 끝나고 어수산란했던 시기에 불안과 누우렇게 찌든 삶의 어두운 소식이 온통 신문지에 실리던 그 시절에 한 모금 오아시스 같이 청량했던 시, 나는 이런 시를 읊조리면서 그나마 꿈을 키웠다. 1950년대 때 고목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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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들에게

여기 200여편의 시들은 아빠가 이십여년전(1987년 쓴 글)군에 복무하고 있을때 방과후와 일요일 마다 외출하지 않고 타이핑한 시들이다.

  그 당시 내가 있던 사단 감찰부에서는 모든 서류를 타이프를 이용해 작성했는데 나는 부관학교 출신이 아니고 보병 출신이어서 타이프를 칠줄 몰라 무척 고생했었단다.

  타이프를 칠 줄 모르면 그곳에 근무 할 수 없기 때문에 업무가 끝나는 시간과 외출이 허용되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고참들의 눈을 피해 평소에 좋아하던 시들,   안보고 찍을 실력이 없던때라 외우고 찍을 수 있던 시들을 타이핑했다. 고참들이 있으면 타이프 망가진다고 잔소리 할 것 같어 그들이 없는 일요일엔 식사시간외에는 하루 종일 타이프와 씨름을 했다. 비록 두 손가락으로 치기 시작 했으나 나중에는 천천히 하는 말을 모두 받어 칠 수 있게 되었다.(지금 표현으로는 그게 학다리 타법이겠지.)

  이시들은 평소 아빠가 애송하던 시가 대부분이었고 또 신문에 발표했던 시들을 잘러 놓았던 시들이었다.

  - 중 략 -

  여기 이 시들은 시중에서 3,4천원이면 이보다 더 방대한 시집을 살 수도 있겠지만 아빠의 손 때 묻은 이 종이들, 이십여년을 이사하면서 버리지 않고 보관했던 이 종이들을 이제 양장본으로 만들어 너희 들에게 남겨 주려고 한다.

  먼 훗날까지도 너희들은 아빠의 詩心(시심)과 같이 살 수 있을것이며 아빠의 사랑을 느낄것이며 또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아름다운 마음이 언제까지나 너희들과 같이 하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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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내가 만든 단 한권의 발행하지 않은 책이며 전문 타이핑해서 딸들이 중, 고등학교 다닐때 만들어 주면서 쓴 글이다.  이 책을 만들었을 때만도 이십년 가깝게 된다.

  요사이 신문을 보면서 유감을 느끼는것은 그 시절에는 보통 신문이 4면 혹은 8면이었는데도 1주일에 한번 정도는 온전한 시들을 전재하였다.

  이일동 문화부장이면 신문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문화면을 깔끔하게 만드셨던거 같어 우리들은 그분이 신문사를 전직하면 따라서 신문도 바꿨을 정도였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신문 면수도 늘고 경제적으로도 비교 할 수없을정도로 괄목할 정도로 성장했는데도 신문에 소개되는 시는 적고 차지하는 면적도 훨씬 적다.

  지금 도하 각 신문에 대선 자금 어쩌고 하는데 제일 많이 불법자금을 제공했다는 어느 그릅과 연관되있다는 J일보는 "오늘의 시?" 인가 하는 코너의 몇줄 소개하고 그래도 미안해서인지 (시 일부) 혹은 (시 전부) 따위의 글을 부기하고 더 한심스러운 일은 그 짧은 시 뒤에 시보다 더 긴 평을 시인이라는 사람들을 시켜서 쓰게 하는 짓이다.

  그래서 스크랩 할 시도 없다.  나는 십수년을 보던 그 신문을 드디어 NO네들이 싫어 한다는 또다른 J일보로 옮겼다. 그래도 그 구석에는 가끔 시 전문을 실리는것 같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문화에 인색한 시대가 되 였는지 그래서 인심도 더 각박해 진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 봐야 할것 같다.

  그 시절 잊어버릴 수 없던 이야기 한토막

  노천명(1913-1957) 시인이 어떤 신문에 <나에게 레몬을> 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언젠가는 이 시도 소개하겠지만 이 시를 발표하고 며칠지나서 이분이 돌아가셨다.

  도하 신문들은 노천명씨의 절필 시를 소개했고 <시인과 문학>,이니 <노천명 시와 일생>이니 하고 지면을 가득 메웠고 우리 들은 또 스크랩하기 바빴다.

 

  나는 그때에 시들, 신문에 발표되고, 혹은 시집으로 만들어졌던 잊혀졌던 시들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 방문객 예진님의 말처럼 참 골동품가게 구색을 마추고 싶어서다. 그러나 시장터의 싸구려 골동품가게는 아니다.

  누렇게 바랜 신문 스크랩이지만 그분들에게 송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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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2-26 22:52   좋아요 0 | URL
수암님, 사단감찰부에 계셨네요. 아이들 아빠도 그런 곳에 근무했었어요. 속초22사단이었는데 이곳 부산에서 그곳까지 참 자주도 면회 다녔더랬어요. 결혼하고 3개월 후에 입영했거든요. 원래 예정은 그게 아니었는데, 참 사는 건 예정대로 되는게 절대 아니더군요. 그래서 그날그날 뜻밖의 선물을 받는 마음으로 사는 게 훨씬 즐거운 것 같습니다. 수암님, 하하아빠...는 먼저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줄 걸요. 그리고... 옛날 사랑하셨다는 시, 참 좋아서 그냥 젖어보았습니다. 사는게 참 누추하게 느껴질 때 위로가 되려나요^^

水巖 2004-02-27 08:13   좋아요 0 | URL
저는 열두사단에요. 화천 근처였죠. 학교 후배들이 전방에서 고생한다고 빽?을 써서 말단 중대에서 끌어다 놨죠.
그 시절 타이프 아세요? 글자에 받침이 붙으면 글자가 길어지고 받침이 없으면 짧이지는 그런 기형적인 글자에요. 스미스.코로나 제품 타자기에요. 공병우 식 한글타자기죠.
지금 보니까 얼핏 보아선 글자를 잘 알아보지 못하겠는데요. 익숙의 상실?인가요?
그것도 그 시절엔 분명히 문명의 이기였다고 했는데 참 격세 지감이 드는 골동품점의 이야기이군요.

김여흔 2004-03-03 14:24   좋아요 0 | URL
수암님, 냉정과 열정 사이님 서재에 남겨놓으신 코멘트 보고 찾아 뵙게 됐습니다. 그 코멘트에 연륜이 느껴지던군요. 어떤 분이신가 훔쳐보러 왔다가 좋은 글과 시들 간직하게 됐네요. 종종 인사드리겠습니다. 추억의 시 모음 코너, 참 좋아요.

水巖 2004-03-03 15:1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추억의 시 코너는 이제 시작이니까 내가 알고 좋아했던 시들을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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