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에 선 남자 마르틴 베크 시리즈 3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르틴 베크(Martin Beck) 시리즈의 세번째 권 『발코니에 선 남자』 에는 내가 좋아하는 북유럽 소설가 중 한 명인 요 네스뵈의 서문이 함께 한다. 요 네스뵈에 따르면, 1963년 여름 스톡홀름의 공원에서 놀던 두 어린 여자아이가 누군가에게 유인되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발코니에 선 남자』는 그 실제 사건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소설은 제목부터 누군가를 특정하는 터라 결국 제목의 '발코니에 선 남자'를 주목해서 읽어갈 수 밖에 없게 한다. 제목이 스포인건가? 아니면 다른 역할이 있나? 궁금해하면서 말이다.




스톡홀름의 공원들에서 살해당한 여자아이가 발견된다. 동시에 도시 곳곳에서는 강도 상해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누군가는 보호자 없는 여자아이를, 누군가는 가방을 든 노약자를 노리고 있다.

고정적인 등장 인물들의 변화가 먼저 보인다. 2권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에서 육 개월차 신혼이던 콜베리는 2개월 뒤에 아내가 아이를 낳을 예정이다. 마르틴 베크는 아내와 사이가 더욱 나빠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새로운 동료인 군발드 라르손이 등장하는데, 마르틴 베크와는 상극인 듯 하다. 초반부터 '비록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현재까지 극소수만이 성공한 일을 해낼지도 모르는 찰나였다. 더이상 못 참고 화를 터뜨릴 정도로 마르틴 베크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 말이다.'(p29) 란 표현이 등장하니 말이다.

여자아이가 살해당한 사건을 맡은 콜베리는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녹초가 된 기분을 느낀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신의 아이를 떠올리니 더욱 끔찍했을 것이다.


콜베리는 사회의 급속한 폭력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종국에 그것은 사회에 살면서 함께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들,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만든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불과 작년 한 . 해동안만 해도 경찰의 기술력은 급속하게 상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늘 한 걸음 앞서가는 것 같았다. 그는 새로운 수사 기법과 컴퓨터를 떠올렸고, 그것들 덕분에 이런 사건의 범죄자도 몇 시간 만에 붙잡힐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훌륭한 기술적 발명이 관련자들에게 안겨주는 위안은 미미하다고도 생각했다. 그것들은 가령 그가 방금 남겨두고 떠나온 여인에게 어떤 위안을 안겨줄 것인가. 혹은 콜베리 자신에게.


사건은 계속 벌어지는 데 성과없는 추적은 칠 일째로 접어든다. 그 때 한 여자의 제보로 강도 상해 사건의 용의자를 붙잡고 취조를 시작한다. 이 용의자에게서 여자아이들을 살해한 사건의 범인을 목격했는지를 밝혀내려고 하고, 간신히 범인의 인상착의를 알게 된다. 강도 상해 사건의 용의자의 취조는 군발드 라르손이 진행했는데, 함께 하던 마르틴 베크는 '막연하게 뭔가 기억이 떠오를 듯했다. 하지만 정체 모를 기억은 떠오르자마자 홀연히 사라졌다'(p177) 이거나 '마음 깊은 곳에는 그것 말고도 신경쓰이는 일이 있었지만, 무엇인지는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p178) 의 상태가 된다. 군발드와 관련되어 계속 답답함이 생기는데, 마르틴 베크는 '군발드에 관해서 뭔가 꼬집어 기억이 안 나는 일이 있어'(p237) 라고 중얼거린다. 소설 초반의 군발드와 관련된 복선이 나중에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 때가 되서 마르틴 베크가 왜 그렇게 답답해했는지를 알게 된다. ( 눈치 빠른 독자는 계속되는 힌트에 앞으로 되돌아가 발견해낼 테지만. )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은 계속 목격자들을 탐문하는 등 수사를 이어간다. 살해된 아이의 친구인 세 살짜리 꼬마가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에게 받았던 지하철 승차권, 비정한 범죄자에게서 얻은 막연한 인상착의, 추적 대상의 정신 상태에 대한 막연한 해석 등 단서라고는 모두 구체적이지 않은데다가 심란한 것들이다.


발코니에 남자에서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일을 결정하는 것이 화자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행동은 전개상의 필요성, 플롯의 재미, 좀더 넓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요량으로 주인공이 내리는 도덕적 선택 따위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 요 뇌스베


불현듯 무엇인가를 깨닫는 마르틴 베크. '마르틴 베크가 과거에 수차 이런 식의 순간적인 영감을 떠올렸고, 그것이 결국 까다로운 사건을 해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서 이번에도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확인해볼 가치는 있을 것이다'(p263). 마르틴 베크가 영감을 받긴 했으나, 요 네스뵈의 말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사건 수사의 과정이 계속 서술된다. 스톡홀름의 복잡한 골목을 헤매고, 경찰을 불신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캐내고, 산더미 같은 서류 작업을 해치워야하는 현실적인 일들이 말이다.


그들은 또 하루를 견뎌냈다. 마지막 살인이 벌어진 뒤로 일주일이 흘렀다. 마지막이 아니라 가장 최근의 살인이라고 해야할까.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발 디딜 곳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일시적인 휴식일 뿐임을 알았다.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밀물이 찰 것이다.

『발코니에 선 남자』 는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소설이기도 하지만, 지독하게도 현실적인 수사 과정을 보여주기에 '소설 속 내용이 진짜 이야기라고 믿게 된다' 라는 요 뇌스베의 말에 절로 동의하게 된다. 범죄소설을 통해 사회에 숨겨진 빈곤과 범죄를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들의 집필 의도는 사회 전반과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 범죄소설작가 아카데미는 범죄소설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시리즈를 기념하기 위해 마르틴 베크상을 제정하여 1971년부터 매년 시상하고 있다. 다음 편인 『웃는 경관』 은 시리즈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소설이라 더욱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시태그 프랑스 소도시 여행 - 2024 최신판 #해시태그 트래블
조대현 지음 / 해시태그(Hashtag)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적 40여일의 유럽 배낭 여행 동안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는 프랑스를 파리와 인근 베르사유 정도만 다녀왔던 점이었다. 저비용 고효율을 얻겠다며 동선을 짜면서 다른 국가들은 최소 2개 이상의 도시를 여행했었는데 말이다. 그 때의 아쉬움은 다음 유럽 여행은 프랑스를 여유롭게 느껴보는 여행으로 해보자는 다짐을 하게 했었다. 비록 아직까지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해시태그 프랑스 소도시 여행』 을 발견하니 다시 설레기 시작한다.




목차를 보며 책 속에 소개되어 있는 프랑스 지역들을 먼저 확인해본다. 피레네 산맥, 브르타뉴, 낭트, 노르망디, 오베르 쉬르 우아즈, 보르도, 부르고뉴, 리옹, 오를레앙, 낭시, 스트라스부르, 안시, 샤모니-몽블랑, 칸, 아비뇽, 니스, 몽펠리에, 앙티브, 마르세유, 모나코 등이 소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보르도, 낭트, 몽펠리에, 마르세유 등이 궁금했다. 모네의 정원으로 유명한 지베르니가 있는 노르망디 지역이나 반 고흐가 좋아했던 목가적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도 궁금하다. 프랑스의 매력은 유럽에서 넓은 영토에서 받을 수 있는 같은 풍경이 없을 정도로 풍경이 다채롭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소도시에서 여행하다보면 사람들의 인심에 기분이 좋아지면서 여행을 할 수 있는 동력을 더욱 얻게 된다고 소개한다. 책의 도입부에 프랑스에 대한 소개와 함께 프랑스의 역사, 요리, 프랑스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방법들을 소개해두었는데, 마침 최근에 읽은 책에서 나온 68 혁명에 관한 단락이 보여 반가웠다.


'프랑스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방법' 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노르망디 해안가를 중심으로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는 북프랑스,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피레네 산맥,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는 남프랑스에 대한 정보들을 풀어내며 프랑스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돕는다. 프랑스는 육각형 형태의 국토를 가지고 있고, 프랑스의 대표적 여행지인 수도 파리와 큰 도시인 레옹, 마르세유, 프랑스의 작은 마을이 몰려 있는 남프랑스까지 여행을 하려면 일정 배정을 잘해야 한다.

책에서도 프랑스는 일정 배정을 잘못하면 짧게 4박 5일 정도의 여행은 수도만 둘러보면 끝이 나 버린다고 이야기한다. ( 바로 내가 그랬다. ) 그래서 프랑스 여행은 어디로 여행을 할 계획이든 여행 일정을 1주일은 배정해야 한다고. 책에서는 4박5일부터 6박7일, 7박8일, 13박14일, 17박18일 등의 다양한 코스를 제안하고 있다. 가보고 싶던 도시를 확인해보니 나는 일단 13박14일이 필요하다!


프랑스 여행에서 가장 기분이 나쁘게 잃어버리는 경우가 날치기라고 한다. 카메라나 핸드폰이 날치기의 주요 범죄 대상이라고 한다. 안보이게 하거나 손에 끈을 끼워두라고 조언한다.

『해시태그 프랑스 소도시 여행』 속 사진들을 보며 가보고 싶은 곳들을 마음껏 감상했다. 여행의 시작은 계획부터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벌써 여행을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마토마토마토 초등 읽기대장
송은주 지음, 모로 그림 / 한솔수북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 1회 한솔수북 선생님 동화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인 『토마토마토마토』를 읽어본다. 초등 읽기대장 시리즈의 한 권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를 써야 학교에 갈 수 있었던 시기에, 마스크를 쓴 짝꿍이 잘생긴 줄 알았는데 마스크를 벗은 모습에 실망했다던 한 아이의 솔직한 고백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3학년인 주인공 하늬는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이든과 짝꿍이 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3학년이 된 첫날 전학온 이든은 잘 웃고 성격도 자상해서 모두들 좋아하는 친구다.

어느날 이든이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본 하늬는 볼은 빵빵한데다가 빨갛고, 코 밑은 더 빨간 모습이라며 꼭 토마토 같다고 생각한다. 마스크를 쓰고 있을 때는 웃을 때마다 초승달처럼 변하는 이든의 눈이 반짝여서 잘생겼다고 생각했건만, 마스크 벗은 모습에 실망하게 된 자신의 모습에 '이든이는 그대로인데 나는 왜 이러지?'(p52) 라고 고민하게 되는 하늬. 책 속의 이야기는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이 경험했을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더욱 몰입하여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문득 코로나 시절 아이가 이야기해주던 '마기꾼', '마해자' 란 단어가 떠올랐다. 마기꾼은 마스크+사기꾼의 합성어이고, 마해자는 마스크+피해자의 합성어다. 마스크를 쓰고 벗었을 때의 차이가 사기수준이라거나, 반대로 마스크가 외모를 가려 저평가되었다는 의미란다. 사람은 심리학적으로 마스크로 가려진 부분을 선호하는 얼굴로 채울 수도 있다는 가설을 떠올려보면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마기꾼'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냐며 아이와 웃었던 기억도 떠오른다.


『토마토마토마토』 는 교실에서 함께 키우는 토마토 화분을 소재로 '토마토 아이' 같은 이든의 모습이라던가, 하늬의 부재중에도 하늬의 토마토 화분을 함께 돌보는 이든의 자상함, 그리고 제목이기도 한 '토마토마토마토' 라는 말놀이 상황까지 자연스럽게 연결해서 더욱 재미있기도 하다.

초등 저학년, 중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 읽기 대장' 시리즈는 아이들 마음속에 따뜻하고 건강한 마음이 씨앗처럼 심겨 자라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시리즈로, 『토마토마토마토』 에서는 마스크 속에 감춰진 얼굴, 즉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가는 아이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모로 작가가 그려낸 아이들의 모습은 사랑스러운 이야기와 어우러져 더욱 귀여움을 빛낸다. 이야기는 하늬의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후반부에 깜짝 등장하는 이든의 일기는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모두 사랑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 생명의 씨앗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유혜인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듄』 의 작가 프랭크 허버트(Frank Herbert)의 단편소설들을 읽어본다. 현재 국내에 소개된 단편집은 1951-1961까지의 작품과 1962-1985 까지의 작품을 모아 두 권으로 소개되어 있다. 6년간의 자료조사와 집필 끝에, 1965년에 『듄』 이 완성되었으니 1951-1961 의 작품 들은 듄의 세계관이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어갔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을 테고, 1962-1985 의 작품은 『듄』 이후의 작가의 또 다른 세계관 확장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란 개인적인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펼쳤다. 리뷰는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으로 남겨본다.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에는 1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각 단편들은 <아날로그>, <갤럭시>, <월즈 오프 이프>, <더 매거진 오브 판타지 앤드 사이언스 픽션> 등의 잡지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각 단편의 속 표지에는 제목과 함께 발표된 해와 관련된 내용들이 짧게 설명되어 있다.


1969년작 <존재의 기계 > 는 팔로스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도시에 존재하는 어떤 기계가 갑자기 탑을 짓기 시작하며 시작한다. '팔로스 문화의 궁전' 이라는 탑이다. 광장 건너편의 건물에서 창문 너머로 휘트라는 남자가 탑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 도시에서 '존재의 기계' 라고 불리는 기계는 어떤 존재인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탑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 휘트의 아내는 "이번에는 또 뭘 빼앗아 가려나" 라고 중얼거린다.

휘트와 휘트의 아내의 대화 속에서 팔로스의 인간들은 키는 2미터 정도이며 햇빛에 그을린 올리브색의 피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검은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존재의 기계가 인간들을 통제하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도 곧 알게 된다. 존재의 기계는 인간들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들에게서 여러가지를 차근차근 빼앗아왔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듄의 세계』 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프랭크 허버트는 "SF의 가장 큰 매력은 인간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독자들은 존재의 기계의 생각도 들을 수 있다. 기계는 팔로스 인간들의 꿈을 분석하고 생각을 듣고 그에 따라 계획을 수정하는 존재다.


"기계는 꿈을 분석할 때 성욕, 초자연적 에너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경험 같은 개념들을 활용했다. 기계가 비교한 바에 따르면 죽음은 성적 에너지의 소멸을 의미했다. 과학적인 발상은 아니었다. 추론된 에너지의 파괴를 상정하고 .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확실한 법칙들을 무시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비교를 하려면 영혼과 신(들)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다. 일시적인 성욕에 대한 가설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여기에 옳지 않은 사고 시스템이 있다. 존재의 기계는 기록했다.

-p386 "


오래된 고전을 읽다보면 그동안의 여러 창작물들에서 비슷한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후대의 창작물들은 분명 이전의 고전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테니 말이다. 나는 존재의 기계를 보며 영화 <매트릭스>의 중앙 컴퓨터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가상세계에서 살고 있지 않을 뿐 팔로스의 인간들은 기계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낯설지 않은 설정이지만 60년대에는 발상 자체부터 더욱 재미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휘트는 존재의 기계와 대화를 시도한다. 존재의 기계는 휘트가 다가오는 것을 기록하고 입구를 만들어 준다. 수천 세기 만에 처음으로 기계의 보호 구역안에 들어온 인간이었다. 기계와 휘트가 나누는 대화를 읽다가 문득 나는 내가 chatGPT 와 나누었던 실없던 대화를 떠올리기도 했다. 순간 살짝 소름이 돋았다. 요즘 AI 의 발전 속도가 무서울 정도다. 기계 밖으로 나온 휘트는 무엇인가 변해있는 존재가 되어 있다. "저게 뭔지 알아냈어. 낡은 관계를 깨뜨리는 장치야. 감각을 봉투처럼 감싸는 기계. 우리의 감각을 공격하고 우리를 재구성하기 위해 만들어졌지. <중략> 우리 인생을 편집하는 거야" 라고 휘트는 말한다. 독자들은 휘트의 말 속에서 인간이 왜 기계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


"저 기계를 만든 자들은 우리 인간의 삶이 완벽해지기를 바랐어. 하지만 기계에 결함이 있었지. 기계는 이걸 깨닫고 스스로 바로잡으려는 중이고. <중략>

기계를 만들면서 상상력으로 가는 입구를 빼먹은 거야. 기계는 그 길을 지켜야 했지만 말이야. 제작자들은 기호밖에 주지 않았어. 기계는 우리 같은 의식을 가져 본 적이 없었어..<중략>

제작자들은 기계만의 내적인 삶을 주려고 했어. 하지만 실제로는 고정된 패턴을 줘 버린 거야. 논리도, 물론.

- p400, p402"


이 팔로스란 행성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 책 속에서 확인해보시길 ) 영어 제목으로 'The Mind Bomb' 이 표시되어 있지만 워낙 존재의 기계의 존재감이 크다보니 'The Being Machine' 으로 더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의 표제로 선택되어 있는 작품 <생명의 씨앗> 은 1970년 04월 <아날로그> 지에 수록된 작품으로 지구에서 새로운 식민지 행성으로 이주한 이들의 이야기다. 선별된 인간, 가축, 꼭 필요한 기본 물품을 가득 채운 우주선은 머나먼 곳에 인간을 '심기 위해' 지구를 떠났다. 착륙하고 난 후 어째서인지 기본 물품들은 동이 났고, 착륙하고 3년이 지난 지금 멸종 위기 속에 던져졌다. 우주선은 연료가 없어 동작하지 않았으며, 생존은 보장되지 않았고, 화학 작용, 중력, 하루 주기의 미묘한 차이에서 비롯된 행성의 질병으로 조금씩 앓고 있는 사람들.

지구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지구의 기준으로 적응하려 애쓰지만, 행성에 뿌리를 내린 씨앗은 이곳의 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아 거의 죽어가던 씨앗이었다. 과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을 문제였다. 그들은 이곳을 또 다른 지구로 만들려는 중이었기에. "하지만 이 행성은 지구가 아니었고, 지구가 될 수도 없었다."(p429)

이 곳에 이주한 지구인들은 오래 살지 못하고,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지구의 기준으로 병이 들 것이고, 이주를 계획한 사람들의 희망과 반대되는 모습을 변화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과학자들의 실패를 이야기했다.'(p430) 문득 이 문장에서 『파운데이션』 의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가 "SF 소설에서 과학을 제거하려는 경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라면서 프랭크 허버트를 꼭 집어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떠올리게 했다는 일화도 떠오른다. 『듄의 세계』 에 따르면 1974년 에세이 『SF 소설과 위기의 세계』 를 통해 허버트는 『파운데이션』 처럼 엄격하게 통제된 우주의 "권력자들은 <중략> 사회, 종, 개인에 관한 단일한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마지막에 실린 1985년작 <듄으로 가는 길 The Road to Dune> 은 또 다른 단편소설집인 『아이(Eye)』 에 수록되었던 작품이다. 『아이(Eye)』 는 13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었고, 대부분의 단편은 책이나 잡지 형태로 발표된 작품이었고 <듄으로 가는 길 The Road to Dune> 만 새롭게 발표된 작품이었다.

소설 『Dune』 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이 짧은 단편은 패디샤(Padishah) 황제 샤담 4세(Shaddam IV)의 몰락 이후 아라키스 행성으로 여행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가이드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폴의 개인용 오니솝터(ornithopter) 나, 이룰란 공주, 던컨 아이다호 등의 초상화가 Jim Burns 의 삽화로 그려져 있으며, 이 캐릭터들에 대한 설명이 뒤따른다. 『Dune』 팬들을 위한 깜짝선물인 셈.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에 수록된 프랭크 허버트의 단편소설들을 읽으며 『Dune』 의 흔적을 발견해보는 것도 즐겁고, 그의 작품세계를 만나보는 것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가 후대에 준 영향을 유추해보는 것 또한 이번 독서의 재미. SF소설 팬들이라면 이 고전작품들을 놓치지 마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요일의 역사가 - 주경철의 역사 산책
주경철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겉으로만 달라 보일 뿐이지 역사와 문학은 본래 같은 부류다' 라며 책의 이야기를 연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흔적들을 천착하여 인간과 사회의 큰 흐름을 짚어보는 동시에 그 내밀한 속사정을 읽으려 하는 점에서 서로 상통한다는 것. '히스토리 역시 스토리의 일종이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여본다. 덕분에 『일요일의 역사가』 는 이론 중심의 역사가 아닌 이야기 중심의 역사 이야기로 독자들을 만난다.




1년여 간 월간 「현대문학」에 절찬 연재했던 글들을 엮어낸 『일요일의 역사가』 는 총 15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세번째 이야기인 <이븐 바투타의 주유천하>편을 보자 낯익은 이름이 반가웠다. 이슬람 문명을 잘 모름에도 나는 어찌 '이븐 바투타'를 알고 있는가. 실제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이 마구 섞여있는 게임 <대항해시대> 때문이었다.



그는 모로코 왕국의 이슬람 율법학자 가문에서 1304년에 태어난 학자이자 판관이자 여행자이다. 그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독실한 이슬람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이슬람법을 공부했다. 공부를 마친 그는 모든 무슬림이 일생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꼭 해야 하는 메카 순례 여행을 떠났다. 원래 고향을 떠날 때에는 메카만 방문하고 올 예정이었지만 30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에 걸쳐 10만 킬로미터를 돌아다녔다. 그는 그 경험을 모아 『이븐 바투타 여행기』 를 썼다. 찾아보니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오도릭의 『동방기행』과 함께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 여태 몰랐다.. )

그의 여행이 가능했던 이유로 저자는 '이슬람의 집'이라 불리는 초문명권을 설명한다. 아라비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여러 문명이 공존하는 세계다. 이슬람은 개종을 적극 권하되 공존 혹은 종합의 정책을 폄으로써, 여러 종교 및 언어 공동체들을 수용하여 하나의 세계-문명으로 통합하는 성향을 띠었다. (p75) 결과적으로 이슬람권의 확대는 최초의 지구적 문명(Global civilization)으로 발전했다는 것.


"7-17세기의 1,000년 동안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구세계의 모든 문명들(유럽, 이란, 산스크리트, 말레이-자바, 중국)이 서로 접촉하게 되었다. 이슬람권 주변의 상이한 문명 요소들이 들어와서 아랍 문명과 섞였다. 특히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문명의 특징적인 요소들이 섞여 풍요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


마녀사냥의 근간이 되었던 악의 고전 『말레우스 말레피카룸』 에 대한 이야기나, '고양이 대학살 사건' 의 부르주아에 대한 반감이란 분석에서 확장되어 서술되는 여성 서사와 '마녀를 몰아낼 게 아니라 스스로 마녀가 되는 것' 에 관한 여성학자의 해석도 흥미롭게 읽었다. 프랑스의 68 혁명에 대한 부분도 새롭게 알아갔다. 노동운동, 환경운동, 여성해방운동, 성해방 등 여러 요소들이 뒤섞인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68운동은 단순한 '학생 시위'라는 식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는 것과 진정성 있는 혁명 프로그램이 없는 대신 말의 성찬이 펼쳐졌던 이 운동은 과거와 같은 사회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준 사건이었다고 한다. '당장 대안이 없었기에 무력했지만, 어쩌면 뚜렷한 대안 없이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꿈이었기에 역설적으로 미래에 더 풍성한 결실을 맺었는지 모른다.'(p378)


각 편의 주제들이 일관된 주제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이 인류 역사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기 보다는 '인간과 사회의 다양한 스펙트럼의 일부를 보이는 짧은 단면들 같은 느낌' 이라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며 지어내는 경험 세계를 여러 각도에서 본다는 의미로 이야기들을 엮었다고 했다. 저자가 공들어 엮은 이야기들 속에서 나 또한 머나먼 과거로부터 이어진 어떤 존재의 사슬을 느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