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히너 전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247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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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뷔히너(Georg Büchner)는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형식과 독창적인 언어로 독일 현대극의 선구로 평가받는 뛰어난 수작들을 남긴 작가로, 24살의 나이에 병환으로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어, 요절한 비운의 천재로 불리우기도 한다.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둔 그가 생전에 남긴 문학 작품은 희곡 「당통의 죽음」, 「보이체크」, 「레옹스와 레나」와 단편소설 「렌츠」 등 네 편뿐이고 생전에는 희곡 『당통의 죽음』 만이 출판되었지만, 독일 문학사에 강렬한 흔적을 남기며 후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열린책들의 「뷔히너 전집」 에는 『당통의 죽음』, 『보이체크』, 『레옹스와 레나』, 『렌츠』 의 문학 작품 외에 <『레옹스와 레나』 의 흩어진 단편들>, <헤센 지방의 전령>, <뇌신경에 관한 시범 강연> 또한 수록되어 있다. 






뷔히너 전집 

Gesammelte Werke (1837년)

게오르그 뷔히너

열린책들 세계문학 - 247

열린책들



오늘날 그의 희곡들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공연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기승전결을 벗어난 열린 형식과 낭만성을 벗어난 냉철한 사실주의, 부조리와 소외 등 현대 연극의 주요한 특징들을 선구적으로 보여 준 작품들로 평가된다. 나 또한  「당통의 죽음」 을 연극으로 먼저 만났었는데, 게오르그 뷔히너의 문학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프랑스 역사에 관한 시대극으로만 감상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서야(이제라도!)  『뷔히너 전집』 을 찬찬히 읽었다. 



『뷔히너 전집』 에 수록된 희곡 당통의 죽음(Dantons Tod)는 4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실존인물인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등장한다. 게오르그 뷔히너는 이 작품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마지막 국면, 즉 당통과 로베스피에르가 서로 첨예하게 대치하다가 로베스피에르 일파에 의해 당통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처형당하기까지의 약 10일 남짓한 기간을 그리고 있다.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당통이 내세우는 향락주의와, 사회복지를 우선시하는 로베스피에르가 내세우는 공화주의가 모두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욕망을 추구하기 위한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은유적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을 빛낸 영웅이 아닌  ‘반영웅(Antiheld)’을 그려낸다. 당통은  ‘9월 학살’을 주도한 자신의 책임을 곱씹어보며 고뇌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뷔히너 전집에 실린 작품 중 보이체크(Woyzeck)는 실제 독일에서 요한 크리스티안 보이체크라는 독일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해서 쓰여진 희곡으로 군인이었던 보이체크가 자신의 애인을 찔러 살해한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1836년에 쓰여진 이 작품은 '현대의 비극'으로 불린다.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가 등의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주인공 보이체크는 이발병, 잡역병으로 일하는 군대 졸병이다. 가난했던 터라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결혼비용 때문에 결혼식도 못 올린 채 아기를 가졌으며, 그것 때문에 부도덕하다며 손가락질을 받는 하층민이다. 돈에 궁했던 보이체크는 온갖 천한 일을 하고, 실험대상이 되어 완두콩만 섭취하면서 오로지 아내와 아이를 위해 푼돈을 벌며 살아간다. 



보이체크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이름보다는 각 사회계층을 상징하는 신분으로 표현되고 있기도 하다. 문학적으로는 '기존의 선형적 구조 대신 조각난 짧은 장면들이 급작스럽게 전환되는 방식으로 전개' 되며, 이렇게 '고의적으로 작품의 흐름을 파편화해 내용을 한층 입체적으로 구성함으로써 구조에서부터 모순과 혼란으로 가득찬 사회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게다가 작가가 채 완성을 못하고 요절함으로써 원작 자체가 미완성인데다가, 막과 장의 구분이 모호하여 대중들에게 어려운 작품으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인터라 기회가 되면 연극이나 뮤지컬로 만나고 싶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희곡이 문학장르로 자리잡은 것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되었다. 그러나 소설에 익숙한 내게 희곡은 어렵게 다가오는 편이다. ( 많이 읽어보지도 못했다. ) 공연을 위한 대본이기에 작품 속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려 애쓰게 되는데, 인물의 대화만으로 상황을 유추해가면서 그 사이를 상상력으로 채워보는 것 또한 도전과제다. 그런데 소설보다 극적인 긴장감이 높은 희곡을 천천히 읽다보면 어느 순간 인물들의 대사 속의 장면들이 더욱 시각적이고, 입체적으로 확~ 다가오는 순간이 생기는데 이럴 때 나름의 지적인 만족감을 얻는다. ( 해냈어! 이런 느낌이랄까? ) 입말체로 되어있어 연극배우마냥 소리 내어 읽어보는 즐거움 또한 존재한다. 물론 전문가(!)가 무대에 올리는 공연을 기대하게 되는 즐거움이 더 크지만 말이다. 다른 희곡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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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크눌프 - 크눌프 삶의 세 가지 이야기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더스토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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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란 작가의 이름을 언급하면 대부분 『데미안』 을 제일 먼저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 『유리알 유희』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으로 이어진다. 직업과 결혼을 통한 평범하고 안정된 생활을 거부하고, 세상을 자유롭게 떠돌며 자연과 사람들을 관찰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하던 주인공 『크눌프』 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 물론 나와 내 주변 독서 친구들의 경우다. ) 아마도 헤세 문학 후반기의 자기성찰적 경향의 소설들을 주로 읽느라, 초반기의 작품인 이 소설은 미루고 있던 이도 있었다. ( 『수레바퀴 아래서』 가 1906년에, 『크눌프』 는 1915년에, 『데미안』 은 1919년에 나왔다. ) 『크눌프』는 1907년부터 1914년까지 각기 다른 잡지에 실렸다가 1915년에 '크눌프 그 삶의 이야기'라는 부제와 함께 한 권의 책으로 묶여서 출판되었다고 한다. 처음 발표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이 작품의 유려한 문체와 부드럽고 단순한 언어, 그리고 작품 속에 그려진 전원적인 풍경에 찬사를 보냈다.

『크눌프』 를 1913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로 디자인된 책으로 만나보니 마치 외국의 고서점에서 보물을 건져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50여 페이지의 짧은 이야기를 담은 얇은 책은 양장본 표지를 만나 깔끔함을 자랑한다. 패브릭 양장본과 블랙벨벳 에디션 디자인도 함께 나왔는데 실물 느낌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Knulp : Drei Geschichten aus dem Leben Knulps

헤르만 헤세

1913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주)미르북컴퍼니 / 더스토리

소설은 '이른 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종말' 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잡지에 발표된 순서로는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이 1908년 가장 먼저 발표되었고, 1913년에 '이른 봄'이, 1914년에 '종말' 이 발표되었다. 2부인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은 화자가 크눌프의 친구이며, 1부와 3부는 작가시점으로 서술된다.

1부 '이른 봄' 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크눌프는 유쾌하고 밝은 이미지로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삶의 여러가지에 얽매여 고단하고 지루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부러움이 섞인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피혁공 로트푸스는 "정말 행복한 친구야" 라면서 '인생에서 단지 관찰자 이상을 바라지 않는 이 친구, 그것을 과욕이라고 해야 할지 겸허한 것이라고 해야 할지'(p37)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크눌프는 제 성격대로 살며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옳았다. 그가 어린애같이 말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때 그런 그를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 p38

작가는 일상적인 삶에 나름대로 적응하여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과, 그 세계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그렇다고 바깥 세계로 완전히 떠나지도 못한 채, 그 주위를 빙빙 돌면서 방랑자로 살아가는 크눌프의 모습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관찰자 이상을 바라지 않는' 크눌프의 인생은 남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을까. 그가 방랑을 선택했던 것은 타인에 대한 신뢰를 잃어야했던 과거의 경험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자유에 따르는 대가는 '고독'과 '가난' 이었다.

책 후반부에 실린 작품해설에 따르면 이 소설은 『수레바퀴 아래서』 의 주인공 한스처럼, 소년 시절에 다니던 라틴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나와 죽을 때까지 방황하는 주인공의 삶은, 헤르만 헤세 자신이 소년 시절 라틴어 학교를 중단하고 다시는 학교 생활을 이어가지 못한 것에 대한 회환과 추억의 자전적 요소를 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크눌프는 삶의 끝에서 신과 대화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 크눌프는 그의 삶을 어떻게 느꼈을까.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크눌프에게 신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보라! 나는 그대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필요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방랑하였고,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매번 다시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 불러일으켰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어리석은 일을 하면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바로 나 자신이 그대 안에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사랑받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형제이며, 나의 분신이다. 그대가 맛보고 경험한 모든 것은 모두, 바로 그대 안에서 내가 그대와 함께했다.

- p156

책 속의 다른 인물들처럼 일상적인 삶에 나름대로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 또한 크눌프가 부러웠다. 책 속의 사람들이 크눌프에게서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듯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헤세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고독한 방랑자의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결코 젊음이 충동과 낭만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도 있다. 어떤 삶이 훌륭한 삶인가란 질문도 던져보게 된다. 그 질문에 앞서 '훌륭한', '좋은' 이란 뜻부터 정의해야할지도 모른다. 삶에 있어서 정해진 정답이란 없다. 크눌프의 삶도, 내 삶도 모두 저마다의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작가는 그런 다양한 삶을 인정하며 배려하며 서로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자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나는 작가의 과제가 자신의 독자에게 인생과 인간에 대한 규범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거나, 그가 전능하고 권위적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 크눌프와 같은 인물들은 나에겐 매우 매혹적이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지만 많은 유용한 사람들처럼 해를 끼치지는 않지. 그들을 심판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닐세.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크눌프와 같이 재능 있고 생명력 충만한 사람들이 우리의 세계 안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크눌프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또한 내가 독자들에게 충고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 연약한 사람들, 쓸모없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일세.

-1954년 1월 에른스트 모르겐탈러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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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히너 전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247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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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히너 전집에는 『당통의 죽음』, 『보이체크』, 『레옹스와 레나』, 『렌츠』 의 작품 외에 <『레옹스와 레나』 의 흩어진 단편들>, <헤센 지방의 전령>, <뇌신경에 관한 시범 강연> 이 수록되어 있다.



Gesammelte Werke (1837년)

게오르그 뷔히너

열린책들 세계문학 - 247

열린책들

작가 게오르그 뷔히너 (Georg Büchner) 에 대해 찾아보지 않았더라면, 뷔히너 전집에 왜 <헤센 지방의 전령>, <뇌신경에 관한 시범 강연> 이 포함되어 있는지 의아해할 뻔 했다. ( 물론 책의 후반부에 게오르그 뷔히너 연보 또한 수록되어 있기에 꼼꼼하게 들여다본다면 추측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


뷔히너는 1834년에 프랑스의 <인권 및 시민권 협회>를 본떠 <인권 협회>를 창립, 헤센의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헤센 대공국의 반동적 사회 상황에 저항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부츠바하 출신의 학교장 바이디히 (F. L. Weidig)와 함께 '헤센 지방의 전령(Der Hessische Landbote)'이라는 독일 최초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전단을 작성하여 농민들에게 살포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뷔히너 전집』 에는 1834년 7월 판본과 11월 판본이 모두 실려있다.

선동적 어조로 씌여진 '헤센 지방의 전령(Der Hessische Landbote)'을 읽다보면 과거의 상황과 지금이 무엇이 다른가 생각해보게도 된다. '대공' 이라고 우러러보는 이도 제후의 망토를 벗기면 '그 역시 당신들처럼 벌거벗은 연약한 몸으로 태어나 당신들처럼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p330) 라고 하면서 '그렇게 똑같은 인간이 지금 당신들의 목덜미를 발로 짓누르고, 70여만 명을 자신의 쟁기에 묶고, 그런 일을 담당할 장관을 임명하고, 자신이 부과한 세금으로 당신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자신이 만든 법으로 당신들의 목숨을 좌우하고, 귀족과 귀부인을 궁신으로 거느리고, 신에 버금가는 그런 권력을 마찬가지로 비범한 집안 출신의 아내를 맞아들인 자식들에게 물려준다.'(p331) 라고 지적한다.

슬프구나, 당신들 불쌍한 우상 숭배자들이여! 당신들은 자신을 잡아먹는 악어를 숭배하는 이교도와 같다. 당신들이 악어에게 씌워 준 왕관은 당신들 본인에겐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가시 면류관이요, 당신들이 손에 쥐여 준 왕홀은 당신들을 징벌하는 채찍이요, 당신들이 앉힌 왕좌는 당신과 당신의 자식들을 고문하는 의자다.

- p331

만일 뷔히너가 요절하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떤 작품들을 더 만날 수 있었을까. 매우 궁금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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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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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Retrato en Sepia

이사벨 아옌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 406

민음사

『세피아빛 초상』 은 라틴 아메리카 여성 해방의 역사를 제시하며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가장 뛰어난 작가로 인정받고 있는 이사벨 아옌데의 3부작 소설 중 한 권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던 아우로라의 삶을 보여 주며 『영혼의 집』의 클라라, 『운명의 딸』의 엘리사와 함께 4대에 걸친 여성들의 역사를 풀어낸다. 라틴 아메리카의 대를 이은 가족의 이야기다 보니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과 비교되기도 한다.

칠레 출신 미국인 소설가인 이사벨 아옌데( 풀네임은 이사벨 아옌데 요나(Isabel Allende Llona)다. )는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특징인 마술적 리얼리즘과 페미니즘을 결합시켜 구사하는 작가다. 아옌데의 작품에는 칠레의 굴곡진 현대사와 그 역사를 온몸으로 통과해가는 여성들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다.

삼부작의 각 권들이 출간된 시기별로 보면 「영혼의 집」(1982) , 「운명의 딸」(1999), 「세피아빛 초상」 (2000) 의 순서다. 그런데 책을 펼쳐 읽다 보니 등장하는 이름들이 서로 엮인다. 등장인물의 연대기로 보면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 「영혼의 집」 의 순서다. 『세피아빛 초상』의 주인공 아우로라 델 바예는 「운명의 딸」 의 주인공이었던 엘리사의 딸과 파울리나의 아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며, 『영혼의 집』 의 주인공 클라라는 『세피아빛 초상』 에 등장하는 니베아 델 바예와 세베로 델 바예의 딸인 구성이다. 시대적 배경으로는 「운명의 딸」 이 19세기 후반에 미국 서부로 이주한 칠레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세피아빛 초상」 은 다시 칠레로 역이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아우로라는 유년 시절의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악몽에 시달린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어디 네가 너의 악몽의 어둠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는지 보자꾸나"(p275) 라는 말과 함께 구식 감광판 대신 종이를 쓰는 현대식 카메라를 선물 받는다. 열세 살 때 선물 받은 이 카메라 덕분에 주인공은 '몇 달 동안의 유일한 목표가 되고, 악몽을 밝히려는 집념에 매달리다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나는 암실에서 다양한 현상 기술을 실험하거나 가족들의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고 복잡한 설계도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우연의 얽힘처럼 보이는 것들이 카메라로 자세히 관찰해 보면 완벽한 유사성을 드러내곤 했다. 어떤 것도 우연이 아니었고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게 없었다. <중략>

근본적인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눈이 아니라 오직 가슴만이 핵심을 잡아낸다. 그러나 카메라는 가끔 그 본질이 미세한 분위기를 포착한다.

- p339

아우로라는 사진을 찍으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자신의 과거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가족과 자신의 기억, 복잡한 가정사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칠레 내전의 소용돌이 와중에 놓인 인물들의 역경과 고난, 피와 고통으로 얼룩진 칠레의 근현대사가 씨줄과 날줄로 엮인다. 역사 속에 존재했으나 기록되지 않았던, 늘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곤 했던 많은 여성들의 모습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이야기를 통해 되살아난다. 『세피아빛 초상』 은 남성들에 의해 가려지고 숨겨졌던 굴절된 역사를 주인공 아우로라 델 바예가 새롭게 고쳐 쓰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내 유년 시절의 오랜 비밀들을 밝혀 내 정체성을 찾고 나만의 전설을 만들기 위해 글을 쓴다. 우리가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결국 우리가 엮어놓은 기억뿐이다. 각자 자기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한 빛깔을 고른다. 나는 백금 사진의 영구적인 선명함을 고르고 싶다. 그러나 내 운명에는 그런 빛나는 구석이 조금도 없다. 나는 모호한 색깔들과 불분명한 미스터리,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이야기는 세피아빛 초상의 색조를 띤다.

- P431,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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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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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발표된 후, 2018년에 국내에 출간된 소설 『파친코』 는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던 스테디셀러다. 애플TV플러스에서 동명 드라마가 공개되면서 더욱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전 출판사의 판권이 만료되고 인플루엔셜 출판사에서 새롭게 개정되어 출간되었다.




 파친코 1
Pachinko (2017년)
이민진 장편소설
인플루엔셜


재미교포 1.5세인 이민진 작가가 1989년부터 30여 년에 걸쳐 이야기를 구상했다는 이 작품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 뿌리내리고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이민자의 삶을 작가 특유의 통찰력과 공감 어린 시선으로 어루만진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첫 문장 또한 유명하다. ( 이전 판의 번역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였다. 원문은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 2017년 출간 직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첫 문장의 화자가 누구인지 추측해보게 만드는 첫 장은, 영도라는 섬에 살고 있던 소녀 양진이 남편 훈이와 결혼한 이후, 여러 번의 유산 끝에 겨우 만나게 된 딸 선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엄마와 선자와 남아 생계에 어려움을 겪던 중, 생선중개상인 한수를 만나게 되고 선자는 몰래 연애를 한다. 그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한수는 이미 아이가 셋이나 있던 유부남이었다. 선자는 그녀를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한수를 거절하고 일본에 가기 위에 목사 이삭과 결혼하여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에 도착한 부부는 조선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알게 된다. 현실을 받아들이며 일본에서의 삶을 꾸려나가는 중 이삭이 감옥에 끌려가고, 생계를 위해 갖은일을 하게 된다. 



1, 2권에 걸쳐 선자를 중심으로 대략 1910년에서 1990년까지 4대에 이르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여 풀어내는 이 소설은, 개정판 책소개에 따르면 원문의 의미를 보다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다시 번역하고, 작품 특유의 속도감 있는 문체를 살리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또한 작가가 처음 의도한 구조와 흐름을 살리기 위해 총 세 파트(1부 ‘고향’, 2부 ‘모국’, 3부 ‘파친코’)로 된 원서의 구성을 그대로 따른다. 소설 『파친코』 1권은 1부 ‘고향(1910-1933)’ 과 2부 ‘모국(1939-1962)’ 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제시대, 일본의 패망, 광복, 한국전쟁 동안의 시대적 배경 속 선자의 삶을 담담히 그려낸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이 겪은 수난과 생존 투쟁의 역사다. 소설 『파친코』 는 첫 문장에서 개인이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 이기거나 혹은 지는 승부의 서사를 담지 않았다. 작가가 첫 문장에서 운을 뗀 것처럼, 숨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역사의 파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이야기다. 


1권의 후반부에는 선자의 아들인 노아와 백요셉( 일본어로 보쿠 모자수, 창씨개명으로는 반도 모자수 ) 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2권에서 본격적으로 파친코 사업을 선택해야 했던 재일조선인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 2권이 더욱 기다려진다! 개정판 2권이 얼른 나오길!! )

너는 아주 용감해, 노아야. 나보다 훨씬, 훨씬 더 용감해. 너를 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 p307

한 방의 인생 역전을 꿈꾸는 이들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구슬에 돈을 걸고 대박 혹은 쪽박을 맞이하는 운명의 게임인 '파친코'가 소설의 제목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책의 제목인 ‘파친코’가 “도박처럼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뜻함과 동시에, 혐오와 편견으로 가득한 타향에서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파친코 사업을 선택해야 했던 재일조선인들의 비극적 삶을 상징한다”고 밝힌 바 있다. 많은 차별을 받으며 정식 직업을 얻기 힘들었던 재일 조선일들이 생계를 위해 뛰어들 수 밖에 없던 이 사업은 어쩔 수 없이 야쿠자 같은 이들과 엮일 수 밖에 없고, 이는 재일조선인들의 이미지가 게으르고 불량스럽게 보이는데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배우 이민호가 일종의 악역인 '한수' 캐릭터를 선택했다기에 궁금했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원작을 읽고 드라마를 다시 보니 더욱 새롭다. 





'한수' 캐릭터가 마음에 든 이유는 무엇이었나?

- 정돈되어있지 않은 감성에 끌렸다. 제가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감성을 담은 이야기고 이 안에서 한수는 '악'의 모습, 어두운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존하며 (그런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단순히 '나쁜 남자'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내면의 처절함을 느꼈다. 그가 참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 배우 이민호 인터뷰 중에서




애국심은 그저 이념이야.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념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잊게 돼. 그리고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들은 그 이념에 지나치게 심취한 사람을 이용하지. 넌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어. 너 같은 사람들이나 나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어도 조선을 바로잡을 수 없어. 일본이 빠져나가고, 이제 소련과 중국과 미국이 거지같이 작은 우리나라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어. 네가 그들과 싸울 수 있을 것 같아? 조선은 잊어버려. 네가 가질 수 있는 것에 집중해.

- p362, 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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